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왕봉의 망해정과 제석봉의 제석당과 중봉의 마암당
천왕봉의 망해정과 제석봉의 제석당 중봉의 마암당에 대한 기록은 1923년 '개벽 제34호 지리산보(1923년 4월 1일)'에 자세한 내용이 실려있다. '함양 군수 민인호가 함양명승고적보존회(보승회)를 조직하여 동군 유지 강위수(姜渭秀)는 등산객들의 편리를 위하여 天王峯에 망해정(望海亭)을 짓고, 박노익(朴魯翊)과 영원사승(靈源寺僧) 일동은 제석당(帝釋堂)을 건축하였으며, 이진우(李璡雨)와 벽송사승(碧松寺僧) 일동은 마암당(馬岩堂)을 건축하였는데 두 곳이 모두 중봉이다.[兩處는 皆 中峯 : 마천에서 오르는 자들은 제석봉을 中山이라고 하고, 엄천으로 오르는 사람들은 중봉을 中山이라고 함.(김종직의 유두류록)]이다.'라는 내용에서 천왕봉의 망해정과 제석봉의 제석당은 이론(異論)이 없어 관련 자료만 첨부하고, 중봉의 마암과 마암당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마암(중봉샘)에 대한 유람록의 기록은 1472년 김종직의 유두류록과 1610년 박여량의 두류산일록, 그리고 1825년 김선신의 두류전지에 나온다. 1871년 배찬의 유두류록에는 중봉 산막으로, 1922년 권도용의 방장산부에는 다시 마암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유람록의 코스와 내용의 정황상 중봉 샘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현 마암에 대한 유람록의 기록은 1610년 박여량은 행랑굴로 기록하고 있지만, 1871년 배찬은 마암 산막으로, 1877년 허유와 박치복은 개운암으로, 1924년 강계형은 보존사(保存社 *함양명승고적보존회)에서 이곳에 마암당을 지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마암은 유람록의 기록대로 본다면 중봉 샘의 구 마암과 현 마암이 두 곳에 존재하는 셈이다. 풍수를 하는 분들의 견해는 천왕봉 아래 마암은 천마(天馬)로 보고, 영랑대 아래 마암은 병마(兵馬)로 보고 있다. 두 곳 지형의 공통적인 점은 말안장 처럼 잘록한 안부(鞍部)의 아래에 샘이 있다는 것이다. 참고로 수의학을 전공한 산영님은 화랑의 우두머리인 영랑의 무리가 함양쪽에서 실제 현 마암까지 말을 끌고 올 수도 있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현재 중봉 샘이라는 이름은 1980년대 초에 김경렬 선생이 붙인 이름이다.(김경렬 선생의 다쿠멘타리르포 지리산I p32)
마암당의 위치에 대한 논란이 있었던 것은 '개벽 제34호 지리산보(1923년 4월 1일)'에 마암당을 중봉에 건축했다는 기록 때문이다. 하봉을 1472년 김종직과 1586년 양대박, 1611년 유몽인, 1849년 민재남은 소년대로 기록하고 있다. 하봉에 대한 지명은 1910년 배성호의 유두류록에 처음 나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봉이 중봉에서 독립 지명으로 기록된 이후인 1924년 강계형은 마암당의 위치를 하봉으로 언급하였고, 그보다 1년 전인 1923년 개벽 제34호 지리산보에 마암당이 중봉에 있다고 하였기 때문에 마암당의 위치가 혼란이 있었던 것 같다. 개벽 제34호 지리산보에서의 중봉(中山)은 하봉(소년대)은 물론 영랑대와 현 마암은 물론 쑥밭재, 청이당 지역을 아우르는 포괄적인 개념으로 이해한다면, 마암당의 위치는 더 이상 논란의 여지가 없을 것으로 본다. 어찌 되었든 마암은 유람록의 기록에 따르면 두 곳으로 구 마암은 현 중봉 샘이고, 현 마암은 1610년 박여량은 행랑굴, 1871년 배찬은 마암 산막, 1877년 허유와 박치복은 개운암, 1922년 함양군수 민인호가 조직한 함양명승고적보존회가 세운 마암당이 있었던 것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제석당의 석각과 마찬가지로 馬巖(마암)과 최근 발견된 方丈門(방장문) 석각 또한 1922년에 함양명승고적보존회에서 새긴 것으로 추정한다.
가. 개벽 제 34호 지리산보(1923년 4월 1일)
현재 咸陽郡守 閔麟鎬씨는 空殼의 名勝古蹟이나마 보존하랴고 保勝會를 조직하고 智異山을 세계에 소개하기 위하야 智異山誌를 葺輯 중이오, 同郡有志 姜渭秀씨는 遊山하는 人의 편리를 圖키 위하야 山上에 望海亭을 건축하고, 朴魯翊 及 靈源寺僧 一同은 帝釋堂을 건축하얏스며, 李璡雨 及 碧松寺僧 一同은 馬岩堂을 건축하야 (兩處는 皆 中峯) 本年 陽春佳節에 開山式을 行하랴 한다. 此가 本山의 幸이라 할지.
현재 함양 군수 민인호씨는 속이 빈 빈껍데기(空殼)의 명승고적이나마 보존하려고 보승회를 조직하고 지리산을 세계에 소개하기 위하여 지리산지를 편집중이오. 동군(함양군)의 유지 강위수(姜渭秀)씨는 산을 유람하는 사람들의 편리를 도모하기 위하여 산상(天王峯)에 망해정(望海亭)을 건축하고, 박노익(朴魯翊)과 영원사승(靈源寺僧) 일동은 제석당(帝釋堂)을 건축하였으며, 이진우(李璡雨)와 벽송사승(碧松寺僧) 일동은 마암당(馬岩堂)을 건축하여(兩處는 皆 中峯 두 곳은 모두 중봉) 금년 양춘가절(陽春佳節)에 개산식을 행하려고 한다. 이것이 본산의 다행(幸)이라 할지.
[개벽 지리산보 원문 : http://db.history.go.kr/id/ma_013_0330_0200]
나. 1924년 강계형의 두류록(頭流錄)
종자들이 말하기를, “전에 산에 오른 자들은 관을 벗고 나무를 끌어안고 바위를 끼고 간신히 나아갔는데 지금은 보존사(保存社 *함양명승고적보존회)의 힘으로 산 아래 사람을 시켜 벌목을 하고 험한 곳을 고르게 한 덕분에 이 앞까지는 평지라 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또 유산자들의 노숙을 생각(염려)하여 마암과 상봉 및 제석당 등지에 판옥(板屋)을 세우고 풍우를 가리게 하였으니 혜택이 유산인에게 미쳤다고 할 수 있다. 나와 내명은 모두 추위에 곤란을 겪는 자들이므로 길가의 초목이 무성한 것을 보고 말하기를 “한 골짜기의 땔나무를 긁어 집으로 보내면 겨울을 나는 데에 어렵지 않겠다.”고 하자, 종자가 듣고 말하기를 “(저의) 마음 씀이 마을사람들에게 멀리 미치지 못하니 스스로 부끄럽습니다.” 하였다.
從者言 前之上山者 脫冠巾而抱木挾巖 艱辛而進 今則賴有保存社之力 使山下人伐薪輯險 此前則可謂平地矣 又慮遊山者之露宿 設板屋於馬巖上峯及帝釋堂等 處蔽風雨可謂惠及遊人矣 余與乃明俱是困於寒者 見路傍草樹之離披曰 若梳一谷之薪 輸之於家 則過冬不難矣 聞此從者之言 自愧用心之不及社人遠矣
힘을 다하여 마암당(馬巖堂)에 이르렀는데 이는 하봉에서 처음 도착하는 곳이다. 거대한 바위가 둥그렇게 솟아 있는 것이 십여 길이었고 아래 부분은 평탄한데 곁에는 근원이 되는 샘이 있었다. 몇 칸의 집을 새로 지었는데 온돌과 벽 없는 마루가 간략히 갖추어져 있어 길 가는 사람이 다리를 쉴 만하였다. 막 점심을 먹으려 할 때에 문선비와 세동 사람 몇이 도착하여 둘러앉아 점심을 먹었다.
盡力到馬巖堂 乃下峯初到處也 蓋巨巖穹隆壁立者十餘仞 而下稍平坦傍有源泉 新築數間屋子 溫突凉軒略僃 而足以歇行者之脚一行 方午飯之際 文生與細洞數人來到 遂匝坐點心
다. 1937년 김학수의 유방장산기행의 망해정
서북쪽에는 봉우리 하나가 우뚝 서 있었으니 바로 반야봉(般若峯)이다. 산세가 이곳에서 왔는데 이것이 천왕봉(天王峯)이다. 꼭대기에 올라가니 모두 암석이 반석이 되어 있었으니 일월대(日月臺)이다.<중략> 바위 앞에는 산령사(山靈祠)가 있는데 나뭇조각으로 덮여 있다. 바위 표면에 새겨진 이름은 몇 백 명인지 모르겠는데 혹은 마멸되고 혹은 선명하였다. 바위 사이에는 가옥 하나가 있는데 수십 명을 수용할 수 있는데 진주(晉州)의 강위수(姜渭秀)가 세운 것이라고 한다. 마침내 옷을 풀어헤치고 그 가운데에 행장을 풀고서 저녁을 먹을 생각을 하였다.
西北有一峰特立. 卽般若峰. 山勢自此而來. 此爲天王峰也. 上頂皆岩石盤繞. 有日月臺. <중략> 巖前有山靈祠. 覆以木片. 岩面刻名姓者. 不知其幾百. 而或磨滅. 或鲜明. 巖間有一屋. 可容數十人. 而云晋州姜渭秀所築也. 乃卸其衣裝行具於其中. 爲夕飯之計.
라. 다큐멘타리 르포 지리산I에서 망해정의 흔적(발췌)
우리들의 천막은 성모 사당이 있었던 자리에서 20m쯤 중산리 쪽으로 내려간 곳에 세워졌다. 이 자리에는 10년쯤 전(60년대 말~70년대 초로 추정)까지 50명을 수용할 만한 지하식 산장이 있었던 곳이다. 진주 사람 김순용(金順龍)이라는 50대 초반 남자가 봄에서 가을까지 7개월 간 여기서 산장 주인 노릇을 했다. 그는 진주 농대의 기상관측 업무를 위임 맡고 날마다 흐리고 맑고 비 오는 상황 등을 기온의 체크와 함께 조목조목 미리 인쇄된 장부에 기록하면서 산장을 경영해 왔던 것이다. 평화를 찾은 1957년 봄부터 천왕봉 산장의 문을 열었고 한다.
산장의 구조는 엎드려 들어가서 앉을 수 밖에 없는 구조이긴 해도 온돌식이었고 가운데에 칸을 질러 두 개의 방을 만들었는데, 한쪽은 30명, 한쪽은 20명쯤 수용이 가능해 보였다. 그리고 지붕은 흙을 다지고 돌과 풀을 심어 위장하고 또한 비가 새지 않는 특수한 구조로 되어 있었다. <중략>성모 사당은 지하식 산장의 위쪽 20m쯤 평지에 있었다. 둘레에는 한길이 넘는 돌담을 앞만 틔우고 쌓아 올려 두 칸을 만들고 너와지붕을 덮었으나 6.25 때 지붕이 없어졌다. 그로부터 성모 석상은 눈과 비에 노출된 채 그를 찾아든 숱한 사람들을 맞게 된 것이다. 출처 : 다큐멘타리 르포 지리산 I (김경렬)
마. 1923년 지리산보승회의 제석당의 석각
제석당터 석각 제석암&감로천외(180804)
♣ 개벽 제 34호 지리산보(1923년 4월 1일)
현재 咸陽郡守 閔麟鎬씨는 空殼의 名勝古蹟이나마 보존하랴고 保勝會를 조직하고 智異山을 세계에 소개하기 위하야 智異山誌를 葺輯 중이오, 同郡有志 姜渭秀씨는 遊山하는 人의 편리를 圖키 위하야 山上에 望海亭을 건축하고 朴魯翊 及 靈源寺僧 一同은 帝釋堂을 건축하얏스며 李璡雨 及 碧松寺僧 一同은 馬岩堂을 건축하야(兩處는 皆 中峯) 本年 陽春佳節에 開山式을 行하랴 한다. 此가 本山의 幸이라 할지.
몰입(flow)은 물리적 시간의 착각을 일으켜 시간이 가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왜곡 현상을 말한다. 강도 높은 몰입을 경험해야 깊은 행복감과 높은 성취감을 느낄 수 있다. 선인들의 유람록 복원 역시 몰입(沒入)의 과정을 통해 시행착오를 하며 아주 조금씩 얻어진다는 사실이다. 몰입의 현상을 경험하지 않고는 몰입을 이해할 수 없다. 몰입은 항상 현재 진행형으로 자신이 주도하여 시간을 이끌어가는 고도의 지각(知覺) 현상이다.『 모든 창조적인 활동을 하려면, 자신의 내부에 산더미 같이 쌓여있는 생각으로부터 벗어나 새롭고 순수한 지각을 받아들여야 한다.』라는 <아서 코슬러>의 말로 글을 맺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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