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实踐人文

폐암자 군자사&도마사와 마적사지를 찾아서(201206)

도솔산인 2020. 12. 7. 16:05

폐암자 군자사&도마사와 마적사 지를 찾아서(201206)

 

 

▣ 일 시 : 2020년 12월 06일(일)

▣ 코 스 : 군자사터-도마사터-벽송사-신농산삼약초원-천진전-마적사터

▣ 인 원 : 4명(문 회장님, 일정 민선생님, 선과님)

▣ 날 씨 : 맑음(포근함)

 

 

내가 지금 이 글을 쓰는 것은 내 의지가 아니다. 누군가 나에게 이 글을 쓰게 한다는 느낌이다. 우리 민족은 외세의 침입에는 매우 약하나 자국민들끼리 싸움은 끝장을 보는 근성이 있다. 삼국시대 수백 년의 내전을 치러낸 저력이 있어서일까. 그래서인지 좁은 땅덩어리에서 내전에는 유독 강하다. 남북 전쟁으로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고도 핵폭탄은 우리의 심장을 겨누고 있다. 그런데도 남쪽은 또 좌우로 나누어져 호시탐탐 서로를 죽이려고 기를 쓴다. 정치는 물론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조직적으로 백병전을 치르고 있다고 본다. 어디를 가도 일진회가 없는 곳이 없다. 지리산도 예외는 아니다. 탄수 이종식(李鐘植, 1871~1945) 선생의 비결 명문 논집에도 '지리산에서 팔도 사람들이 싸운다.(智異山八道人戰)'라고 하였다.

 

집단 체면에 빠져 지리산에서 자기보다 나은 사람, 산을 잘 아는 사람, 열심히 하는 사람을 용납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같은 분야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협력하면 시너지 효과가 있을 텐데...'라고 말을 하지만, 온갖 위계를 동원하여 모함을 하고 폄훼를 한다.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궁금하다. 아마 내가 아니면 안된다는 독선 때문일 것이다. 지리산 인문학을 얼마나 안다고 사람을 깔보고 무시하고 짓밟을까. 기회다 싶으면 앞뒤를 가리지 않고 무자비(無慈悲)하다. 회원들은 바른 말을 하고 싶어도 사람의 눈치를 봐야 한다. 견마지로를 할 것인지, 묵언 수행을 할 것인지, 떠나야 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두려운 것은 진실이 아니다. 정의도 아니다. 사람이다.

 

몇 년 전 상류암 터를 찾기 위해 1610년 박여량의 두류산일록 원문을 읽어 내려갔다. 박여량이 군자사에서 1박을 하였는데, 감수재의 기록은 너무나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군자사에서 '박명부가 술이 너무 취해 기생의 치마 속에 손도 넣지 못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감수재의 시각에서 일행들의 상식에 벗어나는 행동에 촌철살인을 한 것이다. 군자사의 기록은 10여 편의 유람록에 나오는데, 지리산을 유람하는 관리와 유생들의 숙소 역할을 하였다. 승병을 일으켜 임진왜란 때에 나라를 구했음에도, 조일전쟁이 끝난 후에 관리와 사족들의 적폐가 극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쉽게 설명하면 신성한 사찰에서 기생파티를 한 것이다. 빈대 때문에 폐사된 절이 많은데 빈대가 곧 지배계급인 것이다. '빈대 붙는다.'는 노력없이 소득을 얻는다. 기생하다. 등의 의미이다. 군자사 터로 나를 인도한 것은 마천 당벌(堂伐) 부락 진평왕 태자의 태실이다.

 

注 선과 임병기 선생님 의견 : 전국의 많은 사찰의 폐사 원인을 빈대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빈대는 탐관오리, 사대부, 앙반 등등의 지배 계급을 말한다. 유산기에 기록되었듯이 절에서 기생과 노닥거리고, 밤, 잣, 종이 등 온갖 물품을 요구하고 수탈한 그들의 만행에 견디지 못하고 스님들이 절을 떠나게 된 것이다. 즉 빈대는 그들 지배계급을 이른다.

 

注 1. 박여승(박명부)의 오늘 밤 계획은 끝내 이루지 못했으며 끝내 손도 집어넣지 못했다(終不入手) 청원향 두 개도 자신이 사르지 못하고 두 기생의 소매 속으로 들어갔다고 하니, 웃을 만한 일이다. 2. 내가 장난 삼아 말하기를 “예전부터 ‘하동암’이라 불러왔지만, 이제는 ‘합천암(陜川巖)’이라고 고쳐 부르는 것이 좋겠네'라고 하였다. 박명부가 합천군수를 지냈기 때문에 한 농담이었다.

 

대구에서 선과님이 새벽바람에 달려왔다. 외마 마을 입구에 차를 주차하고 한 대를 이용하여 군자 마을로 이동을 하였다. 마을에 도착하니 군자 마을의 문재선(62세) 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퇴직을 하고 귀향한 분이다. 이 마을에는 다섯 개의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옛 문헌에 나오는 영정(靈井)은 신령스러운 샘이다. 그래서 사찰 이름도 본래는 영정사(靈井寺)였다. 진평왕이 이곳에 와서 아들을 낳아서 후에 군자사(君子寺)가 된 것이다. 현재는 우물이 하나만 남아있다. 마을에 상수도가 들어오면서 용도가 폐기되어 우물 4개는 땅 속에 매립되었다. 둘레석을 피손하지 않고 그대로 묻었다니 다행이다. 하나 남은 우물은 수량이 많아 특수작물을 재배하는 데 농업 용수로 사용하고 있다.

 

문재선 님이 부도가 있는 마을 뒤 왕대숲으로 안내하였다. 본래 4기가 있었는데 2기가 반출되었고, 2기가 대숲에 아직 남아 있다고 한다. 크기가 너무 커서 옮기지 못한 것이다. 우리는 승탑 지대석 2개와 옥개석을 확인하였다. 문 선생이 2년 전 왕대나무를 자르면서 보았다고 하니 확인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군자사에서 고개를 넘으면 바로 도마사(都馬寺)이다. 이곳에 있는 승탑(부도)은 벽송사로 실어갔다고 한다. 문 회장님이 1994년 마천면 지를 쓸 때 부도를 확인했으니 부도를 옮겨간 것은 20년 전후의 일이다. 마을 분을 몇 분 만났는데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벽송사로 실어갔다는 말씀을 하셨다. 도마사(都馬寺)에 관한 기록은 마천 의중마을에 살았던 삼송(三松) 임응택(林應澤, 1879~1951) 선생의 와유강산이 유일하다. '운학정을 잠깐 지나 도마사와 군자사의 옛터를 찾아드니 세월이 흘러 매우 오래된 옛 절터가 속가의 마을이 되었다. '亭子(雲鶴亭)를 暫間지나 都馬寺와 君子寺에 옛터를 찾아드니, 年久歲深 古寺터가 俗家成村 되었으니...'라는 내용이다.  

 

우리는 옮겨간 승탑을 확인하기 위해 벽송사로 향했다. 군자사의 승탑으로 추정되는 2기는 서암정사 방향 채마밭 옆에 있고, 도마사에서 옮겨온 승탑은 벽송사 위에 있었다. 아는 것은 없으나 삼층 석탑에 대한 설명은 사진에 별도로 간략하게 설명하겠다. 벽송사에서 나와 석상용 장군 증손자(석영일)에게 독립운동 자료를 돌려주고 신농산삼약초원을 향했다. 강재두 사장은 지난 4월 고열암에서 만난 후, 서복회와 지리산 역사문화조사단의 야합(野合)을 주선한 분이다. 이분이 바로 적은(跡隱) 강지주(姜趾周 1856∼1939) 선생의 증손자이다. 적은(跡隱) 선생이 살았던 마적대와 세진대를 지키면서 신농산삼약초원을 운영하는 석사 농부이다. 금대사를 금마대라고 하듯이 마적대 또한 마적사의 이칭인 듯하다. 마적대에서 바라보는 금대산은 금마 음수의 형국이다. 강재두 사장이 직접 지리산 흑돼지 수육과 시래깃국과 약초원에서 재배한 노지 배추쌈을 준비했다. 후식으로는 곶감과 6년 근 산삼을 내놓았다.

 

약초원에서 나와 마적사와 천진전을 찾았다. 지리산길 지도에 대종교 터인 진전을 마적사 터라고 표기하고 있다. 천진전 터는 전답(논) 자리로 물이 표출되어 지표로 흐른다. 대종교에서 복토를 하였지만 용출되는 수맥을 잡지 못했다. 또한 천진전에서 용유담은 보이지도 않는다. 석불 하대석은 고려 초기로 추정하며 석등 하대석이 아니다. 이 석불 하대석은 '천진암 사람들이 마적사 터 위 소나무가 있는 곳에서 포클레인으로 옮겨갔다.'라고 한다. 마적사 터 입구에 사는 김성수(94세) 어른 부부의 말씀이다. 이분들은 대종교가 들어오기 전(50년 전)에 이곳에 정착했다. 천진전 터는 40년 전 강재두 사장 백부님 소유의 논으로 대종교에 팔았다고 한다. 용유담으로 나와 선과 임병기 님은 산청 구형왕릉으로 떠나고, 민 선생님과 용담입문 석각을 보고, 탄수 공의 집터에서 한동안 북두칠성을 상징하는 칠봉이 에워싸고 있는 칠성동을 바라보았다. 방장제일문과 성교대는 자미원의 신선세계로 들어가는 칠성동의 관문인 것이다. 방장제일문 위에는 탄수 공의 묘소가 있다. 끝.

 

注 자미원(紫微垣) 별자리 이름. 고대의 별자리는 28수(宿) 외에 삼원(三垣)으로도 구분했다. 즉 자미원(紫微垣) · 태미원(太微垣) · 천시원(天市垣)이다. 자미원이란 황하 유역 북쪽 하늘의 북극성을 기준으로 그 주위에 운집해 있는 성운(星雲) 집단을 말한다.

 

 

※ 답사 요약

 

① 진평왕(567~632)은 신라 제26대 임금으로 진흥왕(540~576)의 태자 동륜(銅輪)의 아들이고 진흥왕의 장손자이다. 576년 진흥왕이 서거하자 차자(次子) 진지왕(576~579)이 즉위한다. 동륜(銅輪) 태자의 아들인 진평왕은 함양 마천 군자사로 피신한다. 이때 진평왕의 나이가 10살이다. 579년 진지왕이 폐위되자 화백회의와 조정의 추대로 왕위에 오른다. 진평왕이 이곳에서 왕자를 낳아서 579년 잠저시 별궁(영정사)을 군자사(君子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다.

 

군자사는 1807년 남주헌과 하익범의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에 마지막으로 나타난다. 1888년 정환주가 간행한 천령지 사찰 편에 군자사가 '지금은 없다(今無)'라는 기록으로 미루어 1807년~1888년 사이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한다. 폐사의 시기가 진주 민란과 관계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

 

지리산길 지도의 마적사 터는 오류로 보인다. 천진전 터는 물이 표출되어 지표로 흐른다. 천진전에 있는 '석불 하대석은 대종교 사람들이 마적사 터 위 소나무가 있는 곳에서 포클레인으로 옮겨갔다.'라고 한다. 마적사 터 입구 독가에 사시는 김성수(94세) 어른 부부의 말씀이다.

 

④ '유두류록 탐구'에서 백모당에 관한 기록을 읽었는데, 백모당 터는 야영장이 아니고 느티나무 산장 본채로 추정한다. 기와 사진을 가객 님께 제공한 문 회장님의 이야기이다. 직접 전달했는데도 의사 전달에 착오가 발생한 것이다. 이것이 구전(口傳)의 한계를 반증하는 것이다.

 

⑤ 도마마을 어원은 두모(豆毛)에서 비롯되었다. 두모(豆毛)란 큰 흙덩이가 쌓여서 언덕이 된 곳을 말한다. 두모는 신령스러운 곳을 의미한다. 두모는 주역의 기본 4괘인 건곤감리(乾坤坎離)에서 그 첫 번째인 건(乾)을 취하고 있다. 건(乾)은 순수 양(陽)의 하늘을 상징한다. (고려대학교 지리학과 남영우 교수) 출처 : ww.hygn.co.kr/3326

 

도마(都馬)라는 지명은 전국 곳곳에 많다. 민주지산의 도마령(都馬嶺)은 장수가 칼을 차고 넘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도마현(都馬峴), 도마천(都馬川), 도마리(都馬里), 도마동(都馬洞) 등이 있다.

 

 

 

▶ 참고자료 : 군자사 관련 옛 문헌의 기록

 

1. 군자사 관련 진평왕의 기록

 

가. 1530년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1권 경상도(慶尙道)

 

군자사(君子寺) 지리산에 있다. 전설에, “신라 진평왕(眞平王)이 왕위를 피해서 여기에 살다가, 태자를 낳아서 나라에 돌아가고, 집은 희사하여 절로 만들었다.” 한다.

 

나. 함양군수(1601-1604) 고상안(高尙顔, 1553-1623) 태촌집(泰村集)

 

군자사(君子寺)는 함성(含城) 치소 남쪽에 있다. 곧 두류산 서북쪽의 기슭이다. 절 아래 우물이 있고 우물 가에 미나리밭이 있다. 옛날부터 개구리가 없다. 어떤 이는 우물의 발원처에 웅황(雄黃:광물, 살충제)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였다. 옳은지 여부는 모르겠다. 대체로 사물의 이치는 깨달을 수 없는 것이 많다. 이를테면 영가(永嘉:안동) 성안에 모기가 없는 것이나 상주(尙州) 사불산(四佛山)에 칡이 없는 것과 같은 것이 그것이다. 《泰村集 제5권》 함양군수(1601-1604) 고상안(高尙顔, 1553-1623) 지음

 

※군자사는 신라 진평왕이 숙부 진지왕이 서기 576년 즉위함으로 인하여 도성을 떠나 이곳에 피신, 은거한 별궁이다. 579년 진지왕이 폐위된 뒤 도성에 돌아가 즉위하고 이곳에서 아들을 낳은 것을 기념하여 이곳에 군자사를 창건하였다. 그러나 진평왕은 딸만 성장하여 선덕여왕이 되었다.

 

다. 1656년 정수민(鄭秀民)이 사찬한 天嶺誌

 

지리산에 있다. 세속에 전하는 말에 '신라 진평왕이 지위를 피하여 이곳에 살다가 태자를 낳아 국도로 돌아간 뒤 집을 희사하여 절을 만들었다고 한다. 지금은 없다. (在智異山。俗傳新羅眞平王。避位居此。生太子還國。捨家爲寺。○有兪好仁詩 ○今無)

 

注 1888년 후손 정환주(鄭煥周)가 간행함. 注 폐사 시기는 1888년 이전으로 보임.

 

라. 연대 미상의 마천 당흥 부락 마애석각 명문

 

옛날이야기에 전하기를 '신라 진평왕이 이산에 들어왔을 때에 봉지(封地)를 허락한 다음에 이곳을 차지하여 그 후 주민들이 모두 땅에 대하여 감히 입을 열지 못하였다.'라고 한다.(古諺傳眞平王入此山時聽封次占此而其后居人皆以噤地云)

 

注 噤 : 不敢開口的樣子 噤 寒而閉口 口閉 地 語助詞

 

 

2. 선인들의 유람록 군자사 관련 진평왕의 기록

 

가. 1610년 박여량의 두류산일록

 

군자사는 옛 이름이 영정사(靈淨寺)이다. 신라 진평왕이 즉위하기 전에 어지러운 조정을 피해 이 절에 와 거처하였다. 그때 아들을 낳게 되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고 한다. 안국사(安國寺)도 이때에 그 이름을 얻은 듯하다. 전란을 겪은 뒤에 중창한 것은 법당∙선당(禪堂)∙남쪽 누각뿐이다.(君子者。古之靈凈寺也。新羅眞平王避亂居此寺生子。因改以今名。其曰安國寺者。亦因其時而得此稱歟。戰兵火之後。所重刱者。法堂禪堂南樓而已。)

 

나.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

 

저물녘에 군자사(君子寺)로 들어가 잤다. 이 절은 들판에 있는 사찰이어서 흙먼지가 마루에 가득하였고 선방(禪房) 앞에 모란꽃이 한창 탐스럽게 피어 있어 구경할 만하였다. 절 앞에 옛날 영정(靈井)이 있어 영정사(靈井寺)라 불렀다. 지금은 이름을 바꿔 군자사라고 하는데, 가져온 뜻이 무엇인지 모르겠다.(暮投君子寺. 寺野刹也. 埃氛滿堂. 獨牧丹對禪房方敷榮. 可賞. 寺前舊有靈井. 號靈井寺. 今改以君子. 未知取何義也.)

 

다. 1643년 박장원의 유두류산기

 

○ 8월 22일, 저녁때 군자사에 이르렀다. 이 절의 본래 이름은 영정사(靈井寺)였는데 진평왕이 이곳에서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고 한다. 절의 법당과 건물들이 모두 웅장하고 화려하였다. 절의 서쪽 구석에 화려한 단청 칠을 한 새로 지은 별전이 있는데 삼영당(三影堂)이라고 했다. 삼영당 안에는 청허(淸虛), 사명(四溟), 청매(靑梅) 세 대사의 초상화가 있었다.

 

라. 1680년 송광연의 두류록

 

○ 8월 26일, 다시 20리를 가서 군자사에 이르렀다. 함양군수 윤천(尹○)이 두 명의 악공 및 안주와 술을 보내왔다. 절 앞에는 옛날 영정(靈井 : 신령스러운 우물) 영정사(靈井寺)라 불렀는데 뒤에 군자사로 개칭하였다. 무엇을 근거해서 군자사로 이름을 바꾸었는지는 모르겠다.

 

마. 1783년 이덕무 청장관전서 군자사 사적(君子寺事蹟)

 

계묘년(1783) 6월 23일에 나는 아들 광류(光霤)와 함께 두류산(頭流山) 구경을 가서 군자사(君子寺)에서 묵었다. 이 절의 사적(事蹟)을 적은 현판이 걸려 있기에 이를 줄여서 적는다.

 

천령의 남쪽 50리쯤에 지리산이 있고, 지리산의 동쪽 기슭 아래 큰 시냇가에 군자사가 있다. 진 대건(태건) 11년(579 무술(578) 신라 진평왕(579~632 재위) 이 잠저 시절 왕위를 피하여 여기에 살다가 태자를 낳고서 서울로 돌아갔다. 드디어 그 집을 희사하여 절로 만들고 이것으로 이름 지었다. 그 뒤로 여러 번 병화를 만나 흥폐를 거듭하였다.(天嶺之南五十許里。有智異山。智異之東麓下大溪邊。有君子寺。陳大建十一年戊戌。新羅眞平王潛邸。避位居此。因生太子而還國。遂捨家爲寺。以是名焉。自爾厥后。荐遭兵燹。或興或廢。) 동사(東史)를 상고하건대, 진평왕(眞平王)은 후사가 없는데 지금 '이곳에서 태자를 낳고 인하여 군자사라고 명명하였다.' 하였으니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 청장관전서 69권에 나오는 이덕무의 글은 사근역 찰방으로 있을 때에 군자사에 와서 사적기 현판의 내용을 옮긴 것이다. 현판 사적기 말미에 '강희 23년(갑자, 1684)에 방장산 승려 형곡 복환이 쓰다.'라는 기록이 있다.

 

바. 기타

 

군자사에 대한 기록은 1472년 김종직, 1571년 양경우, 1586년 양대박, 1651년 오두인, 1767년 홍씨, 1780년 이동항, 1807년 남주헌과 하익범의 유람록 등에 나오는데 진평왕에 대한 내용이 없어서 참고 자료에서 제외했다..

 

 

 

우물터 I(이정표 오른쪽 축대 안에 있었다고 함)
함양군수(1601-1604) 고상안(高尙顔, 1553-1623) 태촌집(泰村集)에 나오는 미나리 밭 자리

 

함양군수(1601-1604) 고상안(高尙顔, 1553-1623) 태촌집(泰村集) : 군자사(君子寺)는 함성(含城) 치소 남쪽에 있다. 곧 두류산 서북쪽의 기슭이다. 절 아래 우물이 있고 우물 가에 미나리밭이 있다. 옛날부터 개구리가 없다. 어떤 이는 우물의 발원처에 웅황(雄黃:광물,살충제)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였다. 옳은지 여부는 모르겠다. 대체로 사물의 이치는 깨달을 수 없는 것이 많다.

 

매립된 군자사 우물 터(사각의 둘레석이 있다고 함)
군자사 추정터 I
군자사 추정터 II
승탑(부도) 지대석
승탑(부도) 지대석
승탑 옥개석

 

문재선님 댁의 확(외부 사람들에게 손이 탈 것을 염려하여 매입함)
도마사 부도터(이곳의 부도 3기를 벽송사로 옮겨갔다고 함)
출리암
도마사 절터로 추정
도마사터의 도리송
도마 마을 샘터
두리송 소나무는 인공으로 조림함(도마사 영역으로 추정함)
청주한씨세보에 한조봉(鷼鳥峰), 학조봉(鶴鳥峰) 구전으로는 황새봉
진평왕이 넘었던 대왕재

 

벽송사
경암당탑
남곡당탑
도마사에서 옮겨온 승탑
함양 벽송사 3층 석탑
석등 하대석 (간주석과 상대석, 화사석, 옥개석은 망실)
선과님의 설명으로는 폐사지(군자사?)에서 옮겨온 것으로 추정함.

 

통일신라 작품을 계승한 고려전기 석탑으로 추정 벽송사 창건시기와 맞지 않는다고 함. 선과님의 설명으로는 인근 폐사지(군자사?)에서 옮겨온 것으로 추정함.

 

 

용유담
신농산삼약초원(
신농산삼약초원
석불 하대석 (석불 좌상의 하대석으로 추정되며, 중대석과 상대석은 망실)
소나무 근처에 석불 하대석이 있었다고 함.
마적사 터
군수엄후형휴영세불망비

 

郡守嚴侯亨休永世不忘碑(군수엄후형휴영세불망비) 癸卯 十月 日 休川面(계묘 십월 일 휴천면):1963년 10월에 새김.

14대 함양군수 엄형휴(嚴亨休) 취임:63.02.04 이임:64.09.30,기간:1년8월 출생지:고성군, 함양군수 재임 중에 새김.

 

 

용담입문
세진대(유가대, 유환대)
풍수로 보면 창암산은 북두칠성을 상징하는 칠봉이 에워싸고 있는 칠성동을 지키는 수문장이다.

 

※ 저의 주관적인 생각입니다. 오류가 있으면 지적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