♣ 崇祖惇宗/지산유고

지산유고에 나오는 수당(修堂) 이남규(李南珪) 선생(230430)

도솔산인 2023. 4. 30. 18:49

지산유고에 나오는 수당(修堂) 이남규(李南珪) 선생(230430)

 

 

  1896년 3월 말 김산 의병장 이기찬은 의병을 이끌고 황간 영동 보은을 거쳐 문경 대정(大井)으로 이동하여 함창에 있는 일본군 병참부대를 공격하려고 하였으나, 諸將(제장)들이 다 말하기를 "저들(日本軍)은 强(강)하고 우리(義兵)는 弱(약)하여 날카로운 기세를 당해낼 수 없습니다."라고 하며 반대를 하자, 선생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싸워서 죽자고 하면 사람들은 나를 따르지 아니하고, 집으로 돌아가 편안하게 생업에 종사하자고 하면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하다고 하니 차라리 뗏목을 타고 바다를 떠돌아다니듯 流浪(유랑)을 하고 숲 속에 숨어서 제군들이 원수를 갚고 승리하는 날을 기다리는 것, 이것이 바라는 바이다' 라고 하고, 4월 3일 대장직을 진사 조동석에게 전임하고 금천으로 돌아왔다.(지산유고 창의일기)

 

  그 해 6월 지산 이기찬(李起璨, 1853~1908)의 장자 이강하(李康夏, 1873~1940)가 피체되어 상주 감영에 수감되었다. 참령 이겸제(李謙濟, 1867~1947)에게 국문을 받고 사형 집행 직전 안동관찰사 이남규(李南珪, 1855~1907) 공이 “상주 의병장 이 아무개[李起璨]는 그가 의병을 일으킨 것도 근거가 있고, 그가 의병 활동을 멈춘 것도 내세우는 말이 있다. 만약 사실과 어긋난 일이 있으면 내가 그것을 감당할 것이다.”라는 관문(공문)을 보내 목숨을 구하였다. 같은 시기에 문초를 받은 후임 의병장 진사 조동석 선생의 부자는 상주 감영에서 손국하였다. 1907년 이남규 공은 홍주 의병장 민종식(閔宗植, 1861~1917)을 숨겨주었다가 한양으로 압송되던 중, 장남인 이충구(李忠求, 1874~1907)와 함께 일본군에게 피살당했다.

 

  수당 가문은 구한말의 애국지사인 수당(修堂) 이남규(李南珪, 1855~1907) 선생과 함께 순국한 아들 이충구(李忠求),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친 손자 이승복(李昇馥, 1895~1978), 그리고 6.25 때 국군 장교로 순국한 증손자 이장원(李章遠)에 이르기까지 4대에 걸쳐 국가유공자를 배출한 명문가이다.

 

 

 

  ▶ 지산유고 연보

 

  ○ [1896년] 6월 장자 강하(康夏)가 체포되어 상주 감옥에 수감되었다. 당시 참령(參領) 이겸제(李謙濟)가 극형의 형구를 갖추고 국문(鞠問)하였다. 공초(供招)하기를 “신하가 임금을 위해 죽고 자식이 아비를 위해 죽는 것이 실로 제가 원하는 마음입니다. 자식으로서 아버지에 대해 증언하여 붙잡히게 하고 자신의 죄는 면한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또한 영감께서는 특히 대대로 나라의 녹을 받는 신하가 아닙니까? 우리 국모께서 시해를 당했을 때부터 우리나라 전체의 신민 중에 그 누가 왜적의 살점을 씹어 먹고 왜적의 가죽을 깔고 자기를 바라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선비가 된 사람으로서는 대중이 심문하는 죄인과 대응해야 할 것이며, 신하가 된 사람으로는 왕께서 분개하시는 역적과 맞서야 할 것입니다. 임금의 밀조를 받고서 적의 기마병을 토벌하는 일은 비록 패했지만 의리를 펼친 것이다. 간신이 참소하는 말을 지어내어 충신 악비(岳飛) 같은 충신을 참수하라는 말을 받아들이시니, 장수가 된 것이 무슨 죄란 말입니까?”라고 하였다.

 

  이겸제가 또 묻기를, “의병이라 사칭하고 민간에서 재물을 토색질하였으니, 강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라고 하자, 공초하기를 “반드시 저의 진술을 빌리지 않더라도 조사하고 물어볼 곳은 모두 멀리 있지 않습니다. 당시 군량을 스스로 낸 이들 우리 주[尙州]의 정의묵(鄭宜默)조남석(趙南奭)과 황간(黃澗)의 이용직(李容直) 등 여러 공들 모두 의리를 내세워 돕길 원했습니다.”라고 하였다.

 

  공초가 끝나 엄하게 가쇄를 채워 하옥하고 머지않아 사형을 집행하려 하였다. 이때 조공(趙東奭) 부자도 체포되었는데, 역적을 꾸짖으며 굽히지 않다가 죽었다고 한다. 바야흐로 수색과 염탐을 떠들썩하게 하였지만 실상은 공초한 내용과 같았다. 안동부[花山府]로부터 참령의 관부[參領所]로 보내온 관문(關文)이 있었는데 그 내용에 “상주 의병장 이 아무개[李起璨]는 그가 의병을 일으킨 것도 근거가 있고, 그가 의병 활동을 멈춘 것도 내세우는 말이 있다. 만약 사실과 어긋난 일이 있으면 내가 그것을 감당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때 관찰사 이남규(李南珪) 공은 선생에 대해 매우 잘 아는 사이였는데, 그 일을 몸소 맡아 글을 지어 보호해서 이 사건이 결국 종결되었다. 만일 그때 혐의쩍은 흔적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목숨을 보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六月 長子康夏逮繫尙州獄 時參領李謙濟具極刑以鞠之 供曰 臣爲君死 子爲父死 實所甘心也 未聞以子證父拘之而自免也 且令監 獨非世祿之臣乎 自我國母見弑 環東土臣民 孰不欲食其肉寢其皮也 爲士而應衆所推罪乎 爲臣而敵王所愾逆乎受密詔而討賊馬 雖敗而伸義 構讒言而收斬岳 何罪於爲將 李又問 稱以義兵 討財民間 非强盜而何 供曰 不須借吾唇舌 査問處距 此皆不遠也 那時軍餉自有出者 本州鄭宜默趙南奭黃澗李容直諸公 皆出義願助也 供訖嚴枷下獄 將不日正刑 時趙公父子被逮 罵賊不屈而死云 方大張搜詗 而實如所供 自花山府有關文來照參領所曰 尙州義將李某 其出也有據 其止也有辭 如所否者 我自當之云 時觀察使李公南珪 深知先生 而身擔其事 自爲文以保之 事遂寢 若於其時 小有疑迹 難保矣

 

  ※ 참고 : ‘受密詔而討賊馬’는 ‘構讒言而收斬岳’과 對가 되어 ‘賊馬’를 ‘斬岳’처럼 해석해야 할 듯한데, 고사를 찾아보아도 잘 나오지 않아 그대로 두었습니다. 아무래도 미심쩍은 대목입니다. 문장은 로 되어 있는데, 賊馬는 고사가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문자만 이지 내용상으로는 가 아닌 듯합니다.<최석기 교수님>

 

 

  ▶ 지산유고 행장

 

  의병을 해산한 후에 상경하여 상소를 올리고, 또 돌아와 불초에게 訓戒를 써서 이르시기를 “바야흐로 이제 의병과 도적이 구분이 없어 충신과 역적이 서로 뒤바뀌니, 너는 신중히 처신해야 한다.”라고 하셨다. 그리고서 한 달 남짓 지난 뒤에 불초가 과연 체포되어 상주 감옥에 구금되었다. 당시 안동관찰사 이남규 이 참령 이겸제에게 공문을 보내 이르기를 “상주 의병장 李某(이기찬)는 그가 의병을 일으킨 것도 근거 있고, 그가 의병활동을 멈춘 것도 내세우는 말이 있다.”라고 하여, 이 때문에 감옥에서 드디어 풀려났다. 대개 이공은 평소 부군을 깊이 아는 사이였기 때문에 스스로 글을 지어 보호해준 것이다.

 

  釋兵後 上京陳 且還書戒不肖曰 方今義賊無分 忠逆相倒 汝其愼處也 居月餘 不肖果逮 繫尙州獄 時觀察使李公南珪 移文于參領李謙濟曰 尙州義兵將李某 其出也有據 其止也有辭 以此獄遂解 盖李公平日深知府君 故自爲文以保之也

 

  ☞ · 이남규[李南珪, 1855(철종 6)~1907] 조선 말기의 의사(義士).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원팔(元八), 호는 산좌(汕左), 수당(修堂). 충청남도 예산 출신으로 1861년 허전(許傳)의 문하에 들어가 일찍이 이름을 떨침. 1875년(고종 12) 사마시에 합격, 1883년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 1885년 홍문관교리, 그뒤 부수찬·수찬을 역임함. 1893년 부호군, 1896년 안동부관찰사를 역임. 1898년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 1902년 궁내부특진관이 되었음. 1906년 병오의병 당시 홍주에서 거의하였던 민종식(閔宗植)이 일본군에 패하여 은신을 요구하자 숨겨 주었으며, 이 일로 인하여 의병과 관련 있다 하여 1907년 공주옥에 투옥되었다가 며칠 뒤 온양 평촌 냇가에서 아들 이충구(李忠求)와 함께 피살되었음.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국민장)이 추서됨.

· 이겸제(李兼濟, 1867~1947) 구한말 무관. 개화파의 일원.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냄. 일본식 이름 후쿠다 겐지.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 705명 명단에 포함됨. · 정의묵(鄭宜默, 1847~1906) 본관은 진주(晉州) 우복 정경세의 봉사손(奉祀孫) 문과에 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와 경연참찬관을 지냄 1894년 상주 소모사로 동학군을 토벌함. · 조남석(趙南奭) : 상세자료 없음. · 이용직(李容直, 1824~1909) 본관은 전주 고종의 인척 경상도관찰사 파직 후 죄인의 몸으로 김천 부항면 홍심동에 은거함. 김산 의병에게 200금과 正租(벼) 80석을 내놓음.  

 

 

수당 이남규 선생의 고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