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적동 세진대 석각 명문과 마적사지(200918)
▣ 일 시 : 2020년 09월 18일(금)
▣ 코 스 : 용유담-세진대-신농산삼약초원-마적사터-마당바위
▣ 인 원 : 4명(조박사님, 강재두님, 呂사장님)
▣ 날 씨 : 맑음
나는 평소 암자터에 식견이 없거니와 불교에 전혀 문외한이다. 2006년 세인들이 세석산장 앞 영신사라는 곳을 답사한 후, 의문이 들어 김종직의 유두류록과 기행시를 찾아서 읽게 되었다. 이 후 지장사지, 두류암지, 상류암지, 수곡골의 은정대, 고령암 터 등, 폐암자터 몇 군데를 답사한 것이 고작이다. 지난 5월 초 유몽인의 ‘유두류산록’에 나오는 마적사지 답사한 일이 있다. 이번에도 적은(跡隱) 강지주 (姜趾周 1856∼1939) 공의 현손(玄孫)인 신농산삼약초원 강재두(姜在斗) 님에게 안내를 받았다.
유람록에서 세진대에 대한 기록은 아직 찾지 못했다. 다만 천령지와 함양군지에 나오는 유환대(瑜環臺)와 유가대(瑜珈臺)가 세진대의 가능성이 있다. 불교에서 유래한 이름인 유가대(유환대)를 마적동에서 세거 했던 진양 강씨 적은(跡隱) 강지주(姜趾周 1856∼1909)공이 세진대기를 짓고 이름을 바꾼 듯하다. 강지주(姜趾周) 공의 호인 적은(跡隱 : 마적동 은거함)은 마적사 위치를 암시하고 있다. 공교롭게 강지주(姜趾周) 선생의 집터와 마적사로 추정하는 위치가 일치한다. 공의 묘소 또한 옛 집터(마적암터) 뒤에 있으니, 생전에 마적사 터에 은거했다가 사후에도 마적사지를 떠나지 않은 셈이다.
1. 마적사에 대한 옛 문헌의 기록
가.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
○ 1611년 4월 3일 임신일. 아침에 출발하여 의탄촌(義呑村)을 지나는데 옛일에 대한 감개가 무량하였다.<중략> 동행한 사람들이 옷깃을 거머쥐고 곧바로 외나무다리(略彴)를 건너 허물어진 사당 안으로 뛰어들어가 기다렸다. 잠시 후 은실 같은 빗줄기가 떨어지더니. 새알만큼 큰 우박이 쏟아지고 일시에 소나기가 퍼부었다. 좌중의 젊은이들은 숟가락을 떨어뜨릴 정도로 얼굴빛이 새파랗게 변했다. 한참 뒤 하늘에 구름이 뒤엉키더니 구름 사이로 햇빛이 비추었다. 드디어 언덕을 따라가다가 길을 잃어 숲 속으로 들어갔는데 젖은 풀잎이 옷을 적시고 등나무 가지가 얼굴을 찔렀다. 밀고 당기며 가시덤불을 헤치고 산허리를 비스듬히 돌며 올라갔다. 허리를 구부리고 한 걸음씩 나아가는데, 죽순을 꺾고 고사리를 뜯느라 발걸음이 더뎠다. 동쪽으로 마적암(馬跡庵)을 지났다. 나뭇가지와 넝쿨을 잡고 겨우 올라가니 옛터가 아직 남아 있었다.
나. 천령지와 함양군지의 기록
1) 천령지의 기록
마적사는 지리산에 있다. 고승 마적도사가 거처하던 곳을 이름하였다. 앞에는 유환대(瑜環臺)가 있고, 아래에는 수잠탄(水潛灘)이 있고, 수잠탄(水潛灘) 위가 곧 용유담(龍遊潭)이다. 지금은 없다. [원문] 馬跡寺在智異山 以高僧馬跡所居爲名 前有瑜環臺 下有水潛灘 灘上卽龍遊潭 今無
2) 함양군지의 기록
마적사는 지리산에 있다. 고승 마적도사가 거처하던 곳을 이름하였다. 앞에는 유가대(瑜珈臺)가 있고, 아래에는 수잠탄(水潛灘)이 있고, 수잠탄(水潛灘) 위가 곧 용유담(龍遊潭)이다. 전부터 없었다. [원문] 馬跡寺在智異山 以高僧馬跡所居爲名 前有瑜珈臺 下有水潛灘 灘上卽龍遊潭 前無
다. 1924, 강계형의 두류록(頭流錄)
조금 후 마적동으로 향하는데 남사 어른(성칠)이 앞장섰고 문선비도 동행하였다. 문중의 어른 우여(遇汝 강지주)氏의 집에 이르러 서로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회포를 풀었다. 술을 몇 순배 마신 뒤 파하였다. 그 이웃에 사는 박창서 어른 또한 다과를 보내 대접하였으니 그 마을의 풍속의 순후함과 옛정이 넘치는 것을 볼 수 있어 서로 칭찬하여 떠들기를 그치지 않았다. 여러 이웃들 또한 한 마디로 같이 그러하였다.(출처 : 이재구 선생 역)
▶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에 나오는 마적사지(200505) : blog.daum.net/lyg4533/16488304
2. 적은(跡隱) 강지주 (姜趾周 1856∼1939)의 세진대기(洗塵臺記)
마을에서 왼쪽 아래로 몇 백 보를 돌아가면 톱으로 자른 듯한 바위가 있는데 둥글고 평평하고 넓어 삼사십 인이 앉을 수 있다. 또 몇 걸음 되지 않는 근처에 맑은 물이 쉼 없이 솟는 샘이 있다. 이에 나는 샘에서 양치하고 바위를 쓸고 앉아 두루 돌아보며 탄식하여 말하였다. “만약 이 바위가 이름난 사람이나 통달한 선비를 만났다면 마땅히 《석기(石記)》나 《석보(石譜)》1)에 나오는 태호석이나 황산석과도 서로 겨룰 수 있었을텐데, 외딴 숲속에 자리하여 황량한 땅 무성한 수풀 사이에 묻혀 있는 것을 보니 안타깝구나!”
그리하여 아름다운 이름을 부여하여 『세진대(洗塵臺)』라 하였다. 인근의 여러 벗들과 더불어 의논하기를, 문건을 작성하고 약간의 재물을 모아 해마다 모여 강학하는 밑천으로 삼고자 하였다. 또 벼랑에 나란히 성명을 새겨 넣는 일을 마치고는 강학하고 술을 마시고 그 일을 가지고 시를 읊었다. 또한 세진대라 명명하게 된 뜻을 여러 동지들에게 고하였다.(출처 : 이재구 선생 역)
3. 1924년 강계형(姜桂馨) 두류록(頭流錄) 루트
1924년 8월 16일 심연 강계형(心淵 姜桂馨 1875~1936)공은 문정동을 출발하여 세동(1박)-마적동-송대(1박)-마당바위-장구목-사립재-통천문-쑥밭재-천례탕-마암당을 지나 천왕봉에서 1박을 한다. 그동안 알고 있었던 장구목(缶項, 부항)도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곳이 아닌 듯하다. 송대에서 1박을 하고 마당바위에서 장구목(缶項, 부항)을 지나 사립재에 도착하는데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장암(塲巖, 마당바위)을 출발하여 장구목(缶項부항)에 도착하니 갈증이 나고 침이 말랐다. 곧이어 사립재[扉峴비현]에 당도하여 벗 치조를 방문했더니 아이가 말하기를 조금 있으면 돌아올 거라 했지만 일행에게 뒤쳐질까봐 힘써 길을 올랐다.」 그렇다면 장암(塲巖, 마당바위)에서 사립재(扉峴비현)로 넘어가는 장구목(缶項, 부항)은 어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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