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필재 김종직의 아홉 모롱이(九隴) 길 길과 미타봉 소림 선방 가는 길
▣ 일 시 : 2020년 04월 04일(토)~05일(일)
▣ 코 스
1일 차 : 광점동-두류암추정터-어름터-석상용 장군묘-부도터-아홉 번째 구롱-일강-미타봉-고열암
2일 차 : 고열암-일강(一岡)-미타봉-소림선방-벽송사 능선-장구목-어름터-빙티-두류암 터-광점동
▣ 인 원 : 5명(미산님, 하림 조박사님, 광광자 소혼님, 지산님)+산영님(첫날 당일산행)
▣ 날 씨 : 맑음(영하 2도)
議論臺(의논대) - 김종직(1431~1492)
兩箇胡僧衲半肩 : 참선승 두 사람이 장삼을 어깨에 반쯤 걸치고
巖間指點小林禪 : 바위 사이 한 곳을 소림 선방이라고 가리키네
斜陽獨立三盤石 : 석양에 삼반석(의논대) 위에서 홀로 서있으니
滿袖天風我欲仙 : 소매 가득 천풍이 불어와 나도 신선이 되려 하네.
注 胡僧 : ① 호승 ② 선(禅)의 어록 등에서, 달마대사(達磨大師)를 가리켜 참선승으로 국역함. ③ 호국(胡国)의 중 ④ 서역이나 인도에서 온 중. 소림 선방 : 중국 숭산의 소림사에 있는 한 동굴로 달마대사(達磨大師)가 9년간 면벽참선수행을 했다는 소림굴을 말함. 三盤石 : 넓은 반석, 의논대를 가리킴. 天風 : 하늘 바람, 가을바람.
지난 3월 7일~8일에 상류암에서 초령(새봉)으로 가는 길을 잇고, 3월 14일~15일, 동부(洞府)와 아홉 모롱이 길(九隴)을 확인한 후에, 3월 21일~22일, 송대에서 벽송능선~사립재골로 올라와 동부(洞府, 사립재골)에서 상 허리길로 고열암까지 연결하였으나 궤적의 수정이 불가피하여, 다시 3월 28일~29일에 적조암에서 고열암으로 올라와 아홉 모롱이(九隴) 길을 돌아 쑥밭재로 연결되는 구롱(九隴) 길을 열었다. 이 길에 대한 고문헌의 기록은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에 나오는 일강(一岡, 벽송사 능선)과 동부(洞府, 사립재골)와 구롱(九隴, 아홉 모롱이)이 그 단서(端緖)의 전부이다. 산영(山影)님과의 대화에서 마암의 유래는 '화랑의 우두머리 영랑이 말을 끌고 올라와서 마암에 말을 매어놓고 영랑대에 올랐기 때문에 마암이 되었다.'라는 유추에서 가축을 끌고 올라올 수 있는 길을 찾기로 한 것이 점필재의 아홉 모롱이(九隴, 구롱) 길을 찾을 수 있는 단초(端初)가 되었다,
* 九隴(구롱) : 아홉 모랭이는 방언이라 표준어인 아홉 모롱이로 통일함. 洞府(동부) : 도교에서 신선들이 사는 곳. 一岡(일강) : 산등성이 또는 등달. 여기에서는 벽송 능선을 말함.
가축을 마암까지 끌어올릴 수 있는 길은 오봉리에서 사립재로 올라오는 길과, 송대나 추성에서 벽송사 능선으로 올라와서 동부(洞府, 사립재골)로 진입하는 길, 광점동에서 어름터로 올라와 아홉 모롱이(九隴:구롱) 길로 연결되는 길을 확인하기로 하고, 이번 산행은 광점동에서 출발하여 아홉 모롱이(九隴:구롱) 길로 연결하기로 하였다. 산중 깊숙이 화전민들의 전답이 있기에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농우(農牛)가 이동할 수 있는 길이 필요했을 것으로 판단하고, 일제시대 만들어진 지적도를 찾아서 임야와 전답과 도로의 지번과 지목까지 일일이 확인하였다. 특이한 것은 화전민들의 전답은 대개 임야로 지목이 바뀌었지만, 500년 전 옛 길이 현 지적도에 지번과 지목이 도로로 살아있다는 점이다.
산영(山影)님의 산길에 대한 견해는 산촌 사람들의 눈높이로 마소가 이동할 수 있고, 시간과 거리를 단축할 수 있는 가장 편안한 길이다. 전란이 일어났을 때 농경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마소를 안전하게 피신시킬 수 있는 곳을 동부와 청이당으로 보는 것은, 아홉 모롱이(九隴:구롱) 길 곳곳에 많은 인원을 동원하여 인공으로 구축한 돌을 깔아 포장한 길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산영(山影) 조박사님은 산길에 있어서 가축과 인간의 동선은 불가분의 관계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아무튼 내가 찾고자 하는 점필재 길과 산영(山影)님이 찾는 가축의 이동 동선은 일치하여, 고열암에서 일강(一岡, 벽송 능선)~동부(洞府, 사립재골)를 지나 쑥밭재에 이르는 아홉 모롱이(구롱:九隴) 길을 찾았다고 본다.
이번 산행의 목적은 광점동에서 시작하여 마지막 구롱(九隴, 숙밭재 부근)에서 동부(洞府)를 잇고 일강(一岡)을 넘어 고열암으로 가는 아홉 모롱이 길과 김종직 선생의 의논대 시에 나오는 소림 선방을 다시 확인하기 위함이다. 동부(洞府)에서 일강(一岡)으로 넘어가는 상 허리길은 여러 갈래여서 정확한 길을 가늠하기 어렵지만, 고열암에서 쑥밭재까지 상 허리길이 지금도 희미하게 남아 있다. 나는 고전을 공부하였으나 문리가 트이지 못하였고, 산행을 많이 했지만 등산의 개념으로 산길을 보았기 때문에, 산촌의 생활과 생존 개념의 옛길에 대한 이해가 많이 부족했는데, 이제 조금 눈이 트인 것 같은 느낌이다.
나보다 먼저 신유두류록을 탐구하면서 九隴(아홉 모랭이) 길을 찾고자 노력했던 야사씨(野史氏)들에게 먼저 심심(甚深)한 감사를 드린다. 사실은 그분들의 헛 발품과 시행착오와 오답 노트가 내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김종직 선생의 점필재 길 복원을 나 혼자 마무리를 하는 것보다 함께 했더라면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든다. 그것은 선인들의 향기와 민초들의 애환이 남아있는 우리 민족의 소중한 역사 문화 자원이기 때문이다. 지난 일들을 상기하니 같은 분야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 '복두재 병충해' 심지어 '해커' 등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전문 용어를 써가면서 척(隻)을 지고 적(敵)을 삼을만한 이유가 있었는지... 혹여 아직도 지리 인문학과 유람록 탐구에 열정과 여력(餘力)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다면, 점필재의 구롱(九隴) 길을 수정·보완하고 질정(叱正)하길 바라면서... 그대들이야 내게 어찌 대했든 간에, 묵자에 나오는 '天下無人(천하에는 남이 없다.)'이라는 말로 글을 맺는다. 끝.
* 관련자료 링크
1. 김종직의 유두류록에 나오는 동부(洞府)와 구롱(九隴) : http://blog.daum.net/lyg4533/16488278
2.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 기행시 의논대에 나오는 소림 선방 : http://blog.daum.net/lyg4533/16488289
▶ 첫날
☞ 두류암 관련 선인들의 유람록과 천령지의 기록
1. 1580년 邊士貞(1529∼1596)의 유두류록
○ 4月 初七日. 早食發行. 過龍遊潭. 至頭流庵. 層崖削出. 壁立萬仞. 百花爭發. 襲香一洞. 竟日坐玩. 不覺其暮遂入禪房. 共宿焉.
○ 4월 초7일에 아침 일찍 밥을 먹고 출발하여 용유담(龍遊潭)을 지나 두류암(頭流庵)에 도착하였다. 층층의 벼랑이 깎아지를 듯 솟아 있고 절벽이 만 길 높이로 우뚝 서 있었다. 온갖 꽃이 다투어 피어나니 꽃향기가 계곡을 온통 뒤덮었다. 하루 종일 앉아서 완상하니 날이 저무는 것도 몰랐다. 마침내 선방(禪房)에 들어가 함께 잤다.
○ 晨朝促喫. 過紫眞洞. 攀巖飛杖. 登天王峯. 是日也天氣淸朗. 極目無碍. 精神灑落.
○ 四月 初八日. 아침 (두류암에서) 일찍 밥을 먹고 자진동(紫眞洞)을 지나 바위를 잡고 지팡이를 날리며 천왕봉(天王峯) 에 올랐다. 이 날은 날씨가 매우 맑고 화창하여 시계가 막힘이 없었고 정신이 씻은 듯 상쾌하였다.
☞ 紫眞洞(자진동) : 어름터 주변으로 추정함.
2.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
○ 4월 3일(임신) 遂入頭流菴. 菴之北有臺. 直南而望之. 有飛瀑瀉于巖間. 如懸玉簾數十仞. 雖竟夕坐玩. 不覺其疲. 而會雨新晴. 谷風淒緊. 以爲過爽不可久淹. 遂入禪房安頓焉.
○ 1611년 4월 3일 임신일 드디어 두류암(頭流庵)에 들어갔다. 암자 북쪽에 대(臺)가 있어 그곳에 올라 정남쪽을 바라보니, 바위 사이로 폭포수가 쏟아지고 있는데 마치 옥으로 만든 발을 수십 길 매달아놓은 것 같았다. 저녁 내내 앉아 구경하더라도 피곤하지 않을 듯하였다. 마침 비가 그치고 날이 활짝 개었다. 골짜기에서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매우 상쾌한 느낌이 들었다. 오래 앉아 있을 수 없어 선방으로 들어가 편히 쉬었다.
3. 1611년 유몽인의 기행시 頭流菴(두류암)
頭流菴 - 柳夢寅
虛壁脩縑繟 : 텅 빈 절벽은 긴 비단을 드리운 듯하고
淸光碎石縫 : 맑은 햇빛은 부서진 바위를 꿰맨 듯하네
傳聲通翠筧 : 흐르는 물소리는 푸른 대통을 통해 들려오고
飛注作寒舂 : 떨어지는 물은 차갑게 절구질을 하네
雙柏西僧老 : 두 그루 잣나무 서쪽 승방 가에서 늙었고
層壇北斗封 : 층층의 법단은 북두성인듯 우뚝하구나
長風生萬籟 : 긴 바람 불어와서 온갖 소리 일으키니
深省寄前峰 : 깊이 성찰하며 앞산 봉우리에 기대 섰네.
4. 김영조(金永祚)(1842~1917)
[1867년 8월 26일~29일] 向文殊寺. 境甚幽僻. 暮抵松臺村. 村在頭流山下. 四山簇立. 林壑蔚然. 川聲滾滾. 亦一別景也. 訪朴德元. 因畱宿. 踰一嶺. 至林下石澗盤上. 各啖梨一枚. 歷大坂至頭流菴. 田家數十戶. 皆升茅構木爲居也.
문수사(文殊寺)를 향하니, 장소가 매우 깊숙하고 치우쳐 있었다. 저녁에 송대촌(松臺村)에 이르니, 마을이 두류산 아래 있어, 사방에 산이 빽빽하게 들어서서, 숲과 골짜기가 울창하며, 시내 소리가 세차게 들리니, 또 하나의 색다른 경치였다. 박덕원(朴德元)을 찾아가서 하룻밤 묵었다. 고개 하나를 넘어 숲 아래 있는 돌 시내[얼음터]에 이르러, 각자 소반 위의 배 하나씩을 먹었다. 큰 언덕을 지나 두류암(頭流菴)에 이르니, 농가 수십 호가 모두 띠풀로 지붕을 얹고, 나무를 얽어서 살고 있었다. [생초-엄천사지-문정동-세동마을-송대리-벽송사능선-어름터-두류암-말바우산막-중봉-천왕봉]
5. 정수민이 편찬한 천령지
[원문] 頭流庵. 在君子寺東三十里. 東有松臺. 韻致幽閑.今無.(천령지130)
두류암은 군자사 동쪽 삼십리에 있다. (두류암) 동쪽으로 송대가 있는데, (두류암은) 운치가 그윽하고 한가하다. 지금은 없다.
☞ 정수민(鄭秀民)이 천령지(天嶺誌)를 편찬한 시기(1656년)에는 두류암이 있었고, 천령지(天嶺誌)가 家藏(가장 : 간행되지 않고 후손에 의해 집에 보관 됨)되어 있다가, 후손 정환주(鄭煥周)가 간행한 시점(1888년)에 今無가 추가 기입한 것으로 추정한다. 간행 시점(1888년)에는 이미 두류암이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전해지는 천령지는 정환주(鄭煥周)의 간행본이다.
▶다음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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