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实踐人文

대원사 계곡 장항령과 장항동에 대하여

도솔산인 2020. 1. 4. 13:22

대원사 계곡 장항령과 장항동에 대하여


장항동(獐項洞)에 대한 기록은 남명 조식 선생의 유두류록에 처음 보이는데, 하달홍(1809~1887)장항동기에 장항동의 유래가 명확하게 나와 있다.금년 봄에 내가 두류산 동쪽을 유람하면서 장항동을 찾고자 하였는데, 산속의 노인들도 아는 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실망하여 대원암에 투숙하였다. 그런데 벽에 걸린 시를 보고서 비로소 이곳이 장항동임을 알았다. 대원암 앞에 장항치가 있는데 장항동이라는 이름은 아무래도 이 때문에 얻었을 것이다. <중략> 그러나 남명선생을 기다려 알려지게 된 것은 이 장항치가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려고 한 것은 아닐까. <중략> 그러나 사람들은 대원암만 알고 장항동을 알지 못하니, 또한 이 장항치의 불행이 아니겠는가. 선현들의 향기를 남긴 곳이 없어져 드러나지 않을까 두려워 이에 기록한다.하달홍은 장항동기에서 장항동의 지명이 세상에 처음 알려지게 된 것은 남명 조식 선생의 유두류록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다.


부사 성여신(1546~1632)이 편찬한 진양지 불우조(佛宇條)에 상류암에 대해서 『장항동(獐項洞) 위쪽에 있는데, 난후(亂後)에 중건(重建)하였다(在獐項洞上, 亂後重建)』라고 하였고, 산천조의 덕산동(德山洞) 지명에서는『서흘산(鉏屹山)으로부터 동쪽으로 흘러 상류암(上流菴)을 거쳐 장항동(獐項洞)에 이르고 남쪽으로 흘러 삼장천(三壯川)되어 살천(薩川)으로 더불어 양당촌(兩堂村) 앞에서 합하니 이를 덕천(德川)이라 이른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이를 종합하면 장항치에서 대원사와 유평마을까지 장항동을 지칭한다고 할 수 있다. 장항동을 대원동이라고도 하는데 그 기록은 찾지 못했고, 대원암 창건(1635년) 이후의 장항동의 동소이칭(同所異稱)이 아닌가 생각한다. 장항령은 글자 그대로 노루목이다. 장항령은 일반 백성들이 사이에 부르던 지명이 아니고, 남명을 흠모하는 경상우도 사족들 사이에서 기록으로 전해져 온 또 하나의 청학동으로 들어가는 관문이었던 것이다.




* 장항동에 대한 유람록의 기록 

이름

유람연도

유람록

비고

1

조식

1558년 이전

유두류록

장항동

2

하홍도

1616

유람시

丙辰八月與申處士尙溶遊獐項洞

3

하달홍

미상

장항동기

대원암, 장항동/장항치(1809~1877

4

허유

1877

두류록

장항령

5

박치복

1877

남유기행

장항령

6

김기주

미상

유람시

麞項洞(장항동)(1844~1882)

7

정재규

1887

두류록

장항령, 石杠(돌다리)


548(진흥왕 9) 연기(緣起)가 창건하여 평원사(平原寺)라 하였다. 그 뒤 폐사가 되었던 것을 1685(숙종 11) 운권(雲捲)이 옛터에 절을 짓고 대원암(大源庵)이라 하였으며, 1890(고종 27)구봉(九峰)이 대원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1685년 이전에는 대원암은 없었다.



장항령 추정지(경남 산청군 삼장면 평촌리 산 115-5번지)



자료제공 자리전차군단 <칠성>님


증정부인 밀양박씨유공비/도사강재순 부인남평문씨유공비



사진은 현재 대원교 건너기 직전의 석각으로 장항동으로 들어가는 옛길의 흔적을 가늠할 수 있다. 계곡(대원교) 중간에도 나무아미타불의 석각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데, 다음에 시간을 가지고 다시 답사를 해야 할 것 같다. 현재 도로를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은 금물이다. 1887년 정재규의 두류록에 나오는 석강(石杠 돌다리)은 대원사 주차장 직전의 복개한 다리 위치로 추정된다. 一丁 閔 선생님이 장항치를 찾는데 10년이 넘게 걸렸다고 하니, 옛 지명 하나를 찾고 고증하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지금이라도 검증되지 않은 지명을 지리산길 지도에 함부로 표기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명심하고, 결자해지하는 마음으로 그동안의 오류를 하나하나 확인하고 고쳐서 바로잡는 작업이 급선무임을 각성(覺醒)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