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산행기록

점필재 길 동부(洞府)에서 일강(一岡)을 넘어 고열암 가는 길

도솔산인 2020. 3. 23. 15:38

점필재 길 동부(洞府)에서 일강(一岡)을 넘어 고열암 가는 길 

 

 

▣ 일 시 : 2020년 03월 21일(토)~22일(일)

▣ 코 스 : 송대-벽송사 능선-사립재골-구롱(일강)-상허리길-고열암-송대-용유담

▣ 인 원 : 3명(송연목님, 덕자님)

▣ 날 씨 : 맑음

 

 

청이당에서 고열암까지 거꾸로 가는 점필재 길에서

자꾸 만해의 심우장이 생각나는 까닭은 어째서인지...

 

 

심우장(尋牛莊)

 

                만해 한용운(1878∼1944)

 

잃은 소 없건마는

찾을 손 우습도다

만일 잃을 씨 분명하다면

찾은 들 지닐소냐

차라리 찾지 말면

또 잃지나 않으리라.

 

 

심우장은 만해가 말년을 보냈던 집으로 성북동에 있다.
그는 이곳에서 입적했다. 조선총독부가 보기 싫다고 북향(北向)으로
지었다고 한다. 시제(詩題)의 뜻이 '소를 찾는 집'인데, 시 속에
<소>의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듯하다.
그러나 그의 시세계나 그의 삶으로 보면 일제 강점기 아래 조국의 상실이나

그 마음을 찾는 의미로 보아도 좋을 듯하다.


이 종우( 시인 / www.ilovepoem.co.kr)

 

 

▶ 관련 자료 : 1472년 김종직의 유두류록(최석기 외)

 

○  「15일(기묘). 동이 틀 무렵에는 날씨가 더욱 흐렸다. 주지가 말하기를 "빈도(貧道)가 이 산에 오래 머물렀는데, 구름의 형세로 보아 오늘은 반드시 비가 오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기뻐서 짐꾼을 줄여 나머지는 돌려보내고 절을 나와 곧바로 길을 떠났다. 푸른 넝쿨 우거진 수풀 속에는 저절로 죽은 큰 나무가 길에 쓰러져 다리가 되었고, 반쯤 썩은 것은 가지가 땅에 걸쳐 있어 지나갈 때 말을 탄 것처럼 출렁거렸다. 몸을 구부리고 쓰러진 나무 밑으로 빠져나와 한 등달(一, 벽송사 능선)를 지났다.

 

[원문]己卯黎明益陰翳寮主云貧道久住此山以雲卜之今日必不雨余喜减擔夫遣還出寺卽行蒼藤深菁大木之自斃者顚仆于磎徑因爲略彴其半朽者枝條猶拒地若行馬然挽出其下

 

해공이 말하기를 "여기가 아홉 고개(九隴) 중에서 첫번째 고개입니다"라고 하였다. 연달아 서너 고개를 지나자 널찍한 곳(洞府)이 나왔는데, 주위가 넓고 그윽하였다. 나무가 해를 가리고 담쟁이넝쿨과 칡넝쿨이 뒤얽혀 있으며, 시냇물이 돌에 부딪히며 굽이쳐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동쪽은 산등성이지만 그렇게 높지는 않고, 서쪽은 지세가 점점 낮아져 20리를 가면 의탄촌(義呑村)에 이른다. 만약 닭·개·소·송아지를 끌고 이곳에 들어와 나무를 베어내고 밭을 개간하여 기장·찰벼·삼·콩 등을 심는다면 무릉도원(武陵桃園)보다 못할 것이 없으리라. 내가 지팡이로 시냇가의 돌을 두드리면서 유극기를 돌아보고 말하기를 "아, 어느 때나 그대와 함께 은둔해 이런 곳에서 노닐어볼까?"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바위에 낀 이끼를 긁어내고 바위 한복판에 이름을 새기게 하였다.

 

[원문] 空云九隴之第一也連度三四得一洞府寬閑奧邃樹木蔽日蘿薜蒙絡溪流觸石曲折有聲其東山之脊也而不甚峭峻其西地勢漸下行二十里達于義呑村若携鷄犬牛犢以入刊木墾田以種黍稌麻菽則武陵桃源亦不多讓也余以杖叩澗石顧謂克己曰嗟乎安得與君結契隱遁盤旋於此耶使之刮苔蘚題名于巖腹

 

☞ 구롱(九隴) : 아홉 모롱이(모랭이)를 가리킴. 동부(洞府) : 도교(道敎)에서 말하는 신선이 사는 곳.

 

용유담
송대에서 바라본 미타봉
장암 장기판
송대의 지리 은자님댁
돌 포장 길
케른(Cairn)
벽송사 능선 상 허리길 산막 기도터(구들과 샘이 있음)
사립재골 집터I
사립재골 집터II
일몰
사립재골 상단
사립재
케른II
벽송사 능선 상 허리길 시그널 바위 I
벽송사 능선 상 허리길 시그널 바위 II
오뚝이 바위(향로의 모양)
전체가 와불산 미타봉(부처님) 앞에 향로(향로봉)가 놓인 형국으로 이해함(사진 임보선님)
고열암
독녀암(노장대)
의논대에서 바라본 미타봉(이곳이 一岡 : 첫번째 등달)
약작(略彴) : 통나무 다리 홈
용유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