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0년 변사정의 유두류록
1. 지인들이 모여 두류산 유람을 떠나다.
나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고 타고난 자질이 어리석으며 성품이 거칠고 배움이 보잘것없어 세상에서 믿음을 받지 못해 그저 농사짓고 독서하는 것을 나의 일로 삼았다. 가정(嘉靖) 을묘년(乙卯年 1555년, 명종 10년) 봄에 두류산 도탄(桃灘)에 초가집을 짓고 아침엔 집을 나서 구름 낀 높은 곳에 있는 밭을 갈고, 날이 저물면 집으로 돌아와 책을 읽었다. 피곤하여 할 일이 없는 날이면 사슴과 더불어 사립문을 닫아걸고 한가하게 초가에서 누워 쉬었다. 이웃에 사는 노인이 때때로 채소와 술을 가지고 나의 초가에 와서 대접해 주었다. 생활이 적막하여 홀로 즐기며 돌아갈 줄 몰랐으니 학업은 더 서툴러져서 진척되기를 바랄 것도 없었다. 이처럼 이곳에서 홀로 즐기며 생활한 지가 수십 년은 되었다.
때는 만력(萬曆) 8년(선조 13년, 1580) 음력 4월 초3일 군회(君晦) 정염(丁焰), 사중(士重) 김천일(金千鎰), 계평(季平) 양사형(楊士衡) 대재(大哉) 하맹보(河孟寶) 등 여러 친구들이 백장사(白丈寺)에서 나를 찾아왔다. 나는 기쁘게 그들을 맞이하여 접대하였고 옛 정을 모두 풀었으며, 친구들은 이틀을 머물러 잤다. 군회 정염이 말하기를, “두류산은 곧 삼신산(三神山) 중의 하나이다. 뛰어난 선배들의 유람이 이미 시문이나 유기(遊記)에 모두 드러나 있다. 그런데 우리들이 만약 한 번 가서 경관을 감상한다면 한(韓), 정(鄭)의 유산록(遊山錄) 을 실제로 징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유산록을 보는 것보다는 몸소 실제 경관을 찾아가는 것이 나으니, 이제 그대들과 뜻을 같이하여 두류산을 맘껏 노닐어서 묵은 빚을 갚아 보도록 하세나.”라고 하였다.
이에 각자 대나무 지팡이 들고 짚신을 신고는 마침내 길을 나서 산을 내려가 논도랑이나 밭두둑을 따라 고불고불한 길을 가서 황계 폭포(黃溪瀑布)를 지나 환희령(歡喜嶺)을 넘었다. 지금껏 쭉 이어진 길이 20리인데, 모두 푸른 솔과 초록빛 넝쿨이었다. 밝은 바람이 옷깃 속으로 들어오고 정룡암(頂龍庵)에 도착하니 바위 사이로 이름 모를 꽃들이 피었다 떨어지고 골짜기엔 이름 모를 새가 오고갔다. 눈으로 경관을 바라보고 귀로 숲의 소리를 들으니 참으로 이곳은 신선이 사는 세계였다. 서로를 돌아보며 담소를 나누는데 날이 장차 저물려고 하였다. 여러 친구들과 함께 이 암자의 북당(北堂)에서 잤다.
[원문] 지인들이 모여 두류산 유람을 떠나다.
余早孤. 質鈍性踈學蔑. 不見孚於世. 以耕讀為業. 在嘉靖乙卯春. 構築茅屋於頭流之桃灘. 朝出而畊於雲. 暮歸而讀是書. 疲倦無事. 與麋鹿閑卧於柴門. 隣翁有詩持菜酒來. 饋於蓬戶. 生涯蕭條. 自樂而忘返. 學業踈鹵. 無望於進就. 如是而獨遨於斯間者. 盖數十年矣. 詩適 萬曆八年四月初三日. 丁焰君晦金千鎰士重楊士衡季平河孟寶大哉諸友. 自百丈寺來訪余. 余欣然激接. 叙盡舊情. 留宿二宵. 君晦曰頭流乃三山之一也. 而先輩名碩游觀. 已著於詠記中. 然吾儕若一番遊賞. 則韓鄭之錄可徵. 而况見錄不如躬探眞形. 則今與二三同志. 縱游頭流. 以償夙債. 各扶竹杖着芒鞋. 遂行下山. 經水畦. 邐迤而過黃溪瀑. 踰歡喜嶺. 連延二十里. 皆蒼松碧蘿. 淸風襲人. 至頂龍庵. 巖間開落不種花. 谷中去來難名鳥. 目遇耳得. 眞是仙界. 相與顧眄談笑. 日將夕矣. 與諸友共宿于是庵之北堂.
2. 용유담을 지나 두류암에 머물다.
○ 초6일에 아침밥을 급히 먹고 큰 내를 건너서 6, 7리를 가니 물이 콸콸 흐르고 산은 우뚝 솟아 있었다. 월락동(月落洞)을 거쳐 황혼동(黃昏洞)을 지나 작은 시내를 건너서 가는데 고기잡이 한 사람이 앞으로 나와 인사를 하였다. 살펴보니 일찍이 안면이 있는 자였다. 열 마리나 되는 물고기로 우리를 대접하겠다며 말하기를, “이 물고기는 산중의 진귀한 물건이 될 수 있으니, 이것을 여러 어른들께 대접해 드리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길을 안내하며 자기 집으로 가자고 하였다. 군회 정염이 말하기를, “다만 물고기를 대접한데서가 아니라 그의 말이 참으로 가상하다.”라고 하였다. 곧 그를 따라 몇 리를 가니 계곡 안에 인가가 두세 집 있었다. 닭이 울고 개가 짖으며 푸른 나무 사이로 흰 구름이 나오니 또한 절경이었다. 오후엔 옥련동(玉蓮洞)에 올라 영원암(靈源庵)에 이르렀다. 산이 깊어 세속과는 단절되었는데, 푸른 회나무와 초록빛 단풍이 비단 날개를 펼친 듯 사람을 가로질러 있었다. 여기서 조금 쉬었다가 날이 저물어 장정동(長亭洞) 김씨가 우거하는 집에서 투숙하였다. 초7일에 아침 일찍 밥을 먹고 출발하여 용유담(龍遊潭)을 지나 두류암(頭流庵)에 도착하였다. 층층의 벼랑이 깎아지를 듯 솟아 있고 절벽이 만 길 높이로 우뚝 서 있었다. 온갖 꽃이 다투어 피어나니 꽃향기가 계곡을 온통 뒤덮었다. 하루 종일 앉아서 완상하니 날이 저무는 것도 몰랐다. 마침내 선방(禪房)에 들어가 함께 잤다.
[원문] 용유담을 지나 두류암에 머물다.
○ 初六日. 促食越大川行過六七里. 水聲潺潺. 山容峨峨. 歷月落洞. 過黃昏洞. 越小溪而行. 一漁子進前而拜. 視之則乃曾有面雅者也. 以數十尾之魚慰余曰. 此足為山中貴物. 則以是供饋諸老夫云. 引路邀請. 君晦曰. 非直在物. 其言甚嘉. 卽隨行數里. 谷中有兩三人家. 鷄鳴犬吠. 出白雲綠樹中. 亦一絶境. 午後躋玉蓮洞. 抵靈源庵. 山深境絶. 蒼檜靑楓. 錦翼衡人. 少頃休憇. 暮投長亭洞金雅之寓舍. 留宿.初七日. 早食發行. 過龍遊潭. 至頭流庵. 層崖削出. 壁立萬仞. 百花爭發. 襲香一洞. 竟日坐玩. 不覺其暮遂入禪房. 共宿焉.
3. 천왕봉에 오르다.
○ 초8일 아침 일찍 밥을 먹고 자진동(紫眞洞)을 지나 바위를 잡고 지팡이를 날리며 천왕봉(天王峯) 에 올랐다. 이 날은 날씨가 매우 맑고 화창하여 시계가 막힘이 없었고 정신이 씻은 듯 상쾌하였다. 여러 친구들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우리들의 지금 유람은 참으로 장대하지 않은가?”라고 하였다. 여러 산들과 수많은 골짜기가 발아래로 펼쳐져 있고, 거대한 신령과 장대한 교룡(蛟龍) 이 자기의 집에 웅크리고 있는 듯했다. 한동안 머물러 있다가 머뭇머뭇하며 내려와 해진 산장에서 잤다.
[원문] 천왕봉에 오르다.
○ 初八日. 晨朝促喫. 過紫眞洞. 攀巖飛杖. 登天王峯. 是日也天氣淸朗. 極目無碍. 精神灑落. 顧謂諸友曰. 吾儕今日之㳺觀. 不亦壯乎. 羣山萬壑. 羅列膝下. 巨靈長蛟. 縮㐲其宅. 逗遛數頃. 躑躅而下. 投宿殘店.
4. 쌍계사에 머물다 돌아가다.
○ 초9일에 아침 일찍 밥을 먹고 출발하여 의신사(義神寺)에 도착해서 한 번 쉬었는데 겨우 양의 어깨뼈를 삶을 정도 로 잠깐이었다. 곧 성사동(聖獅洞)을 지나 신흥사(神興寺)에 도착하니, 승려 몇 명이 나와서 맞이하였다. 나는 후전(後殿)의 동쪽 방에서 밤새도록 승려와 얘기를 나누었는데, 무슨 봉우리와 어떤 계곡이 매우 빼어난 곳이라 언급하니, 귀로 듣는 것이 눈으로 보는 것보다 오히려 나았다. 초10일에 아침을 늦게 먹고 승려와 함께 골짜기 입구까지 나오니 기이한 바위 하나가 있는데 그 위에는 수십 명이 앉을 만했다. 그 옆에 큰 글씨로 세 글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푸른 이끼가 덮어서 자획이 분명하지는 않았다. 승려에게 묻기를, “저것은 누구의 글씨인가?”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소승은 사실 정확히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부터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의 글씨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승려는 앞으로 나와 인사를 하고는 절로 돌아갔다. 이어서 칠불암(七佛庵)에 가서 잠시 쉬었다가 쌍계사(雙溪寺)에 도착했다. 종 한명이 서쪽에서 와서 편지 한 통을 올리는데, 곧 군회 정염의 고향 집에서 보낸 급보였다.
○ 11일에 여러 친구들과의 훗날을 기약하고 헤어졌다. 도탄 거사(桃灘居士) 변사정(邊士貞) 이 기록하다.
[원문] 쌍계사에 머물다 돌아가다.
○ 初九日. 早喫行至義神寺. 得一憇. 纔熟羊胛. 便過聖獅洞. 至神興寺. 釋子數輩進前邀. 余於後殿之東. 竟夜與釋子言. 及某峯某洞竒絶處. 耳之所得. 猶勝於目所寓矣. 初十日晩朝與釋子出洞口. 有一竒巖. 上可坐數十人. 其傍有大書三字. 靑苔成紋. 字畫隱微. 謂釋子曰. 彼誰氏之書乎. 釋子對曰. 小僧其實未可的知. 然自來言崔孤雲書也云. 釋子拜前而歸. 因行七佛庵小憇. 至雙溪寺. 有一蒼頭自西而來. 獻一封書. 卽君晦家鄕之急報也.十一日. 曰與諸君留後約焉. 桃灘居士邊士貞記.
출처 :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최석기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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