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마애석각

함양군 마천면 당흥부락 진평왕의 태자 추정 태실지

도솔산인 2020. 11. 10. 06:45

함양군 마천면 당흥 부락 진평왕의 태자 추정 태실지

 

 

▣ 일   시 : 2020년 11월 7일(토)-8일(일)

▣ 장   소 : 함양군 마천면 당흥(당벌) 부락

▣ 인   원 : 8명(민병태 님, 정혜종 님, 조용섭 님, 임병기 님, 안무진 님, 서복회 문호성 회장님, 강재두 부회장님) 

▣ 코   스 : 진평왕 왕자 태실지-탄수대(방장제일문)-덕암-용유담-신농 산삼 약초원-마적 사지

▣ 준비물 : 토욜참석(2식 식량), 정혜종씨(탁본, 드론)

 

 

함양 서복연구회 문호성 회장님(느티나무산장)은 1994년 마천면지(馬川面誌) 발간을 주관하였고 향토사 연구에 관심이 많은 분이다. 당시 삼송(三松) 임응택(林應澤, 1879~1951) 선생의 와유강산(臥遊江山)을 발굴하여 마천면지(馬川面誌)에 소개한 바가 있다. 와유강산은 마천면 당흥 부락에 사는 김수태(金守泰) 어른(1929년생, 92세)이 17세 때(1945년)에 필사한 것으로 지리산의 18경을 노래한 4, 4조 가사체의 작품이다. 당시 마천면지를 발간하기 위해 자료를 조사하던 중 진평왕 왕자 태실지 석각을 확인하였다고 한다. 얼마 전에 서복회 문 회장님과 강재두 부회장님이 김수태 어르신과 석각을 확인하고 사진을 보내왔다.

 

진평왕(567~632)은 신라 제26대 임금으로 진흥왕(540~576)의 태자 동륜(銅輪)의 아들이고 진흥왕의 장손자이다. 576년 진흥왕이 서거하자 차자(次子) 진지왕이 즉위한다. 동륜(銅輪) 태자의 아들인 진평왕은 함양 마천 군자사로 피신한다. 이때 진평왕의 나이가 10살이다. 579년 진지왕이 폐위되자 화백회의를 비롯한 조정의 추대로 왕위에 오른다. 진평왕이 이곳에서 왕자를 낳아서 579년 잠저시 별궁을 군자사(君子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다고 한다. 진평왕의 왕자 출생과 군자사, 태실지의 석각 명문이 연결고리이다. 당흥 부락 김수태 어르신은 진평왕의 왕자 태실지로 말하고 있다. 오래전 태실지 부근에 마을이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사고로 죽는 일이 빈번하자 마을 전체를 아래(당흥 부락)로 옮겼다고 한다. 김수태 어르신이 태어나기 전이라고 한다.

 

☞ 진지왕(眞智王,?~579) 신라의 제25대 왕. 진흥왕의 둘째 아들. 성은 김(金)이며, 이름은 사륜(舍輪) 또는 금륜(金輪)이다. 태자인 동륜(銅輪)이 572년(진흥왕 33)에 죽었기 때문에 태자의 아들이 있었지만 거칠부의 세력에 힘입어 왕위에 올랐다. <삼국유사>에는 정란과 황음으로 인해 폐위되었다고 전한다. 재위 기간은 576년~579년이다. 579년 죽어 시호를 진지(眞智)라고 하고 영경사 북쪽에 장사 지냈다.

 

절집에 문외한이 사적에 대해 논할 수 있을까. 사전에 자료를 검색하고 조금 읽어본 것이 전부이다. 먼저 지리산 역사문화 조사단 민병태 님, 氣를 공부하는 친구 안무진, 대구에 계신 불구(佛具)와 승탑 연구가 선과 임병기 님께 도움을 요청하여 답사 전날 저녁에 숙소에서 만났다. 불교에 조예가 깊은 남원의 지리산 마실 조용섭 님도 합류하였다. 각 분야에서 한 소식(消息)을 하는 재야 고수들이 지리산 백무동에 모여 조촐한 전야를 보냈다. 마애 석각 명문 판독은 내 몫이나 문리가 트이지 않아 항시 두려움을 느낀다.

 

 

 

일요일 아침 마천면사무소에 주차를 하고 당흥 부락 김수태((金守泰, 92세) 어르신을 찾아뵈었다. 어르신은 17세 때(1945년)에 삼송 선생의 와유강산(臥遊江山) 필사한 분이다. 몇 년 전 군청(郡庁)에서 자료를 가지고 갔지만 내용을 판독할 사람이 없어 책으로 내지 못했다고 한다. 어르신께 와유강산(臥遊江山)의 탈초 작업을 하고 있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75년 세월의 때가 묻은 필사본을 내게 선뜻 내주셨으나, 원본은 받을 수 없다고 사양하였다. 어르신은 와유강산(臥遊江山)을 전해 줄 사람을 기다리고 계셨던 것 같다. 이 댁의 당호는 一字文星堂이다. 지리산 영신봉에서 서쪽으로 펼쳐진 一字의 칠선봉 능선에서 당호를 '一字文星堂'으로 지었다고 설명하셨다. 금대산이 주산(主山), 지리산 주능선을 안산(案山)으로 하고, 금마가 물을 마시는 형국에 문성(文星)이 낙조(落照)하는 명당으로 이해가 되었다. 당호에 걸맞게 어르신의 장남(54년생)은 약관에 행정고시 합격하여 교통건설부에서 정년을 하였다고 한다.

 

文星 : 중국에서, 북두칠성 중의 여섯째 별을 달리 이르는 말. 학문을 맡아 다스리는 별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북두칠성 1.탐랑 2.거문 3.녹존 4.문곡 5.염정 6.무곡 7.파군으로도 불립니다. 북두의 제1성에서 제4성까지를 괴(魁)라 하고 제5성에서 제7성까지를 표(杓)라 하며 합해서 두(斗)라 하는 것이다. 북두칠성 가운데 자루가 되는 세별이 형성(衡星) 개양성(開陽星) 요광성(搖光星)인데 제5성에서 제7성까지이므로 이를 두표(斗杓)라고 하는데 손잡이 같다고 해서 두병(斗柄)이라고도 한다.

 

마천면 당흥 마을 마애 석각은 금대산에 정남향으로 뻗어 내린 산록(山麓)에 위치해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안국사와 금대사의 사이이다. 정면으로는 영신봉과 좌고대, 칠선봉 능선이 보인다. 사진으로 판독이 되지 않았던 석각 명문이 아침 햇살에 선명하게 드러났다. '古諺傳眞平王入此山時聽封次占此而其后居人皆以噤地云' 25자이다. 민선생님과 일행 분들은 주변을 둘러보는 사이 산죽과 주변을 정리하였다. 겨우 글자만 겨우 알고 뜻을 알지 못하니 내겐 항상 장애물(障碍物)이다. 성교대와 방장제일문, 덕암, 용유담을 두루 답사한 후 신농산삼약초원에서 점심을 먹었다. 오후는 일정대로 탁본을 하였다. 현장에서 명문을 억지로 꿰어 맞춰 보았지만 태실에 관한 내용은 없다. 집에 돌아와 군자사와 진평왕 관련 자료를 정리하였다. 1600년대 초 함양군수 고상안(1553-1623)의 태촌집(泰村集)에 '군자사 우물가 미나리 밭에는 개구리가 없다.'라는 기록이 흥미를 끈다. 태실지(금표) 답사 자료는 한 달 후에 선과 임병기 님이 정리하기로 하였다.

 

 

 

 

1. 군자사 관련 진평왕의 기록

 

가. 1530년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1권 경상도(慶尙道)

 

군자사(君子寺) 지리산에 있다. 전설에, “신라 진평왕(眞平王)이 왕위를 피해서 여기에 살다가, 태자를 낳아서 나라에 돌아가고, 집은 희사하여 절로 만들었다.” 한다.

 

나. 함양군수(1601-1604) 고상안(高尙顔, 1553-1623) 태촌집(泰村集)

 

군자사(君子寺)는 함성(含城) 치소 남쪽에 있다. 곧 두류산 서북쪽의 기슭이다. 절 아래 우물이 있고 우물 가에 미나리밭이 있다. 옛날부터 개구리가 없다. 어떤 이는 우물의 발원처에 웅황(雄黃:광물,살충제)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였다. 옳은지 여부는 모르겠다. 대체로 사물의 이치는 깨달을 수 없는 것이 많다. 이를테면 영가(永嘉:안동) 성안에 모기가 없는 것이나 상주(尙州) 사불산(四佛山)에 칡이 없는 것과 같은 것이 그것이다. 《泰村集 제5권》 함양군수(1601-1604) 고상안(高尙顔, 1553-1623) 지음

 

※군자사는 신라 진평왕이 숙부 진지왕이 서기 576년 즉위함으로 인하여 도성을 떠나 이곳에 피신, 은거한 별궁이다. 579년 진지왕이 폐위된 뒤 도성에 돌아가 즉위하고 이곳에서 아들을 낳은 것을 기념하여 이곳에 군자사를 창건하였다. 그러나 진평왕은 딸만 성장하여 선덕여왕이 되었다.

 

다. 1656년 정수민(鄭秀民)이 사찬한 天嶺誌

 

지리산에 있다. 세속에 전하는 말에 '신라 진평왕이 지위를 피하여 이곳에 살다가 태자를 낳아 국도로 돌아간 뒤 집을 희사하여 절을 만들었다고 한다. 지금은 없다. (在智異山。俗傳新羅眞平王。避位居此。生太子還國。捨家爲寺。○有兪好仁詩 ○今無)

 

注 1888년 후손 정환주(鄭煥周)가 간행함. 注 폐사 시기는 1888년 이전으로 보임.

 

라. 연대 미상의 마천 당흥 부락 마애석각 명문

 

옛날 이야기에 전하기를 '신라 진평왕이 이산에 들어왔을 때에 봉지(封地)를 허락한 다음에 이곳을 차지하여 그 후 주민들이 모두 땅에 대하여 감히 입을 열지 못하였다.'라고 한다.(古諺傳眞平王入此山時聽封次占此而其后居人皆以噤地云)

 

注 聼(청) : 聽(청), 聴(청) (이, 은 청), 噤 : 不敢開口的樣子 噤 寒而閉口 口閉 地 語助詞

 

 

 

古諺傳 眞平王入此山時 聼封次占此而 其后居人皆以噤地云

옛날 이야기에 전하기를 '신라 진평왕이 이산에 들어왔을 때에 봉지(封地)를 허락한 다음에 이곳을 차지하였다. 그 후 주민들이 모두 감히 (땅에 대하여?) 입을 열지 못하였다.'라고 한다.

 

 

 

2. 선인들의 유람록 군자사 관련 진평왕의 기록

 

가. 1610년 박여량의 두류산일록

 

군자사는 옛 이름이 영정사(靈淨寺)이다. 신라 진평왕이 즉위하기 전에 어지러운 조정을 피해 이 절에 와 거처하였다. 그때 아들을 낳게 되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고 한다. 안국사(安國寺)도 이때에 그 이름을 얻은 듯하다. 전란을 겪은 뒤에 중창한 것은 법당∙선당(禪堂)∙남쪽 누각뿐이다.(君子者。古之靈凈寺也。新羅眞平王避亂居此寺生子。因改以今名。其曰安國寺者。亦因其時而得此稱歟。戰兵火之後。所重刱者。法堂禪堂南樓而已。)

 

나.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

 

저물녘에 군자사(君子寺)로 들어가 잤다. 이 절은 들판에 있는 사찰이어서 흙먼지가 마루에 가득하였고 선방(禪房) 앞에 모란꽃이 한창 탐스럽게 피어 있어 구경할 만하였다. 절 앞에 옛날 영정(靈井)이 있어 영정사(靈井寺)라 불렀다. 지금은 이름을 바꿔 군자사라 하는데, 가져온 뜻이 무엇인지 모르겠다.(暮投君子寺. 寺野刹也. 埃氛滿堂. 獨牧丹對禪房方敷榮. 可賞. 寺前舊有靈井. 號靈井寺. 今改以君子. 未知取何義也.)

 

다. 1783년 이덕무 청장관전서 군자사 사적(君子寺事蹟)

 

계묘년(1783) 6월 23일에 나는 아들 광류(光霤)와 함께 두류산(頭流山) 구경을 가서 군자사(君子寺)에서 묵었다. 이 절의 사적(事蹟)을 적은 현판이 걸려 있기에 이를 줄여서 적는다.

 

천령의 남쪽 50리쯤에 지리산이 있고, 지리산의 동쪽 기슭 아래 큰 시냇가에 군자사가 있다. 진 대건(태건) 11년(579 무술(578) 신라 진평왕(579~632재위) 이 잠저 시절 왕위를 피하여 여기에 살다가 태자를 낳고서 서울로 돌아갔다. 드디어 그 집을 희사하여 절로 만들고 이것으로 이름 지었다. 그 뒤로 여러 번 병화를 만나 흥폐를 거듭하였다.(天嶺之南五十許里。有智異山。智異之東麓下大溪邊。有君子寺。陳大建十一年戊戌。新羅眞平王潛邸。避位居此。因生太子而還國。遂捨家爲寺。以是名焉。自爾厥后。荐遭兵燹。或興或廢。) 동사(東史)를 상고하건대, 진평왕(眞平王)은 후사가 없는데 지금 '이곳에서 태자를 낳고 인하여 군자사라고 명명하였다.' 하였으니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 청장관전서 69권에 나오는 이덕무의 글은 사근역 찰방으로 있을 때에 군자사에 와서 사적기 현판의 내용을 옮긴 것이다. 현판 사적기 말미에 '강희 23년(갑자, 1684)에 방장산 승려 형곡 복환이 쓰다.'라는 기록이 있다.

 

 

태실지로 추정되는 곳의 분묘(眞官洞下店谷嶝)
獨釣臺
마적사지

 

☞ 진평왕(眞平王, 567~632) : 신라 제26대 임금. 재위 579∼632.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백정(白淨). 아버지는 진흥왕의 태자인 동륜(銅輪). 어머니는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의 딸인 만호부인(萬呼夫人). 왕비는 김씨로서 복승갈문왕(福勝葛文王)의 딸인 마야부인(摩耶夫人). 진흥왕의 태자 동륜(銅輪)의 아들. 576년 진흥왕이 서거하자 차자 진지왕이 즉위, 태자 아들 진평왕 함양으로 피신. 579년 진지왕이 폐위되자 화백회의를 비롯한 조정의 추대로 왕위에 오름. 579년~584년 조모인 사도왕후 박씨가 섭정. 579년 잠저시 별궁에 군자사 창건.

 

 

※ 태봉(胎封) : 왕실의 태()를 봉안하는 태실 중에서 그 태의 주인이 왕으로 즉위하면 태실을 봉하는 제도.

 

왕실에서는 아기가 새로 태어나면 그 태를 소중하게 취급해 전국에서 길지(吉地)를 골라 태실을 만들어 안태하였다. 장소의 선택과 길일을 정하는 일은 관상감(觀象監)에서 맡아 처리하고, 태의 호송과 태실의 역사는 선공감(繕工監)에서 하였다. 장태(藏胎)와 태봉 수개(修改)에 관한 모든 일을 계사(啓辭)와 장계(狀啓), 감결(甘結)과 관문(關文) 등을 통하여 정중하게 처리하였다.

 

처음 태실의 선정은 일반 왕자나 공주 등과 같이 장태처의 비망(備望), 장태 길일의 선정, 잡물의 준비, 도로의 수선, 시역(始役)·개기(開基)·발태(發胎)·봉토(封土)·필역(畢役)·고후토제(告后土祭)·태신안위제(胎神安慰祭)·사후토제(謝后土祭) 등의 절차에 의해 이루어진다. 처음 태실을 정해 태를 봉안할 때는 태실에 대한 장식이 호화롭지는 않으나, 왕이 즉위하는 해 태봉으로 봉해지면 태실 내부와 외부의 장식이 달라진다.

 

태실을 태봉으로 가봉하면 태실의 내부와 주위에 석물(石物)을 추가로 시설하는데, 내부에는 동석(童石개첨석(蓋詹石상석(裳石귀롱대(龜籠臺) 등을 만들고, 외부에는 석 난간(石欄干)·연엽주석(蓮葉柱石)·횡죽석(橫竹石)·우전석(隅磚石)·표석(標石)·비석(碑石)(石欄干)·연엽주석(蓮葉柱石)·횡죽석(橫竹石)·우전석(隅磚石)·표석(標石)·비석(碑石) 등을 비치한다. 석물을 설비하는 데도 절차는 장엄해 택일·시역·개기·조배(造排)의 순으로 진행하고, 필역을 한 뒤에는 고사유제(告事由祭)·고후토제·사후토제 등을 행한다.

 

태봉의 부근에 있는 관할 관서에서는 매년 춘추로 태봉을 순행해 도벌, 태실의 손괴, 천재지변 등 태봉에 영향이 미치는 일이 발생하면 즉시 보고해야 하며 보수 책까지도 진언해야 한다. 태봉에는 태실을 중심으로 사방 300(540m) 안에는 경지를 개간하는 행위를 금하며, 만약 위반하는 사례가 발생하면 국법에 의해 엄벌하도록 되어 있다. 또한 역대 왕의 태봉이 있는 고을에는 그 자격이 승격되어 필역 후에는 유공자에게 상사가 행해진다.

 

 

태실(胎室) : 왕실에서 자손을 출산하면 그 태(胎)를 봉안하는 곳을 지칭하는 용어. 시도 민속문화재. 

 

예로부터 태는 태아의 생명력을 부여한 것이라고 인정, 태아가 출산된 뒤에도 함부로 버리지 않고 소중하게 보관하였다. 보관하는 방법도 신분의 귀천이나 계급의 고하에 따라 다르다. 특히 왕실인 경우에는 국운과 직접 관련이 있다고 더욱 소중하게 다루었다. 태실은 일반적으로 태 옹(胎甕)이라는(胎甕) 항아리에 안치하는 것이 통례이나 왕세자나 왕세손 등 다음 보위를 이어받을 사람의 태는 태봉(胎峰)으로 가봉될 것을 감안, 석실을 만들어 보관하였다.

 

태를 태실까지 봉송하는 절차와 봉안하는 의식도 까다롭다. 왕자나 공주·옹주가 태어나면 태를 봉안할 장소를 관상감(觀象監)에서 물색하고 봉송 및 개기(開基봉토(封土) 등의 날을 가려 정하였다. 선공감(繕工監)에서는 태를 봉송할 도로를 수치하고 역사에 지장이 없도록 대비한다. 봉송 일이 되면 봉송 관원을 임명한다. 당상관으로 안태사(安胎使)를 정해 안태 봉송의 책임을 맡게 하고, 배태관(陪胎官)을 차정해 태를 봉송하는 도중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불의의 사태에 대비하며, 전향관(傳香官)과 주시관(奏時官)을 차정, 안태사와 배태관의 업무를 보좌하게 하였다. 그와는 별도로 당하관으로 감동관(監董官)을 뽑아 일체의 공사를 감독하게 하고, 상토관(相土官)을 파견해 이미 선정된 태실이 길지(吉地)인가를 재확인시킨다. 그 밑에 감역관(監役官)을 두어 도로의 수치와 태실의 역사를 감독하게 한다.

 

태실의 역사를 마치면 토지신에게 보호를 기원하는 고후토제(告后土祭)·태신안위제(胎神安慰祭)·사후토제(謝后土祭) 등의 제례를 치른다. 태실의 주위에 금표(禁標)를 세워 채석·벌목·개간·방목 등 일체의 행위를 금지시킨다. 금표를 세우는 범위는 신분에 따라 차이가 있다. 왕은 300(540m), 대군은 200(360m), 기타 왕자와 공주는 100(180m)로 정하였다. 관할 구역의 관원은 춘추로 태실을 순행해 이상 유무를 확인한 뒤 보고하도록 되어 있다. 태실을 고의로 훼손했거나 벌목·채석·개간 등을 했을 경우에는 국법에 의해 엄벌하도록 정하였다. 우리나라에서 태실이 가장 많은 곳은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에 있는 서진산(棲鎭山)으로 조선 왕실 13위의 태실이 있어 세칭 태봉이라 한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