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점필재길

1472년 김종직 유두류록의 점필재길 길라잡이(5)

도솔산인 2020. 1. 18. 01:00

 

1472년 김종직 유두류록의 점필재길 길라잡이(5)

 

 

5. 산에서 내려오다[영신사-함양관아]

 

18, 임오일. 영신사를 출발하여 칠선봉 쪽으로 영신봉과 영신대를 조망할 수 있는 나지막한  바위가 곧은재 능선(한신능선×) 갈림길이다. 그 초입에 1-39 표지목이 있다. 나는 처음부터 유두류록에서 '徑由直旨而下'의 문구를 '곧바로 지름길을 따라 내려오는데,' 로 이해했다. 김종직 선생은 하산길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나무뿌리를 잡고 돌 모서리를 디뎌 가며 내려가는데 수십 리의 길이 이와 같았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얼굴을 돌려 바라보니, 천왕봉이 바로 지척에 있는 듯하였다.』실제로 이곳으로 가파른 길을 내려오다 보면, 천왕봉은 물론 중봉 하봉 영랑대까지 한눈에 들어오고, 계곡이 가까워 올수록 물소리가 우렁차다. 점필재 선생은 계곡 굽은 물가에서 땀을 씻은 후, '下山吟'이란 오언율시를 남긴다. 마부들이 골짜기 입구 사당이 있는 곳에 말을 끌고 와 기다리고 있어 옷을 갈아입고 말을 타고 실덕리에 이르러 길을 안내한 승려(해공과 법종)와 작별을 한다. 그리고 금계에서 조태허, 유극기, 한백원은 용유담으로 유람하러 가고, 김종직 선생은 등구재를 넘어 함양 관아로 돌아온다.  

 

☞ 코스 : 영신사-바른재능선-백무동-실덕탄 등구재-함양관아

 

 

下山吟[산에서 내려와 읊다]

 

杖藜纔下山 : 명아주 지팡이 짚고 겨우 산에서 내려오니

澄潭忽蘸客 : 갑자기 맑은 연못이 산객을 담그게 하네

彎碕濯我纓 : 굽은 물가에 앉아 내 갓끈을 씻으니

瀏瀏風生腋 : 시원한 바람이 겨드랑이에서 나오는구나.

平生饕山水 : 평소 산수 욕심을 부렸는데

今日了緉屐 : 오늘은 나막신 한 켤레가 다 닳았네

顧語會心人 : 여정을 함께한 사람들에게 돌아보고 말하노니

胡爲赴形役 : 어찌 육체의 노역에 나아갔다고 하겠는가?

 

 

遊頭流錄 '徑由直旨而下'의 國譯에 대하여 : blog.daum.net/lyg4533/16486382

 

 

곧은재 능선 진입 지점[초입에 1-39 표지목]

 

 

 

 

 

 

 

下山吟에 나오는 갓끈을 씻은 굽은 물가(彎碕)

 

 

5. 산에서 내려오다

 

18, 임오일.

일찍 일어나 문을 여니, 섬진강(蟾津江)에 조수(潮水)가 넘쳐났는데, 자세히 보니 남기(嵐氣)가 평평하게 펼쳐져 있었다. 밥을 먹고 절의 서북쪽으로 내려와 고개 위에서 쉬면서 반야봉을 바라보니, 대략 60여 리쯤 되는 것 같았다. 이제는 두 발이 다 부르트고 근력이 다하여, 구경하고 싶어도 억지로 할 수가 없어서 지름길로 직지봉(直旨峯)을 돌아 내려오는데, [徑由直旨而下 : 곧바로 지름길을 따라 내려오는데, 直指로 봄] 길이 나아갈수록 가팔랐다. 나무뿌리를 잡고 돌 모서리를 디뎌 가며 내려가는데 수십 리의 길이 이와 같았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얼굴을 돌려 바라보니, 천왕봉이 바로 지척에 있는 듯하였다. 이곳에는 대나무 끝에 간혹 열매가 있어 사람들이 따서 가져갔다. 백 아름이 될 만한 큰 소나무들이 깊은 골짜기에 즐비하게 서 있었으니, 평소에 보지 못한 것들이었다. 높은 기슭을 내려와서 보니, 두 골짜기의 물이 합쳐지는 지점에 숲과 산줄기를 진동시킬 만한 물소리가 뿜어 나왔으며, 백 자 정도 깊은 맑은 못에는 고기들이 이리저리 헤엄쳐 놀았다. 우리 네 사람들은 여기서 손에 물을 떠서 양치질을 하고 비탈길을 따라서 지팡이를 짚고 갔는데 즐거운 여정이었다.

 

[원문]

壬午. 早起開戶. 見蟾津潮漲. 久視之. 乃嵐氣平鋪也. 食罷. 竝寺之西北. 憩于嶺上. 望般若峯. 約六十餘里. 而兩足盡蠒. 筋力已竭. 雖欲往觀. 不能強也. 徑由直旨而下. 道益懸危. 攀樹根. 履石角. 數十餘里. 皆此類也. 面東而仰視. 天王峯若咫尺矣. 竹梢或有實. 皆爲人所採. 松之大者. 可百圍. 櫛立嵌巖. 皆平日所未見. 旣下峻趾. 二壑之水所合. 其聲噴放. 振搖林麓. 澄潭百尺. 遊魚濈濈. 余四人掬水漱齒. 沿崖曳杖而行. 甚可樂也.

 

골짜기 입구에는 야묘(野廟)가 있었는데, 마부가 말을 끌고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옷을 갈아입고 말에 올라 실택리(實宅里)에 이르니 부로(父老) 두어 사람이 길 아래에서 맞이하여 절하면서 말하기를, “사군(使君)께서 산을 유람하는 사이 아무 탈도 없었으니, 감히 하례 드립니다.” 라고 하므로, 나는 그제 서야 백성들이 내가 유람하느라 일을 접어두었다 하여 나를 허물하지 않은 것을 보고 기뻐하였다. 해공은 군자사로 가고, 법종은 묘정사(妙貞寺)로 가고, 조태허, 유극기, 한백원은 용유담(龍游潭)으로 유람하러 가고, 나는 등구재(登龜岾)를 넘어 바로 군재(郡齋)로 돌아왔는데, 나가 유람한 지 5일 만에 가슴 속과 용모가 트이고 단정해짐을 갑자기 느끼게 되어, 처자(妻子)나 이서(吏胥)들이 나를 보더라도 전일과 다를 것 같았다.

 

[원문]

谷口有野廟. 僕人以馬先候焉. 遂更衣乘馬. 實宅里. 父老數輩. 迎拜道左云. 使君遊歷無恙. 敢賀. 余始喜百性不以優遊廢事罪我也. 解空. 往君子寺. 法宗. 往妙貞寺. 太虛克己百源. 往遊龍遊潭. 余則踰登龜岾. 徑還郡齋. 出遊纔五日. 而頓覺胸次神觀. 寥廓蕭森. 雖妻孥吏胥視我. 亦不似舊日矣.

 

! 두류산처럼 높고 장엄하고 빼어난 산이 중원(中原)에 있었더라면 반드시 숭산(嵩山)과 태산(泰山)보다 먼저 천자(天子)가 올라가 금니(金泥)를 입힌 옥첩 옥검(玉牒玉檢)을 봉()하여 상제(上帝)에게 승중(升中)하였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응당 무이산(武夷山), 형악(衡嶽)에 견주어서, 저 박아(博雅)하기로는 한 창려(韓昌黎), 주 회암(朱晦庵), 채서산(蔡西山) 같은 이나, 수련(修煉)을 한 이로는 손흥공(孫興公) , 여동빈(呂洞賓) , 백옥섬(白玉蟾) 같은 이들이 서로 연달아 이 산중을 노닐며 거처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유독 군적(軍籍)을 도피하여 부처를 모신다는 용렬한 사내나 도피한 천인들의 소굴이 되어 있으니, 오늘날 우리 들이 한 차례나마 산에 올라 유람하여 그나마 평소에 원하던 것에 보답하기는 했지만, 세속의 일들에 급급하여 두루 청학동을 찾아보고 오대(五臺)를 유람하여, 기이하고 그윽함을 찾아보지 못했으니, 어찌 이 산의 불우(不遇)이겠는가? 자미(子美)방장삼한(方丈三韓)’의 시구를 길이 읊조리니, 정신이 날아오름을 스스로 느끼지 못하겠구나. 임진년 중추(仲秋) 5일 후에 쓰노라.

 

[원문] 

嗚呼. 以頭流崇高雄勝. 在中原之地. 必先嵩岱. 天子登封金泥玉牒之檢. 升中于上帝. 不然. 則當比之武夷衡岳. 博雅如韓昌黎朱晦菴蔡西山. 修煉如孫興公呂洞賓白玉蟾. 聯裾接踵. 彷徉棲息於其中矣. 今獨爲庸夫逃隸竄籍學佛者之淵藪. 吾輩今日. 蹤得登覽一遭. 僅償平素之願. 而繩墨悤悤. 不敢訪靑鶴歷五臺. 遍探幽奇焉. 夫豈玆山之不遇耶. 長詠子美方丈三轉之句. 自不覺神魂之飛越也. 歲壬辰仲秋越五日. .

 

 

1472년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을 좇아 점필재 길을 답사하게 된 계기는 영신사지청학연못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하였다. 나 또한 유람록 답사를 처음 시작할 때에는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다. 여러 차례 수정과 보완을 거듭하였지만, 나의 답사 기록에도 당연히 오류가 있을 것이다. '후생가외(後生可畏)라.'라고 하였으니, 후답자들이 밝은 눈으로 크고 작은 오류를 바로잡아 주길 기대하면서 글을 맺는다. 끝으로 그동안 함께 답사한 산친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끝.

 

 

* 유람록 출처 : 한국문화콘텐츠 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