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마애석각

금계 방장제일문과 탄수(灘叟)공 비결 명문(200918)

도솔산인 2020. 10. 11. 20:11

금계 방장제일문과  탄수(灘叟)공 비결 명문(200918)

 

 

▣ 일 시 : 2020년 09월 18일(금)

▣ 코 스 : 용유담-세진대-신농산삼약초원-마적사터-마당바위-탄수대-덕암

▣ 인 원 : 6명(조박사님, 강재두사장님, 呂사장님, 송담스님, 도필락님, 카리스마님)

▣ 날 씨 : 맑음

 

 

 점필재길 여덟 모랭이 길의 방장문과 탄수대의 방장제일문은 누구의 필획이고 어떤 연관이 있는가. 지난 5월부터 방장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고, 일주일 만에 제일방장문과 방장문을 다시 찾았다. 하나의 단서는 서복회 문 회장님이 보내온 '탄수(灘叟) 이종식(李鐘植, 1871~1945) 선생 비결 명문 논집'이다. 7언 8율의 비결문에 그 비밀이 들어있다. 비결문의 절반은 의병 운동 관련이다. 탄수(灘叟)공의 아버지 죽포 이규현(李圭玹, 1848~1935)공과 장형(長兄) 이종순(李鐘純 1866~1913) 공이 정미(1907년) 의병장 석상용 의진에 총과 군자금을 지원했다가 고초를 겪은 내용이다. 탄수(灘叟)공이 실상사에 주둔한 일본군을 찾아가 처형 직전 장형(長兄)을 구명하였다는 이야기이고, 나머지는 탄수공이 비결 공부를 하게 된 계기와 미래에 대한 비결의 예언이다. 그리고 방장제일문과 금계동을 명명한 사람이 탄수(灘叟)공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암흑과 같은 일제 강점기에 탄수공은 마천에서 해가 처음 뜨는 곳을 금계동(金鷄洞)이라고 이름하고 금계가 우는 광복을 기다렸을 것이다. 탄수공의 비결 명문에 오도재는 눈과 마음이 쉬는 안식처가 된다.’ ‘지리산이 팔도 사람들의 싸움터가 된다.’ ‘낙동강 낙오병들의 소굴이 된다.’라고 하였다. 더더욱 금계에 문장가가 방문할 것을 알았나니, 방장은 재난을 극복하고 문화재가 되었네라고 하였다. 금계동의 역사가 후대에 글을 쓰는 사람에 의해 발굴된다는 이야기로 받아들여진다. 탄수(灘叟)공의 비결 명문을 억지로 초벌 국역하였다. 시간이 과거와 현재, 미래가 혼재되어 있고, 문맥의 앞뒤가 잘 연결되지 않았다. 일부의 내용은 이해하지 못하였다. 탄수공의 예언이지만 탄수공이 쓴 글은 아니다. 비결문의 원문을 확인하고자 일요일 오후 의탄 의중 마을을 찾았으나, 이용대(李榕大) 어른을 뵙지 못하고 돌아왔다.

 

 

탄수 이종식 선생 금계동 창시 기념비(사진 서복회 문호성 회장님)

이종식(李鐘植, 1871~1945) 본관은 경주 호는 탄수(灘叟), 마천면 의탄리 의중 마을에서 호군가선동추(護軍嘉善同樞)지낸 이규현(李圭玹, 1848~1935) 公의 三男으로 태어남. 죽포 이규현(李圭玹, 1848~1935)공과 장형(長兄) 이종순(李鐘純 1866~1913) 공이 정미(1907년) 의병장 석상용 의진에 총과 군자금을 지원했다가, 장형(長兄) 이종순(李鐘純) 공이 붙잡혀가자, 탄수(灘叟)공이 실상사에 주둔한 일본군을 찾아가 처형 직전의 장형(長兄)을 구명함. 탄수공이 금대암에 들어가 수도를 하다 신병이 나서 죽을 고비를 넘김. 나라의 미래가 궁금하여 10년 동안 주역 공부를 했다고 함. 정감록의 비결을 믿고 금계 마을을 금계포란형 십승지라고 함. 실제로 빨치산들이 기승을 부릴 때 산속 화전민들이 금계마을로 소개되었다고 함. 금계동과 방장제일문의 이름을 짓고 미래에 대해 예견하는 탄수 비결 명문 논집을 남김.(탄수 비결문)

 

※ 卒年이 세보에는 1945년, 비석에는 1943년임.

 

 

금계동 석각(사진 서복회 문호성 회장님)

 

灘叟 李種植 先生 秘訣 名文 論集

 

 

二死一生淸貧樂 : 두 번 죽음을 넘기고 한 번 사는 삶에 청빈함이 즐겁고
晝田夜讀仙示燈 : 낮에 밭 갈고 밤에 독서를 하니 신선이 등불을 밝혀주네
曲折後習得開見 : 우여곡절 겪은 뒤에 익히면 열린 견해를 얻고
深思我宣必事知 : 심사숙고하여 나를 펼치면 필시 만사를 알 것이네

 

體剛富榮政祉忠 : 몸이 굳세고 부강하면 정치가 복되고 충성될 것이고
英才拔範萬代雄 : 영재를 발탁하여 모범 삼으면 만대의 인재가 될 것이네
我亂天命終身壽 : 천명을 어지럽힌 내가 종신토록 수를 누리니
國權回復千年恨 : 국권 회복을 바라는 마음 천년의 한이 되었네

 

人眼勇猛九虎宓 : 사람의 눈이 용맹하기가 아홉 마리의 범이 엎드린 듯 하고
能宣庸幹尊慕盡 : 능히 근간의 쓰임을 펼치니 존경과 사모함을 다 받네
敵我殺差使命知 : 적과 내가 서로 죽여야 한다는 사명을 알게 되니
天保地護萬古監 : 하늘과 땅이 보호하여 만고의 거울이 되네

 

灘叟遺言方丈門 : 탄수(灘叟)공의 유언인 방장문을
子功能移復生碑 : 자제들이 힘써 옮겨 다시 비를 세운다
金臺庵筆方丈災 : 금대암에서 쓴 방장재(方丈災)는
五道嶺連脈徵象 : 오도령에 연결된 맥의 상징일세

 

白頭連峯五道嶺 : 백두산에서 이어진 봉우리 오도령은
萬人眼息心息處 : 만인들의 눈과 마음의 안식처가 되네
方丈山愛母抱象 : 방장산은 자애로운 어머니가 끌어안은 형상이라
亂傷憶摸滿客峻 : 전란의 상처를 기억하는 산객들로 가득하네

 

智山慣豫竹浦憂 : 지리산은 으레 미리 죽포 공을 근심하여
義兵逢原戰勝筋 : 벌판에서 의병을 만나자 승전에 힘쓰라 하였네
倭侵擊義士道蹤 : 왜적이 의병을 공격하자 士道가 따르니
飢渴歎聲哭姓祖 : 주리고 마른 듯 염원하는 탄성에 온 겨레가 울부짖네

 

榮勢今沈慨歎民 : 성한 기운 이제 막히자 온 백성이 탄식하고
失國失財亡子父 : 나라와 재물을 잃으니 자식과 아비가 죽어가네
義兵銃志敵探偵 : 의병들이 총잡은 의지를 왜적들이 정탐하고
長男刑罪拒隱身 : 장남에게 형벌이 떨어지자 은신을 거부하네

 

三男代死請倭論 : 삼남이 대신 죽겠다고 왜놈에게 설득하길 청하여
刑場親面救命出 : 형장에서 몸소 만나 父兄의 구명하여 나왔네
敵從後監積骨恨 : 적이 뒤에서 감시하니 뼛속까지 한이 쌓이고
孤征修道念寺避 : 홀로 수도하고자 절간에 피할 것을 생각하였네

 

金鷄洞名官簿擢 : 금계동 이름이 관청 장부에서 삭제되고
新村全貌舊觀繁 : 신촌의 전모는 옛 모습보다 번성하였네
丁丑金鷄誕生當 : 정축년(1877) 나는 금계에서 당연히 태어났지만
古稀鷄鳴曉天譯 : 고희의 나이 닭 우는 새벽에야 금계였다 알려지리

 

金鷄避亂豫標點 : 금계가 피난처라고 미리 표점하니
一姓一步遠傳昊 : 한 성씨 한 걸음씩 널리 전해졌고
同胞戰亂自足殺 : 동포들은 전란에서 스스로 죽일 수 있다고
灘叟未來秘訣布 : 탄수 공이 앞으로의 일을 비결로 퍼트렸네

 

晨明早日霜老峯 : 동이 트면 해가 일찍 뜨는 상로봉은
陽色眺會避難處 : 양기가 빠르게 모여드는 피난처네
洞民功德追尊碑 : 동민들은 추존비를 세워 공덕을 기리고
灘叟創始金鷄洞 : 탄수 공은 이곳에 금계동을 창시하였네

 

金鷄認知文翰訪 : 금계에 문장가가 방문할 것을 알았나니
方丈災復文化財 : 방장은 재난을 극복하고 문화재가 되었네
春秋風穀山水搖 : 봄가을 곡식에 이는 바람이 산수를 흔들고
馬肥川獵享樂景 : 가을이 되면 천렵하며 좋은 경치 누리네

 

義兵枉臨親相逢 : 의병들이 왕림하자 친히 서로 만나
敵擊打同意稱寃 : 적이 동포들을 친 것을 원통하다 여겼네
竹浦援助勝戰望 : 죽포공이 원조하자 승전을 바랄 수 있었고
獨立志願謨隣暗 : 독립을 소원하여 이웃 몰래 도모하였네

 

義勝敵敗日忿奮 : 의병이 승리하고 적이 패하자 날로 분발하니
敵劍惡暴晝夜虐 : 왜적 칼날의 포악하기가 밤낮으로 잔학해졌네
竹浦三男灘叟征 : 죽포(竹浦) 공의 삼남 탄수(灘叟) 공이 가자
修道經秘訣因習 : 도를 닦고 비기를 경륜하여 인습을 끊어내었네

 

捕搏灘叟引質敵 : 탄수 공이 포박되어 끌려가 적의 인질이 되었지만
生還無證遺功除 : 살아 돌아와 증거가 없으니 남긴 공적이 사라졌네
寂寞千里曠野狹 : 고요하고 적막한 천리에 들판과 협곡은 공허한데
攝該先着那親動 : 이를 끌어와 먼저 착수하나 어찌 친히 움직였다 할까

 

千年宿夢亂災失 : 천년의 오랜 꿈을 난리와 재해로 잃어버리고
方丈山第一門忽 : 방장산의 제일문도 잊혀졌네
智異山八道人戰 : 지리산은 팔도 사람들의 전쟁터가 되고
洛東江落伍兵胴 : 낙동강 낙오병들의 소굴이 되었네

 

 

※ 초학의 국역이라 오역이 있을 터이니 바로잡아 주십시오.

 

 

탄수대 방장제일문

방장제일문은 추성(七星)이 조림하는 불로장생 선계(仙界)로 들어가는 카디널 게이트이다.

가야의 구형왕이 이곳으로 들아와 추성동에 성을 쌓은 것도 연유가 있다고 본다

추성(楸城)은 北斗七星의 추성(樞星)에서 온 지명이다.

군사적 요새와 종교적 성지가 결합된 곳이다.

고대에 서양에도 이런 곳이 많다.

 

탄수공이 그것을 읽어낸 것이다.

 

 

 

方丈第一門(방장산제일문)

 

萬古名勝方丈山 : 만고의 명승 방장산(方丈山)은

三門五戶第一門 : 삼문담과 오호강의 제일문이네

運自大發金馬坮 : 기운은 금마대에서 절로 크게 일어나니

世人仰視皆歡喜 : 세인들이 우러러보고 모두들 기뻐하네.

 

 

탄수공의 장자 이영우(1912~1951)공이 지은 시이다. 도로공사로 1971년 다시 새긴 듯하다.(아래 사진)

 

五戶紅流抱壁歸/三門潭碧仙遊磯/灵境桃源何處問/星橋坮上降靑衣 不肖子 暎雨 謹韻 靑雨/崙雨/坪雨/季雨

 

오호의 붉은 강물은 절벽을 감싸고 돌아가고/삼문의 푸른 연못은 신선이 노니는 물가로다./신선이 사는 무릉도원이 어느 곳이냐고 물으니/성교대(星橋坮) 위에 청의동자를 내려보내는구나.

 

 

탄수대

灘叟䑓(탄수대)

 

                                       李鍾植(1871~1945)

 

灘聲七里澹忘歸 : 칠리의 여울물 소리가 돌아갈 생각을 잊게 하고,
回首嚴陵舊釣磯 : 고개를 돌아보니 엄릉이 노닐던 옛적 낚시터네.
不着羊裘誰辨我 : 양 가죽 옷 입지 않았으니 어느 누가 알아볼꼬?
烟江風雨一簑衣 : 비 바람 부는 안개낀 강에서 도롱이 하나 걸친 나를.

 

注 : 칠리탄(七里灘)의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동한(東漢)의 은사(隱士)인 엄광(嚴光)이 은거하며 낚시질하던 곳으로, 절강성(浙江省) 동려현(桐廬縣) 남쪽의 여울을 말하는데, 보통 은사의 거처를 뜻한다. 칠리뢰(七里瀨) 혹은 엄릉뢰(嚴陵瀨)라고도 한다. 엄광은 광무제(光武帝)의 어릴 때 친구이다. 《後漢書 卷83 逸民列傳 嚴光》

 

 

灘叟李公杖屨之所(탄수이공장구지소)

金鷄一同謹誌(금계일동근지)

 

 

祝願文(축원문)

 

法師 姜聖通 謹詩

 

善哉故人李灘叟 : 훌륭하구나 고인이 되신 탄수 이종식 선생이여!

千秋恒遊灵灵坮 : 영원토록, 항시 신령스러운 영대에서 노니시네.

願惟生前遺遺業 : 생각컨대 생전에 선생께서 남기신 많은 일들이

今日運開大㒷発 : 오늘에야 운이 열려 크게 發興하기를 바랍니다.

 

注 : 방장제일문과 축원문은 내용상 유자의 작품은 아님. 승려가 한시를 지을 때는 운자를 안 맞추는 경향이 있음. 法師 姜聖通 : 서백일교 법사, 윤우(崙雨)공과 각별하게 지냈고, 서백일교를 믿어 후에는 김제로 이사를 갔다고 함. 

 

 

五戶紅流抱壁歸 : 오호의 붉은 강은 절벽을 감싸고 돌아가고

三門潭碧仙遊磯 : 삼문의 푸른 못은 신선이 노니는 물가로다.

灵境桃源何處問 : 선경의 무릉 도원이 어느 곳이냐고 물으니

星橋坮上降靑衣 : 성교대 위에 靑衣 童子를 내려 보내는구나.

 

不肖子 暎雨 謹韻(불초자 영우 근운)

靑雨(청우)/崙雨(윤우)/坪雨(평우)/季雨(계우)

 

 

注 · 오호(五戶)과 삼문(三門)은 道家에서 말하는 天門地戶(천문지호)를 뜻하는 가상의 공간. 天門地戶란 次元의 世界를 넘나들 수 있는 신선 세계의 門을 말한다. 천문(天門)은 하늘 문이고, 지호(地戶)는 땅의 문. 물이 들어오는 쪽을 천문(天門)이라 하고, 나가는 쪽을 지호(地戶)라 한다. 오호(五戶)는 의중 마을 앞 절벽을 휘감아 돌아나가는 지점을, 삼문(三門潭)은 우락대 앞 의탄천과 합류하는 소가 건널 수 있는 물이 잠잠한 곳을 가리킨다. · 성교대(星橋坮) : 방장제일문 앞 바위에 홈을 파서 놓은 통나무 다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임. · 靑衣 : 신선들을 모시고 있던 靑衣童子(청의 동자)

 

 

구암대(鷗巖䑓)

구암대(鷗巖䑓)의 구(鷗)는 흰 갈매기로 하얀 도포를 입은 신선을 상징하여 '신선들이 노니는 대'를 의미한다.

탄수공 장자 축원문에 '三門潭碧仙遊磯 : 삼문의 푸른 연못은 신선이 노니는 물가로다.'에 구암대의 답이 있다.

 

 

우락대(牛樂䑓)

 

주역의 중화리괘(重火離卦) 단사(彖辭)의 축빈우(畜牝牛) 즉 암소를 뜻한다. 우락대와 연관이 있는지...

소는 섶다리나 통나무 다리를 건너지 못한고 우락대 앞 삼문담으로 건넜다고 한다.

우락이 소를 타는 즐거움인지 소가 삼문담에서 유영한다는 말인지 잘 모르겠다.

 

 

금계동구(사진 유목민님)
새별들 덤바우 : 전라도 사투리로 큰 바위(한자로 德巖)
德巖(李璡雨, 李輔雨)
성혈 드론 사진
덕암의 성혈

 

 

☞ 성혈(性穴, cup-mark)은 바위의 표면을 오목하게 갈아서 만든 컵 모양 혹은 원추형의 홈이다. 민속에서는 알 구멍, 알 바위, 알 뫼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성혈은 일반적으로 선사 시대의 신앙 혹은 별자리와의 관련성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그림이나 형상을 표현한 바위그림[岩刻畵]이라고 보기도 한다. 민간에서 알 바위나 알 구멍이라 부르는 장소가 많이 남아 있는 것을 통해 근세에도 자손의 번창을 빌고자 바위에 성혈을 새기는 주술적인 행위를 지속하였음을 알 수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점필재 길 여덟 모랭이 방장문과 방장문 석각
방장문 탁본(지리산국립공원 경남사무소 제공, 200709)

의탄 마을 덕암(德巖)은 은계(隱溪) 이진우(李璡雨, 1897~1954) 공의 필획으로 보인다. 이진우 이보우 두 사람의 이름이 있기 때문이다. 구롱 길 여덟모랭이의 방장문 석각이 은계(隱溪)의 필획일 가능성은 있으나 기록이 없으니 누구의 필획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석각 시기는 이진우가 1922년 마암에 마암당을 지으면서 '馬巖'이라는 석각을 한 시점으로 추정한다. 석각을 한 주체는 이진우가 분명하지만 필획의 주인에 대한 판단은 유보한다.

 

 

방장제일문은 지리산 관문인 칠선계곡 입구에 천왕봉을 바라보는 금계동 입구에 있다. 의탄리는 지리산 둘레길 3구간이다. 탄수대의 방장제일문, 우락대, 구암대, 덕암과 성혈 등의 석각이 둘레길 바로 주변에 있지만 안내판조차 설치되어있지 않다. 지금이라도 탄수대 방장제일문에 진입로와 안내판을 설치하고, 성교대(약작 통나무 다리)를 복원한다면 의탄리 금계마을의 새로운 명소가 될 것이다.

 

죽포공 장구지소

이규현(李圭玹, 1848~1935) 공은 본관 경주, 자는 인집(仁執), 호는 죽포(竹圃), 호군가선동추(護軍嘉善同樞) 증 병조참의(兵曺參議) 방장제일문을 명명한 탄수(灘叟) 이종식(李鍾植, 1871~1945) 공이 죽포(竹圃)의 셋째 아들이고, 마암당을 지은 은계(隱溪) 이진우(李璡雨, 1897~1954) 공이 장손자이다. 이진우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1913년 卒) 할아버지인 죽포(竹圃)의 슬하에서 성장했다. 이 비석은 의중마을 지리산 둘레길에 뻘쭘하게 그냥 서있다.

 

 

의중마을에 살았던 이규현(李圭玹, 1848~1935)공과 장자 이종순(李鐘純 1866~1913) 공이 정미(1907) 의병장 석상용 의진에 총과 군자금을 지원했다는 사실은 미발굴된 이야기이다, 탄수(灘叟) 이종식(李鍾植, 1871~1945)공이 죽음을 무릅쓰고 실상사에 주둔한 일본군을 찾아가 자신이 인질로 잡히고 장형(長兄)을 구명하였다는 스토리는 미담을 넘어 너무나 극적인 이야기이다. 지금이라도 의중과 금계마을에 살았던 죽포공 문중의 독립운동 사료를 발굴하여 현장(顯章)함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인천대학교 독립운동연구소 소장 이태룡 박사의 전언에 의하면 한말 당시 전국에는 15만~20만명의 포수들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에 비유하면 예비군에 해당한다. 관청의 허락 하에 민간인이 총포를 소지하는 것이 허용된 것이다. 일본인들은 포수들이 의병진에 가담하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을 것이다. 일본에 의병운동 관련 실상사의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한다. 설사 기록이 있다고 하더라도 일반인이 일본의 자료를 열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후손이 독립운동을 입증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니 난감한 일이다.

 

죽포 이규현공의 장손자 은계(隱溪) 이진우(李璡雨, 1897~1954)공은 1922년 벽송사 승려들과 마암에 마암당을 건축하였다. 함양 명승고적 보존회(군수 민인호)에서 주관하여 천왕봉을 오르는 길목에 지리산의 탐방객들을 위한 편의 시설을 건축한 것이다.[함양군수 민인호의 지리산지와 개벽 제34호 지리산보, (192341)] 이진우 공은 마천초등학교를 설립(1933)하는데, 학교 설립기금으로 萬金(만금)을 쾌척한 향토교육가이다. 또한 6.25 동란 이후 전란 극복을 위해 천석의 재산이 바닥이 날 정도로 이웃을 위해 자신의 재산을 희사한 자선사업가이다.

 

☞ 마천초등학교를 설립하는데 학교건립기성회를 조직하고 전답 100두락을 진주 식산은행에 저당 잡혀 학교 설립비 1/3인 1만원을 내놓음. 학교 건립 기금 모금이 지지부진하자 학교 건립 후 사재를 털어 모든 빚을 청산해 줌.

 

찬바람이 쌩쌩부는 도계공원에 면민이 세운 송덕비로는 부족하다고 본다. 3대가 쌓은 나라의 독립을 위한 헌신, 무지에 대한 교육의 열망, 굶주리고 헐벗은 이웃에 대한 積善(적선)은 함양의 역사문화에 소중한 자산이 될 것으로 확신한다. 다른 지자체에서는 가공인물과 없는 전설도 억지로 끌어당겨 스토리텔링을 하고 있다. 변강쇠와 옹녀의 황당한 이야기보다 암울했던 전란의 시기에 죽포공과 탄수공, 은계공 3대가 민초들을 위해 살았던 소중한 나눔의 이야기를 지리산 둘레길 안내판에 자세하게 기록하여 세인들에게 기억하게 하는 것이 우리 세대의 소명이라고 생각한다.

 

탄수공의 생몰 연대는 경주이씨세보의 기록을 따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