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实踐人文

진평왕 태자의 태실지와 군자사 이야기(201212)

도솔산인 2020. 12. 13. 19:57

진평왕 태자의 태실지와 군자사 이야기(201212)

 

 

▣ 일 시 : 2020년 12월 12일

▣ 코 스 : 진평왕 태자 태실지-금대사-안국사-애향공원-군자사터-도마사터-금계마을-오도재-송대

▣ 인 원 : 5명(문 회장님, 산학동자님, 송연목님, 허사장님)

▣ 날 씨 : 맑음

 

 

함양 서복연구회 문호성 회장님은 1994년 마천면지(馬川面誌) 발간을 주관하였고 향토사 연구에 관심이 많은 분이다. 당시 곽성근(현 중소벤처기업 진흥공단 상임감사) 님과 함께 마천면지를 편찬하기 위해 7년 동안 자료 조사를 하면서 진평왕 태자 태실지(추정) 마애 석각 명문을 확인하였다고 한다. 당시 지리산 유람록이 국역되기 전이라 고증할 수 있는 문헌의 자료가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오전에 마천에서 곽성근 이사를 잠시 만나 인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태실지 석각 명문을 줄줄 외우고 있었다. 최근 발굴되는 자료들은 당시 현장 답사가 있었던 곳이다. 나는 이곳 답사가 겨우 다섯 번째이니 아는 것이 별로 없다. 그래서 지난주(201205) 김수태(92세) 어르신을 뵙고 태실지에 관한 구전을 채록하였다. 

 

두 시간 가까운 대화를 나누면서 어른의 말씀을 경청했다. 김수태 어르신은 1929년생(현 92세) 본관은 김해 아호는 문성당(文星堂). 명(名)은 수태(守泰) 당호(堂號)는 일자문성당(一字文星堂)이다. 어르신은 탁영 김일손 선생의 후손으로, 선대에 경북 청도에서 남원으로, 12대조께서 인월로 이거(移居)하였고, 7대조께서 마천 당흥 부락에 정착하였다. 조부께서는 한말 과거에 급제하여 사헌부 감찰을 지내셨다. 어르신의 장자 김○신(54년생)씨는 약관에 행정고시에 합격하여 건설교통부에서 정년을 하셨다. 손자는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얼마 전에 대령으로 진급했다고 한다. 일자문성당의 당호에 맞게 벼슬이 끊어지지 않는 집안이다. 어른께서는 서당에서 천자문과 소학을 읽으시고 함양 향교에서 사서삼경을 공부하셨다고 한다.

 

신라 진평왕 태자 태실지에 대해서 말씀하신 내용이다. 당흥 마을 진평왕 태자 태봉이 있다. 태봉은 구전으로 전한다. 동으로는 금대암이 있고 서쪽으로는 안국사가 있는데 그 길목에 있다. 이 길이 절에서 절로 다니는 옛길이다. 옛날에는 태봉 인근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봄이 되면 마을 사람들이 임천 강변에서 모여서 화전놀이를 했다. 남자들은 임천에서 천렵도 하고, 여자들은 음식을 준비하여 마을 잔치를 열었다. 그런데 술을 마시고 주민들끼리 싸워 사람이 죽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런 일이 해마다 거듭되자 마을 어른들이 회의를 하여 마을을 아랫동네로 옮기게 되었다. 터의 기운이 강해서 마을 주민들의 성정이 포악해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언제인지는 확실하지 않고 선대로부터 전해오는 이야기라고 하셨다. 금대산(金坮山)의 다른 이름은 금태산(金台山)으로 금성(金星)을 상징한다. 또 다른 이름은 금마대(金馬坮)로 방장제일문 명문 시에도 나타나 있다. 금마는 왕이 타는 말이다. 금마라는 지명은 전북 익산에도 있는데 백제 왕궁터 인근에 있다. 내 추측으로는 마을이 옮기는 시점에 향계(鄕契)에서 금표를 새긴 듯하다. 당벌(堂伐)이라는 지명에서 당은 사당을 뜻한다. 당터의 위치는 아는데 내용은 잘 모르겠다.

 

注 화전(花煎) 놀이 : 매년 음력 3월 중순경에 교외나 야산 등지에서 진달래 꽃을 부치거나 떡에 넣어 먹는 등 여럿이 함께 즐기는 민속놀이. 세시풍속.

 

태봉의 추정 위치에는 현재 진주 강씨 묘가 있다. 진주 강씨는 이 지역에서 명망이 높은 가문이다. 노강정하양박(盧姜鄭河梁朴)에서도 으뜸이다. 묘를 쓴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조선이 무너진 한말이나 일제 강점기일 가능성이 크다. 무덤을 쓸 때 땅을 파니 처음에는 물이 나오고 더 깊이 파니 부처가 나왔다고 한다. 부처는 진주 강씨 집안에서 가지고 갔다. 이 이야기는 선대로부터 전해지는 이야기이다. 석각 명문이 있는 곳에 대숲이 우거지고 이끼가 끼어 어르신이 이끼를 제거하고 능소화를 심고 가꾸셨다고 한다. 마을을 이전할 당시 당흥 부락 동계(洞契)에서 금표(禁標)로 석각을 새긴 것으로 추정한다. 금대사 아래 하금대가 있는데 절터라는 말씀도 하셨다. 금대암이 상금대이다. 하금대에 어렸을 때 소 풀 뜯기러 그곳에 자주 갔다. 그곳에 불두(佛頭) 한쪽이 깨진 석불이 있었다. 맷돌도 있었다. 서산대사가 이곳에 머물렀다고 전한다. 그 석불은 오래전에 없어졌다고 한다.

 

진평왕(567~632)은 신라 제26대 임금으로 진흥왕(540~576)의 태자 동륜(銅輪)의 아들이고 진흥왕의 장손 자이다. 576년 진흥왕이 서거하자 차자(次子) 진지왕이 즉위한다. 동륜(銅輪) 태자의 아들인 진평왕은 경주를 떠나 함양 마천 영정사로 피신한다. 이때 진평왕의 나이가 10살이다. 579년 진지왕이 폐위되고 화백회의를 비롯한 조정의 추대로 왕위에 오른다. 진평왕이 이곳에서 왕자를 낳아서 579년 잠저시 별궁을 군자사(君子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다고 한다. 진평왕의 왕자 출생과 군자사, 태실지의 석각 명문이 연결고리이다. 당흥 부락 김수태 어르신은 진평왕의 태자 태봉으로 말하고 있다. 오래전 태실지 부근에 마을이 있었던 것은 일자문성이 보이는 높은 곳에 마을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 진지왕(眞智王,?~579) 신라의 제25대 왕. 진흥왕의 둘째 아들. 성은 김(金)이며, 이름은 사륜(舍輪) 또는 금륜(金輪)이다. 태자인 동륜(銅輪)이 572년(진흥왕 33)에 죽었기 때문에 태자의 아들이 있었지만 거칠부의 세력에 힘입어 왕위에 올랐다. <삼국유사>에는 정란과 황음으로 인해 폐위되었다고 전한다. 재위 기간은 576년~579년이다. 579년 죽어 시호를 진지(眞智)라고 하고 영경사 북쪽에 장사 지냈다.

 

지난주에 이어서 군자사 터를 다시 찾았다. 2년 전 대나무를 벨 당시 대형 부도 2기가 노출되어 있었다고 하니 혹시 하고 일말의 기대를 하였다. 부도의 지대석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집주인(김○근 님)이 들어갈 수 없다고 막았다. 우리를 골동품상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외부 사람들이 다녀가면 담장에 있던 석조부재가 하나씩 없어지곤 했다고 하니 거부 반응을 일으킬 만도 하다. 오래전에 주민들 모르게 승탑 2기가 반출되었다고 한다. 주민들 말로는 서암정사로 옮겼다고 하는데 확인이 필요하다. 남은 부도 2기는 대밭에 파묻었다고 하였다. 장독대 아래에 탑의 부재가 있다고도 했다. 외부로 반출을 막기 위한 궁여지책인 셈이다. 김○근(54년생) 선생의 설명으로는 자기 집 인근이 다비식을 하던 터라고 했다. 선과님 云 '사찰의 다비장은 그 절에서 가장 음기가 강한 곳이다. 이런 곳에는 해탈의 경지에 오른 스님의 부도를 세운다고 한다. 일례로 해인사 성철스님 부도가 그런 장소이다. 군자사도 다비장과 부도전이그렇게 조성된 것 같다. 음기를 누르기 위한 일종의 풍수비보책이다.'라는 의견을 주셨다. 군자 마을을 감싸고 있는 왼쪽 청룡 줄기를 잘라서 집집마다 정신질환자가 나온다. 뱀 봉과 개구리 봉, 황새 봉이 있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도마사로 가는 도로가 뱀의 허리를 끊어 마을에 피해가 있다는 것이다. 당산나무도 있었으나 새마을 운동으로 사라졌다. 예전에 몇 아름이 되는 미루나무가 여러 그루 있어 강바람을 막아줘서 마을에 들어오면 안온했다고 한다.

 

내가 말하기를, 군자 마을에 다섯 개의 샘이 있었다. 옛 문헌에 나오는 영정(靈井)이다. 이름 그대로 신령스러운 샘이다. 상수도가 들어오면서 마을의 샘을 매립하여 물이 빠져나가지 못한다. 마치 집이 배처럼 물 위에 떠있는 형국이다. '군자사 샘터 아래 미나리 밭에는 개구리가 살지 않는다.'라는 기록으로 미루어 샘물이 차갑고 수량이 많아 개구리가 알을 낳지 않을 정도인데 그 물길을 막은 것이다. 사람이 배설을 못하면 어떻게 되겠나. 머리가 뜨거워지고 미치지 않겠는가. 자연의 순환을 사람이 막은 것이다. 김재근 님은 내 이야기에 금방 공감을 했고 전화번호를 받았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는 말이 있듯, 고향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아버님 생전에는 군청에서 승탑 관리비로 얼마의 돈이 나왔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서 부모님 두 분이 다 돌아가셨고, 외지에 나가 있는 아들이 부도를 지킬 사람이 없자 땅에 묻은 것이다. 군자사 앞 지명이 장승백이라는 설명도 하였다. 인사를 하고 나오는데 정 맞은 돌이 여기저기 보이기 시작했다.

 

 

경암당(鏡巖堂)
남곡당(南谷堂)

 

몇 년 전 상류암 터를 찾기 위해 1610년 박여량의 두류산일록 원문을 읽어 내려갔다. 박여량이 군자사에서 1박을 하였는데, 감수재의 기록은 너무나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군자사에서 '박명부가 술이 너무 취해 기생의 치마 속에 손도 넣지 못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감수재의 시각에서 일행들의 상식에 벗어나는 행동에 촌철살인을 가한 것이다. 군자사의 기록은 10여 편의 유람록에 나오는데, 지리산을 유람하는 관리와 유생들의 숙소 역할을 하였다. 조일전쟁(임진왜란)이 끝난 후인데도 관리와 사족들의 적폐가 극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쉽게 설명하면 신성한 사찰에서 기생파티를 한 것이다. 빈대 때문에 폐사된 절이 많은데 빈대가 곧 지배계급인 것이다. '빈대 붙는다.'는 노력 없이 소득을 얻는다. 기생하다. 등의 의미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빈대 붙는다.'라는 어원도 아마 이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도마사에서 옮겨온 부도(벽송사)

 

도마마을은 청주한씨 집성촌이다. 삼불사에서 시작하는 골짜기의 이름은 정승골이다. 지명의 유래에 대해서 조사가 더 필요하다. 삼불사라는 이름은 암자 위의 3봉과 연관이 있는 것 같다. 출리사에 들렀는데 스님이 출타를 하시고 부재중이다. 충격적인 이야기는 어떤 분(?)이 도마마을에 있던 부도 3기를 20년 전에 1기당 30만 원씩 받고 팔아먹었다고 한다. 어떤 경로인지는 몰라도 그 승탑은 현재 벽송사에 있다. 우리는 금계마을로 이동하여 탄수 공의 집터에서 칠성동을 넔을 놓고 바라보았다. 좌우로 벽송 능선의 710.8봉과 창암산이 수문장 역할을 한다. 영룡봉과 영랑대, 중봉과 상봉, 제석봉의 5봉이 한눈에 들어온다. 산천재에서 천왕봉을 바라보는 느낌이다. 그렇다면 정녕(丁寧) 북두(北斗)가 조림(照臨)하여 칠봉이 되었는가. 풍수연구가 양상화(楊相化, 1931~2019) 선생이 이르기를 '천수상(天垂象) 지재상(地載象)이라.'라고 하였으니 '하늘에 있는 형상을 땅에 그대로 옮겨놓은 것'으로 이해하였다. 오도재 지리산 제일문 산신각으로 이동하여 오도산 신령님께 예를 드렸다. 1764년부터 오도재를 지키고 있는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 임한굉 공(折衝將軍僉知中樞府使任公漢宏)을 만난 후 내일의 답사를 위해 송대마을로 향했다. 끝.

 

 

※ 답사 요약

 

① 진평왕(567~632)은 신라 제26대 임금으로 진흥왕(540~576)의 태자 동륜(銅輪)의 아들이고 진흥왕의 장손 자이다. 576년 진흥왕이 서거하자 차자(次子) 진지왕(576~579)이 즉위한다. 동륜(銅輪) 태자의 아들인 진평왕은 함양 마천 군자사로 피신한다. 이때 진평왕의 나이가 10살이다. 579년 진지왕이 폐위되자 화백회의와 조정의 추대로 왕위에 오른다. 진평왕이 이곳에서 왕자를 낳아서 579년 잠저시 별궁(영정사)을 군자사(君子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다.

 

군자사는 1807년 남주헌과 하익범의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에 마지막으로 나타난다. 1888년 정환주가 간행한 천령지 사찰 편에 군자사가 '지금은 없다(今無)'라는 기록으로 미루어 1807년~1888년 사이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한다. 폐사의 시기가 진주 민란과 관계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지리산 골짜기로 숨어들었다. 지산대를 석각한 사람들도 진양정씨이다. 

 

③ 군자사의 승탑 2기와 도마사의 승탑 3기(율봉당외 2기)는 반출되어  현재 일부가 벽송사에 있다고 한다. 벽송사에 있는 3층석탑과 석등 하대석도 인근 폐사지에서 옮겨온 것이다. 삼층석탑은 통일신라 말기에서 고려초의 양식으로 벽송사 창건연대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삼층석탑의 출처도 인근 폐사지의 가능성이 매우 높다.

 

④ 진평왕의 태실지를 다섯 번의 답사로 결론을 낼 수는 없다. 나는 근세에 새겨진 마애석각 명문과 구전으로 태실지에 접근하였다. 옛사람들이 금대산의 금마와 칠선봉 능선의 일자문성을 보고 이곳을 군왕지지로 생각해던 것은 아닐까. 정사에 전혀 기록이 없는 진평왕의 태자는 가공인물일 수도 있다. 우리는 석각 명문에 나와 있듯 옛날이야기(古諺傳)로 받아들이면 그만이다. 

 

 

 

▶ 참고자료 : 군자사와 도마사 관련 옛 문헌의 기록

 

1. 군자사 관련 진평왕의 기록

 

가. 1530년 신 증 동국여지승람 제31권 경상도(慶尙道)

 

군자사(君子寺) 지리산에 있다. 전설에, “신라 진평왕(眞平王)이 왕위를 피해서 여기에 살다가, 태자를 낳아서 나라에 돌아가고, 집은 희사하여 절로 만들었다.” 한다.

 

나. 함양군수(1601-1604) 고상안(高尙顔, 1553-1623) 태촌 집(泰村集)

 

군자사(君子寺)는 함성(含城) 치소 남쪽에 있다. 곧 두류산 서북쪽의 기슭이다. 절 아래 우물이 있고 우물 가에 미나리밭이 있다. 옛날부터 개구리가 없다. 어떤 이는 우물의 발원처에 웅황(雄黃:광물, 살충제)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였다. 옳은지 여부는 모르겠다. 대체로 사물의 이치는 깨달을 수 없는 것이 많다. 이를테면 영가(永嘉:안동) 성안에 모기가 없는 것이나 상주(尙州) 사불산(四佛山)에 칡이 없는 것과 같은 것이 그것이다. 《泰村集 제5권》 함양군수(1601-1604) 고상안(高尙顔, 1553-1623) 지음

 

※군자사는 신라 진평왕이 숙부 진지왕이 서기 576년 즉위함으로 인하여 도성을 떠나 이곳에 피신, 은거한 별궁이다. 579년 진지왕이 폐위된 뒤 도성에 돌아가 즉위하고 이곳에서 아들을 낳은 것을 기념하여 이곳에 군자사를 창건하였다. 그러나 진평왕은 딸만 성장하여 선덕여왕이 되었다.

 

다. 1656년 정수민(鄭秀民)이 사찬한 天嶺誌

 

지리산에 있다. 세속에 전하는 말에 '신라 진평왕이 지위를 피하여 이곳에 살다가 태자를 낳아 국도로 돌아간 뒤 집을 희사하여 절을 만들었다고 한다. 지금은 없다. (在智異山。俗傳新羅眞平王。避位居此。生太子還國。捨家爲寺。○有兪好仁詩 ○今無)

 

注 1888년 후손 정환주(鄭煥周)가 간행함. 注 폐사 시기는 1888년 이전으로 보임.

 

라. 연대 미상의 마천 당흥 부락 마애석각 명문

 

옛날이야기에 전하기를 '신라 진평왕이 이산에 들어왔을 때에 봉지(封地)를 허락한 다음에 이곳을 차지하여 그 후 주민들이 모두 땅에 대하여 감히 입을 열지 못하였다.'라고 한다.(古諺傳眞平王入此山時聽封次占此而其后居人皆以噤地云)

 

注 噤 : 不敢開口的樣子 噤 寒而閉口 口閉 地 語助詞

 

마. 삼송(三松) 임응택(林應澤, 1879~1951) 선생의 와유강산에 나오는 도마사.

 

도마사(都馬寺)에 관한 기록은 마천 의중마을에 살았던 삼송(三松) 임응택(林應澤, 1879~1951) 선생의 와유강산이 유일하다. '운학정을 잠깐 지나 도마사와 군자사의 옛터를 찾아드니 세월이 흘러 매우 오래된 옛 절터가 속가의 마을이 되었다. '亭子(雲鶴亭)를 暫間지나 都馬寺와 君子寺에 옛터를 찾아드니, 年久歲深 古寺터가 俗家成村 되었으니...'라는 내용이다.

 

2. 선인들의 유람록 군자사 관련 진평왕의 기록

 

가. 1610년 박여량의 두류산일록

 

군자사는 옛 이름이 영정사(靈淨寺)이다. 신라 진평왕이 즉위하기 전에 어지러운 조정을 피해 이 절에 와 거처하였다. 그때 아들을 낳게 되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고 한다. 안국사(安國寺)도 이때에 그 이름을 얻은 듯하다. 전란을 겪은 뒤에 중창한 것은 법당∙선당(禪堂)∙남쪽 누각뿐이다.(君子者。古之靈凈寺也。新羅眞平王避亂居此寺生子。因改以今名。其曰安國寺者。亦因其時而得此稱歟。戰兵火之後。所重刱者。法堂禪堂南樓而已。)

 

나.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

 

저물녘에 군자사(君子寺)로 들어가 잤다. 이 절은 들판에 있는 사찰이어서 흙먼지가 마루에 가득하였고 선방(禪房) 앞에 모란꽃이 한창 탐스럽게 피어 있어 구경할 만하였다. 절 앞에 옛날 영정(靈井)이 있어 영정사(靈井寺)라 불렀다. 지금은 이름을 바꿔 군자사라고 하는데, 가져온 뜻이 무엇인지 모르겠다.(暮投君子寺. 寺野刹也. 埃氛滿堂. 獨牧丹對禪房方敷榮. 可賞. 寺前舊有靈井. 號靈井寺. 今改以君子. 未知取何義也.)

 

다. 1643년 박장원의 유두류산기

 

○ 8월 22일, 저녁때 군자사에 이르렀다. 이 절의 본래 이름은 영정사(靈井寺)였는데 진평왕이 이곳에서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고 한다. 절의 법당과 건물들이 모두 웅장하고 화려하였다. 절의 서쪽 구석에 화려한 단청 칠을 한 새로 지은 별전이 있는데 삼영당(三影堂)이라고 했다. 삼영당 안에는 청허(淸虛), 사명(四溟), 청매(靑梅) 세 대사의 초상화가 있었다.

 

라. 1680년 송광연의 두류록

 

○ 8월 26일, 다시 20리를 가서 군자사에 이르렀다. 함양군수 윤천(尹○)이 두 명의 악공 및 안주와 술을 보내왔다. 절 앞에는 옛날 영정(靈井 : 신령스러운 우물) 영정사(靈井寺)라 불렀는데 뒤에 군자사로 개칭하였다. 무엇을 근거해서 군자사로 이름을 바꾸었는지는 모르겠다.

 

마. 1783년 이덕무 청장관전서 군자사 사적(君子寺事蹟)

 

계묘년(1783) 6월 23일에 나는 아들 광류(光霤)와 함께 두류산(頭流山) 구경을 가서 군자사(君子寺)에서 묵었다. 이 절의 사적(事蹟)을 적은 현판이 걸려 있기에 이를 줄여서 적는다.

 

천령의 남쪽 50리쯤에 지리산이 있고, 지리산의 동쪽 기슭 아래 큰 시냇가에 군자사가 있다. 진 대건(태건) 11년(579 무술(578) 신라 진평왕(579~632 재위) 이 잠저 시절 왕위를 피하여 여기에 살다가 태자를 낳고서 서울로 돌아갔다. 드디어 그 집을 희사하여 절로 만들고 이것으로 이름 지었다. 그 뒤로 여러 번 병화를 만나 흥폐를 거듭하였다.(天嶺之南五十許里。有智異山。智異之東麓下大溪邊。有君子寺。陳大建十一年戊戌。新羅眞平王潛邸。避位居此。因生太子而還國。遂捨家爲寺。以是名焉。自爾厥后。荐遭兵燹。或興或廢。) 동사(東史)를 상고하건대, 진평왕(眞平王)은 후사가 없는데 지금 '이곳에서 태자를 낳고 인하여 군자사라고 명명하였다.' 하였으니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 청장관전서 69권에 나오는 이덕무의 글은 사근역 찰방으로 있을 때에 군자사에 와서 사적기 현판의 내용을 옮긴 것이다. 현판 사적기 말미에 '강희 23년(갑자, 1684)에 방장산 승려 형곡 복환이 쓰다.'라는 기록이 있다.

 

바. 기타

 

군자사에 대한 기록은 1472년 김종직, 1571년 양경우, 1586년 양대박, 1651년 오두인, 1767년 홍씨, 1780년 이동항, 1807년 남주헌과 하익범의 유람록 등에 나오는데 진평왕에 대한 내용이 없어서 참고 자료에서 제외했다..

 

 

태실지 앞 고사리 밭에서 바라본 일자문성 주능선
일자문성(一字文星)

 

☞ 일자문성(一字文星, StartFragment) : 풍수학 용어로 높고 낮은 봉우리가 없이 한일자 모양으로 생긴 산을 말한다. 일자문성은 부와 귀를 뜻한다. 대통령, 국회의원등, 일자문형의 안산을 두고 있으면 "나무꾼도 벼슬을 한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나라에 귀하게 쓰일 인재를 배출하는 형세이다. 일자문성은 부와 귀를 나타내며 앞뒤 어느 방향에서 보아도 일자라면 정말 귀하게 여긴다. 일자문성은 군왕의 산이라. 요즘으로 치면 대통령도 나올 수 있는 산 형태이다.

 

 

오른쪽 삼봉 아래 삼불사가 있음(별자리와 관련이 있을 수 있다.)
진평왕 태자 태실지 금표 추정 석각
古諺傳眞平王入此山時聽封次占此而其后居人皆以噤地云

 

古諺傳 眞平王入此山時 封次占此 而其后居人 皆以噤地云

 

옛날이야기에 전하기를 “신라 진평왕이 이 산에 들어올 적에 언덕에 올라 머물다가 이곳을 점유하여 그 후 주민들이 모두 이 땅에 대하여 감히 입을 열지 못하였다.”라고 한다.

 

注 噤 : 不敢開口的樣子 噤 寒而閉口 口閉 地 語助詞

 

 

금대암
안국사
안국사
왼쪽 영원봉 영원령 삼정산 확인이 필요함
애향공원
마천 애향공원 마천고을 표지석 조형물
축시
벽송한인(碧松閒人) 배원응 서(裵元應 書)

 

마천 애향 공원은 1996년 마천애향회(당시 회장 문호성)가 주축이 되어 공원을 조성하고 마천고을 표지석 조형물를 세웠다. 석조 조형물 속에는 1994년 편찬한 마천면지를 넣었다고 한다. 마천면의 역사가 들어있는 타임 캡슐인 셈이다.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공원을 조성하자, 3년 후에 1999년 함양군에서 석장승을 세웠다. 이곳에는 마천면에 흩어져 있는 비석을 모아서 세워 놓았다. 이곳에 가면 마천면의 역사가 있다.

 

 

부연소
의병장석상용선생전적비
영정(靈井)
군자사 우물 아래 미나리꽝 자리
화장실(아래 돼지우리)
우물터
군자사터에서 바라본 천왕봉
군자사 다비식 터라고 함
부도 옥개석
출리사
도마마을 우물터
蛇頭峰(뱀머리봉)과 蛙峰(개구리봉)
황새봉
탄수이종식선생 금계동 창시기념비
북두추성조림 칠성동(영룡봉, 하봉, 중봉, 상봉, 제석봉 창암산)
지리산제일문

 

지리산 제일문은 2006년 11월에 완공되었다. 당시 함양 군의회 의장 문호성 의원이 추진하여 25억의 예산을 들여 함양군에서 건설한 것이다. 군의회 문호성 의원이 함양군수에게 질의하는 과정에서 '호남에는 호남제일문이 있다. 마천면 금계마을에 방장제일문 석각이 있다. 함양군은 예로부터 지리산의 관문이다. 함양군에서는 방장제일문을 세울 의향이 없는가?'라는 문호성 의원(현 서복회 회장)의 제안으로 지리산제일문과 오도재 공원이 건립되었다고 한다.

 

 

오도산영신지위(悟道山靈之位)
벅수 : 마을 어귀나 다리 또는 길가에 수호신으로 세운 사람 모양의 형상
절충장군첨지중추부사임공한굉지묘(折衝將軍僉知中樞府使任公漢宏之墓)
건륭29년갑신팔월○日建[乾隆二十九年(1764년)甲申八月○日建]
지세가 여근의 형상이라 하네
이글을 보니 생각나는 사람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