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实踐人文

제석당 마애석각 명문에 나오는 박노익(朴魯翊)

도솔산인 2021. 1. 1. 18:34

제석당 마애석각 명문에 나오는 박노익(朴魯翊)

 

 

  1921년 함양 군수 민인호(閔麟鎬 1884~1950)는 산청 출신이다. 동경제국대학을 나와 일제 강점기에 탁지부 주부를 거처 함양군수(1919.10~1923.3)를 지냈으며, 1921년 함양명승고적보존회를 조직하여 지리산을 널리 알리는 데 힘썼다. 그 일환으로 1922년 4월 16일~20일(음)까지 고적조사원 권도용(1877~1959), 토목 기수보 大谷定浩(오오타니 사다히로), 고용인 2명, 벽송사 승려 김선응, 이종인, 마천면장 김병호 및 삯꾼 2인을 포함 모두 10명이 벽송사를 출발하여 천왕봉을 유람하였다.

  유람의 목적은 함양 군수가 주도하는 함양명승고적보존회에서 마암에 마암당(이진우와 벽송사승 일동), 제석봉에 제석당(박노익과 영원사 승 일동), 천왕봉에 망해정(진주 부호 강위수)을 건축하기 위한 사전 조사로 보인다. 답사 후에 민인호는 선인들의 지리산 유산기와 시를 수집하여 1922년 7월 '《지리산지(智異山誌)》'를 편찬하였으며, 자신의 글 '「지리산탐승안내」'를 그 부록에 실었다. 함양명승고적보존회 활동 내용은 1923년 개벽 34호에 실려있다. 함께 고적조사원으로 참여한 추범(秋帆) 권도용(權道溶, 1877~1959)은 「방장산부」를 남겼다.

  이때 박노익(朴魯翊, 1875~?)과 이진우(李璡雨, 1897~1954)는 동행하지 않았고, 3대 마천면장 김병호와 벽송사 승려(김선응, 이종인) 두 사람이 동행했다. 추범 권도용(1877~1959)은 면우 곽종석의 제자로 함양을 대표하는 당시 유림의 실력자였다. 방장문과 덕암 석각을 조사하면서 은계(隱溪) 이진우(李璡雨, 1897~1954)의 선대와 후손을 파악했으나, 박노익(朴魯翊)은 어떤 인물인지 밝혀내지 못했다.

 

  면암 최익현 선생은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1906년 전라북도 태인에서 제자 임병찬(林炳瓚, 1851~1916)과 창의를 한다. 그 준비 과정에서 병오년(1906) 윤4월 10일 113명에 달하는 지사들의 연명부인 동맹록(同盟錄)을 작성한다. 박노익(朴魯翊) 선생이 면암집 동맹록에 이름이 올라있다. 박노익(朴魯翊, 1875~?) 선생은 한말과 일제 강점기에 마천면 창원 마을에 살았던 인물이다. 본관은 밀양, 字는 성순(性舜), 號는 춘파(春坡), 벼슬은 참봉(參奉) 乙亥(1875년)생이다. 1906년 면암 최익현 선생의 창의에 참여하였고, 한일 강제 합병의 시점에 2대 마천면장을 지낸 인물이다. 면장의 임기를 마치고 1922년 함양군수 민인호가 주관하는 함양고적보존회 사업에 참여하여 영원사 승려들과 제석봉에 제석당 건물을 지었다. 제석당의 바위에 그의 마애 석각 명문이 남아 있다. 끝.

 

※ 일각에서 박노익(朴魯翊)을 영원사 僧(승)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及(급)은 접속사로 and의 의미이다. '박노익과 영원사 승 일동은 제석당을, 이진우와 벽송사 승 일동이 마암당을 지었다.'라는 내용이다.

 

 

가. 閔麟鎬의 《智異山誌》 부록 「智異山探勝案內」(1922년)

 

姜渭秀氏는 上峯에 望海亭을 建築하고 朴魯翊及靈源寺一同은 帝釋堂建築李璡雨及碧松寺一同은 馬巖堂建築(兩處는 皆中峯)에 次第着手하야 一般人士의게 登山眺望의 便宜를 與하야 不遠間, 開山式을 擧行할 터인즉 將來 玆山에 對하야 無限의 發展希望을 成就하면 일로부터 人人마다 一種愛山癖을 培養케 할뿐 아니라 本郡에 在하야 尤히 愛鄕心이 增長될 同時에 發展狀況도 隨하야 더욱 擴大할진져.

 

나. 개벽 제 34호 지리산보(1923년 4월 1일)

 

현재 咸陽郡守 閔麟鎬씨는 空殼의 名勝古蹟이나마 보존하랴고 保勝會를 조직하고 智異山을 세계에 소개하기 위하야 智異山誌를 葺輯 중이오, 同郡有志 姜渭秀씨는 遊山하는 人의 편리를 圖키 위하야 山上에 望海亭을 건축하고, 朴魯翊 及 靈源寺僧 一同은 帝釋堂을 건축하얏스며, 李璡雨 及 碧松寺僧 一同은 馬岩堂을 건축하야 (兩處는 皆 中峯) 本年 陽春佳節에 開山式을 行하랴 한다. 此가 本山의 幸이라 할지.

 

다. 면암 최익현 선생의 동맹록

 

  190511월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될 당시 그는 72세의 노구였다. 최익현은 8도 사민(士民)에게 포고문을 발표하여 항일 투쟁을 호소하였다, 19062월에는 자신의 문하생으로 전북 태인의 종석산(宗石山) 밑에서 후학을 양성하던 임병찬(林炳瓚)을 찾아가 구체적인 거사 계획을 수립하였다. 거사 장소는 태인의 무성서원(武城書院)으로 정한 뒤, 최익현은 담양의 용추사龍湫寺로 내려가 기우만, 이항선, 장제세, 조안국등 호남의 명유지사(名儒志士) 50여 명을 소집, 이들과 회동하여 항전 방책을 논의하고 113명에 달하는 지사들의 연명부인 '동맹록(同盟錄)' 을 작성하였다.

 

[출처] 사진으로 보는 근대사 - 실패로 끝난 최익현의 거의擧義|작성자 라미

 

동맹록(은계 이진우 선생의 조부 죽포 이규현)

1922년 마암당을 짓고 1929년 마천초등학교를 설립한 은계 이진우의 조부 죽포(竹圃) 이규현(李圭玹, 1848~1935)공도 동맹록에 이름이 실려있다.

 

동맹록 국역본(둘째 줄 朴魯翊 字는 성순(性舜) 호는 춘파(春坡) 본은 밀양 벼슬은 참봉(參奉)이다.)

 

☞ 면암 최익현 선생 동맹록 : https://lyg4533.tistory.com/16488419

 

 

 

라.  박노익(朴魯翊) 관련 마애석각 명문

 

제석당(帝釋堂) 박노익건옥(朴魯翊建屋) 임술(1922년) 7월○일
제석암(帝釋巖)
감로천(甘露泉)
감로천(甘露泉)

 

1. 1922년 7월 박노익(朴魯翊)은 영원사 승려 일동과 제석당을 건옥함.

2. 박노익(朴魯翊)의 재임 기간은 정확하지 않으나 2대 마천 면장을 역임함. 1922년 3대 마천면장은 김병호

3. 1906년 작성된 면암 최익현의 동맹록에 박노익(朴魯翊)의 字는 성순(性舜) 호는 춘파(春坡) 본관은 밀양 벼슬은 참봉(參奉)

 

 

소재지 : 함양군 마천면 강청리 산 100번지

행적자 : 박노익  연대 : 일제강점기  석각시기 : 1922년

[개요] :

면암 최익현은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1906년 전라북도 태인에서 제자 임병찬(林炳瓚, 1851~1916)과 창의를 한다. 그 준비 과정에서 병오년(1906) 윤4월 10일 113명에 달하는 지사들의 연명부인 동맹록(同盟錄)을 작성한다. 박노익(朴魯翊)이 면암집 동맹록에 이름이 올라있다. 박노익(朴魯翊, 1875~?)은 한말과 일제 강점기에 마천면 창원 마을에 살았던 인물이다. 본관은 밀양, 字는 성순(性舜), 號는 춘파(春坡), 벼슬은 참봉(參奉) 乙亥(1875년)생이다. 1906년 면암 최익현의 창의에 참여하였고, 한일 강제 합병의 시점에 2대 마천면장을 지낸 인물이다. 면장의 임기를 마치고 1922년 함양군수 민인호가 주관하는 함양고적보존회 사업에 참여하여 영원사 승려들과 제석봉에 제석당 건물을 지었다. 제석당의 바위에 그의 마애 석각 명문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