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实踐人文

칠성동의 유래와 진평왕 태자 태실지를 찾아서(201205)

도솔산인 2020. 12. 6. 21:04

칠성동의 유래와 진평왕 태자 태실지를 찾아서(201205)

 

 

▣ 일 시 : 2020년 12월 05일(토)

▣ 코 스 : 함양초교-화암마을-산지골펜션-마천 당흥부락-백무동-군자사터-도마사터-벽송사-신농산삼약초원-천진암-마적사터

▣ 인 원 : 나 홀로

▣ 날 씨 : 맑음(포근함)

 

 

함양에서 창원마을 출신 박영일 교수와의 점심 약속 때문에 출발을 늦췄다. 한 시간 일찍 도착하여 함양초등학교 정원에 방치된 배례석(拜禮石)을 확인하였다. 불교를 모르니 불구(佛具)를 알리가 없고 명칭 또한 생소한 용어이다. 눈을 부릅뜨고 정 맞은 돌을 찾았지만 장님이나 다를 바가 없다. 선과님에게 여러 번 통화를 한 후에야 겨우 배례석(拜禮石)을 찾았다. 오랫동안 화단에 디딤돌로 사용하여 연꽃 문양이 많이 훼손되었다. 함양에서 박 교수의 일행과 만나 점심을 먹었다. 1박 2일 일정을 함께하자는 요청을 사양하고 일요일 신농 산삼약초원에서 점심을 약속하고 화암을 향했다. 배례석(拜禮石)에 대한 설명은 링크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注 배례석(拜禮石) : www.baekryunsa.com/new/sub03/sub04.php

 

김종직의 유두류록에 '엄천을 지나 화암에서 쉬었다.'라는 문구에서 엄천은 지명이다. 만약 엄천(냇물)이라면 '渡(건널도)'나 '越(넘을월)'을 썼다. 현재의 행정 구역으로는 엄천과 화암의 선후가 맞지 않는다. 점필재는 함양에서 출발하여 팥치재(팥두재)를 넘어 화암에서 쉬고 당두재를 넘었다고 본다. 이 길이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한말에 함양군에는 17개의 면이 있었고, 1914년도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휴지면(休知면)과 엄천면(嚴川面)을 통합하여 휴천면(休川面)이 된다. 당통합 이전의 엄천면 화장산 아래 유평리 일원과 동강리, 운서리, 송전리, 용유담 일원을 포함한 듯하다. 1888년(고종 25) 간행된 천령지에 엄천(지명)의 영역은 당북(堂北, 당두재 북쪽), 초정(初亭), 소연(所淵), 음법(陰法), 탄촌(炭村, 문정), 용당(龍堂, 용유담)을 포함하고 있으니 확인할 필요가 있다. 용당은 용유담의 당집을 가리키는 듯하다. 1472년 당시 엄천사가 많은 토지를 소유했을 것이고 그 영역 전체를 엄천이라고 했을 가능성이 높다. 화암에서 당두재 방향을 바라보면 옛길이 어렴풋이 보인다. 사숙재의 시를 보면 엄천은 화장사에서 국계로 가는 길도 엄천이다.

 

☞ 1914년 함양군(咸陽郡) 행정구역
원수면(元水面), 북천면(北川面), 병곡면(甁谷面), 지내면(池內面), 백토면(柏吐面), 도북면(道北面), 관변면(官邊面) 사근면(沙斤面), 유등면(柳等面), 휴지면(休知面), 마천면(馬川面), 예림면(藝林面), 석복면(席卜面), 백전면(柏田面) 모간면(毛看面), 덕곡면(德谷面), 엄천면(嚴川面)

 

출처 : heme.archives.go.kr//next/oldhome/contents/contentViewArchive.do?key=00004&key2=0026883408

 

 

送金修撰宗直作宰咸陽 二首

 

(二)

智異山高萬丈長 : 지리산 높이 솟아 올라 만 길이나 거대한데

山藏古郡號咸陽 : 그 산속에 묻힌 옛 고을 함양이라 부른다네

花長舊刹嚴川路 : 화장사 옛 절터 지나서 엄천으로 가는 길에

翠竹茅茨是故鄕 : 푸른대밭 띠집 있는 곳 거기가 내 고향일세

 

                         私淑齋集 卷之一 七言絶句  출처 : 천령지

 

 

운서리 산지골 펜션에 들러 유진국 사장님의 얼굴을 잠시 보았다. 마지막 곶감 작업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80세가 넘은 할머니들께서 감을 깎고 계셨는데 근동에서 가장 숙련된 기술자라고 한다. 아침에 댁으로 모시러 가는데 잠이 없으셔서 새벽 4시에 연락이 온다고 한다. 대봉 곶감을 구입하러 갔다가 또 얻어왔으니 염치없는 일이다. 가객님 댁에는 손님이 있는 듯하다. 만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 같아서 카톡을 보내고 운서리를 떠났다. 금계 마을 탄수 공 집터에서 칠선계곡 방향을 바라보았다. 영룡봉, 영랑대(하봉), 중봉, 상봉, 제석봉, 5봉이 병풍을 펼친듯 우뚝하고 좌로는 벽송사능선의 710.8봉이 우로는 924.9봉(창암산)이 수문장 역할을 하고 있다. 7봉과 북두칠성의 숫자가 일치한다. 덕암의 성혈 별자리와 칠성동의 유래를 이제 알 수 있을 것 같다. 칠성동은 북두칠성에서 유래했고 칠봉은 북두칠성을 상징한다. 그래서 덕암에 별자리로 북두칠성을 새겨놓은 것이다. 자료를 정리하는데 임재욱 선생이 '천문을 엎어 놓은 것이  지리이다. 금대에 삼태성이 정좌하고 천왕봉 쪽이 안산에 해당되니 자미원도를 비교해 보라.'는 조언을 보내왔다. 탄수공 후손이 내게 준 자료에 순천의 서강 양상화 선생의 '방장산 답사기'를 여기에 링크한다. 

 

☞ 서강 양상화 선생의 '방장산 답사기' : blog.daum.net/lyg4533/16488408

 

점필재의 아홉 모랭이 길에서 방장문 석각 명문의 발견은 답사의 전환점이 되었다. 방장 제일문에서 탄수 공을 만났고, 와유강산에서 삼송 공을 만났다. 마천 당흥 부락의 진평왕 관련 석각은 유람록 이외 분야로 시야를 넓히게 되었다.. 이 자료들은 서복회 문 회장님이 1994년 마천면지를 발간하기 위해 현장을 조사라는 과정에서 축적된 자료이다. 나는 이미 미지의 세계를 향했고 이미 미답의 길을 가고 있다. 또 하나의 의문은 一字文星이다.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진평왕 왕자 태실지를 다시 찾았다. 이곳에서는 영신봉에서 좌고대는 물론 칠선봉, 덕평봉까지 벽소령, 부자암, 삼각고지, 명선봉까지 주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태실지에서 내려와 김수태 어르신을 뵙기 위해 일자문성당을 찾았다. 두 시간 가까운 대화에서 태실지에 관한 말씀을 주로 들었다.

 

김수태 어르신은 1929년생(현 92세) 본관은 김해 아호는 문성당(文星堂). 字와 名은 수태(守泰) 당호는 일자문성당(一字文星堂) 어렸을 때 어떤 스님이 찾아와 지리 주능선에 일자문성의 형국이니 집터가 명당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어르신은 탁영 김일손 선생의 후손이다. 선대에 경북 청도에서 남원으로, 12대조께서 인월로 이거하였고 7대조께서 마천 당흥 부락에 정착하였다. 조부께서 한말 과거에 급제하여 사헌부 감찰을 지내셨다. 어르신 댁 거실에 교지가 걸려있다. 어르신의 장자 김종신(54년생)씨는 군 제대 후 행정고시에 합격하여 건설교통부에서 정년을 하셨다. 손자는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얼마 전에 대령으로 진급했다고 한다. 벼슬이 끊어지지 않는 집안이다. 어른께서는 동네 서당에서 천자문과 명심보감을 읽으시고 함양 향교에서 사서삼경을 공부하셨다고 한다. 이용근(李榕近, 1936~) 어르신에 대해  물으니 '용그이 살아있냐?'라고 물으셨다. 학문의 깊이를 물으니 '용근이가 낫다.'라고 하시며 웃으셨다. 이용근 옹은 이정우(李整雨, 1908~1996) 공의 아들이라고 한다. 죽포공 후손들이 자손이 귀하여 상(相) 대신 용(榕)을 썼다고 한다.

 

신라 진평왕 태자 태실지에 대해서 말씀하신 내용이다. 태봉은 구전으로 전해진다. 당흥 마을 진평왕 태자 태봉이 있다. 동으로는 금대암이 있고 서쪽으로는 안국사가 있는데 그 길목에 태봉이 있다. 이 길이 절에서 절로 다니는 옛길이다. 옛날에 태봉 근처에 마을이 있었는데 봄이 되면 임천강에서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화전놀이를 했다. 남자들은 임천에서 천렵을 하고 여자들은 음식을 준비하여 마을 잔치를 했는데, 술을 먹고 주민들끼리 싸워 사람을 죽이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런 일이 해마다 일어나자 마을 어른들이 회의를 하여 마을을 아랫동네로 옮겼다고 한다. 터의 기운이 세서 마을 주민들의 성정이 포악해진다고 생각한 듯하다. 오래전부터 마을에 전하는 이야기라고 하셨다. 금대산(金坮山)의 다른 이름은 금태산(金台山)으로 금성(金星)을 상징한다. 또 다른 이름은 금마대(金馬坮)로 방장제일문 시에 나타나 있다. 금마는 왕이 타는 말이다. 금마라는 지명은 전북 익산에도 있는데 백제 왕궁터 인근에 있다.

 

 화전(花煎) 놀이 : 매년 음력 3월 중순경에 교외나 야산 등지에서 진달래 꽃을 부치거나 떡에 넣어 먹는 등 여럿이 함께 즐기는 민속놀이. 세시풍속.

 

 

태봉 추정지 무덤

 

태봉의 추정 위치에는 진주 강씨묘가 있다. 진주 강씨는 이 지역에서 명망이 높은 가문이다. 노강정하양박(盧姜鄭河梁朴)에서 넘버 2이다. 묘를 쓴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조선이 무너진 일제 강점기일 가능성이 크다. 무덤을 쓸 때 땅을 파니 처음에는 물이 나오고 더 깊이 파니 부처가 나왔다고 한다. 부처는 진주 강 씨 집안에서 가지고 갔다. 이 이야기는 선대로부터 전해지는 이야기이다. 석각 명문이 있는 곳에 대숲이 우거지고 이끼가 끼어 어르신이 이끼를 제거하고 능소화를 심고 가꾸셨다고 한다. 마을을 이전할 당시 당흥 부락 동계(洞契)에서 금표로 석각을 새긴 것으로 추정한다. 금대사 아래 하금대가 있는데 절터라는 말씀도 하셨다. 금대암이 상금대이다. 하금대에 어렸을 때 소 풀뜯기러 그곳에 자주 갔다. 그곳에 불두 한쪽이 깨진 석불이 있었다. 맷돌도 있었다. 서산대사가 이곳에 머물렀다고 전한다. 그 석불은 오래전에 없어졌다고 한다.

 

어르신께 인사를 드리고 나오는데 대문까지 배웅하셨다. 대문에서 일자문성을 다시 여쭈니 영신봉에서 칠선봉 능선을 가리키신다. 오래전에 택시를 대절해서 구미에 다녀오셨다고 한다. 박정희 대통령 선대의 묘도 일자문성이라고 하셨다. 칠성동은 칠선 계곡을 감싼 7봉과 칠선 능선의 칠선봉은 칠성신앙에서 나온 지명이다. 지난주 칠성동에서 1박을 하였다 해발 600m에서 영하의 날씨에 마당가의 고추나무가 아직 살아있다. 서리가 내리지 않았을 리는 없는데 신기한 현상이다. 독가 주인 정○환 씨에게 물으니 햇볕을 많이 받아서 따듯하다고 한다. 계곡의 자연 지형이 온기를 보존하는 것으로 보인다.

 

숙소로 들어가 가객님의 유두류록 탐구를 읽었다. 대부분 예전에 읽었던 내용이다. 별반 다른 내용이 없다. 점필재 길의 지명에 대한 다른 해석이 너무 많다. 화암, 지장사, 함양 독바위, 향로봉(상내봉),아홉 모랭이 길, 진주암(옹암), 청이당, 마암, 영랑재, 소년대, 한신능선, 등 사람에 따라 해석이 다를 수 있다.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문헌(유람록)에 이름이 있는데 새이름을 붙인 지명은 안타깝다. 김경렬 선생의 의탄설을 동강으로 뒤집은 것만해도 그 공로가 크다. 어쨌든 유람록 복원이라는 인문학의 거대한 문을 열었다. 가객님의 초창기 답사 기록은 많은 사람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당시 산행에서 새로운 장르였고 그 반향은 대단했다. 이렇게 누구나 처음 가는 길은 어려우나 남이 간 길을 따라 가는 것은 쉽다. 끝.

 

 

배례석
정 맞은 돌(?)
화암마을 이정표
판문마을 가는 길에서 옛길이 보인다.
화심정
서주천과 화암마을
화암마을 앞 들판
탄수공 집터에서 바라본 영룡봉, 영랑대, 중봉, 상봉, 제석봉
칠봉은 북두칠성을 의미한다.
일자문성
탄수공 집터 지번
진평왕 태자 태실지 금표 명문 석각

 

옛날 이야기에 전하기를 '신라 진평왕이 이산에 들어왔을 때에 봉지(封地)를 허락한 다음에 이곳을 차지하여 그 후 주민들이 모두 땅에 대하여 감히 입을 열지 못하였다.'라고 한다.(古諺傳眞平王入此山時聽封次占此而其后居人皆以噤地云)

 

注 噤 : 不敢開口的樣子 噤 寒而閉口 口閉 地 語助詞

 

 

진평왕 태실에서 바라본 주능선
일자문성(StartFragment)

 

일자문성(StartFragment) : 풍수학 용어로 높고 낮은 봉우리가 없이 한일자 모양으로 생긴 산을 말한다. 일자문성은 부와 귀를 뜻한다. 대통령, 국회의원등, 일자문형의 안산을 두고 있으면 "나무꾼도 벼슬을 한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나라에 귀하게 쓰일 인재를 배출하는 형세이다. 일자문성은 부와 귀를 나타내며 앞뒤 어느 방향에서 보아도 일자라면 정말 귀하게 여긴다. 일자문성은 군왕의 산이라. 요즘으로 치면 대통령도 나올 수 있는 산 형태이다.

 

 

김수태 어르신
진평왕 태자 태실지 금표 석각 추정 지번

 

※ 저의 주관적인 생각입니다. 오류가 있으면 지적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