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탄 금계 방장제일문 주변의 마애 석각 명문
나는 사물을 보는 문리가 트이지 않아 수없이 발품을 팔아야 한다. 얼마 전 함양 서복회 문 회장님께 1922년 마암당을 지은 은계 이진우(李璡雨, 1897~1954) 공의 아들이 의중 마을에 산다는 정보를 듣고, 이용대(은계 이진우 선생의 子) 어르신을 찾아뵌 일이 있다. 그날 어르신께 금계 방장 제일문(方丈第一門)의 이름을 종조부 이종식(李鍾植, 1871~1945) 공이 지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경주이씨 세보를 확인하니 은계 이진우(李璡雨, 1897~1954) 선생과는 숙질간이다. 1922년 4월 16일에서 20일까지 함양 고적 보존회에서 함양군수 민인호(閔麟鎬)가 추범(秋帆) 권도용(權道溶, 1877~1963) 선생을 고적 조사원으로 삼아, 토목 기수보 大谷定造, 벽송사 승려 김선응·이종인, 마천면장 김병호 등과 함께 고적조사에 나선다. 코스는 벽송사에서 출발하여 두리의 폐사-금강문-천례탕-마암-천왕봉-제석당으로-백무동으로 내려온 것으로 보인다. 이후 의중 마을의 은계 이진우(李璡雨, 1897~1954) 공과 벽송사 승려 일동은 마암에 마암당을 짓는다. 그 내용은 1922년 7월 함양군수 민인호(閔麟鎬, 함양명승고적보존회장)가 발행한 지리산지(智異山誌)와 개벽 제 34호 지리산보(1923년 4월 1일)에 실려있다.
며칠 전 조용헌 박사로부터 지리산 모처를 답사하고 싶다는 연락을 받았다. 금대산 아래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의 금계(金鷄) 마을과 탄수대(灘叟䑓) 마애 명문 시어 중 삼문(三門)과 오호(五戶), 금마대(金馬坮)가 조용헌 박사의 욕구를 자극한 듯하다. 답사 전에 이미 ‘금마대(金馬坮)는 금대(金坮)로 금대산(金坮山)이요, 마천(馬川)은 금마음수(金馬飮水)의 형국이라 마천(馬川)이다. 빠르게 흐르는 계곡물이 전국에 한두 곳인가. 그렇다면 전국의 모든 하천이 마천(馬川)이 아닌가?’ 지명을 풍수로 술술 풀어내는 강호 동양학자의 새로운 해석이다. 나 또한 점필재 길 아홉 모롱이 길의 방장문(方丈門)과 금계(金鷄) 방장제일문(方丈第一門)은 어떤 관련이 있는지. 탄수대(灘叟䑓) 마애 명문 시에 나오는 삼문(三門)과 오호(五戶), 성교대(星橋坮)는 어디인지, 궁금함이 더해져서 현장의 답사가 다급해있던 시점이다.
금요일 밤 조용헌 박사와 지리산을 찾았다. 비가 내리는 백무동은 어둠 속에서 계곡의 물소리가 마치 우레 소리와 같았다. 다음날 새벽 식전에 조용헌 박사는 [조용헌 살롱] 칼럼을 조용히 탈고하여 조선일보에 송고한다. 문 회장님의 안내로 운학정(雲鶴亭)에서 조선 선조 때의 인물 정복현(鄭復顯, 1521∼1591) 선생을 만났다. 그 위치는 백무동 초입이다. 계곡 옆에 민재남(閔在南, 1802~1873)의 운학정 시비와 정자가 있다. 아침이 되어도 안개비는 그치지 않았다. 방장제일문(方丈第一門) 터널에 당도하니 칠선휴게소 허상옥 사장과 산친들이 우리를 맞이한다. 허사장은 먼저 우락대(牛樂䑓)와 구암대(鷗巖䑓) 석각을 안내하였다. 구암대(鷗巖䑓)는 그리 오래된 석각은 아닌 듯하다. 방장제일문(方丈第一門) 석각에 접근하는데, 문 회장님과 허 사장님이 낫으로 길을 뚫고, 사진으로만 본 방장제일문과 탄수대(灘叟䑓) 석각을 확인하였다. 탄수대(灘叟䑓)에서 바라보는 칠리탄(七里灘)의 삼문(三門)과 오호(五戶), 성교대(星橋坮)에서 의중 마을 초입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조용헌 박사가 갑자기 ‘바로 저곳입니다.’라고 하며 의중 마을을 가리킨다. ‘저곳이 명당입니다. 물이 들어와 돌아나가는 음과 양이 만나는 곳입니다. 저곳을 소 십승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곳으로 갑시다!’ 삼문(三門)과 오호(五戶), 천문지호(天門地戶)를 단번에 읽어냈다. 소가 냇물을 헤엄쳐서 건넜다는 곳의 바위에 우락대(牛樂䑓) 석각이 있다. 냇물이 자연적으로 멈추어 잠잠한 곳이 삼문담(三門潭)이고, 의중마을 아래 냇물이 왼쪽으로 휘어져 돌아나가는 지점이 오호강(五戶江)이다. 탄성이 절로 나왔다. 모든 궁금함이 일시에 풀리는 순간이다. 탄수대(灘叟䑓)에서 내려와서 '금계동구(金鷄洞口)' 석각을 먼발치에서 확인하고 의중마을 죽포대(竹圃䑓)를 찾았다. 죽포(竹圃) 이규현(李圭玹, 1848~1935)공은 조선 후기 헌종 때에 호군가선동추(護軍嘉善同樞)를 지내고 병조참의(兵曺參議)로 추증된 인물로 탄수 이종식(李鍾植, 1871~1945) 공이 셋째 아들이고, 은계 이진우(李璡雨, 1897~1954)공은 장손자이다.
은계 이진우(李璡雨) 선생의 생가는 금대산을 바라보고 앞에는 칠리탄이 유유히 흐른다. 한나라 무왕 때에 양가죽 옷을 입은 엄광의 고사를 그대로 옮겨다 놓은 은둔지사가 머무는 명당이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금대산은 노적봉이라 천석꾼의 터이고, 왼쪽으로는 작은 언덕과 대나무 숲이 법화산 미천 석재장의 화기를 막아준다. 아침에 빛이 금대산에 반사되어 양기가 들어온다.'라는 조용헌 박사의 설명이다. 이용대 어른의 말씀에 따르면, 조선 영조 때에 선전관을 지낸 8대조 이일언(李日彦, 1722~1794) 공이 의중마을 입향조라고 한다. 이용대 어른의 증조부 죽포 이규현(李圭玹, 1848~1935)공은 한말 의병장 석상용(石祥龍, 1870~1920) 장군의 가문과 사돈간이다. 정묘(1907년) 의병장 석상용 장군 의진에 식량과 총을 제공하여 실상사에 주둔한 일본군에 父子가 피체된다. 사형을 당하기 직전에 3남 탄수 이종식(李鐘植, 1871~1945) 공이 대신 죽겠다고 자청하여, 父(李圭玹, 1848~1935)와 長兄(李鐘純 1866~1913)을 구출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국가보훈처에 독립유공자 서훈 신청을 했으나 인정받지 못했다고 한다.
오늘의 마지막 석각 여행지 德巖(덕암)을 찾아 나섰다. 의탄 마을에서 냇물을 따라 조금 내려가면, 도로에서 멀지 않은 지점에 두꺼비 모양의 바위가 있다. 앞에는 측면으로 마천 석재장에 조성중인 부처님 두상이 보이고, 아래로는 임천이 德巖(덕암) 들판을 감싸 안고 흐른다. 덕암(德巖) 석각 왼쪽에 이진우(李璡雨)와 이보우(李輔雨) 두 어른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에 마암당을 지은 이진우(李璡雨, 1897~1954)공의 이름이 있다. 德巖(덕암) 석각 휘호의 주인공이 은계 이진우 공이라는 의미기도 하다. 德巖(덕암)에 올라서니 작은 들판이 한눈에 들어왔다. 바위 위에는 선사시대의 유적인 성혈(性穴, cup-mark)이 있어 폰에 담았다. 답사를 마치고 돌아와서 서복회 문 회장님으로부터 ‘탄수 이종식 선생 비결 명문 논집’ pdf 파일을 받았다. 필사본이 아닌 탈초한 자료이다. 아래 한글로 옮기면서 읽어보니 미래를 예견한 비결서인 듯하다. 방장문(方丈門) 필획의 주인을 찾아 나선 시간 여행에서 먼 길을 에둘러 이제야 목적지에 한발 가까이 다가선 느낌이다. 끝.
☞ 정복현(鄭復顯, 1521∼1591)의 자는 수초(遂初)이고 호는 매촌(梅村)이며, 본관은 서산(瑞山) 우후(虞侯) 정신(鄭愼)의 아들. 정희보(鄭希輔)ㆍ조식(曺植)의 문인으로 노진(盧禛)ㆍ양희(梁喜) 등과 교유함. 함양(咸陽)에 거주함. 41세(1561년)에는 마천동(馬川洞)에 운학정(雲鶴亭)을 지었다. 강익과 더불어 원원상종(源源相從)하였고, 도의로 강마하였다. [출처] 매촌 정복현자료|작성자 문길
雲鶴亭(운학정)
閔在南(1802~1873)
古松流水上(고송유수상) 고송이 우거진 시냇가에
雲鶴共徘徊(운학공배회) 구름과 학이 함께 배회하네.
千載亭猶在(천재정유재) 천년이 가도 정자는 남겠지만
何人去復回(하인거복회) 어떤 사람이 갔다가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조용헌 박사는 '鷗(구)는 흰 갈매기로 산수에서 한가하게 노니는 신선(선비)를 상징하여 구암대라고 이름한 것으로 설명하였다. 탄수공 1자 영우(暎雨)공이 차운(次韻)한 축원문에 '三門潭碧仙遊磯 삼문담은 푸르러 신선이 노니는 물가로다.'라는 문구에서 구암대(鷗巖䑓) 앞이 소가 헤엄쳐서 건넜다던 물이 깊고 잠잠한 곳이 삼문담(三門潭)임을 알 수 있다.
灘叟䑓(탄수대)
李鍾植(1871~1945)
灘聲七里澹忘歸 : 칠리의 여울물 소리가 돌아갈 생각을 잊게 하고,
回首嚴陵舊釣磯 : 고개를 돌아보니 엄릉이 노닐던 옛적 낚시터네.
不着羊裘誰辨我 : 양 가죽 옷 입지 않았으니 어느 누가 알아볼꼬?
烟江風雨一簑衣 : 비 바람 부는 안개낀 강에서 도롱이 하나 걸친 나를.
注 : 칠리탄(七里灘)의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동한(東漢)의 은사(隱士)인 엄광(嚴光)이 은거하며 낚시질하던 곳으로, 절강성(浙江省) 동려현(桐廬縣) 남쪽의 여울을 말하는데, 보통 은사의 거처를 뜻한다. 칠리뢰(七里瀨) 혹은 엄릉뢰(嚴陵瀨)라고도 한다. 엄광은 광무제(光武帝)의 어릴 때 친구이다. 《後漢書 卷83 逸民列傳 嚴光》
灘叟李公杖屨之所(탄수이공장구지소)
金鷄一同謹誌(금계일동근지)
祝願文(축원문)
法師 姜聖通 謹詩
善哉故人李灘叟 : 훌륭하구나 고인이 되신 탄수 이종식 선생이여!
千秋恒遊灵灵坮 : 영원토록, 항시 신령스러운 영대에서 노니시네.
願惟生前遺遺業 : 생각컨대 생전에 선생께서 남기신 많은 일들이
今日運開大㒷発 : 오늘에야 운이 열려 크게 發興하기를 바랍니다.
注 : 방장제일문과 축원문은 내용산 유자의 작품은 아님. 승려가 한시를 지을 때는 운자를 안 맞추는 경향이 있음.(강정화 교수님)
五戶紅流抱壁歸 : 오호의 붉은 물은 절벽을 감싸고 돌아가고
三門潭碧仙遊磯 : 삼문의 못 푸르러 신선이 노니는 물가로다.
灵境桃源何處問 : 선경의 무릉도원이 어느 곳이냐고 물으니
星橋坮上降靑衣 : 성교대 위에 靑衣 童子를 내려보내는구나.
不肖子 暎雨 謹韻(불초자 영우 근운)
靑雨(청우)/崙雨(윤우)/坪雨(평우)/季雨(계우)
注 · 오호(五戶)와 삼문(三門)은 道家에서 말하는 天門地戶(천문지호)를 뜻하는 가상의 공간. 天門地戶란 次元의 世界를 넘나들 수 있는 신선 세계의 門을 말한다. 천문(天門)은 하늘 문이고, 지호(地戶)는 땅의 문. 물이 들어오는 쪽을 천문(天門)이라 하고, 나가는 쪽을 지호(地戶)라 한다. 오호강(五戶江)은 의중 마을 앞 절벽을 휘감아 돌아나가는 지점을, 삼문담(三門潭)은 우락대 아래 소가 건널 수 있는 물이 잠잠한 곳을 가리킨다. · 성교대(星橋坮) : 방장제일문 앞 바위에 홈을 파서 놓은 통나무 다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임. · 靑衣 : 신선들을 모시고 있던 靑衣童子(청의 동자)
方丈第一門(방장산제일문)
萬古名勝方丈山 : 만고의 명승 방장산(方丈山)은
三門五戶第一門 : 삼문담과 오호강의 제일문이네
運自大發金馬坮 : 기운은 금마대에서 절로 크게 일어나니
世人仰視皆歡喜 : 세인들이 우러러보고 모두들 기뻐하네
注 : 운자가 맞지 않음. 유자의 작품은 아님(강정화 교수님)
※ 금마대 : 금대산 마천은 금마음수(金馬飮水)의 형국, 상금대, 중금대, 하금대의 지명이 있음.
☞ 삼송(三松) 임응택(林應澤, 1879~1951)의 선생의 臥遊江山(와류강산)에는 '방장산제일문'에 대한 기록이 있다. 임응택(林應澤) 선생은 馬川面 義呑里 義中 部落에 살았던 인물이다. 臥遊江山(와류강산) 내용중 서복관련 자료가 있어 마천 향토지에 그대로 실었으며, 필사본은 당흥 부락 김수태 어르신이 가지고 있다고 한다.(함양서복연구회 문호성 회장님)
亭子(雲鶴亭)를 暫間 지나 都馬寺와 君子寺에, 옛터를 찾아드니 年久歲深 古寺터가 俗家 成터 되어 드니, 山水 風景 玩賞하고 潤水聲을 지나갈 때 緩緩 경 쇳소리 不和 中에 들어가니, 작지를 머무르고 徘徊 하여 살펴보니 中天에 소신 金山景佳 좋은 金坮寺라. 이 무 遊覽하는지라 이런 名勝地를 過門不入한단 말인가. 靑 杖을 다시 세워 寒山石經을 나가니 數間石室 정지키의 方丈山第一門이라, 門上에 새겼는데 白炳端坐禮佛하니 白雲仙風 奇異하다. 畵中仙境玩賞 하고 淸江石橋 찾아드니 松 下問 童子 하니, 碧松寺 정시하다. 碧松寺를 지낸 後에 七星洞을 살펴보니 北斗楸城照臨이라. [서복회 문호성 회장님이 보내주신 <臥遊江山(와류강산)에서>발췌함]
五戶江流抱壁歸/三門潭碧仙遊磯/灵境桃源何處問/星橋坮上降靑衣 不肖子 暎雨 謹韻 靑雨/崙雨/坪雨/季雨
오호의 붉은 물은 절벽을 감싸고 돌아가고/삼문의 못 푸르러 신선이 노니는 물가로다./신선이 사는 무릉도원이 어느 곳이냐고 물으니/성교대(星橋坮) 위에 청의동자를 내려보내는구나.
☞ 略彴(약작) : 한 개의 통나무로 놓은 다리. 독량(獨梁), 독목교(獨木橋), 외나무다리를 뜻하는데, 바위에 홈을 내어 서너 개의 통나무를 엮어서 만든다리로 보인다. 냇물 가운데 바위 위에 통나무를 놓아 다리를 연결함.
☞ 이규현(李圭玹, 1848~1935) : 본관 경주 호 죽포(竹圃) 자 인집(仁執) 호 죽포(竹圃) 호군가선동추(護軍嘉善同樞) 증 병조참의(兵曺參議) 제일방장문 필획의 주인공 탄수(灘叟) 이종식(李鍾植, 1871~1945)이 죽포(竹圃)의 셋째 아들이고, 마암당을 지은 은계(隱溪) 이진우(李璡雨, 1897~1954)가 죽포의 장손자이다.
☞ 성혈(性穴, cup-mark)은 바위의 표면을 오목하게 갈아서 만든 컵 모양 혹은 원추형의 홈이다. 민속에서는 알 구멍, 알 바위, 알 뫼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성혈은 일반적으로 선사 시대의 신앙 혹은 별자리와의 관련성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그림이나 형상을 표현한 바위그림[岩刻畵]이라고 보기도 한다. 민간에서 알 바위나 알 구멍이라 부르는 장소가 많이 남아 있는 것을 통해 근세에도 자손의 번창을 빌고자 바위에 성혈을 새기는 주술적인 행위를 지속하였음을 알 수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민인호(閔麟鎬 1884~1950) : 산청 출신으로 동경제국대학을 나와 일제 강점기에 탁지부 주부를 거처 함양군수(1919.10~1923.3)를 지냈으며, 1921년 함양명승고적보존회를 조직하여 지리산을 알리는 데 힘썼다. 민인호는 함안군수 함양군수 밀양군수 김해군수를 지냈으며, 밀양군수 시절에도 밀양고적보존회를 설립하였다. 일제로부터 2차례 기념장(記念章)을 받았고,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올라 있다.
▶권도용(權道溶, 1877~1963) : 호는 추범(秋帆) 함양 병곡 출신. 독립운동가. 함양을 대표하는 유학자. 곽종석의 문인이 되었으며, 경상우도 유맥에서 중요한 인물. 1910년 한일병합 후에는 후진을 양성하였으며, 1913년 위암(韋菴) 장지연(張志淵)의 후임으로 경남일보 2대 주필로 언론 계몽운동에 힘썼다. 1919년 3.1 운동이 출판법 위반으로 옥고를 치렀다. 1922년 4월 함양군수 민인호(閔麟鎬)와 지리산 고적 조사를 하고 방장산부(方丈山賦)를 남겼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6년 권도용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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