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필재 길 동부(洞府)에서 일강(一岡)을 넘어 고열암 가는 길
▣ 일 시 : 2020년 03월 21일(토)~22일(일)
▣ 코 스 : 송대-벽송사 능선-사립재골-구롱(일강)-상허리길-고열암-송대-용유담
▣ 인 원 : 3명(송연목님, 덕자님)
▣ 날 씨 : 맑음
청이당에서 고열암까지 거꾸로 가는 점필재 길에서
자꾸 만해의 심우장이 생각나는 까닭은 어째서인지...
심우장(尋牛莊)
만해 한용운(1878∼1944)
잃은 소 없건마는
찾을 손 우습도다
만일 잃을 씨 분명하다면
찾은 들 지닐소냐
차라리 찾지 말면
또 잃지나 않으리라.
심우장은 만해가 말년을 보냈던 집으로 성북동에 있다.
그는 이곳에서 입적했다. 조선총독부가 보기 싫다고 북향(北向)으로
지었다고 한다. 시제(詩題)의 뜻이 '소를 찾는 집'인데, 시 속에
<소>의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듯하다.
그러나 그의 시세계나 그의 삶으로 보면 일제 강점기 아래 조국의 상실이나
그 마음을 찾는 의미로 보아도 좋을 듯하다.
이 종우( 시인 / www.ilovepoem.co.kr)
▶ 관련 자료 : 1472년 김종직의 유두류록(최석기 외)
○ 「15일(기묘). 동이 틀 무렵에는 날씨가 더욱 흐렸다. 주지가 말하기를 "빈도(貧道)가 이 산에 오래 머물렀는데, 구름의 형세로 보아 오늘은 반드시 비가 오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기뻐서 짐꾼을 줄여 나머지는 돌려보내고 절을 나와 곧바로 길을 떠났다. 푸른 넝쿨 우거진 수풀 속에는 저절로 죽은 큰 나무가 길에 쓰러져 다리가 되었고, 반쯤 썩은 것은 가지가 땅에 걸쳐 있어 지나갈 때 말을 탄 것처럼 출렁거렸다. 몸을 구부리고 쓰러진 나무 밑으로 빠져나와 한 등달(一岡, 벽송사 능선)를 지났다.
[원문]己卯。黎明益陰翳。寮主云。貧道久住此山。以雲卜之。今日必不雨。余喜。减擔夫遣還。出寺。卽行蒼藤深菁난中。大木之自斃者。顚仆于磎徑。因爲略彴。其半朽者。枝條猶拒地。若行馬然。挽出其下。度一岡。
해공이 말하기를 "여기가 아홉 고개(九隴) 중에서 첫번째 고개입니다"라고 하였다. 연달아 서너 고개를 지나자 널찍한 곳(洞府)이 나왔는데, 주위가 넓고 그윽하였다. 나무가 해를 가리고 담쟁이넝쿨과 칡넝쿨이 뒤얽혀 있으며, 시냇물이 돌에 부딪히며 굽이쳐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동쪽은 산등성이지만 그렇게 높지는 않고, 서쪽은 지세가 점점 낮아져 20리를 가면 의탄촌(義呑村)에 이른다. 만약 닭·개·소·송아지를 끌고 이곳에 들어와 나무를 베어내고 밭을 개간하여 기장·찰벼·삼·콩 등을 심는다면 무릉도원(武陵桃園)보다 못할 것이 없으리라. 내가 지팡이로 시냇가의 돌을 두드리면서 유극기를 돌아보고 말하기를 "아, 어느 때나 그대와 함께 은둔해 이런 곳에서 노닐어볼까?"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바위에 낀 이끼를 긁어내고 바위 한복판에 이름을 새기게 하였다.
[원문] 空云。此九隴之第一也。連度三四。得一洞府。寬閑奧邃。樹木蔽日。蘿薜蒙絡。溪流觸石。曲折有聲。其東。山之脊也。而不甚峭峻。其西。地勢漸下。行二十里。達于義呑村也。若携鷄犬牛犢以入。刊木墾田。以種黍稌麻菽。則武陵桃源。亦不多讓也。余以杖叩澗石。顧謂克己曰。嗟乎。安得與君結契隱遁。盤旋於此耶。使之刮苔蘚。題名于巖腹。
☞ 구롱(九隴) : 아홉 모롱이(모랭이)를 가리킴. 동부(洞府) : 도교(道敎)에서 말하는 신선이 사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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