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0년 감수재 박여량의 두류산일록 답사자료 I
1. 박여량이 살았던 수동면 도천
2. 정경운이 살았던 백연리 席卜(노인복지센터 : 함양군 함양읍 백연리 381-1)
3. 척서정(구라 마을회관 : 함양군 수동면 우명리 942)
4. 남계서원(함양군 수동면 남계서원 길 8-11(수동면 원평리)
5. 이은대/이은정/소고대(하백마을회관 : 함양군 함양읍 백연리 825-4) 어은정(漁隱亭)과는 관계가 없는듯...
6. 목동 첨지 박춘수의 집(휴천면 목현리 목동마을)
7. 엄뢰대(지곡마을회관 : 함양군 유림면 지곡양지길3/손곡마을회관 : 함양군 유림면 손곡길 14, (손곡리633-3)
신광선의 정자(추원정?), 최함의 계당, 조목단(신효선의 유허), 두리소, 함허정, 손곡마을 섶다리 위치, 등
▼ 감수재 박여량과 고대 정경운이 살았던 마을
박여량(朴汝樑, 1554∼1611) 본관은 삼척(三陟). 자는 공간(公幹), 호는 감수재(感樹齋). 함양 출신. 아버지는 승사랑(承仕郎) 박현좌(朴賢佐)이며, 어머니는 합천이씨(陜川李氏)로 충순위(忠順衛) 이숙(李淑)의 딸이다. 노상(盧祥)의 문인이다.
1600년(선조 33)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을 거쳐, 예조·병조·형조의 낭관과 북청판관에 이어 1608년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세자시강원문학(世子侍講院文學) 등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때 곽재우(郭再祐)가 의병을 일으킨다는 소문을 듣고 격문을 돌려 많은 지원을 하였고, 정유재란에는 의병으로 황석(黃石)에 들어가 여러 고을에 통문을 돌려 군량을 조달하였다.
평생을 성리학과 『대학(大學)』의 무자기(毋自欺: 자기 자신을 속이지 말 것)에 심혈을 기울였고, 정온(鄭蘊)·오장(吳長)·박이장(朴而章)·박성인(朴成仁) 등과 교유하였다. 1613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감수재문집(感樹齋文集)』이 있다. 출처 : 다음 백과
정경운[鄭慶雲, 1556~1610(?)]은 조선 중기의 유학자, 의병장이다.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덕옹(德顒), 호는 고대(孤臺)이다. 그는 함양군 함양읍 백연리(栢淵里) 돌뿍[席卜]에서 살았으며, 주변에 위치한 위천수(渭川水)의 뇌계(㵢溪) 냇가에 고송반석(古松盤石)으로 경승(景勝)을 이룬 소고대(小孤臺)가 있었으므로 자신의 호를 '고대(孤臺)'라고 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함양(咸陽)에서 의병을 일으켜 관군을 도와 왜병과 싸웠으며, 초유사 김성일과 함께 진주성 전투에도 참전하였다. 왜란 당시의 의병 활동을 기록한 일기 《고대일록》(孤臺日錄)을 남겼다.
그의 몰년(沒年)에 관해서는 『晋陽鄭氏世譜』(517∼518쪽)에 1610년 정월 15일에 55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것으로 나타나 있는데, 이는 『고대일록』의 기록과는 다소간 차이가 나므로 정확한 몰년의 확인은 곤란하다고 할 수 있으며, 내암의 「문인록」에 네 번째의 문인으로 등재되어 있다.(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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