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감수재길

1610년 박여량의 두류산일록에 나오는 상류암지와 초령

도솔산인 2021. 7. 10. 07:41

1610년 박여량의 두류산일록에 나오는 상류암지와 초령

 

 

  이 글은 2015.11.11. 12:36에 작성한 것으로, 내용을 보완하고 수정하여 재작성했다. 상류암에 대해서 진양지불우조(佛宇條)에서는 장항동(獐項洞) 위쪽 에 있는데, 난후(亂後)에 중건(重建)하였다(獐項洞, 亂後重建)고 하였고, 【산청군지(山淸郡誌)】내고장 전통(傳統)편 寺址 목록에서 上流庵址는 삼장면 油坪里에 있다고 하였다. 진양지산천조의 덕산동(德山洞) 지명에서는 서흘산(鉏屹山)으로부터 동쪽으로 흘러 상류암(上流菴)을 거쳐 장항동(獐項洞)에 이르고 남쪽으로 흘러 삼장천(三壯川)되어 살천(薩川)과 더불어 양당촌(兩堂村)앞에서 합하니 이를 덕천(德川)이라 이른다.고 했다.

 

장항동(獐項洞)에 대하여 : https://lyg4533.tistory.com/16488237

 

 

1. 상류암지의 추정 근거

 

  [두류산일록 국역본 누락 부분 9/7] 방곡의 上溪(오봉리)까지 내려오니 종들이 말을 가지고 와서 기다렸다. 계곡 가에 앉아서 각각 마음을 진정시킨 후에 남여를 버리고 말을 탔다.(下至方谷之上溪. 奴輩以馬來待矣. 臨溪而坐. 各罷鎭心. 舍輿乘馬) 방곡촌(方谷村)을 지나는데 마을의 집들은 다 대나무를 등지고 집을 지었으며 감나무로 둘러 싸여있고 인가와 접하였으나 화평함이 속세를 벗어난 지경과 같았다. (村舍皆負竹爲家. 繚以柿木. 鷄鳴犬吠. 洽一別境也)임천을 건너(越瀶川) 신광선의 정자에서 술을 서너 순배 마셨다.

 

9/6 : 천왕봉-甑峰-마암-소년대-행랑굴–두류암 갈림길(청이당)-청이당계곡-상류암

9/7 : 상류암-상류 암-새봉과 진주독바위 안부(초령)-사립재-방곡촌(方谷村)-지곡마을 신광선(愼光先)의 정자-최함씨의 계당(溪堂)

 

  우리는 여기에서 유생 신광선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신광선의 집은 방곡 상류에서 가장 가깝다.  지곡 마을 신광선의 집에서 방곡의 상계(오봉리), 사립재, 새봉, 상류암과 두류암의 갈림길(청이당)을 역추적하면 상류암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 초령과 두류암 갈림길(청이당) 사이에 상류암이 있다. 두류암 갈림길(쑥밭재)에서 상류암까지의 기록을 보면....

 

[96]

  [원문] 僅尋樹陰下一條潦路或由岡脊或臨壑谷魚貫而下至一懸崖上無所攀下可數丈諸君與從僧皆蟻附而下余則不得着足周章之際遠聞伐木聲盖巖僧已慮其如此設機械而令我下來也旣至菴一行俱困* 周章 : 당황하다. 어쩔 줄 모르다. 쩔쩔매다. 고심하다.

 

  [국역] 96일 오후, 행랑굴에서 점심을 먹고 두류암 갈림길(청이당)에 이르러 겨우 숲 속에 난 한 갈래 도랑길을 겨우 찾아 등성이를 넘기도 하고 골짜기를 따라가기도 하면서 물고기를 꿴 것처럼 한 줄로 내려갔다. 한 낭떠러지에 이르렀는데 위로는 잡을 만한 것이 없었고, 아래로는 몇 길이나 되는 절벽이었다. 다른 사람들과 따라온 승려들 모두 개미 떼처럼 절벽에 붙어 내려갔는데, 나는 발을 내딛지 못했다. 어쩔 줄 몰라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때, 멀리서 나무를 베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는 산을 잘 타는 승려들이 내가 못 내려오리라 짐작하고 기구를 설치하여 나를 내려가게 하려는 것이었다. 상류암에 이르렀을 때는 일행이 모두 기진맥진했다.

 

  96일 일정에서 부축을 받고 열 걸음을 걷고 한번 쉬어야 하는 박여량의 체력으로 천왕봉에서 늦게 출발(늙은 무녀가 물통을 밀어버려 밤새 물을 받지 못했고, 바위틈에서 떨어지는 물도 한 방울씩 떨어져 밥짓는 것이 자연히 늦어짐)하여 유평까지는 불가능한 거리이다. 그리고 조개골을 따라 장항동(獐項洞, 대원사 인근) 유평까지 내려왔다가 다음날 다시 초령으로 올라갔다는 것은 한마디로 경로이탈이다. 두류암과 상류암 갈림길(쑥밭재 아래)에서 상류암까지 길이 없다고 한 것은 청이당에서 길을 놓쳐 계곡으로 내려간 것으로 본다. 1876년 만성(晩醒) 박치복(朴致馥, 1824~1894)은 새벽에 대원사를 출발하여 철모삼거리까지 말을 타고 올라왔다. 두류산일록에 '두류암 갈림길(청이당)에서 상류암까지 길이 없다.'라고 하였으니, 박치복이 올라온 조개골 길로 박여량이 내려간 것이 아니고, 또한 조개골의 산길과 풍광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 지리 99에서 발표한 상류암 터와 무관함을 반증하는 것이다. 가객님과 꼭대님이 상류암이 '장항동에 있다.’라고 주장하는데, 진양지에는 '상류암은 장항동 위쪽에 있다(在獐項洞上)'라고 분명하게 나와 있다.

 

 

2. 鉏屹山(서흘산)鉏耒峰(서뢰봉써리봉)이다.

 

  【진양지에 나오는 鉏屹山(서흘산)은 써리봉을 가리킨다. 지금의 鋤耒峰(서뢰봉)의 옛 이름이 鉏屹山(서흘산)이고 서뢰(鋤耒)는 농기구의 일종으로 경상도 방언으로 써리 또는 써레로 발음되어 써리봉이 된 것이다. 부사 성여신(1546~1632)이 진양지에서 상류암을 언급한 이유는 '써리봉과 상류암이 서로 마주 보이고 상류암에서 조개골이 보인다.'라는 의미로 이해한다. 따라서 상류암 위치는 새재 마을보다 그 위에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상류암 터 위 암괴에 오르면 비둘기봉부터 써리봉은 물론, 중봉 하봉(영랑대) 말봉(1617.4). 국골사거리까지, 동으로는 웅석봉에서 달뜨기 능선까지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나는 부사 성여신이 묵계에서 설봉(1301봉 하동바위 위 헬기장)을 넘어 쌍계사로 내려오면서 雪峰(설봉)이라고 기록했듯, 이곳을 다녀가지 않고는 절대 남길 수 없는 기록이라고 생각한다.

 

 

 

입체지도
써리봉에서 바라본 상류암 터
조개골 아홉사리길 소나무 전망대에서 바라본 상류암에서 새봉안부 가는 길

 

 

3. 두류산일록 에서 암자 서쪽에 있는

 

97일 무신일 맑음 [16101023土 霜降]

 

[원문]將盥僧請湯水而沃盥余辭之乃就水槽水掬淸注而頮之菴西有臺頗可觀臺上有檜三四株其大僅一掬其長已三四丈矣

 

[국역] 세수를. 나는 사양하고 물통으로 가서 맑은 물을 움켜 낯을 닦았다. 암자 서쪽에는 가 있는데, 주위의 경치가 제법 볼만했다. 그 곁에 위에 회나무 서너 그루가 있었는데 이제 겨우 한 움큼 정도의 굵기였고 길이는 서너 장쯤 되었다.

 

 

암자 서쪽에 대가 있는데....
주위의 경치가가 자못 볼만했다.

 

 

4. 1610년 당시 행정구역

 

  1610년 당시 지리동부의 행정구역은 천왕봉에서 중봉 하봉 1618봉 쑥밭재 새봉 사립재 군계 능선 서북쪽은 함양군이고, 천왕봉에서 중봉 하봉 1618봉 쑥밭재 새봉 새재 왕등재 밤머리재 동남은 진주목 단성현이고, 군계 능선 사립재 새봉 새재 왕등재 밤머리재 동북은 산음현의 영역이다. 이후 산음현은 1767(영조43)에 산청 현으로 개칭되었고, 갑오경장 이후 1895년에 두 현이 산청군과 단성군으로 승격되었다가, 1914년 일제시대에 단성군이 산청군에 편입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면 초령이 외고개나 새재라면 단성현과 산음현의 경계라고 기록했을 것이다. 산행을 한 일행 8명이 모두 그 지역 출신 유생들이니 초령의 지명 오류 가능성은 극히 적다. 특히 신광선은 지금의 유림면 손곡리 지곡 사람이다. 또한 두류산일록은 박여량 홀로 작성한 것이 아니라, 고대 정경운과 지족당 박명부 등 일행들에게 자료를 받아 작성하였고, 작성 후에는 윤독(輪讀) 과정을 거쳤을 것이기 때문이다.

 

 

삼군 행정구역 지도

 

5. 1610년 박여량의 두류산일록에 나오는 상류암과 초령

 

  지난 2015년부터 상류암이 진주독바위 능선이나 진주독바위 양지에 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써리봉과 진주독바위 새봉을 여러 차례 찾았다. 써리봉에서 독바위를 바라보면 거리가 멀어서 육안으로 지형을 살피기 어렵고, 조개골로 올라가며 독바위 아래를 살펴보면 아래서 위를 바라보기 때문에 지세를 정확하게 읽을 수 없다. 20179월 故 마등자님이 청이당 능선에서 독바위 능선을 찍은 사진을 보고, 암자터가 독바위 능선에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그 당시 독바위 능선과 독바위 양지는 미답이라 민대장님과 상류암 터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 끝에 오래전에 '남명연구소 소장을 하셨던 경상대학 최원석 교수와, 어떤 문집에 나온다는 진주암터를 찾으러 독바위 아래로 안내한 일이 있다. 진주독바위는 지명 진주(晋州)가 아니라 진주암(眞珠庵)에서 유래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후에 확인했지만 송대마을 심마니 박영남(朴英南, 1938년생, 현 84세) 할머니께서 문수암 공양주로 계실 때 문수암 스님께 진주암(眞珠庵)에 대한 말씀을 들었고, 진주암(眞珠庵)의 샘터도 알고 계셨다.

 

  상류암과 초령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고전번역원에서 다운로드한 원문 파일에 '踰草嶺. 此乃咸陽山陰兩路之所田分也.로 나와 있어, '田分'의 국역이 모호하여 영인본을 확인하니, '踰草嶺. 此乃咸陽山陰兩路之所由分也.'였다. '초령을 넘었다. 이곳이 바로 함양과 산음 두 길의 갈림길()이 시작되는() ()이다.'라는 내용이다. 따라서 나는 초령은 새봉과 진주독바위 사이 안부이고 독바위능선에 있는 암자터(지리99 숯가마터)를 상류암 터로 본다. 이렇게 되면 행랑굴-두류암 갈림길(청이당, 쑥밭재)-상류암-초령이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1917년 총독부에서 작성한 오만 분지일 조선의 지형도를 보면 초령은 함양 마천과 산청 삼장을 연결하는 연도로 표기되어 있다. 쑥밭재가 삼장과 마천을 연결하는 고개라고 하는 것은 지리산 옛길의 개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이야기이다.  

 

 

1917년 총독부에서 작성한 오만분지일 조선의 지형도

 

6. 초령에 대한 송장섭 선생님의 의견

 

송장섭 선생님은 함양 지곡 개평마을 출신으로 선인들의 유람록을 정독하시고 조용히 답사를 하시는 분이다. 옥종과 덕산에 사시는 친구 세 분과 함께 유람록과 관련 자료를 반드시 읽고 답사를 하신다고 한다. 선생님과 통화를 하게 되었고 초령에 대한 의견을 주셨다. 송선생님은 초령(草嶺)을 새재로 이해하고 계셨다. 선생님께서 첫부임지가 문정초등학교이고 의탄초등학교에도 근무하셨다고 한다. 방곡에서 새재길도 알고 계셨는데, 산나물을 뜯으러 다니셨다고 한다. 

 

가. 남여를 타고 이동할 수 있는 길(0)

나. 새는 억새 풀로 새재를 한자로 옮기면 초령(0)

다. 새재는 방곡 사람들이 조개골로 넘어가는 고개(0)

라. 새재가 함양과 산음의 갈림길 방곡은 함양 외고개는 산음(0)

마. 새재는 화계 사람들이 지리산을 가로질러 화개로 가는 길이다.

 

 

 

아홉사리길 폭이 1m가 넘는다.

 

7. 모든 날짜의 간지 오류

 

1610년 9월 7일 戊申일은 만세력과 하루 차이가 난다. 만세력에는 己酉일이다.(날짜마다 간지를 하루 씩 앞당겨 기록함) 박여량(1554~1611)은 유람 후 감기 몸살로 심하게 앓아누웠고, 916일 척서정(滌暑亭, 수동면 우명리 구라마을) 유람 강평 모임에도 나가지 못했다. 두류산일록도 고대(孤臺) 정경운(1556~1610)과 일행들이 편지로 보낸 자료를 모아 9월 말에야 작성했다. 일행들이 보내온 기록을 수합하여 9월 말이 되어서야 두류산일록을 작성한다. 是年是月是日은 같은 해 같은 달 그믐으로 이해한다.

 

 

붙임

 

1. 지리 99 <꼭대님>의 반박 글 : http://www.jiri99.com/bbs/board.php?bo_table=jiri11&wr_id=110114&page=10

 

* 참고자료 : 진양지와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최석기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