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崇祖惇宗/지산유고

이기찬 선생의 『지산유고』에 나오는 광거정(廣居亭)

도솔산인 2023. 1. 21. 12:31

이기찬 선생의 『지산유고』에 나오는 광거정(廣居亭)

 

 

  얼마 전 광거정 기문을 쓴 우련(友蓮) 이병욱(李炳勖, 1854~1921) 공의 증손인 이경묵(李京默, 58세)씨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후곡리에 있는 시골집이 『지산유고』에 나오는 광거정이라는 전언(傳言)이다. 오래전에 이운(二雲) 영감의 조카인 이승희(李承熙, 1918년생)씨가 살았고, 1970년 초반 먼 친척인 이영희(李永熙, 1944년생)씨가 매입하여 기와를 올렸다고 한다. 1979년 대청댐으로 마을이 수몰되면서 이영희씨는 후곡을 떠났다. 이경묵씨 선친 이의용(李義龍, 1928~2017)씨가 수몰 직전에 문의면 후곡길 382로 옮겨왔다는 것이다. 이경묵씨는 집에 대한 내력을 소상하게 알고 있었고, 현재 그 집에 살고 있다. 과거에는 대청마루가 넓어서 마을의 사랑방 역할을 했다고 한다.

 

注 이병욱(李炳勖, 1854~1921) :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성여(星汝) 호는 우련(友蓮), 우련(友蓮)은 청련(靑蓮)거사 당나라 시대의 시인 이백(李伯)과 벗을 할 정도로 시문에 뛰어났다는 의미이다. 참봉(參奉) 벼슬을 하였다. 임정에서 국무령을 지낸 석오(石吾) 이동녕(李東寧, 1869~1940) 선생이 후곡리 조부(李錫九, 1815~1865 : 연안 이씨 세보) 댁에서 소년 시절(10세~16세)을 보냈는데, 이때 우련(友蓮)의 문하에서 한학을 수학한 것으로 전한다. 지산 선생의 광거정 상량문에는 우련(友蓮)을 사백(詞伯, 시문에 뛰어난 사람을 높여 이르는 말)으로 기록하고 있다. 우련(友蓮)은 광거정 기문을 지었고, 우련의 화동사원(華東史源)』에 지산 선생이 화동사원(華東史源) 서문을 쓴다. 우련(友蓮)이 쓴 만사(輓詞)와 애사(哀辭) 지산유고 실려있다

 

 

문의면 후곡길 382(이경묵씨댁) 사진 출처 : 내외뉴스통신(http://www.nbnnews.co.kr)

 

  126년이라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자. 1897년 봄 이기찬 선생은 제자 이운(二雲) 이의국 공의 요청으로 상주시 화서면 금천리에서 충북 청원군 문의면 후곡리로 이사를 온다. 1896년 2월 이운의 부친인 금사(錦沙) 이봉령(李鳳寧, 1827~1896) 공이 돌아가셨다. 당시 이운(二雲) 영감은 후곡 향려(鄕廬)에서 거상(居喪) 중에 있었다. 스승 이기찬 선생이 창의를 하여 빈털터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스승의 가족은 물론 조카들까지 삶의 터전을 마련해 주었다. 제자 이운 영감이 스승 지산(止山)  선생의 어려움을 알고 동생들의 선생으로 모셔온 것이다. 『지산유고』 가장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정유년(1897년, 고종 34년) 봄에 학사(學士) 이의국(李義國)이 '(스승께서 창의를 하여) 가산을 다 쓰고 남은 것이 없다.'라는 말을 듣고 심려하여 한 전장을 다 비워서 지극 정성으로 대우해 주니, 내가 어른들을 모시고 아이들을 데리고 가서 의지하였다.<止山李先生家狀>

 

  부친상을 마친 이운(二雲) 영감은 한양으로 올라가고, 지산(止山) 선생은 1898년 봄 한양과 영남 주유를 마치고 문의로 돌아온다. 한양에서 스승에게 보낸 편지를 달이 바뀌어서야 읽었다고 하니 직접 만나지는 못한 듯하다. 지산(止山) 선생은 이운(二雲)에게 답서를 쓴다. 서두에 출사에 대한 대의를 논하고, 말미에 제자에 대한 고마움과 그리움을 이렇게 담는다. " 나는 그대의 댁으로 거처를 옮겨서 귀댁의 모든 분들이 태평하게 지내는 것에 이미 위로가 되고, 어리석은 자들이 하는 일 없이 게을리 지내는 것을 면하게 되었습니다. 본가의 춘부장(生父 李學寧, 1851~1923)께서 날마다 저를 찾으시어 물소리 듣고 농사짓는 것을 구경하며, 그러는 사이에 간간이 시를 짓고 술을 마시니 이로써 멀리 떨어진 그리움을 위로할 뿐입니다. 언제쯤 만나서 이야기하겠습니까? 조정에서는 사람을 얻었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대를 잃어서 슬픕니다."

 

  기해년(1899, 고종 36년) 여름 지산 선생을 찾아오는 제자들이 점점 많아지자, 이운(二雲) 영감은 문의면 후곡리에 광거정을 짓는다. 이운 영감의 부친인 금사(錦沙) 이봉령(李鳳寧) 공이 경서를 공부하던 옛집을 증축한 것으로 보인다. 지산 선생의 장자 이강하(李康夏, 1873~1940) 공의 광거정 서문에는 이운 영감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담고 있다. 우련(友蓮) 이병욱(李炳勖, 1854~1921) 공의  광거정 기문에는 『맹자』의 「등문공(膝文公) 장구(章句) 하편의 한 문장을 인용하여 광거정의 이름에 대한 유래를 설명하고 있다.

 

광거정 이름 유래 : 맹자왈 천하의 넓은 집인 에 거처하며, 천하의 바른 자리인 에 서며, 천하의 큰 도인 를 행하여, 뜻을 얻으면 백성과 함께 도를 행하고, 뜻을 얻지 못하면 홀로 그 도를 행하여, 부귀가 마음을 방탕하게 하지 못하며, 가난과 천함이 절개를 옮겨놓지 못하며, 위세와 무력에도 지조를 굽히지 않는 것을 이것을 대장부라 이른다.[孟子曰 居天下之廣居 立天下之正位 行天下之大道 得志 與民由之 不得志 獨行其道 富貴不能淫 貧賤不能移 威武不能屈 此之謂大丈夫]『孟子』 膝文公 下

 

 

▶ 광거정 서문(廣居亭序)

  내가 문양에 우거한지 3년이 지난 기해년(1899, 고종36년) 여름에 이봉(理峰)의 남쪽에  몇 칸의 초가를 지었다. 지대가 높아서 통창하고, 오래 걸리지 않아 완성되었다. 또한 광대하니 어진 마을에 편안한 집은 진실로 '광거(廣居)'라는 이름에 딱 들어맞았다. 이는 대개 선생과 장자(長者)가 오가며 노니는 곳과 후생과 소자(小子)가 강학할 장소를 위하여 지은 것이다. <중략>우리 대인으로 하여금 이곳에서 가르침을 세우고 예를 강론한 것은 이운 학사(二雲學士)가 실로 인도한 것이니 당초에 이곳에서 몇 년 동안 일을 계획하고 안배하였다. 지금은 나랏일로 바쁘고 궁궐에 입직하였으나 마음은 항상 여기에 있어 끊임없이 편지로 뜻을 전하였으니, 만약 사문(斯文)에 뜻이 있어 몽매한 이들을 기르는 것에 간곡한 자가 아니라면 어찌 능히 이와 같이 하겠는가. 이에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렇기는 하지만 말이 일단 없다면 그 마음을 알기 어려울 것이다."라고 하기에 내가 마침내 기문을 지어 이 정자에 오르는 자들로 하여금 이운(二雲)이 밖에서 잊지 않았던 이운(二雲)의 뜻을 알게 하고자 한다.

 

▶ 광거정 기문(廣居亭記)

  이 정자는 금사공(錦沙公)이 경서를 공부하던 옛터로 그 아들 이운(二雲) 학사가 문하의 자제들을 위하여 강습하는 장소를 만들면서 그 옛 모습을 그대로 하고 그 규모를 더한 것이다. 지금 금초가 그 가운데에서 고상하게 있으니, 이곳에서 도를 강론함에 도포를 입은 선비들이 구름처럼 모이고, 이곳에서 술과 음식을 권하는 예를 행함에 여대(輿臺)가 구름처럼 따르니, 대개 장차 한 나라로 하여금 사양하는 기풍을 일으킬 수 있고, 또한 한 고을 사람들로 하여금 보고 느끼는 바가 있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니, 그렇다면 이 정자의 규모는 비록 작으나 이 정자의 범위는 넓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추부자(鄒夫子, 맹자)가 말씀하시길 "천하라는 넓은 집에 거처하고 천하의 대도를 실천한다."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한 해석으로 "광거(廣居)는 인()이요. 대도(大道)는 의()이다."라고 하였으니, 우리 무리가 어진 집과 의로운 길을 버리고 어디로 가겠는가. 마침내 그 정자를 '광거정(廣居亭)' 이라고 이름하고 낙성(落成)하였다.

 

  필자가 태어난 문의면 후곡리 도곡 마을은 1979년 대청댐으로 수몰이 되었다. 1965년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후곡을 떠나 대전으로 이사하였다. 이경묵씨 댁을 둘러보기 위해 눈비가 섞여 내리던 날 대청댐을 굽이굽이 돌아 후곡을 찾았다. 수몰민들의 사향탑(思鄕塔)을 보니 가슴이 뭉클하다. 고향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지만 애써 말한다면 나도 고향을 잃은 실향민이다. 사향탑 옆에는 용흥국민학교 유적비가 있다. 용이 사는 물속에 있는 고향으로 가는 길은 애잔하기만 하다. 이경묵 씨 집은 개축을 하였으나 기둥이며 서까래는 원형 그대로이다. 문득 천정 속의 대들보에 지산 선생이 쓴 상량문이 있지 않을까 궁금해진다. 점심을 먹고 이경묵씨의 안내로 지산 선생 묘소가 있었던 자리와 퇴락한 연안 이씨 재실을 둘러보았다. 집에 돌아와 『지산유고』에 나오는 광거정 관련 내용을 촘촘히 읽어보았다. 

 

  이운(二雲) 이의국 공은 1883년(고종 20년) 지산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 사제간의 인연을 맺었다. 1888년(고종 25) 성균관 사마시에 합격한다. 1890년(고종 27) 문과에 올라 승문원을 거쳐 규장각직각(奎章閣直閣)과 통정대부 비서감승(通政大夫秘書監丞)을 역임했다. 1897년(광무 원년) 스승인 지산 이기찬 선생이 창의(倡義)를 하여 살림이 아주 결단났다는 소식을 듣고, 어려움에 처한 스승과 식솔들을 거둔다. 1899년(광무 3년)에는 스승을 위해 광거정을 짓는다. '태사공(太史公, 사마천)이 이르기를, “권세와 이익으로 결합한 자는 권세와 이익이 다하면 사귐이 멀어진다.”라고 하였다. 그대는 또한 세상의 도도한 흐름 가운데 한 사람이거늘, 초연히 도도한 권세와 이익의 밖으로 스스로 벗어나서, 권세와 이익으로 나를 바라보지 않음이 있는가. 태사공의 말씀이 잘못되었는가.' 스승에 대한 존경을 말하기는 쉽지만 실천하기는 어렵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발문으로 글을 맺는다.  끝.

 

注  창의(倡義) :국난을 당하여 의병을 일으킴. 국가의 지원도 없다. 희생만 있고 보상은 없는 것이 의병이다. 1883년(고종 20년) 금사(錦沙) 이봉령(李鳳寧, 1827~1896) 공이 의흥(義興, 현 경북 의성군 우보면) 현감으로 와서 아들 이의국을 지산 선생에게 보내 배우게 하였다. <지산선생 연보>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발문 : 太史公云 以權利合者 權利盡以交疎 君亦世之滔滔中一人 其有超然自拔於滔滔權利之外 不以權利視我耶 太史公之言非耶

 

 

수몰민들의 사향탑
용흥국민학교 유적비
이경묵씨 댁
지산 이기찬 선생의 묘소가 있던 자리(충북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후곡리 산 9-1번지)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여 일본군과 친일세력들이 의병장의 무덤을 파헤친다. 1912년 9월 2일 이강하(李康夏) 공은 선고(先考, 止山, 1853~1908)와 중제(仲弟, 康殷, 1883~1912)의 무덤을 파묘하여, 초강(楚江, 금강) 가에서 화장하여 산골(散骨)하였다. 이강하 선생은 충북 청원군 문의면 후곡리를 떠나 상주로 이거(移居)를 하였다.

 

청흥종계안(靑興宗契案) : https://lyg4533.tistory.com/16488131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후곡리 34번지

 

 

1. 지산 이선생 연보[止山李先生年譜]

 

  가. 광무 원년 정유년(1897)[光武元年丁酉] 선생 45

 

  ○ [1897년] 광무 원년 정유, 선생 45세 때에 이운(二雲) 이의국(李義國, 1867~1935) 학사가 문의 향려에서 상제로 있는 동안, 선생에게 장리(杖屨, 거처)를 문의로 옮길 것을 청하여 마침내 이사를 하였는데 봄에 長子 강하가 가족을 이끌고 먼저 갔다.  ○ 선생께서 서울에 계시면서 상소를 올렸으나 등철되지 않았다. 양주 고령(故嶺)의 판서 호 퇴초(退樵) 윤의선(尹宜善) 공이 청하여 맞이하면서 매우 예의가 있었다. 수일 동안 머물면서 이야기하였고 수창한 시가 있다.  ○ 여름에 남쪽 낙동강 가를 몇 달 동안 유람하였다. 류이강(柳二江)과 동반하였는데 좇아서 유람하는 제공(諸公) 들이 매우 많았다.  ○ 이로 인하여 하회마을에 들어가 석호(石湖) 류도성(柳道性, 1823~1906) 선생께 인사를 드리고, 하은 류신영 공과 아우 호 東濬을 방문하였는데, 뜻이 같고 의기가 투합하여 서로 더불어 매우 환영하였다. 몇 달 동안 머물면서 술작한 것이 많았는데 모두 잃어버렸다.

 

○ 光武元年丁酉 先生四十五歲 時二雲學士 居憂於文義鄕廬 請移先生杖屨於文上 遂移就之 春長胤擧家先往  ○ 先生在京陳疏未徹 楊州故嶺 尹判書宜善號退樵 請邀而甚禮之 數日留話 有酬唱詩  ○ 夏南遊洛東江上數月 與柳二江 同伴 從游諸公甚衆  ○ 因入河回拜石湖柳先生 訪霞隱柳公臣榮 及弟號東濬 志同義合 相與甚歡 數朔見留 多有述作而幷逸之

 

 注 이의국(李義國, 1867~1935) : 본관은 연안(延安)이며 자는 치인(致仁), 호는 이운(二雲)이다. 현 충북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후곡리(後谷里) 출생. 1883년(고종 20년) 금사(錦沙) 이봉령(李鳳寧, 1827~1896)이 의흥(義興, 현 경북 의성군 우보면) 현감으로 와서 아들 이의국을 지산 선생에게 보내 배우게 하였다. 1888년(고종 25) 성균관 사마시에, 1890년(고종 27) 문과에 올라 승문원을 거쳐 규장각직각(奎章閣直閣)과 통정대부 비서감승(通政大夫秘書監丞)을 역임했다. 1910년 한일병합(韓日倂合)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백의로 국운을 한탄하였다. 육영에 뜻을 두어 학교를 신축하고 용흥강습소(龍興講習所)를 설립하였다.

  류만식(柳萬植, 1860~1926) : 호는 이강(二江), 자는 건일(建一), 본관은 풍산(豊山)이다.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의 후손으로 부는 해사(海史) 류도석(柳道奭), 조부는 계당(溪堂) 류주목(柳疇睦)이다. 상주 수암 종택 이강정사(二江精舍)에 살았다.

  류도성(柳道性, 1823~1906) : 본관은 풍산(豐山). 자는 선여(善汝), 호는 석호(石湖).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류이좌(柳台佐)이고, 아버지는 류기목(柳祈睦)이다. 큰아버지 류희목(柳希睦)에게 양자로 들어가 대를 이었다. 1842(헌종 8) 통훈대부에 올라 비서원승을 역임하다가 귀향하여 숭조(崇祖) 사업에 진력하였다. 1864(고종 1) 현재 중요민속문화재 제84호로 지정된 하회 북촌택을 건립하였다. 저서로는 석호유고(石湖遺稿)4권이 전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류신영(柳臣榮 1853~1919) :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경부(敬夫). 호는 하은(霞隱). 출신지는 풍남면(豊南面) 하회동(河回洞:현 풍천면 하회리). 류신영은 경술국치(庚戌國恥) 때 순절한 류도발 (柳道發 )의 큰아들이다. 그는 1919년 2월 고종황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장례에 아들 종묵 (宗黙)을 참례시킨 뒤, 3월 3일 (음 2.2) 독약을 마시고 자결 하였다. 1968년 대통령표창, 1991 건국훈장 애국장.  『기려수필 』, 『한국독립사』 하권 『독립운동사』 7 권

 류동준(柳東濬, 1859∼1939) : 호는 시산(時山), 본관은 풍산(豊山)이다.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의 후손이며, 생부는 류도발(柳道發)이고 양부는 류도성(柳道誠)이다. 저서로는 『시산집』이 있다.

 

 

  나. 광무 2년 무술년(1898)[光武二年戊戌] 선생 46세

 

  ○ [1898] 광무2년 무술, 선생 46, 봄에 비로소 문의 寓所(우거하는)로 돌아왔다. 이로부터 원근의 제자들이 날로 더욱 찾아들었다.   한림학사 이의국(李義國)에게 서찰을 보냈는데 출사의 대의를 논하였다.

 

 光武二年戊戌 先生四十六歲 春始還文義寓所 自是遠近諸子 日益進  ○ 與翰林義國書 論出仕大義

 

 

  다. 광무 3년 기해년(1899)[光武三年己亥] 선생 47세

 

 [1899] 광무3년 기해, 선생 47, 광거정(廣居亭)을 지었다. 횡사(黌舍, 글방)이 비좁아서 드디어 날이 오래 걸리지 않고 집을 짓고 명명하여 광거정이라고 하였다. 선생께서 상량문과 4언율시 원운, 7언절구 팔경을 지으니, 원근의 사우들이 화답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 光武三年己亥 先生四十七歲 廣居亭成 黌舍難容 遂不日構成 命名曰 廣居 先生作上梁文及四律原韻 七絶八景 遠近士友多有和之者

 

  

2. 지산 이선생 가장[止山李先生家狀]

 

  정유년(1897년, 고종 34년) 봄에 학사(學士) 이의국(李義國)이 가산을 다 쓰고 남은 것이 없다는 말을 듣고 심려하여 한 전장을 다 비워서 지극 정성으로 대우해 주니, 내가 어른들을 모시고 아이들을 데리고 가서 의지하였다. 부군은 서울에서 영남으로 내려와 청량산(淸涼山)과 병산(屛山)의 사이를 두루 돌아보았다. 무술년(1898, 고종 35년) 봄에 비로소 문의의 우거(寓居)로 돌아왔는데, 이 학사가 두 아우로 하여금 스승으로 삼게 하였다. 이때부터 원근의 자제들이 날마다 더욱 찾아들었다.

 

  丁酉春 李學士義國 聞當日擧義散盡家産而無餘 心慮之 爲虛一庄 以待之甚勤 不肖 乃奉老携幼而往依之 府君自京下嶺南 周遊淸涼山屛山之間 戊戌春 始還文義寓所 李學士使二弟師之 自是遠近諸子日益進焉

 

注 두 아우 : 친가 아우 李義立(1871~1933)은 1891년 상주로 보내 지산 선생에게 배우게 함.  양가 아우 李義軾(1886~1900)로 추정함. 양가 아우 李義徹(1893~1933)은 당시 4세(?) 

 

  <중략>  주역은 부친의 명으로 40세 이전에는 읽지 않다가 만년에 집중적으로 공을 들여 완색하여 깨닫는 부분이 있으면 반드시 초록해 두었으며, 선천도(先天圖)와 후천도(後天圖), 하도(河圖)와 낙서(洛書) 등을 비치해두고 살폈다. 만년에 간괘(艮卦)의 상전(象傳)에서 뜻을 취하여 '지산(止山)으로 자호하였다. 병신년(1896, 고종33년) 이후에 시사가 날로 잘못되고 나라가 장차 기울어져 가는 것을 보고 항상 울분을 품었는데, 간혹 벗들과 더불어 술을 마시며 심회를 말할 때면 그때마다 줄줄 눈물을 흘렸다. 호은(湖隱) 이 상사(李上舍), 우련(友蓮) 이 참봉(李參奉) 등 여러 공들과 함께 그 때문에 분개하여 눈물을 흘린 것이 여러 번이다.

 

  周易以親命 四十以前不讀 晩而專工賾 有得必抄記 有先後天河洛等圖 以寓觀省焉 晩以艮象取義 自號止山 丙申以還 見時事日非 宗國將移 常懷憤鬱 或與親朋 對酒說懷 輒泫然淚下 如湖隱李上舍友蓮李參奉諸公同爲之 慨泣者累矣

 

완색(玩賾) : 깊이 궁구하다. 호은(湖隱) 이 상사(李上舍) : 이학령(李學寧, 1851~1923),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국함(國咸),  호는 호은(湖隱), 신묘년(1891, 고종 28년) 成均生員 이 상사(李上舍), 1891년 아들 이의립(李義立)을 상주 금천 지산 선생에게 보내 수학하게 하였다.우련(友蓮) 이 참봉(李參奉) : 이병욱(李炳勖, 1854~1921), 본관은 연안(延安), 참봉(參奉) 벼슬을 함. 자는 성여(星汝) 호는 우련(友蓮)

 

3. 광거정 상량문[廣居亭上樑文]

   지산 이기찬이 지었다.[止山李起璨]

 

  집에 글방이 있고 향당에 학교가 있으니 이를 통해 선왕의 가르침을 알고, 거처하는 곳이 기질을 바꾸고 봉양을 받는 것이 체질을 변화시키니 무엇이 인택(仁宅)의 편안함과 같으랴. 사람과 땅이 서로 일치하고 이름과 실상이 실로 부합한다. 대개 일찍이 강학의 장소에 대하여 들은 적이 있으니 거처하는 것은 공경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에 공자의 집은 만고토록 해와 달을 우러러보았고 대장(大壯)의 집은 천년토록 바람과 비를 기다렸다. 그러나 바야흐로 성인의 가르침이 막혀서 마치 방에 앉아도 담과 벽을 마주한 것과 같았으나, 오직 문양(汶陽)의 후곡(後谷)은 저 형강(荊江)의 상류에 있었으니 우리 조정의 선비를 배양하는 기풍에 어찌 작은 마을이라고 충신하는 자가 없었겠는가? 이곳은 선현이 생활하던 땅인지라 이에 이우당(二憂堂) 주손이 있으니 이씨 집안의 계출(系出)인 중랑(中郎)은 관직이 한림원 학사에까지 이르렀다.

 

  家有塾堂有庠 是知先王之敎 居移氣養移體 孰若仁宅之安 人地相符 名實允合 盖嘗聞講學之所 其必曰居處也恭 夫子之宮墻 仰日月於萬古 大壯之棟宇 待風雨於千秋 方當聖門之蓁蕪 如坐房舍而墻壁 惟此汶陽之後谷 于彼荊江之上流 我朝培養之風 詎無十室邑忠信 先賢棲息之地 爰有二憂堂胄孫 系出李家中郎 官至翰林院學士

 

  생각건대 우리 학사는 효를 독실히 하고 남은 힘에 여러 어리석은 이들을 힘써 나아가게 하였다. 직접 반딧불을 모아 등을 밝히고 모두 나의 집에 들어가기를 허락하였으니, 학사가 자연에 은거하여 지내니(膏車秣馬, 수레에 기름을 치고 말을 먹이고 : 길을 떠날 준비를 한다는 의미) 누군들 그대를 따르지 않겠는가. 이에 금초산인(錦樵散人)이 상주에서 찾아오고 우련(友蓮)은 사백(詞伯)으로서 함께 노닐었다. 사방의 사우(士友)들이 와서 그의 집이 갖추어지지 않은 것을 한스러워하고 손님과 주인이 백배(百拜) ()를 행함에 움직일 공간이 없었다. 이에 바로 그 마땅한 집터를 정하여, 우리 땅의 승지(勝地)를 얻었으니 어찌 꼭 멀리 한가로운 곳을 구할 것이 있겠는가. 또한 그곳을 내버려 두지 않았으니 율리의 풍경이 사람 사는 마을에서 멀지 않았고 중장씨(仲長)의 산수를 곧 집으로 삼았다. 물품이 많지 않았으나 대행히 제가(諸家)의 도움을 입었고 공역(工役)이 반을 넘김에 반드시 높은 언덕에 의거하여 완성하였다. 시렁과 처마의 오래된 소나무는 변치 않는 형상을 생각하게 하고 섬돌과 어우러진 그윽한 풀은 원지(遠志)의 마음을 불러일으키며, 궤석 사이에서 아름다운 빛을 취하고 마을의 석양에 평평히 강물을 끌어당긴다. 이에 옛 제도(규모)에 더하여 아름다운 호칭을 붙여 정자의 이름을 광거라고 하였으니 전날의 좁은 모습이 더 이상 없고 봉우리는 이달(理達)이라고 이름하였으니 어찌 한때의 궁함을 탄식하겠는가. 일에는 민첩하고 말에는 신중하며 거처함에 편안함이 없는 날을 경계하고 본연의 성을 근본으로 삼고 경을 터전으로 삼으니 거처하지 않을 때가 있을 것을 염려하여 이에 긴 들보를 들어서 감히 선송(善頌)을 펴노라.

 

  惟我學士 篤孝餘力 勉進群蒙 親燈聚鎣 咸聽入余之室 膏車秣馬 孰不從子于盤 肆錦樵散人 來自商雒 友蓮詞伯 與同周旋 四方士友之來 恨他屋之未具 百拜賓主之禮 無尺步之可容 乃卜其宜 爰得我處勝地 何必遠求閒界 亦不任他 栗里風煙 不離人境 仲長山水 卽爲田廬 物材不多 行賴諸家之助 工役過半 必因高邱而成 架簷長松 想見後凋之像 交砌幽草 喚生遠志之心 攬秀色於几席之間 挹平瀨於閭閭之夕 用增舊制 肇錫嘉號 亭曰廣居 非復前日之窄 峯名理達 何歎一時之窮 敏於事而愼於言 戒切居無安之日 良爲本而敬爲地 恐有曠不居之時 玆擧修樑 敢伸善頌

 

注 膏車秣馬 : 당나라 한유(韓愈)송이원귀반곡서(送李愿歸盤曲序)내 수레에 기름 치고 내 말을 잘 먹여서 그대 따라 반곡에서 한가로이 살다가 나의 생애를 마치리라.膏吾車兮 秣吾馬 從子于盤兮 終吾生以徜徉하였다. 수레에 기름을 치고 말에 먹이를 먹인다는 뜻으로, 길을 떠날 준비를 한다는 말로 쓰인다. 사백(詞伯) : 1. 시문(詩文)에 능()한 사람. 시문(詩文)의 대가(大家)를 높이어 일컫는 말. 2. 학식(學識)이 높은 사람. 周旋(주선) : 돌아다님. 몸가짐. 일이 잘되도록 보살펴 줌. 가운데서 중재 알선함.

 

 

兒郞偉抛樑東 : 어영차, 들보를 동으로 던지세

馬峰秀色鬱穹窿 : 마봉의 수려한 색깔이 창공에 울창하네

誰知努力躋攀處 : 누가 노력하여 산을 올라갈 곳을 알겠는가

恰得當年一簣功 : 당년의 한 삼태기 흙의 공에 꼭 맞도다

 

抛樑西 : 들보를 서로 던지세

楚水中分碧萬畦 : 초강의 물 중간이 나뉘어 만 두둑이 푸르니

惟有神龍時賜雨 : 오직 신룡이 때에 따라 비를 내려주어

旱苗興發綠天齊 : 가물던 벼 싹이 일어나 하늘과 더불어 푸르네

 

抛樑南 : 들보를 남으로 던지세

巷門虛對碧伊嵐 : 마을 문이 공연히 푸른 아지랑이 마주하네

居人未解斯亭樂 : 머무는 사람들은 이 정자의 즐거움을 알지 못하나

樂付漁樵伴兩三 : 즐거움은 어부와 초동 두세 명과 짝하는 것에 부치노라

 

抛樑北 : 들보를 북으로 던지세

李達源頭逝不息 : 이달봉의 근원이 있는 샘물은 흐르는 것 쉬지 아니하니

傳得書聲知我意 : 글 읽는 소리 전해 얻어 나의 뜻을 알리라

以歸東海爲之極 : 동해로 돌아가는 것으로 법칙을 삼으리

 

李達 :  지산유고 초고 원문의 오자로 理達인 듯함. 

 

抛樑上 : 들보를 위로 던지세

日月光華無盡藏 : 해와 달의 찬란한 빛 다함이 없으니

我顧君王同德照 : 원컨대 군왕은 그 덕을 함께 비추소서

春臺玉燭際寅亮 : 춘대와 옥촉은 천지를 공경하여 이치를 밝힌다네

 

抛樑下 : 들보를 아래로 던지세

下土茫茫利牝馬 : 하토는 아득하여 암말을 이롭게 여기네

那得含光如許大 : 어쩌면 이토록 크게 빛을 머금고 있는가

生生萬物配蒼者 : 만물은 끊임없이 생장하는 하늘과 짝하는 자로다

 

  삼가 바라건대 마룻대를 올린 후에는 인(仁) 의(義)를 문으로 삼고 좌우에 도서를 둘 것이니 기녀와 가무가 어찌 제운(齊雲)과 낙성(落星)의 손님이 되었으며, 벗들이 강습할 것은 바람을 읊고 달을 보고 시를 짓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무이산을 우러러보며 마룻대가 완성되었으니 누가 자신의 경계로 삼을 것인가. 주시(周詩)를 노래함에 거문고 소리 조화로우니 다시 태평성대의 법식을 보겠다.

 

  伏願 上梁之後 仁門義戶 左圖右書 妓女歌舞 寜爲齊雲落星之客 朋友講習 不是吟風弄月之人 仰武夷而棟成 誰作自家之境 歌周詩而瑟和 復賭盛大之儀

 

 

4. 광거정 원운[廣居亭原韻]

  지산 이기찬이 지었다.[止山李起璨] 정자는 문의 이달봉의 남쪽 초강가에 있다. 제생의 강습 장소로 삼았기에 아렇게 이름한 것이다.[亭在文義理達峰之南楚江之上 爲諸生講習之所 名之以此]

 

里仁無地不宜居 : 마을이 인()하여 살만하지 않은 곳이 없었는데

爲愛群蒙敬執虛 : 학동(學童)들을 사랑하여 삼가 헛된 직임을 맡았네

岳醉還酬賓主酌 : 취하길 싫어하면서 도리어 빈주는 술잔을 돌리고

畏名猶帶聖賢書 : 명성을 꺼리면서 오히려 선현의 책으로 둘렀네

數間茅棟堪增舊 : 몇 칸의 띳집은 옛 모습을 더할만하고

一片靈臺乃復初 : 한 조각의 마음은 처음 상태를 회복하네

邪說知非洪水下 : 사설이 홍수보다 못하지 않음을 아니

誰人脫得世皆魚 : 누가 물고기 좋아하는 세상을 벗어날꼬

 

 

광거정 팔경[廣居亭八景]

 

理無不在在山嵐 : 이치는 없는 곳이 없어 산 아지랑이에도 있으니

時帶晴光蘸碧潭 : 때때로 맑게 갠 빛이 푸른 못에 잠기어 있구나

叢桂何愁招隱客 : 계수나무 숲인지라 어찌 은거한 손님 부르길 근심하리

西湖非是古淮南 : 여기 서호가 옛날릐 회남이 아니랴

  이상은 이봉의 아지랑이이다.[右理峰晴嵐]

 

楚江東畔數條烟 : 초강의 동쪽 밭두둑에 몇 갈래 연기가 피어오르니

認有深村點指邊 : 깊은 마을이 있음을 알아 손가락으로 가리키네

道不遠人人在谷 : 도가 사람을 멀리하지 않고 사람이 골짜기에 있으니

生蒭一束玉音傳 : 생추 한 다발로 옥음을 전하노라.

  이상은 도곡의 희미한 안개이다.[右道谷疏烟]

 

注 생추(生蒭) : 여물로 쓰는 싱싱한 풀로, 변변찮은 제수(祭需)를 비유하기도 하고, 현인을 사모하고 예우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후한(後漢)의 서치(徐穉)는 자()가 유자(孺子), 남주(南州)의 고사(高士)라 일컬어졌다. 일찍이 친구인 곽태(郭泰)의 모친상(母親喪)에 조문을 갔는데, 매우 가난하여 제물을 장만할 수 없어 풀 한 다발을 집 앞에 두고 상주(喪主)는 보지도 않은 채 돌아갔다. 사람들은 그 이유를 알지 못했으나, 곽태는 이는 반드시 남주의 고사인 서유자(徐孺子)일 것이다. 시경생꼴 한 다발을 주노니, 그 사람은 옥처럼 아름답도다.生蒭一束, 其人如玉.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내가 이것을 감당할 수 없다.”라고 한 고사가 있는데, 이를 차용하여 한 말이다. 『後漢書 卷53 徐穉列傳』

 

我愛其山不愛雲 : 내가 그 산을 사랑하니 구름 사랑하지 않으랴

嶔然不動靉乎文 : 산은 우뚝하게 움직이지 않고 구름이 문수를 둘러쌌네

學得世情無地施 : 세상살이 배웠지만 베풀 곳이 없으니

隨風散入大江瀆 : 바람 따라 흩어져 큰 강가로 들어가리

  이상은 문수의 떠가는 구름이다.[右文岫歸雲]

 

書山要使學人照 : 서산은 학인들을 비추어 주려고

堪帶斜陽入眼帩 : 석양을 두른 채 높다랗게 보이네

欲惜分陰勤做可 : 촌음을 아끼려거든 부지런해야 하니

哭將靡及矧伊笑 : 곡해도 미치지 못할 것인데 하물며 웃으랴

  이상은 서산의 낙조이다.[右書山落照]

 

竿籟靜聽未撞鍾 : 퉁소 소리 고요하게 들리고 아직 종 울리지 않은 때에

半邊修竹半邊松 : 반쪽은 길게 자란 대나무 반쪽은 소나무라네

一聲逈落燕山曉 : 한 소리가 멀리서 연산의 새벽에 떨어지니

聞此誰人不整容 : 이를 듣고 어떤 이가 몸가짐을 바르게 하지 않으리

  이상은 연산의 새벽 종소리이다.[右燕山曉鍾]

 

注 竿籟竽籟 오타로 보임. 竽籟(우뢰) 피리와 퉁소.

 

楚水如天簇萬帆 : 초수에 하늘처럼 수많은 돛배 보였는데

誰能及溺濟民巖 : 누가 능히 물에 빠진 백성의 험난함을 구제할까

漁郞莫渡蘆中客 : 어부는 갈대숲의 손님을 건너게 하지 못하니

舊國君臣淚滿衫 : 옛 나라의 군신은 소매 가득 눈물이로다

  이상은 초강의 저녁 돛단배로다.[右楚江晩帆]

 

馬峰先得一輪月 : 마봉이 먼저 한 둥근달을 얻으니

聊把驪圖玩爾窟 : 잠깐 풍리(豊驪) 그림 들고 너의 굴을 감상하네

看取萬川同影子 : 온 시내를 가지고서 그림자를 함께 하니

廣居秋也照心骨 : 광거정의 가을밤에 달이 심골을 비추는구나

  이상은 마봉의 가을 달이다.[右馬峰秋月]

 

龍岡何處不宜雪 : 용강의 어느 곳이 눈에 어울리지 않으리

只恨劉郞路阻絶 : 다만 한스러운 것은 유비에겐 길이 막히고 끊긴 것이라네

如使武候終老野 : 만일 제갈량이 들판에서 늙어 죽는다면

曹豪那得試根節 : 명검으로 복잡한 뿌리 끊어보길 해 볼 수나 있었으랴

  이상은 용강의 잔설이다.[右龍岡殘雪]

 

 

5. 광거정 서문[廣居亭序]

    이강하가 지었다.[康夏]

 

  내가 문양(汶陽)에 우거한지 3년이 지난 기해년(1899, 고종36년) 여름에 이봉(理峰)의 남쪽에  몇 칸의 초가를 지었다. 지대가 높아서 통창하고, 하루도 지나지 않아(오래 걸리지 않아) 완성되었다. 또한 광대하니 어진 마을에 편안한 집은 진실로 '광거(廣居)'라는 이름에 딱 들어맞았다. 이는 대개 선생과 장자(長者)가 오가며 노니는 곳과 후생과 소자(小子)가 강학할 장소를 위하여 지은 것이다.

 

  余寓汶陽之越三年 己亥夏 起數間茅棟于理峰之陽 因地高而甚通暢 不日成而亦廣大 仁里安宅 允合廣居之名 而蓋爲先生長者杖屨之所及後生小子講學之地而作也

 

注 문양(汶陽) : 강변에 위치한 양지 바른 곳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인 듯함. 우련(友蓮) 이병욱(李炳勖) 광거정기(廣居亭記)에도 후곡을 문양으로 지칭하고 있음. 

 

  이밖에 강산의 승경과 풍경의 아름다움은 시인이 자세히 노래하였으니 다시 세세히 형용하지 않는다. 벽을 마주한 듯이 깜깜했던 지난 날의 상황에서 이제 남향으로 난 창문 같은 깨우침의 기회를 만들어 옛 규모에 증설하여 후학을 계발시킨 공이 어디로 향하겠는가. 사방의 사우 중 온자들이 우리 집 대인의 덕을 칭송하지 않음이 없으니 아, 나 같은 소자가 어찌 공경하여 감회를 일으키지 않겠는가.

 

  以外江山之勝風景之美 詩人之述備矣 不復具狀 而昨以當面之墻 今作向陽之牖 增舊開來學之功 終歸于何 四方士友來者 無不歌誦吾家大人德 噫 余小子曷不起敬而興感也哉

 

  그러나 우리 대인으로 하여금 이곳에서 가르침을 세우고 예를 강론한 것은 이운 학사(二雲學士)가 실로 인도한 것이니 당초에 이곳에서 몇 년 동안 일을 계획하고 안배하였다. 지금은 나라 일(王事)로 바쁘고 궁궐에 입직하였으나 마음은 항상 여기에 있어 끊임없이 편지로 뜻을 전하였으니, 만약 사문(斯文)에 뜻이 있어 몽매한 이들을 기르는 것에 간곡한 자가 아니라면 어찌 능히 이와 같이 하겠는가. 이에 사람들이 말하기를 " 그렇기는 하지만 말이 일단 없다면 그 마음을 알기 어려울 것이다."라고 하기에 내가 마침내 기문을 지어 이 정자에 오르는 자들로 하여금 이운(二雲)이 밖에서 잊지 않았던 이운(二雲)의 뜻을 알게 하고자 한다.

 

  然使吾大人立敎講禮于此者 二雲學士 實先後之也 當初經綸排鋪 已有年所于玆矣 今勞王事 直於禁中 而心常在玆 源源以書致意焉 若非有志於斯文而惓惓乎蒙養者 烏能若是乎 咸曰然 語姑不及 心豈不知云 余遂記之 使登斯亭者 知二雲外不忘之意云

 

注 경륜(經綸) : 큰 포부를 가지고 어떤 일을 조직적으로 계획함. 또는 그러한 계획이나 포부. 排鋪(排布) : 머리를 써서 일을 조리있게 계획함. 또는 그런 속 마음. 사문(斯文) : 유교(儒敎)의 도의(道義)나 또는 문화(文化)를 일컫는 말. 또는 유학자(儒學者)를 달리 일컫는 말.

 

 

▶ 광거정 원운에 차운하다.[廣居亭元韻2首及八景韻]

 

愛爾深山有此居 : 깊은 산 너를 사랑하여 이 거처를 두었으니

幾年留待主人虛 : 몇 년이나 주인을 기다리며 비어있었나

朗日淸潭春洗硯 : 날 맑고 못물이 맑은 봄이면 벼루를 씻고

霽天明月夜看書 : 맑게 갠 하늘 달 밝은 밤이면 글을 읽네

鶴在九皐聲聞遠 : 학이 구고에서 우니 그 소리 멀리까지 들리고

鳳飛千仞詠歸初 : 봉황이 천 길을 날아오르니 막 시를 읊으며 돌아오네

欲知君子誠心處 : 군자가 마음을 참되게 하는 곳을 알고자 할진댄

鑑取潛潛在沼魚 : 잠잠한 저 연못 안 물고기를 거울삼을지어다.

 

 구고(九皐) : 구고는 깊숙하고도 먼 곳을 가리킨다. 시경(詩經) 학명(鶴鳴)에 이르기를 구고에서 학이 우니 그 소리가 하늘까지 들리는도다. [鶴鳴于九皐 聲聞于天]”라고 하였다.

 

茫茫宇宙藐人居 : 거대한 우주 속에 아득히 작은 거처에

一片靈臺不昧虛 : 한 조각 이내 마음은 허령불매 하도다

春服高堂希點瑟 : 봄옷 입고 높은 당에 올라 거문고를 타고

秋燈徹夜講朱書 : 가을이면 등불 앞에서 밤새 주서를 강론하네

 

道非在遠求諸己 : 도는 멀리 있지 않으니 제 몸에서 구해야 하고

學若成終愼厥初 : 배움을 이루고자 할진댄 그 처음을 삼가야 하네

鹿洞餘規思復見 : 백록동의 남은 규약 다시 보고자 하여

故敎多士詠嘉魚 : 부러 많은 선비들에게 가어를 읊게 하노라

 

 허령불매(虛靈不昧) : 마음이 공허하고 고요하여 흔들리지 않고 신령(神靈)하여 사물에 감통(感通)하여 어둡지 않아서 모르는 것이 없다는 뜻으로 하늘에서 받은 밝은 덕성[明德]의 체용(體用)을 형용한 용어. 가어(嘉魚) : 크고 맛있는 물고기. 시경(詩經)』 「소아(小雅)」편에 나오는 말로, 현자(賢者) 혹은 손님과 더불어 이를 안주 삼아 즐기는 것을 가리키기도 함.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한국고전용어사전] 점슬(點瑟) : 거문고를 타다.

 

理峰朝日見晴嵐 : 이봉의 아침에 피어나는 가물거리는 아지랑이

一半和烟翠滴潭 : 반쯤 안개에 섞여 푸르름을 못에 떨구네

更入霞中看不辨 : 다시 아침노을 속으로 들어가매 분간할 수 없으니

憑欄遙指向東南 : 난간에 기대어 멀리 동남쪽을 가리키네

  이봉의 아지랑이를 읊은 것이다.[理峰晴嵐]

 

江籬短短細生烟 : 짤막한 강리에 은은하게 안개 피어오르니

烟外群山隱顯邊 : 안개 밖으로 뭇 산이 나타났다 사라지네

下界知應君子在 : 인간 세상에 응당 군자가 있음을 알겠으니

谷名長使道心傳 : 골짝 이름으로 길이 도심(道心)을 전하는구나

  도곡의 희미한 안개를 읊은 것이다.[道谷疏烟]

 

雲似其山山似雲 : 구름은 마치 그 산 같고 산은 마치 구름 같으니

淡靑深白互相文 : 옅은 청색과 선명한 흰색이 서로 꾸며주네

縱令巧手圖全景 : 솜씨 좋은 이에게 이 전경을 그려내게 한들

難盡蒼漪渶水濆 : 물속에서 일렁이는 물결 다 그려내지 못하리라

   문수의 떠가는 구름을 읊은 것이다.[文岫歸雲]

 

如畵書峰橫落照 : 그림 같은 문달봉(書峰) 낙조가 가로지르니

崢嶸逈對亭簾峭 : 멀리 마주한 정자 주렴에 가파른 그림자 비추네

山翁莫醉峴山西 : 산 늙은이여 현산(峴山) 서쪽에서 취하지 말지어다

羞見小兒齊拍笑 : 아이들 일제히 박장대소하는 것 보기 부끄러우니

  서현의 낙조를 읊은 것이다.[書峴落照]

 

 쟁영(崢嶸) : 깊고 어두우며 험한 모양. 天衢陰崢嶸 客子中夜發(천구음쟁영 객자중야발 ; 하늘 거리 날씨 침침하고 험해서, 나그네인 나는 밤중에야 길을 떠났다.) 「두보杜甫 自京赴奉先縣詠懷五百字

 

曉色蒼蒼來遠鍾 : 푸르스름한 새벽녘 종소리 멀리서 들려오니

廣居亭畔舞孤松 : 광거정 곁 외로운 소나무 춤을 추네

長蘿纖月燕山寺 : 덩굴 우거지고 초승달 뜬 연산사에서

禮佛僧心也整容 : 예불 드리는 승려는 마음을 바로잡는구나

  연산의 새벽 종소리를 읊은 것이다.[燕山曉鍾]

 

江風獵獵動寒帆 : 강바람 산들산들 차가운 돛을 밀어주고

渡處靑山泛泛巖 : 청산으로 건너가니 바위 둥실 떠 있는 듯

晩有何船來楚客 : 저물녘 어느 배가 초강의 객 실어오니

滿天烟雨濕征衫 : 자욱한 안개비에 나그네 적삼 젖어버렸네

  초강의 저녁 돛배를 읊은 것이다.[楚江晩帆]

 

臥龍岡上有殘雪 : 눈이 채 녹지 않은 용이 누운 언덕에서

春睡遲遲塵夢絶 : 봄잠에 취하니 속세의 꿈 끊어졌네

水鏡村前日欲陰 : 수경촌에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데

經寒松竹尙全節 : 겨울을 버텨낸 송죽은 여전히 푸르도다

  용강의 잔설을 읊은 것이다.[龍岡殘雪]

 

馬嶺東頭豌轉月 : 마령 동쪽 둥그런 보름달이 떠서

瑩然照破魚龍窟 : 훤하게 어룡굴을 샅샅이 비추는구나

故人歸思禁中秋 : 궐안에서 가을 맞은 벗은 고향을 그리며

想徹金蓮立瘦骨 : 야윈 몰골로 임금님의 금련촉을 거두겠지

  마령의 추월을 읊은 것이다.[馬嶺秋月]

 

 

6. 광거정 기문[廣居亭記]

   우련 이병욱이 지었다.[友蓮李炳勖]

 

  위로 하늘로부터 아래로 땅까지는 광대함이 지극하고 시작인 오늘로부터 끝의 먼 옛날까지는 유구함이 지극하니 광대함과 유구함을 합하여 인간 세상이 서 있다. 끊임없이 쉬지 않는 음양의 조화와 서로 섞여 가지런하지 않은 사물의 상수가 그사이에 가로지르며 가득 차 있다. 합쳐서 부르길 '만만(萬萬)'이라고 하는데 그 지극함을 말한다면 역수(曆數)에 밝은 교력(巧力)이라 하더라도 능히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오직 사람만이 겨우 7척의 몸으로 우러러보고 굽어살피며 지난날을 거슬러 오르고 앞으로 올 날을 미루어보아 통합하여 작은 마음에 담을 수 있으니 이 때문에 인간을 "가장 신령스럽다."라고 말하는 것이니 진실로(조금도) 헛된 말이 아니다.

 

  上天下地而廣大極焉 始今終古而悠遠極焉 合廣大悠遠人世立矣 陰陽造化之坱圠無極也事物象數之參錯不齊者 橫塞豎盈於其間 總而號之曰萬萬 而語其至 則巧曆不能數矣 惟人乃能以藐然七尺之軀 仰觀俯察 溯往推來 統而載之於方寸之心 以是而謂之最靈者 非虛語也

 

만만(萬萬) : 자기(自己)가 생각하고 있는 느낌의 정도(程度)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아주 많음.

 

  만약에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성인이 아니라면 반드시 황제(黃帝)에게 하늘에 대해 묻고 백익(伯益)에게 산해(山海)에 대해 물어서 아주 작은 것까지도 거두고 모으며, 반드시 책이 많이 있는 유양(酉陽)에서 핵심을 뽑아내고 한관(漢觀)에서 가죽끈이 끊어져 물방울이 모이고 먼지가 쌓인 뒤에야 비로소 그 중 만분의 일을 익숙히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니 아, 그 또한 어렵지 않겠는가. 하물며 천지의 동쪽 끝이며 바다 끝의 모퉁이에서 태어난 사람은 천지의 광대함에 있어서는 바닷게(장구벌레나 게)와 같으며, 고금의 유구함에 있어서는 쓰르라미와 같을 뿐이어서 오솔길과 시냇물은 자장(子長)이 노닐던 곳이 아니며 그을린 책이나 촌스러운 글은 의상(倚相)이 읽던 책이 아니지 않은가. 다만 경서와 이소(離騷)의 찌꺼기로 빈대나 좀 벌레처럼 배불리 먹고, 해진 붓과 얼어붙은 먹물로 새처럼 지저귀고 벌레처럼 울 뿐이니, 쑥으로 엮은 처마와 명아주로 만든 담장이 이 한 몸에 있어서 천지며 새벽에 일어나고 저녁에 잠자는 것이 이 한평생에 있어서 고금이다. 그렇다면 지난번 이른바 사람이 가장 신령스럽다고 한 것은 거의 잘못된 것이다.

 

  苟非生知之聖 必問天於黃帝 山海於伯益 毫收錙會 必拔鍵於酉陽 絶韋於漢觀 涓聚埃積焉 然後方可以燖熟也記其萬一 吁 其亦爲之難乎哉 況有人生於天地之極東溟海之偏陬 其於天地之大 虷蟹虷井中赤蟲矣 古今之遠 蟪蛄蟬屬矣 樵逕野水 非子長之所遊 煤緬俚簡 非倚相之所讀 只以經糟騷粕 蟫飫而蠹飽 殘毫冷墨 鳥弄而蟲啼 蓬簷藜墻 天地於一身 晨寤夕眠 古今於百年 則向所謂最靈者 幾乎忝矣

 

황제(黃帝) : 중국의 전설상의 제왕. 백익(伯益) : 고대 전설상의 인물. () 임금 밑에서 치수를 도와 그 공으로 영()씨 성을 하사받음. 새들과 이야기한다고 하여 백충장군(百蟲將軍), 우물 파는 기술을 개발했다고 해서 정신(井神)으로도 불린다. [네이버 지식백과] 자장(子長) : 공자의 제자이자 사위이며 공자 문하 72현 중 한 사람이다. 의상(倚相) : 삼분(三墳오전(五典)을 읽었다는 초()나라 좌사(左史), 삼분(三墳오전(五典)보다 오래된 책은 없다고 함.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이소(離騷) : 춘추 전국 시대 말기인 기원전 3세기경 초()나라에 대시인 굴원이 등장하여 새로운 낭독시를 지었다. 그 대표작이 이소로서 중국 문학 사상 가장 오래된 장편 서정시이다.

 

  아, 금초(錦樵)가 뛰어난 기운을 짊어지고 드넓은 재주를 품고서 정신은 천지의 밖에서 노닐고 마음속에는 광대하고 엄정한 문장을 보존하였으나 도리어 문양(汶陽)의 작은 촌락에 갇혀 있으면서 혀가 헤지고 입술이 마를 정도로 날마다 돼지와 개같은 무리들에게 쉬지 않고 떠들며 작은 정자에 몸을 의탁하여 마치 그대로 생을 마치려는 것처럼 하니 어찌 애당초 그대에게 바라던 것이겠는가.

 

  嗟乎 錦樵負魁傑之氣 抱汗漫之才 神遊天地之外 心存顥噩之書 而顧乃局局於汶陽小聚 獘舌乾唇() 日呶呶不休于豚犬之輩 托跡小亭 若將終身焉 豈始望於吾子者哉

 

 注 금초(錦樵) : 지산 이기찬 선생의 호. 기축년(1889, 37) 상주(尙州) 서쪽 금천(錦川) 속리산 속에 은둔하고 자호를 금초산인(錦樵散人)이라고 하였다. 문양(汶陽) : 강변에 위치한 양지 바른 곳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인 듯함. 

 

  금초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하길, "나는 시골의 한 사내로 곤궁한 집을 고수하기만 하니 족히 남에게 비교할 것조차 없거늘 이처럼 극심한 가뭄이 떨치는 시기를 만나 띠를 매고 관직 생활을 하는 경솔한 짓을 감당할 수 없어 한 번 이 정자에서 편안히 쉬면서 더위를 피하고자 할 뿐이니, 어찌 큰일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그 벗 우련자(友蓮子)가 말하길 "그대의 뜻을 알만합니다. 고금의 사람들이 말하길, '궁하면 이 도로써 스승이 되고 벗이 된다.'라고 하였으니, 지금 세상이 양박(陽剝)에 놓여있어 온 천하가 어두운 안개 속에 있어 증기로 가는 가마가 들끓고 거려(佉廬) 문자가 여기저기 널려있으니 무릇 아름다운 옥과 같은 재주를 품은 선비들이 망연하게 어디로 갈지도 모르는 상황이 가뭄의 위세가 붉게 타오르며 백성들을 용광로 속으로 몰아가는 바람에 몸 둘 곳을 알지 못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하늘이 일단 그대에게 재주를 부여하였으니 장보관(章甫冠)을 월나라 사람에게 씌우는 것보다는 차라리 자취와 그림자를 감추지 않고 후학을 권면하여 하늘의 뜻에 보답하는 것이 어찌 아름답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錦樵微哂曰 余村野一夫 株守窮廬 無足況人 而當此魃虐肆威 不堪束帶之狂 聊偃息於此亭 以爲避暑之資耳 烏足以語其大哉 其友友蓮子曰 子之志 可知也已 古今云 窮則以是道爲師爲友 方今世値陽剝 擧天地在昏霧中 汽轎雜沓沸也佉慮縱橫 凡抱瑾懷瑜之士 茫茫然靡所之 奚異於旱威之絶然 驅民於洪壚之中 而不知措躬也 天旣付與子以非常 則與其資章甫於越人 寜晦跡韜影 獎進後學 以酬天之意耳 豈不美哉

 

注 양박(陽剝) : 주역「박괘(剝卦)」 주석에서 박(剝)은 흩어져 떨어진다는 말이라 하였다. 양(陽)은 밝고 길한 것인데, 양박이라 하면 밝고 길한 것이 헐어지고 떨어진다는 말로, 여기에서는 세상의 운수가 쇠퇴하였다는 뜻이다. 장보관(章甫冠) : 중국 은나라 이래로 써 온 관의 하나. 공자가 썼으므로 후세에 와서 유생(儒生)들이 쓰는 관이 되었다.

 

  이 정자는 금사공(錦沙公)이 경서를 공부하던 옛터로 그 아들 이운(二雲) 학사가 문하의 자제들을 위하여 강습하는 장소를 만들면서 그 옛 모습을 그대로 하고 그 규모를 더한 것이다. 지금 금초가 그 가운데에서 고상하게 있으니, 이곳에서 도를 강론함에 도포를 입은 선비들이 구름처럼 모이고 이곳에서 술과 음식을 권하는 예를 행함에 여대(輿臺)가 구름처럼 따르니 대개 장차 한 나라로 하여금 사양하는 기풍을 일으킬 수 있고 또한 한 고을 사람들로 하여금 보고 느끼는 바가 있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니, 그렇다면 이 정자의 규모는 비록 작으나 이 정자의 범위는 넓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추부자(鄒夫子, 맹자)가 말씀하시길 "천하라는 넓은 집에 거처하고 천하의 대도를 실천한다."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한 해석으로 "광거(廣居)는 인()이요. 대도(大道)는 의()이다."라고 하였으니, 우리 무리가 어진 집과 의로운 길을 버리고 어디로 가겠는가. 마침내 그 정자를 이름하길 '광거정(廣居亭)' 이라고 하고 낙성(落成)하였다.

 

  此亭卽錦沙公呴經之舊址 而其胤二雲學士 爲門子弟講習之所 仍其舊而增其制者也 今錦樵巋然高臥于其中 講道於斯 而縫掖雲集 行酳於斯 而輿臺雲從 蓋將使一國興讓 而亦可使觀感於五州之人 然則斯亭之規制雖小 斯亭之範圍 可謂廣矣 鄒夫子曰 居天下之廣居 行天下之大道 釋之曰 廣居 仁也 大道 義也 吾輩舍仁宅義路 而奚適焉 遂名其亭曰廣居而落之

 

금사공(錦沙公) : 의흥 현감을 지낸 이봉령(李鳳寧, 1827~1896)의 호로 이운 이의국의 양부이다.  () : 술로 입을 가시다. 少飮酒以潔口也. 여대(輿臺) : 지위가 낮은 사람. 천역(賤役)에 종사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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