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崇祖惇宗/청흥문중

청흥종계안(靑興宗契案)[1921년(辛酉)11月4日]

도솔산인 2021. 6. 5. 06:55

 

청흥종계안(靑興宗契案)[1921년(辛酉)11月4日]

 

 

  청흥종계안은 1921(辛酉) 114일 종증조부 청송 이강하(李康夏, 1873~1940) 공이 작성한 문서이다. 경북 문경 왕릉(旺陵) 종가에서 안동예안진보청송으로, 1861년 청송에서 군위 의흥으로, 1889년 의흥에서 상주 금천으로, 1897년 금천에서 충북 청원 문의로, 1912년 문의에서 다시 상주로, 1918년 상주에서 충남 대덕군 진잠 세동으로, 1921년 세동에서 진잠 성북으로 이주한 기록과 선대 묘소(청송, 의흥, 문의)의 위치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경북 청송과 군위 의흥에 선영이 있는데, 충남 대덕 진잠 성북에 정주(定住)하면서 경북 청송과 군위 의흥에 있는 선영을 돌보지 못하여, 후손으로서 크게 두렵고 지극히 송구한 마음을 서문(序文)에 담고 있다.

 

  청흥종계안 서문에 "壬子(1912) 가을 92일 나의 先考(김산 의병장 지산 이기찬)仲弟의 유해를 楚江(금강) 가에서 화장하였으니 죄가 이보다 큰 것은 없다. 다만 여기에 기록하여 후세의 자손들에게 알게 할 뿐이다."라는 기록을 남긴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여 일본군과 친일세력들이 의병장의 무덤을 파헤치자, 이강하(李康夏) 공은 아버지 이기찬(李起璨, 1853~1908) 선생과 동생(仲弟 諱 康殷,1883~1912)의 유해를 錦江가에서 화장하여 산골(散骨)하였다. 당시 화장(火葬)은 입에도 담지 못할 일이었지만, 일제의 만행이 얼마나 포악하고 사태가 위급하였으면, 장사를 지낸 지 두 달도 되지 않은 중제(仲弟 諱 康殷, 1883~1912.7.24)의 무덤을 파묘하여 화장하였는지 짐작할만하다. 1912년은 이강하 선생의 선비(先妣) 경주 박씨(226일 졸), 중제(仲弟) 康殷(강은, 724일 졸), 종제(從弟) 康卨(강설, 123일 졸), 종제(從弟) 강연(康連)配星山呂氏(배성산여씨, 126일 졸)가 돌아가셨다. 휘 강연(康連) 공은 절름발이 불구자가 되었고, 이강하 선생은 9월 선고(先考)와 중제(仲弟)의 무덤을 파묘하여 유골을 화장하고 충북 청원 문의를 떠나 상주로 이사를 간다. 그해 청흥 문중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종계안 서문(序文)에는 다른 지역으로 흩어진 집안의 결속과 단합을 위해 종계를 시작하고자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을해수계안(乙亥修稧案) 좌목(座目)에 계유년(1933)에 출생한 廷春廷鵬까지 기록되어 있고 1935년 추가로 작성한 듯하다. 이후 청흥종계는 이강하(李康夏) 공의 사후(1940)부터 유명무실하다가, 19942월에 청흥문중 종회(필자 35)를 다시 시작하여, 20171111~12일 양일간 각처(청송, 의흥, 진잠, 청원 등)에 흩어져있는 산소를 논산시 벌곡면 영주사 묘역으로 이장하여, 1년에 한 번 모여 시제를 지내는 것으로 '청흥문중'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1861'청송에서 의흥(군위)으로 이거한 참봉 상의공(象儀公,1816~1880) 후손들'은 대전 인근과 서울 등지에 48가구가 살고 있다.

 

  청흥종계안을 국역하는 동안 '다만 여기에 기록하여 후세의 자손들에게 알게 할 따름이다.'라는 문구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종계안에 나오는 선대의 산소를 관리해 온 나로서는, 100년이라는 시간 여행을 통해 선대의 영혼과 소통하고 있다고 느끼니, 가슴이 갑자기 뜨거워지고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 이강하(李康夏) 공이 말씀하신 '후세의 자손'이 어찌하여 나란 말인가?' 이강하(李康夏) 공은 천신만고 끝에 122년 후인 2018815일 의병운동 독립유공으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을해수계안 좌목(座目)에 실린 분들 중 생존해 계신 분은 없다. 의 말씀대로 시경 대아(大雅) 편에 나오는 문구로 글을 맺는다. '그대들 조상 생각하지 말고 스스로 그 덕을 닦아라.' .

 

 

* 청흥문중 선대묘소 납골묘 이장 http://blog.daum.net/lyg4533/16487869

 

 

靑興宗契案 辛酉拾壹月四日 : 청흥종계안 신유(1921년) 11월 4일

 

靑興宗稧序

猗歟我靖孝公裔孫之布徧國中者。不啻千萬。其居嶺南者衆多矣。況聞慶旺陵迺吾宗家之世居乎。吾家自聞慶移居于安禮靑眞之間。而爲七八世邱墓之鄕。若靑松府西池洞 自我六代祖以下至曾王考。四世墳墓所在地也。粤在辛酉歲我祖考

 

청흥종계 서문

아! 우리 정효공의 먼 후손(裔孫)들은 나라 안에 퍼져있는 사람들이 아주 많을뿐만 아니라 아마 영남에 거주하는 사람이 衆多할 것이다. 하물며 문경의 왕릉만이 바로 우리 종가의 세거지이겠는가? 우리 집안은 안동 예천 청송 진보지간으로 이거하여 7세 8세의 선영이 있는 고장이 되었다. 또한 청송부 서쪽 지동 같으면 우리 6대조에서 曾祖考(諱宅奎)까지 4世의 분묘가 있는 곳이다. 지난 1861년(辛酉) 나의 조부께서

 

注 公裔:①後裔; 대수가 먼 자손.②後孫; 여러 대가 지난 자손. 邱墓之鄕 : 선영이 있는 고장. 粤在 : 지난

 

 

 

自靑鄕移于義興。而我祖若伯考及仲考一位墓。在於友保面朴垞山也。歲己丑先考移尙州。歲丁酉又移于湖西之文義点一山麓。於懷仁北塩峙。遷我祖考一位墓。於負巽之原。其西下向庚之原。卽我先妣墓也。嗚呼。戊申我遭天崩之痛。奉襄于文義后谷炭峴。後五年壬子春葬先妣于塩峙。秋九月二日。火葬我先考及仲弟遺骸於楚江上。罪莫大焉。特書于此。使後世子孫知之也。仲母權氏墓。在文義西面光大岩西酉坐也。庶姑之墓。在后谷西越山下晩浦上。此乃我六代以下至諸父行墳墓所在記略也。壬子余自文義還于尙。戊午又移于湖之鎭岑西細洞。今年辛酉乃定新宅于城北。與季弟及諸從兄弟團聚。嗚呼。是年也。卽皇考自靑松定居于義興之一回甲也。

 

청송(靑鄕)에서 의흥으로 이사를 하여 나의 조부와 伯父와 仲父 묘 一位가 우보면 朴垞山(박택산)에 있다. 1889(己丑)년에 先考께서 상주로 이사를 하였고, 1897년(丁酉)에 또 호서의 청원 문의 点一山 기슭으로 이사를 하였다. 회인 북쪽 염티에 조고(祖考) 묘 一位를 이장하였고, 동남을 뒤로 한 언덕의 그서쪽 아래 서향(向庚)의 언덕이 곧 나의 어머니(先妣) 산소이다. 아! 1908년(戊申)에는 아버지의 상사를 만나서(天崩之痛) 문의 후곡 탄현에 장례를 모셨다. 5년 뒤 1912년(壬子)년 봄 염티에 어머니(先妣)의 장례를 모시고, 가을 9월 2일 나의 先考(아버지)와 동생(仲弟 : 諱康殷 휘강은)의 유해를 금강변(楚江上)에서 화장하였으니 죄가 이보다 더큰 것은 없다. 다만 여기에 기록하여 후세 자손들이 알게할 뿐이다. 둘째 큰어머니 산소는 문의 서면 광대암 서쪽 유좌(酉坐)에 있고, 庶할머니 산소는 후곡 서쪽 월산 아래 만포 위에 있다. 이것이 바로 나의 육대조 이하 諸父 항렬까지 분묘의 所在를 간략하게 기록한 것이다. 1912년(壬子) 내가 문의에서 상주로 돌아갔고(이사), 1918년(戊午)년 또다시 호서의 진잠 서쪽 세동으로 이사를 하였으며, 금년 1921년(辛酉)에 바로 진잠 성북에 새집을 마련하여 막내 동생과 여러 종형제들이 모두 모였다. 아! 이해가 선고(皇考)께서 청송에서 의흥으로 정주한지 60년이 되는 해이다.

 

注 團聚 : 한집안 식구나 친한 사람들끼리 화목하게 한데 모임. 화목하게 한데 모임. 皇考 : 先考

 

 

當是時我祖考。惟孝友克勤儉成立門戶。而爲子孫基業買置田土。而爲祖先奉祀矣。今我不肖諸孫離先墓棄舊土。罔奠厥居。使靑義先塋。將無奉香禁火之道。豈不大惶極悚底地頭乎。是年卽亦我伯從兄回甲之辛酉也。十一月四日卽其生朝也。是日也諸從諸侄及若干族人齊會。遂發此設稧之論。僉謀詢同。非余一人獨創之義也。玆豈非事有興廢。時有偶合者乎。凡我同爲子孫者。皆當勅念。我先祖靖孝之諡稱實德。而子孫衆多之洪福。追慕我皇考。勤儉之業垂後昆。而門戶成立之。貽謨則庶得免。前日不肖之思。而其永有後承。勿替之望矣。詩曰。無念爾祖。聿修厥德。

 

이때를(克勤克儉) 가문의 지체를 만들어 세우고 자손을 위하여 대대로 물려받은 재산으로(基業) 田土를 사두었으니, 선조들을 위하여 제사를 받들어 모셔야 할 것이다. 지금 못난 나와 여러 손들이 선영의 묘를 떠나 옛터를 버리고 그 살 곳(居所)을 정한 곳이 없다. 청송과 의흥의 선영에서 장차 봉향과 금초의 도리를 못하게 되니, 어찌 크게 두렵고 지극히 황송하여 땅에 머리를 숙여야 하지 않겠는가? 이해가 곧 또한 나의 백종 형님(康秀, 1861~1934)의 회갑인 신유년이다. 11월 4일이 그분의 생신이니 이날 여러 종형제와 조카들과 약간의 족인들이 모두 모였다. 드디어 이 設稧之論(종계를 설립하겠다는 의논)이 시작되었고, 모두의 의견(謀詢)이 일치해서이지 나 한 사람만의 독창적인 뜻이 아니었다. 어찌 일에는 흥폐(興廢)가 있고, 때에는 우연과 일치함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무릇 우리 같은 자손 된 사람들은 모두 마땅히 삼가(勅捻)해야 한다. 우리 선조 효령대군 정효공은 진실한 은덕(實德)에 시호를 받고 칭송받아서(諡稱) 많은 자손들은 큰 복이다. 나의 선고를 추모하는 근검지업이 후손에게 드리워 가문의 지체(門戶)가 만들어지고 세워진다(成立). 후손에게 주는 선대의 가르침(貽謨)은 재앙을 벗어날 수 있다. 전날 못난 나의 생각이나 영원히 후손들이 계승하여 폐하지 말기를 바란다. 시경에 이르기를 '그대들 조상 생각하지 말고 스스로 그 덕을 닦아라.‘

 

注 孝友 :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에 대한 우애. 克勤儉 : 매우 부지런하며 아껴 쓰다. 門戶 : 대대로 이어 내려오는 가문의 지체. 基業 : 기반이 되는 사업. 대대로 계승되는 사업과 재산. 罔奠厥居 : 그 살 곳을 정한 곳이 없다. 禁火之道 : 한식 차례(?) 禁草 : 禁火伐草의 준말. 偶合 : 우연히 맞음. 또는 뜻밖에 서로 일치함. 實德 : 진실한 은덕(恩德). 後昆 : 여러 대가 지난 뒤의 자손 貽謨 : 선대 국왕이 자손에게 내리는 교훈. 자손에게 영향을 준 교훈이나 가르침. 貽謨 : 재앙이나 괴로운 일 따위를 잘 피하여 벗어남. 聿修 : 조상의 덕(德)을 이어받아 닦음.

 

 

* 작성일(2019. 09. 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