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점필재길

김종직의 유두류록에 나오는 동부(洞府)와 구롱(九隴)

도솔산인 2020. 4. 1. 06:35

김종직의 유두류록에 나오는 동부(洞府)와 구롱(九隴)

 

 

1472년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 답사를 하면서 대부분의 지명을 이해하였는데, 오랫동안 유독 동부(洞府)구롱(九隴)을 풀지 못하였다. 지난번 박여량 길인 상류암에서 초령을 연결한 후에 지리 동부에서 마지막 남은 숙제이기도 하다. '천 번을 갈아야 비로소 거울이 밝아진다.(千磨鏡始明)'라는 퇴계 선생의 말씀대로 지난 10여 년 동안 아마도 수백 번 가까이 생각한 어휘일 것이다. 내가 아둔해서 글자만 알고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여 그 답답함을 풀기 위해서 나에게 수많은 질문을 던졌고 그것은 곧바로 답사 산행으로 이어졌다. 이렇게 하여 의문을 풀어가는 과정은 내 삶의 충전재이기도 하다. 점필재 길과 박여량 길에서 마지막 벽에 부딪혀 시간을 보낼 즈음, 뜻밖에 희연(喜緣)을 만나 상류암에서 초령 루트, 동부(洞府)와 구롱(九隴)을 함께 풀게 되었다.

 

김종직 선생은 1472년 4월 14일 고열암에서 자고 다음 날 아침 날씨가 흐리자, 고열암 요주(寮主)(*)가 '오늘은 필시 비가 오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여 담부(擔夫, 짐꾼)를 일부 돌려보내고, 다음날 아침 고열암 중에게 시 한 수를 주고, 상 허리길로 (*)미타봉 옆 일강(一岡, 사진 참조)을 넘어 사립재골의 동부(洞府)를 지나 아홉 모롱이[구롱(九隴)] 길을 돌고 돌아 천왕봉을 향해 유람에 나선다.

 

注 *요주(寮主) : 선사(禪寺)의 소임(所任). 요원(寮元)을 보좌(補佐輔佐)하는 소임(所任)으로, 한 달반 달10일씩 교대함. (*)향로봉 : 1472년 김종직의 유두류록 에는 위치가 모호하지만, 강계형(1875~1936)의 양화대산수록(陽和臺山水錄)에는 명확하게 기술되어 있음(사립재에 이르렀다가 향로봉이 되었고, 정수를 뽑아 우뚝 솟았으니, 이는 군 남쪽 엄천 남쪽의 조산이 된다.) (*)미타봉 : 1472년 김종직의 유두류록. 부처의 형상 아미타불에서 미타봉이라고 한 것으로 이해함. 

 

 

贈古涅僧(고열암 중에게 주다)

 

求名逐利兩紛紛 : 명예를 구하고 이익을 좇는 일 둘 다 어지러우니

緇俗而今未易分 : 지금은 승려와 속인을 분간하는 것이 쉽지 않구나

須陟頭流最高頂 : 모름지기 두류산의 최고봉 천왕봉에 올라보게나

世間塵土不饒君 : 세간의 흙먼지는 그대를 배부르게 하지 못한다네

 

紛紛 : 어지럽다. : 검은옷치, 승복치, 승려, 중치

 

 

고열암에서 쑥밭재로 이어지는 상 허리 길인 아홉 모랭이(구롱) 길로 가려면, 초입은 골로 몇 걸음 내려서서 사면 너덜지대를 지난다. 언덕 바위 위로 조금 올라서면 산죽밭이 이어지는데, 희미하게 길이 보인다. 계곡 허리길을 따라가면 점필재가 언급한 도사목(倒死木)의 약작(略彴, 통나무 다리)이 있었던 건 계곡을 건너 대형 숯가마터에 이르고, 경사지를 가로질러 능선에 오르면 위로는 향로봉(강계형 양화대사수록, 고열암과 벽송사와 사립재 삼거리)이고, 아래로는 미타봉과 벽송사로 이어지는 등달길을 만난다. 경사지 길은 오래 묵어 흙이 많이 흘러내려 길의 흔적이 희미하다. 첫 번째 등달[일강(一岡, 벽송사 능선]을 넘으면서 안내한 승려 해공이 점필재에게 '구롱(九隴) 중 첫 번째입니다.'라고 설명한다. 이곳에서 미타봉은 바로 지척이다.

 

일강(一岡)에서 사립재골 방향 상 허리길로 진입하면, 길은 완만하게 이어지고 숯가마터를 만난다. 여기에서 아래로 진행하다가 너덜길을 건너고 사립재골 집터를 지나 사립재골 상부인 동부(洞府)에 닿는다. 동부(洞府)는 사립재골 고원지대의 습지 주변을 말한다. 유두류록에 '그 동쪽은 산등성이인데 그리 험준하지 않았고, 그 서쪽으로는 지세가 점점 내려가는데, 여기서 20리를 더 가면 의탄촌(義呑村)에 도달한다. 만일 닭과 개, 소나 송아지(鷄犬牛犢)를 데리고 들어가서 나무를 깎아내고 밭을 개간하여 기장, , , 콩 등을 심어 가꾸고 산다면 무릉도원(武陵桃源) 보다 그리 못하지는 않을 듯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동부(洞府)는 도교에서 '신선이 사는 곳'으로 '너덜이 없고 평탄하고 넓은 지형으로, 마을을 형성하여 사람이 농사를 짓고 살 수 있는 곳'을 말한다.

 

여기에서 나오는 구롱(九隴)의 의미도 새롭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아홉 언덕'이지만 순수한 우리말인 '아홉 모롱이(아홉 모랭이)'를 한자로 한역한 생소한 어휘이다. '아홉 모롱이'는 사투리로 '아홉 모랭이', 또는 '아홉 모래이', '아홉 모티이'라고도 하는데, '산기슭의 쏙 내민 귀퉁이'라는 의미이다. 롱(隴)은 (언덕부)+龍(용용, 언덕롱)으로 '용의 형상처럼 구불구불한 산모롱이 언덕 길'을 뜻한다. 순수한 우리말인 '모롱이'를 롱(隴)으로 기록하고 그것을 다시 우리말로 번역하면서 본래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등산의 개념에서 생각한 산길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 그 한계였던 것 같다. 산촌 사람들의 생활길은 가축(牛犢, 소나 송아지)을 끌고 또는 짐을 지고 이동하기 때문에 가장 편안한 길이어야 하고, 시간과 거리 또한 단축해야 하니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혼합(混合)된 지혜가 들어있다고 볼 수 있다.

 

김종직 선생이 동부(洞府)에서 청이당에 이르는 길도 상 허리길인 구롱(九隴) 길을 이용하였다. 모롱이를 돌 때마다 연이어 실 계곡이 나오고 너덜지대는 돌을 깔아 포장을 하였으며, 쓰러진 고목나무와 거대한 바위가 그림처럼 즐비하게 펼쳐진다. 집터를 지나 어름터에서 독바위로 오르는 능선을 넘어 같은 고도에서 평탄한 지형으로 상 허리길은 계속 이어진다. 송대 마을 지인(知人)의 전언(傳言)에 따르면 '그 길은 독녀암에서 시작하여 쑥밭재로 이어지는데, 지금도 산 아래 마을 주민들이 나물을 뜯을 때 가끔 왕래하는 길'이라고 한다.

 

구롱(九隴) 길은 어름터에서 쑥밭재로 오르는 길과 연결된다. 마지막 구롱(九隴)은 쑥밭재로 올라오는 길과 동부 능선이 만나는 부근으로 추정한다. 점필재는 이곳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아홉 고개를 다 지나고 산등성이를 따라 걸어가니 지나는 구름이 갓을 스쳤다. 풀과 나무들은 비가 내리지 않았는데도 젖어 있었다. 그제야 비로소 하늘과 멀지 않음을 알았다. 몇 리를 못 가서 산줄기가 갈라지는데, 그 산등성이를 따라 남쪽으로 가면 바로 진주 땅이다. 안개가 자욱하여 주위를 조망할 수 없었다. 청이당(淸伊堂)에 도착하였는데, 판자로 지은 집이었다. 네 사람이 당 앞의 시냇가 바위를 차지하고 앉아 조금 쉬었다.김종직 선생은 상 허리길로 구롱(九隴)를 지나 쑥밭재를 넘어 청이당에 닿는다. 이렇게 해서 김종직의 유두류록에 나오는 지명과 점필재 루트는 마무리가 된다. 아울러 조만간 마소의 이동 경로를 파악하면 화랑의 우두머리 영랑(永郞)의 길과 마암의 유래도 눈에 보일 것 같다. 끝.

 

 

고열암
의논대에서 바라본 미타봉

 

議論臺(의논대)

 

兩箇胡僧衲半肩 : 참선승 두 사람이 장삼을 어깨에 반쯤 걸치고

巖間指點小林禪 : 바위 사이 한 곳을 소림선방 이라고 가리키네

斜陽獨立三盤石 : 석양에 삼반석(의논대) 위에서 홀로 서있으니

滿袖天風我欲仙 : 소매가득 천풍이 불어와 나도 신선이 되려하네.

 

 

議論臺(의논대) 시에 나오는 소림선방에 대하여

 

미타봉 뒤에는 석굴이 있는데 석실 내부에 축대를 쌓은 흔적이 있다. 김종직의 '의논대' 시 2구에 '바위 한 곳을 소림선방이라고 가리키네.'라는 시구의 '소림선방'으로 추정된다. 그동안 막연하게 시에 나오는 '바위 사이 한곳'을 미타봉으로 생각했는데, 석굴 내부에 들아가 석실을 확인하고 밖으로 나가 조망 바위에 서니, 의논대와 고열암이 코 앞에 들어왔다. 또한 암봉 아래 일부 남아있는 석축은 수행 공간에 외부인의 접근을 막는 담장으로 이해가 되었다.  大學에 이르기를 '만물에는 본말(本末)이 있고, 모든 일에는 시종(始終)이 있으니 선후(先後)를 알면 도에 가까울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정말 유람록의 道에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선 것인가? 나는 도통 알지 못하겠도다! 마침 점필재 길의 시작과 끝을 함께한 광광자(狂狂子) 소혼(銷魂)의 얼굴을 바라보니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석실 밖 조망 바위에서 바라본 의논대와 고열암
돌 포장 길 흔적
청이당에서 사립재로 이어지는 아홉모랭이길(九隴)
청이당 터 석축
청이당 앞 계석

 

내가 오룩스 멥을 사용하지 않아 답사를 함께한 산영님과 칠성님에게 트랙 자료를 받았다.  

 

고열암에서 동부(산영님)
사립재(동부)에서 쑥밭재

 

▶ 관련 자료 : 1472년 김종직의 유두류록

 

15, 기묘일. 새벽에는 날이 더욱 흐려졌는데, 요주가 말하기를, “빈도(貧道)가 오랫동안 이 산에 거주하면서 구름의 형태로써 점을 쳐본 결과, 오늘은 필시 비가 오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기뻐하며 짐을 싸는 인원을 줄여서 돌려보내고 절에서 나와 곧바로 푸른 등나무 덩굴이 깊숙이 우거진 숲 속으로 나아갔다. 큰 나무가 저절로 말라죽어 좁은 길에 넘어져 있으면서 외나무다리 역할을 하였는데 절반쯤 썩어 있는 가지가 그래도 땅을 지탱하고 있어 행마(行馬)와 같은 모습이어서,, 머리를 숙이고 그 밑으로 지나갔다.

 

[원문]

己卯黎明益陰翳寮主云貧道久住此山以雲卜之今日必不雨余喜减擔夫遣還出寺卽行蒼藤深菁大木之自斃者顚仆于磎徑因爲略彴其半朽者枝條猶拒地若行馬然挽出其下

 

그리하여 한 언덕을 지나니, 해공이 말하기를, “이것이 아홉 고개, 바로 구롱(九隴) 가운데 첫 번째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어서 세 번째, 네 번째 언덕을 지나 한 동부(洞府)를 만났는데, 지경이 넓고 조용하고 깊고 그윽하며, 수목들이 태양을 가리고 등나무 덩굴이 덮이고 얽힌 가운데 계곡 물이 돌에 부딪혀 굽이굽이 소리가 들렸다. 그 동쪽은 산등성이인데 그리 험준하지 않았고, 그 서쪽으로는 지세가 점점 내려가는데 여기서 20리를 더 가면 의탄촌(義呑村)에 도달한다. 만일 닭과 개, 소나 송아지를 데리고 들어가서 나무를 깎아내고 밭을 개간하여 기장, , , 콩 등을 심어 가꾸고 산다면 무릉도원(武陵桃源)보다 그리 못하지는 않을 듯했다. 그래서 내가 지팡이로 계곡의 돌을 두드리면서 유극기를 돌아보고 이르기를, “, 어떻게 하면 그대와 함께 은둔(隱遁)하기를 기약하고 이곳에 와서 노닐 수 있단 말인가?”라고 하고는, 그에게 바위의 한가운데에 이끼를 긁어내고 이름을 쓰도록 하였다.

 

[원문]

度一空云九隴之第一也連度三四得一洞府寬閑奧邃樹木蔽日蘿薜蒙絡溪流觸石曲折有聲其東山之脊也而不甚峭峻其西地勢漸下行二十里達于義呑村若携鷄犬牛犢以入刊木墾田以種黍稌麻菽則武陵桃源亦不多讓也余以杖叩澗石顧謂克己曰嗟乎安得與君結契隱遁盤旋於此耶使之刮苔蘚題名于巖腹

 

구롱을 다 지나서는 문득 산등성이를 타고 가는데, 가는 구름이 나직하게 삿갓을 스치고, 초목들은 비를 맞지 않았는데도 축축이 젖어 있으므로, 그제야 하늘과의 거리가 멀지 않음을 알았다. 이로부터 몇 리 가지 않아 등성이를 돌아 남쪽으로 가면 바로 진주(晉州) 땅이다. 그런데 안개가 잔뜩 끼어서 먼 곳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청이당(淸伊堂)에 이르러 보니 지붕이 판자로 만들어졌다. 우리 네 사람은 각각 청이당 앞의 시내 바위를 차지하고 앉아서 잠깐 쉬었다. 이로부터 영랑재(永郞岾)에 이르기까지는 길이 심하게 가팔라서, ‘봉선의기(封禪儀記)’에서 말한, “뒷사람은 앞사람의 발 밑을 보고, 앞사람은 뒷사람의 정수리를 보게 된다.”는 것처럼, 나무뿌리를 부여잡아야만 비로소 오르내릴 수가 있었다. 그래서 이미 한낮이 지난 뒤에서야 비로소 영랑재로 올라갔다. 함양(咸陽)에서 바라보면 이 봉우리가 가장 높아 보이는데, 여기에 와서 보니, 다시 천왕봉(天王峯)을 올려다보게 되었다. 신라(新羅) 때 화랑(花郞)의 우두머리였던 영랑이 3천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산과 물을 찾아 노닐다가 일찍이 이 봉우리에 올랐었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 한 것이다.

 

[원문]

九隴便由山脊而行行雲低拂篢子草樹不雨而濕始覺去天不遠也不數里循脊南晉州之地也烟霧瀰漫不能眺望淸伊堂以板爲屋四人各占堂前溪石上小憩自此至永郞岾道極懸危正如封禪儀記所謂後人見前人履底前人見後人頂攀挽樹根始能下上日已過午始登自咸陽望此峯最爲峻絶到此則更仰視天王峯也永郞者新羅花郞之魁領三千徒遨遊山水甞登此峯故以名焉

 

출처 : 한국문화콘텐츠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