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점필재길

1472년 김종직의 유두류록에 나오는 화암을 찾아서

도솔산인 2020. 10. 18. 09:38

1472년 김종직의 유두류록에 나오는 화암을 찾아서

 

▣ 일 시 : 2020년 10월 16일(금)

▣ 코 스 : 학사루-팥두재(팥치재)-화암-화장사-당두재-엄천사-화계-용유담-신농산삼약초원

▣ 인 원 : 2명(曺박사님)

날 씨 : 맑음

 

 

지난 추석 연휴에 이철우 전 함양 군수님께 화암(花巖)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들었다. 함양군 유림면 유평리에 화암(花巖) 마을이 있다는 것이다. 이 군수님은 화장사(花長寺)를 찾고 계셨는데, 혹시 자료를 찾을 수 있느냐고 물어오셨다. 내가 천령지에 나오는 화장사(花長寺)에 대한 자료를 보내드리고, 이 군수님께서 사숙재의 내 고향(吾鄕, 원제 : 送金修撰宗直作宰咸陽 二首) 시를 보내오셨다. 이 시는 김종직 선생이 함양군수로 부임할 때 사숙재가 한양에서 전송 시로 지은 것이다. 김종직이 함양군수에 임명된 것은 성종 1년(1470년) 40세 때 12월 말이니, 다음 해 1월 부임 행차 때(1471년(성종 2) 1월쯤) 지은 것으로 보인다. 오도재의 입석 조형물에는 뜬금없이 '내 고향(吾鄕)'으로만 소개되고 있다. 여하튼 화암(花巖)을 찾아서 시간 여행을 떠나보자. 

 

 

동강마을 당산나무는 점필재가 지나간 곳일 수는 있지만, 김종직의 유두류록에 나오는 화암은 아니다.

 

 

送金修撰宗直作宰咸陽 二首

 

(一)

多君乞郡阻淸班 : 가상타 그대 청반을 마다하고 군수를 바라니

好向庭闈罄一歡 : 기쁘게 어버이 계신 곳에서 즐거움을 다하리

五鼎從來知叵奈 : 오정은 종래 제물로 씀 어찌 모르오리만은  

終天永慕撫錘瘢 : 영원토록 사모하여 추반(錘瘢)을 어루만지리

 

注 淸班 : 조선 시대, 학식과 문벌이 높은 사람에게 시키던 규장각(奎章閣), 홍문관(弘文館), 선전관청(宣傳官廳) 등의 벼슬. 庭闈 : 부모. 五鼎食 : 소ㆍ돼지ㆍ양ㆍ물고기ㆍ사슴 등 다섯 종류의 육미(肉味)를 갖춘 음식. 錘瘢 : 捶瘢 또는 捶痕과 같은 말인데, 부모님이 종아리를 때린 흉터를 의미함. 돌아가신 부모님을 그리는 마음을 표현할 때 주로 사용하는 용어.

 

(二)

智異山高萬丈長 : 지리산 높이 솟아 올라 만 길이나 거대한데

山藏古郡號咸陽 : 그 산속에 묻힌 옛 고을 함양이라 부른다네

花長舊刹嚴川路 : 화장사 옛 절터 지나서 엄천으로 가는 길에

翠竹茅茨是故鄕 : 푸른대밭 띠집 있는 곳 거기가 내 고향일세

 

                         私淑齋集 卷之一 七言絶句  출처 : 천령지

 

 

천령지(天嶺誌) 사찰편에 화장사(花長寺)에 대한 기록이 있다. 화장사화장산(花長山, 유림면 화촌리 정자나무골)에 있다. 1474년 겨울 사숙재 강희맹(1424~1483)과 점필재 김종직(1431~1492)이 화장사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주고받은 화답 시가 있다. 사숙재 강희맹이 함양 태수 점필재 김종직을 초대하여 밤에 대화를 나누었다. 한양에서 함양 군수로 부임할 때 송별 만남 이후, 사숙재가 1474년 여름에 함양군 유림면 국계리에 낙향하여 점필재를 화장사에서 4년만에 다시 만난 것이다.  당시 지은 시에 이렇게 노래했다.

 

 

相邀武陵宰 : 무릉도원(武陵桃源) 수령을 초대해서

投宿梵王宮 : 법왕궁(절간)에서 하루를 묵었다네

却憶山中寺 : 문득 산속의 절간을 떠올려보니

曾聞飯後鍾 : 전에 식후 듣던 종소리 생각나네

月窓容小語 : 달빛 어린 창은 나직한 소리 포용하고

雲壑相遺蹤 : 구름 긴 골짝은 발자취를 떠올리게 하네

染指辛酸外 : 손가락으로 찍어 음식 맛을 보는 것 말고

唯餘道味濃 : 오직 넉넉한 도의 맛이 진하게 느껴지네

 

 

陪晉山君宿花長寺<점필재 화답시>

 

偸閑陪杖屨 : 한가한 틈을 내서 공을 모시고 떠나

携被宿鴦宮 : 이불을 싸가지고 와 화장사에서 묵네

虎嘯一林雪 : 호랑이는 눈 덮인 숲에서 울부짖고

僧鳴半夜鍾 : 절의 승려 한밤중에 범종을 울리네

泉淸供茗飮 : 샘물은 맑아 차 마실 물을 제공하고

松偃掃塵蹤 : 솔가지 늘어져 속인 발자취 쓸어내네

怊悵名道客 : 슬픈 것은 명도에 몸 담은 나그네가

烟霞興已濃 : 산수를 즐기는 흥취 이미 깊어진 것

 

                               <佔畢齋集 詩集 卷10> 

 

박여량 두류산일록에 방곡리에서 내려와서 유림으로 건너오는 냇물을 임천(瀶川)이라고 하였다. 현 지도에도 임천으로 나와있지만 화계 사람들은 엄천(嚴川)으로 부르고 있다. 임천(瀶川)과 엄천(嚴川)은 一川二名인 것으로 보인다. 사숙재의 '내 고향(원제 : 送金修撰宗直作宰咸陽 二首)' 시의 2연은 화장사(花長寺)에서 엄천을 따라 제계(蹄溪, 사숙재의 고향. 菊溪, 血溪라고도 함)로 가는 길로 이해가 된다. 유림면 유평리 화암(花巖) 마을은 함양에서 팥치재를 넘어 당두재로 가는 길목에 있다. 그러나 유두류록에 '엄천을 지나 화암에서 쉬었다.'라는 내용과 앞뒤가 맞지않는다.

 

○ 1472년 김종직의 유두류록 8월 14일

마침내 그들과 함께 출발하여 엄천(嚴川)을 지나 화암(花巖)에서 쉬고 있는데, 승려 법종(法宗)이 뒤따라왔다.(遂歷嚴川. 憩于花巖. 僧法宗尾至)

 

○ 1610년 박여량의 두류산일록 9월 7일(무신) 양 10월 23일(土)

방곡촌(方谷村)을 지나는데 마을의 집들은 다 대나무를 등지고 집을 지었으며 감나무로 둘러 싸여있고 인가와 접하였으나 두루 속세를 벗어난 지경과 같았다. 임천을 건너[越瀶川] 신광선(愼光先)의 정자에 도착하여 술을 서너 순배 마시고, 최함 씨의 계당으로 가서 묵기로 하였다.

 

경남 함양 유림면 '화암(花巖)' 지명 유래

화암 마을은 조선시대 강화 魯씨가 남원에서 들어와 다래 덩굴과 잡목을 치고 터를 잡아 버림바우라고 불러 왔다. 그 후 선산 김씨가 마을에 들어왔고 마을 뒷산이 바위로 형성되어 있어 멀리서 보게 되면 꽃봉오리처럼 아름답다.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어 꽃바위라고 하여 '화암(花巖)' 이라고 한자어로 표기하였다고 전한다.

출처 : blog.naver.com/kcs022/221396657860

 

 

 

※ 솔레이 이용훈 박사의 견해

 

* 김종직의 유두류록에 기록된 엄천과 화암에 대하여

 

遂歷嚴川 憩于花巖


마침내 엄천(嚴川)을 지나 화암(花巖)에서 쉬는데 '花巖'의 위치를 지정하기에 앞서 먼전 풀어야 할 것은 '遂歷嚴川'입니다. 엄천(嚴川)을 냇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지명으로 볼 것인가 입니다. 지리99의 경우, 그 단서를 '歷'이란 글자에서 찾은 듯하고, 여러 유산기를 통해 강(시내)의 경우는 '지난다'라는 의미의 '歷'을 사용하기 보다는 '건너다'라는 의미의 '渡'나 '越'를 사용하고 있음에 주목합니다. 그것을 근거로 '嚴川'은 강(시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지명이며 '嚴川'으로 추정하게 됩니다. 따라서 '花巖'은 당연히 엄천 이후 등로에 위치해야 하니, 화암을 꽃봉산이 올려다보이는 당산나무 쉼터로 지정하기에 이릅니다. 좀 억지스런면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럴듯한 추론입니다.

 

[참고1] 유두류록에는 '엄천'이 세 번 등장하는데...


(1) 1일차 : 遂歷嚴川 憩于花巖 마침내 엄천을 지나 화암에서 쉬는데
(2) 2일차 : 嚴川里人所改創 : 엄천리 사람이 고쳐 지은 것으로
(3) 4일차 : 郡人由嚴川而上者 : 엄천을 경유하여 오르는 자들은


셋 모두 '엄천'은 마을 이름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참고2] 옛날 함양군에는 5개의 면이 있었고, 그 중 남면에 마천리(馬川里), 엄천리(嚴川里), 휴지리(休知里), 열음리(列音里), 유등리(柳等里)가 있었습니다. 당시 엄천리는 화장산 아래 유평리 일원과 동강리, 운서리 일원을 포함한 듯합니다.

 

그리고 점필재 시집을 찾아보니 '엄천/엄천사'가 여러 곳에 등장하는데... 강을 의미하는 곳은 한 곳인 듯...

 

奉和晉山相公 : 진산 상공에게 받들어 화답하다.

犖确坡頭響馬蹄 : 돌 많은 언덕 길에 말발굽 소리 울리는데
嚴川鷗鷺不驚啼 : 엄천의 갈매기 백로는 놀라 울지 않누나.
欲陪杖屨尋詩興 : 장구를 모시고 시흥을 찾고 싶어라.
脩竹人家東復西 : 긴 대 우거진 인가의 동쪽과 서쪽에서

 

[출처]점필재집 [김종직 1431-1492] 시집 제1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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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화암을 찾아 길을 나섰다.(201016) 먼저 함양으로 내려가 학사루에 들렀다. 학사루를 출발하여 점필재를 따라 팥두재를 넘었다. 휴천면 면소재지와 목현마을을 지나면 바로 화암마을이다. 화암 마을은 지방도에서 약간 벗어나 있다. 화암에 도착하니 曺교수님이 먼저 와 계셨다. 마을 어른께 함양으로 넘어가는 옛길을 여쭈니 목현마을을 거치지 않고 팥두재를 넘는 옛길이 있다고 한다. 화암마을에서 판문마을 방향으로 당두재로 가는 점필재의 행렬이 머리속에 그려졌다. 점필재의 지리산 유람길 찾아가는 시간 여행의 길목에 화암 마을이 있다. 1474년 겨울에도 점필재는 화장사에서 사숙재를 만나기 위해 화암을 지나갔다. 우리는 사숙재와 점필재를 만나기 위해 화장사로 향했다.

 

※ 참고로 화암 마을회관 주소는 경남 함양군 유림면 화암길 23(유평리 521번지)이다.

 

 

점필재길 화암 경유 루트(토산 칠성님 작성)
학사루
팥두재(팥치재)
화암마을
화심정
花心亭(화심정) 왼쪽 헬스기구 있는 기구 있는 곳에 마을 공동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허신(許愼)이 說文에 이르기를 '正은 从一也. 从止也.'라고 하였다. 잘못을 한 번으로 멈추면 '바르다.'라는 뜻이다. 논어 학이편에 '잘못이 있으면 고치는 것을 꺼리지 말라.(過則勿憚改)'라는 문구와 일맥상통한다. 잘못을 인정하고 바로 고치면, 다른 사람의 신뢰를 살 수 있다. 논어에는 잘못(過)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상당히 많다. 논어 자장편에도 '소인은 잘못을 저지르면 반드시 꾸며서 얼버무리려고 한다.(小人之過也, 必文.)'라고 하였다. 사람은 살면서 누구나 잘못할 수 있다. 오류를 바로 인정하고 고친다면, 오히려 반전의 기회로 삼을 수 있다는 말로 받아들여진다. 고치는 것도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화암(花巖)도 그렇다. 

 

 

※ 저의 주관적인 생각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