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산행기록

점필재의 아홉 모랭이 길을 열다(고열암~구롱~청이당)

도솔산인 2020. 3. 30. 02:31

점필재의 아홉 모랭이 길을 열다(고열암~구롱~청이당)

 

 

▣ 일 시 : 2020년 03월 28일(토)~29일(일)

▣ 코 스

    1일 차 : 엄천-당산나무-구시락재-적조암(차량)-지장사터-환희대-선열암-의논대-고열암

    2일 차 : 고열암-일강(一岡)-동부(洞府)-구롱(九隴) 초입 바위-암자터?-벽송사 능선-송대

▣ 인 원 : 4명(산영님, 칠성님, 소혼님)

▣ 날 씨 : 맑음(영하 2도)

 

 

宿古涅庵(숙고열암)

 

病骨欲支撑 : 지친 몸 지탱하려고

暫借蒲團宿 : 잠시 포단 빌려 잠을 자는데

松濤沸明月 : 소나무 물결 달빛 아래 들끓으니

誤擬遊句曲 : 구곡 선경에 노니는 듯 착각하였네.

浮雲復何意 : 뜬 구름은 또한 무슨 뜻인가?

夜半閉巖谷 : 한밤중 산 골짜기 닫혀있구나

唯將正直心 : 오직 올곧은 마음을 가진다면

倘得山靈錄 : 혹시 산신령의 비록을 얻으려나.

 

 

宿古涅庵(숙고열암)

 

감수재 박여량 두류산일록의 청이당에서 상류암~초령 루트를 이으면서, 산길에 대해 새로운 이해를 하게 된 것은, 故 마등자 님이 맺어준 부산 토요산속 산행 대장 칠성님과의 인연에서 비롯되었다. 칠성님을 통해 산영(山影) 曺박사님을 만나서, '산길은 산중의 마을에서 마을, 암자에서 암자, 집터에서 집터, 기도터에서 기도터, 숯가마터와 숯가마터, 고개에서 고개, 샘터에서 샘터, 그리고 당시 산촌 사람들의 주 수입원인 산죽밭까지 길이 연결되고, 심지어 가축의 이동까지 인간의 동선에 모두 포함된다.'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때 가장 먼저 떠오른 어휘가 바로 벽암록(碧巖錄)에 나오는 '줄탁동시(啐啄同時)'와 논어의 한 구절인 '민이호학 불치하문(敏而好學 不恥下問)'이다. ()과 탁()이 동시에 이루어진다. 즉 병아리가 알에서 나오기 위해서는 새끼와 어미 닭이 안팎에서 서로 쪼아야 한다는 뜻으로, 가장 이상적인 사제지간을 비유하거나, 서로 합심하여 일이 잘 이루어지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줄탁동시(啐啄同時)오이가 익으면 꼭지가 저절로 떨어진다.’라는 뜻의 ‘과숙체락(瓜熟蒂落)’과 쌍을 이루어 때가 성숙하면 일이 저절로 이루어지며, 기회와 인연이 서로 투합한다.(瓜熟蒂落, 啐啄同時)’라는 뜻으로 쓰인다. '민이호학 불치하문(敏而好學 不恥下問)'은 논어 공야장(公冶長)에 나오는 문구로, '명민하면서도 배우기를 좋아하였으며 아랫사람에게 묻기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라는 의미로, 일단 나보다 젊은 분들에게 배워야겠다고 결심하고 맨 처음 떠오른 말이다. 아무튼 결과적으로 두 분과 네 번의 산행에서 감수재 길과 점필재 길의 남은 숙제를 모두 풀었고, 청이당에서 고열암 까지 아홉모랭이 길을 연결하였다. 

 

이번 산행은 동강교에서 차량으로 출발하여 당산나무를 지나 구시락재를 넘어 적조암에서 시작하였다. 첫 목적지는 지장사 터이다. 점필재 길의 길잡이 돌배나무에서 수평으로 이동하여 약 200m 거리에 자장사 터가 있다. 암자 뒤편으로는 암괴가 형성되어 있고, 주춧돌의 개수와 크기를 통해 암자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으며, 청자 파편을 비롯해 생초 도기편, 와편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암자 아래에 샘터가 있는데 샘터 주변으로 아직도 축대가 남아있다. 옥계(玉溪) 노진(盧禛, 1518~1578)은 '夜宿地藏庵'이라는 詩 6구 '샘물 소리가 이른 새벽 단잠을 깨우네.'라는 시구에서 암자터 가까이에 샘이 있다는 것을 주목하였다.(지장암 객사 터로 추정되는 곳은 지장사 초입 휴천면 운서리 1266번지와 1267번지, 1268번지로 추정함) 

 

 

  夜宿地藏庵


                      노진(盧禛)[1518~1578]

山中無俗物 : 산중이라 세속의 잡된 일 없어
煮茗聊自飮 : 차 끓여 심심찮게 따라 마시며
坐愛佛燈明 : 앉아서 환한 불등 고이 보다가
深宵始成寢 : 깊은 밤 가까스로 잠이 들었지
還有石泉響 : 헌데 또 바위틈의 샘물 소리가
冷然驚曉枕 : 돌연 새벽 단꿈을 놀래 깨우네

 

                                          <玉溪集>

 

☞ 노진(盧禛)[1518~1578] 조선 중기 남원에서 활동한 문신. 옥계(玉溪) 노진(盧禛)[1518~1578]은 조선 중기 명종과 선조 연간에 주로 활약한 문신으로, 30여 년 동안 청현(淸顯)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노진은 1518(중종 13) 함양군 북덕곡 개평촌에서 태어났으나 처가가 있는 남원에 와서 살았다. 만년(晩年)에는 자손들을 위해 뱀사골 정룡암(頂龍庵) 북쪽에 서재를 지었다고 한다.

 

 

1472년 8월 14일 점필재 김종직 선생이 '지장사에 들렀느냐 들르지 않았느냐?'를 놓고도 논란이 있었지만, 유두류록에는 분명 '지장사 갈림길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짚신을 갈아 신고 환희대로 향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지장사의 범위는 돌배나무를 포함하여 계곡 주변 전답 전체를 지장사 권역으로 보아도 되겠지만, 지리 99에서 주장하는 지장사 터는 암자의 입지 조건이 맞지 않는다. 선생은 환희대와 선열암, 독녀암, 신열암, 의논대를 거쳐 고열암에서 하룻밤을 묵는다. 점필재는 이곳에서 '선열암(先涅庵)', '의논대(議論臺)', '숙고열암(宿古涅庵)', '증고열승(贈古涅僧)'등 4首의 시를 남긴다.

 

다음날 고열암에서 왼쪽으로 몇 발자국 내려서서 (*)미타봉(부처형상바위, 지리산길 지도의 상내봉은 오류) 방향으로 일강(一岡)을 향해 상 허리길로 나아갔다. 길은 너덜을 피해 허리길로 진행되다가 두 갈래길로 갈라져 (*)향로봉(지리산길 지도의 상내봉 삼거리 는 오류) 방향으로 가는 길과 미타봉으로로 가는 길이 있다. 점필재가 언급한 약작(略彴, 통나무 다리) 있었던 실 계곡을 건너 대형 숯가마 터에 이르러 경사진 허리길을 타고 미타봉 안부로 향했다. 길이 오래 묵어 흙이 많이 흘러내려 흔적이 희미하지만 모든 감각을 동원하였다. 드디어 벽송사 능선의 일강(一岡)에 닿았다. 여기에서 동부(洞府)로 내려서서 사립재 방향 상 허리길로 진행하면 암벽 아래 기도터가 나오고 또한 길은 완만하게 이어진다. 사립재골 집터를 지나 세 번째 모랭이를 돌면 사립재골 상단 동부(洞府)에 닿는다. 동부(洞府)는 '신선들이 사는 곳'이라는 의미로 점필재는 이곳을 '무릉도원(武陵桃園) 보다 못할 것이 없다.'라고 기술하였다.

 

(*) 유두류록에 나오는 미타봉과 향로봉에 대한 솔레이박사의 견해 : https://blog.naver.com/ylee6517/221293526270

 

구롱(九隴, 아홉 모롱이) 길은 해발 1,100m 고저의 차이가 약 50m로 5km 가까이 평탄하게 상 허리길로 이어지는데, 한 모롱이를 돌 때마다 실개천이 흐르고, 산길의 길잡이가 되는 고목나무와 거대한 바위들이 전시장처럼 즐비하다. 이 길은 어름터에서 쑥밭재로 오르는 마지막 구롱(九隴)인 능선길과 만난다. 점필재는 이곳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아홉 고개를 다 지나고 산등성이를 따라 걸어가니 지나는 구름이 갓을 스쳤다. 풀과 나무들은 비가 내리지 않았는데도 젖어 있었다. 그제야 비로소 하늘과 멀지 않음을 알았다. 몇 리를 못 가서 산줄기가 갈라지는데, 그 산등성이를 따라 남쪽으로 가면 바로 진주 땅이다. 안개가 자욱하여 주위를 조망할 수 없었다. 청이당(淸伊堂)에 도착하였는데, 판자로 지은 집이었다. 네 사람이 당 앞의 시냇가 바위를 차지하고 앉아 조금 쉬었다.

 

점필재 루트인 고열암에서 일강(一岡)을 지나 동부(洞府)에서 점심을 먹고 송대로 넘어가는 길에 지난 일들을 곰곰이 생각하니 '어떤 일이든 완전한 것은 없다.'라는 것이다. 스포츠 세계의 기록처럼 자신의 노력으로 다시 기록을 바꿀 수도 있지만, 후답자에 의해 깨질 수도 있다고 본다. 유람록 복원 역시 하나하나 알아가는 발견의 즐거움으로 만족해야 하고, 후답자들을 통해 오류가 바로잡히고 검증되어야, 완벽에 가까운 복원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구롱(九隴) 길(아홉 모롱이길)은 가야와 신라시대부터 찬왕봉을 오르는 사람들이 이용한 지리 동부의 천 년 고도(古道) 옛길다. 또한 조선 시대 선인들의 유람길은 대부분 이 구롱(九隴) 길과 연결이 된다는 것이다. 최근 두 분과 몇 차례 답사를 통해 유람록의 산길에 대한 이해가 넓어졌다. 그래서 유람록 길의 정보를 공유하는 차원에서 후답하는 분들이 검증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트랙을 빌려 산행기에 덧붙인다. 끝으로 감수재의 상류암~초령 루트와 점필재의 구롱 루트를 함께 개척한 산영(山影) 曺박사님과 토요산속 산행대장 칠성님, 미산 클럽의 Big3 소혼님과 그동안 답사를 함께했던 산친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끝.

 

※ 요약

1. 구롱 길(아홉 모롱이 길)은 어름터, 송대, 엄천, 오봉리 등으로 통하는 모든 유람록의 길과 연결됨.

2. 고열암~미타봉의 길이 있음. 미타봉에 사람이 머무를 수 있는 석굴 발견, 내부에 축대를 쌓아 석실을 조성함.

3. 김종직의 의논대 시에 '巖間指點小林禪 : 바위 사이 한 곳을 소림 선방이라고 가리키네'에서 소림 선방으로 추정됨.

4. 고열암에서 길이 진행되다가 벽송능선 가까이에서 상내봉 삼거리 안부와 미타봉 안부로 가는 길이 두 갈래로 갈라짐.

 

김종직의 유두류록에 나오는 동부(洞府)와 구롱(九隴)에 대하여 : http://blog.daum.net/lyg4533/16488278

 

 

▶ 1일 차

 

당산나무
적조암
돌배나무(경남 함양군 휴천면 운서리 산 1257번지 지목 도로)
지장사 샘터
지장사 터 추정(경남 함양군 휴천면 운서리 산 122번지 지목 임야)
산뽕나무 거목
환희대 I
환희대 II
先涅庵(선열암)
古涅庵(고열암)
상내봉 안부 상 허리길 숯가마터
상내봉 안부 상 허리길 돌 포장
상내봉 안부 상 허리길
미타봉 안부 일강 시그널 바위
미타봉 안부 상 허리길 돌 포장
고열암 일몰
宿古涅庵(숙고열암)

▶ 2일 차

 

독녀암(노장대)
미타봉(의논대 시에 나오는 소림선방으로 추정 : 석굴 내부에 축대를 쌓은 석실이 있음)
대형 숯가마터
미타봉에서 석실 전망대에서 바라본 의논대와 고열암
일강 바위
도사목(倒死木)
사립재골 집터
사립재골 동부(洞府)
동부에서 청이당으로 가는 길목의 바위
자료제공 산영님

 

☞ 김종직의 유두류록과 기행시 : http://blog.daum.net/lyg4533/164882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