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감수재길

1877년 <朴致馥>의 [南遊記行]조개골

도솔산인 2017. 7. 27. 01:58

1877朴致馥南遊記行

825~830


 

1. 지리산 유람을 떠나 섬계에 머물다.

 

우공의 기주(冀州) 동북의 지역을 유주(幽州)라고 하는데, ()나라가 설치한 것이다. 그 진을 의무려(醫無閭)라고 하며, 무려의 동쪽이 불함(不咸)이다. 또 그 동쪽이 장백(長白) [《광여지(廣與誌)낙랑고(樂浪考)에 보인다. 청화지(靑華誌)에서는 한 산의 다른 이름이라고 하였다.이니, 장백은 다른 이름으로 백두(白頭)라고 한다. 백두의 줄기가 동쪽으로 구불구불 내려오다가 북쪽으로 방향을 바꿔 마천령(磨天嶺)이 된다. 또 동쪽으로 달려 황룡산(黃龍山)이 되며, 또 동쪽으로 달려 대관령(大關嶺)이 된다. 바다와 나란히 천 리를 내려오면 추지(楸池)가 된다. 산봉우리가 높이 솟아 개골(皆骨)의 일만 이천 봉우리가 된다. 또 방향을 바꿔 조금 남쪽으로 내려가 오대산(五臺山)이 되고, 동해를 만나 방향을 바꿔 서남쪽으로 가면 태백과 소백산이 된다. 또 서쪽으로 달려 죽령(竹嶺)이 되고 또 서쪽으로 주흘산(主屹山)과 계립령(鷄立嶺)이 된다. 또 서남쪽으로 삼도봉(三道峰)이 되고 또 남쪽으로 내려와 덕유(德裕)와 금원(金猿)이 된다. 또 서남쪽으로 반야봉(般若峰)이 되고 반야봉의 골짜기를 지나 동쪽으로 가면 웅장하게 서리고 우뚝 솟아 아름다운 것이 지리산(地異山)이다. 천왕(天王)은 그 가장 높은 봉우리이다. 산맥이 백두로부터 흘러왔으므로 혹자는, “두류(頭流)는 호남의 13개의 읍과 영남의 7개 읍을 차지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그 형상이 네모지기 때문에 열어구(列禦寇)가 방호(方壺) 를 원교(圓嶠) 에 비교하였고, 사마천(司馬遷)시황기(始皇紀)와 맹견(孟堅)교사지(郊祀誌)에 모두 방장(方丈)으로 지칭하여 봉래(蓬萊), 영주(瀛洲) 등과 나열하였으니 대개 천하의 명산이다.

 

禹貢冀州. 東北境曰幽州. 漢所置也. 其鎭曰醫無閭. 無閭東爲不咸. 又東爲長白. 見廣輿誌樂浪考. 靑華誌謂一山異名. 長白一名白頭. 白頭之脈. 東迤北折爲磨天嶺. 又東走爲黃龍山. 又東馳爲大關嶺. 竝海千里爲楸池. 嶺聳爲皆骨萬二千峰. 又轉身差南作五臺山. 遇東海. 而折旋向西南爲大小白  又西爲竹嶺又西爲主屹鷄立嶺  又西南爲三道峰  又南下爲德裕金猿  又西南爲般若峰  般若過峽  而東雄蟠特秀爲智異山  天王其最高峰也  山脈自白頭而流  故或曰頭流湖之十三邑嶺之七邑區焉. 其形方故列禦寇以方壺配圓嶠. 馬遷始皇紀 孟堅郊祀志. 皆以方丈臚. 蓬萊瀛洲蓋天下名山也.


* 臚 : 1. 살갗 2. 배의 앞 3. 제사의 이름 4. 펴다 5. 펼쳐 놓다. 6. 전하다(--) 7. 행하다(--)


내가 거주하는 곳이 이 산과의 거리가 백 리가 되지 않아 평상시 생활하면서 마주 대하는데도 세속의 굴레에 얽매어 찾아가지 못하였다. 이번 추석(가을)에 동지들과 여행을 떠나기로 약속을 하였으니, 81일이다. 그러나 집안 일 때문에 뒤에 쳐져 앞에 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니 하늘 높이 솟은 소나무처럼 실망이 그치지 않았다. 817일에 한주(寒州) 여뢰(汝雷) 이진상(李震相)이 필마로 남쪽으로 놀러 왔으니, 그 뜻은 천왕봉의 정상에 있었다. 나와 뜻이 합하여 드디어 여행을 떠날 계획을 정하고, 한주와 남사(南沙)에서 25일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윤효일(尹孝一)과도 약속을 하였다.


余之居. 距玆山無百里. 起居飮食與之相接. 而塵韁所馽屨未及焉. 今秋約同志. 期以八月初一日. 啓行旋. 以家故落後. 望前行如霄漢喬松懊惱不.已 八月十七日. 寒洲李汝雷匹馬南爲. 其志在天王峰絶頂也. 余灕然意脗. 遂定行計. 約寒洲會于南沙. 二十五日約尹孝一.


* 馽屨(칩구) 맬칩, 신구. 앞장서서 인도(引導)함. 啓行 : 여정에 오름. 懊惱 : 뉘우쳐 한탄(歎)하고 번뇌()함. 灕 : 1. 물의 이름 a. 스며들다 (리) b. 물이 땅에 스며들다 (리) c. 흐르는 모양 (리) d. 가을비가 내리는 모양 (리). 脗 : 1. 꼭 맞다 2. 합하다(合--) 3. 입술 a. 물결 가없는 모양 (민)

 

[824] 길을 떠나는데 퇴이(退而) 허남려(許南黎) [허유(許愈, 1833~1904)를 말한다. 그의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퇴이(退而), 호는 남려 또는 후산(后山)이다]가 오리정(五里亭)까지 와서 송별하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퇴이는 곽명원(郭鳴遠), 김치수(金致受) 등과 오래 학문을 연마하고 돌아가니 조만간에 다시 만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내가 등애(鄧艾)의 음평(陰平)의 계책을 주면서, 황매(黃梅)의 오른쪽 골짜기로부터 곧바로 산음(山陰)심적암(尋寂庵)으로 가서 정상을 돌아 남쪽으로 홍계(弘溪)에 도달하면 대원(大源)과의 거리가 얼마 되지 않으니 그곳에서 만날 수 있는가?” 라고 하자, 퇴이가, “라고 대답하였다. 내가 또,“정후윤(鄭厚允)이 멀리 떠나려는 생각이 있는데, 잡아두지 못하거든 기회를 살펴 함께 올 수 있겠는가?” 라고 물으니, 퇴이가,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내가 그 용모와 침울한 소리가 마치 다른 생각이 있는 것 같음을 보고 희롱하여, “강이(剛而) 이정(李楨)은 반드시 오지 못할 것이네.라고 '남명이 구암 이정을 놀린 말'"을 하고 마침내 이별을 하였다. 점심 때 섬계(剡溪)에 도달하였다. 인척인 유계(幼溪) 권성거(權聖擧)와 단계(端磎) 김성부(金聖夫) 등과 모두 미리 약속이 있었는데, 김대형(金臺兄)은 말을 타고 먼저 출발하였고 권척(權戚)은 집안에 근심스러운 일이 있어 머뭇거리고 결정하지 못하였다. 억지로 권한 뒤에 같이 떠나자고 동의를 하여 드디어 소매를 나란히 하고 길을 나섰다.진태(進台)에 도달하니 날이 이미 저물었다. 재사(齋舍)에 있는 박씨를 방문하는데, 어떤 사람이 저 멀리 산허리로부터 다가오는데 보니 바로 박광원(朴光遠)이었다. 박광원의 집은 시냇가에 있어서 방문하였으나 만나지 못하였는데, 지금 갑자기 만나니 매우 기뻤다. 함께 유숙하였다.

 

發行 許退而南黎送至五里亭 黯黯無以爲心 蓋退而郭鳴遠金致受 皆宿硏而歸 未幾日 勢難再動 余授以鄧艾陰平之計 自黃梅右峽 直趣山陰尋寂庵 遶絶頂而南達于弘溪 則去大源 無幾武會于此可乎 退而曰唯唯 余又曰鄭厚允有奮飛之志 而拘掣未能 相機而與之偕可乎 退而曰唯唯 余觀其容俯沈吟若有所思 因戱之曰 剛而必不來矣 南冥戱李龜巖語遂分袂 午抵剡溪 蓋權戚幼溪聖擧 端磎金臺兄聖夫 皆有前約 而金兄騎馬先發 權戚以家憂趑趄不決 强而後可 遂聯袂到進台 日已曛矣訪朴氏齋舍 有人冉冉自山腰撞來 乃朴光遠也 光遠家在溪上 訪之而不遇 今忽邂逅甚可喜也 因與同宿

 

* 幾日 : 며칠. * 黯黯 : 1.어둡고 컴컴하게. 2.속이 상하여 시무룩하게.

* 등애(鄧艾)의 음평(陰平)의 계책 : 위나라 장수 등애는 음평(陰平)에서 사람이 다니지 않는 험준한 지역 7백여 리를 거쳐 성도에 입성한 계책.

* 귀암() 이정()[1512~1571]은 조선 전기 중종과 명종 시기의 문신이다. 자는 강이()이고, 본관은 사천()이다. 25세에 장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에 제수되었다. 6년 뒤 예조 정랑()을 거쳐 영천 군수()가 되었을 때 퇴계(退) 이황()을 처음 만났다. 명종 때 청주 목사(使)로 나아갔고 승정원 좌승지(), 병조 참의(), 사간원 대사간(), 경주 부윤() 등을 역임하다 1568년 홍문관부제학()에 제수되었으나 사퇴하고 서악 정사(西)에서 유생들을 모아 가르쳤다.[강이(剛而) 이정(李楨)은 1558년 남명과 지리산을 유람한 사람] [네이버 지식백과] 진주 동산리 간암 박태형 가문 소장 『귀암집』[晉州東山里艮嵒朴泰亨家門所藏龜巖集]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分袂(분메) : [동사][문어] 이별하다. 헤어지다. 결별하다. 冉冉 : ①나아가는 모양이 느림  ②약함.



2. 남사에 도착하여 머물다

 

[825] 다음날 네 사람은 나이 순서대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여 정오에 남사에 도착하였다. 명원은 마을 입구에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상당한 시간을 서로 인사를 나눈 뒤에 마을로 들어갔다. 한주가 와서 기다린 지 이틀이 되었다. 서로 보고 웃으며 인사를 나누고 다음날 일정을 물었다. 명원이 손을 단정히 하고 앞에 나서며, “이 고을의 여러 군자들은 훌륭한 선생이 찾아오시고 이름난 석학이 많이 오신 것을 기회로 향음례(鄕飮禮)를 열려고 합니다. 예를 거행할 물건들이 이미 갖추어졌으니, 원컨대 하루의 여유를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내가,“훌륭한 일이다. 감히 사양하겠는가?”라고 하였다. 드디어 방에 직분을 나누어 썼다. 한주가 손님이 되고 내가 주인이 되었으며 권척이 안내자()가 되고 김대형과 영공(令公) 하우석(河禹錫)이 선()이 되었으며, 그 밖의 세 빈()과 사정(司正) 등의 여러 책임을 모두 나이 순으로 차례대로 임명하였다.

 

明日. 四人序齒前行. 午抵南沙. 鳴遠出里門等候. 多時肅而入. 寒洲來留已二日. 相視而笑. 因問明日行計. 鳴遠拱手而前曰. 此中諸君子. 以長德之來臨名碩之多會. 欲講鄕飮禮. 儀物已具. 願寬一日暇. 余曰盛擧也. 敢辭. 遂書分榜. 寒洲爲賓. 余爲主. 權戚爲介. 金臺兄河令公禹錫爲僎. 其餘三賓司正. 諸位皆以齒爲序.


* 肅 : 1. 엄숙하다(-) 2. 공경하다(恭--) 3. 정중하다(--) 4. 정제하다(--: 정돈하여 가지런히 하다) 5. 맑다 6. 경계하다(--) 7. 엄하다(--: 매우 철저하고 바르다) 9. 절하다 10. 차다.

 

[826] 다음날 백사장에 자리를 펴고 땅에 금을 그어 문을 만들고 당비(堂碑)를 설치하였다. 사시(巳時)부터 예를 시작하여 해가 뉘엿뉘엿할 때 파하였다. 엄숙하여 떠들지 않았으며 고요하면서도 매우 훌륭하게 예를 치뤘다. 기다란 옷과 넓은 띠를 착용하고 우아하게 거행하였다. 제생(諸生)이 강좌(講座)를 청하자 두 개의 높은 선생 자리를 만들어 나와 한주를 맞이하여 나란히 앉도록 하였다. 내가 그 한 자리를 철거하고 태극도설을 강의 하는 것에 대한 문답에 참여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날이 어두워지자 드디어 파하였다. 내가 아래와 같이 시를 지었다.

 

明日. 鋪席于沙場. 晝地爲門 陳堂碑. 日禺中始行禮至昃乃罷. 肅而不譁靜而孔嘉. 褒衣博帶與與如也. 諸生請設講座. 鋪二皐比要. 余與寒洲竝坐. 余撤去其一. 參聽答問講太極圖說. 未究日曛黑. 遂罷以.


* 禺中 : 사시(巳時). 곧 오전(午前) 10시쯤. * 與與如 : 엄숙하게 위의를 갖춤. * 比要 : 요긴하게 갖추다.


倚杖臨寒水(의장임한수) 지팡이를 짚고 차가운 시내에 서 있는데

披襟立晩風(피금입만풍) 저물녘 바람이 옷깃을 헤치네.

相逢數君子(상봉수군자) 여러 군자들을 만났는데

爲我說濂翁(위아설렴옹) 나를 위하여 염계에 대해 이야기를 하네.


다른 사람들이 운을 나누어 금()자를 얻어 시를 지었다. 그러나 여러 작품들이 모두 흩어져 거둬들이지 못하였다.


分韻. 得襟字諸作. 皆散佚不收.

 

 

3. 입덕문으로 간 뒤 탁영암에 머물다

 

[827] 다음날 입덕문(入德門)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명원과 은거(殷巨) 하용제(河龍濟)가 따라왔다. 은거는 하우석의 아들로 또한 전번의 여행에 참여하여 발이 갈라져 낫지 않았는데 이렇게 뒤를 따르니 그 독실한 성의가 가상하다. 10여 리를 가서 고개를 넘어 왼쪽으로 큰 시내를 끼고 돌아 도구대(陶邱臺)에 올랐다. 몇 리를 가니 탁영암(濯纓巖)이 나왔다. 시냇물이 깊고 맑았으며 감청색으로 바닥이 보였다. 매우 차가워 정신을 상쾌하게 하고 마음의 때를 씻어내는 즐거움이 있었다. 옷을 풀어헤치고 이리저리 산책을 하니 해가 기우는것도 알지 못하였다. 방향을 바꿔 산천재(山天齋)로 향하였다. 조형칠(曺衡七)이 길 왼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 용모와 거동이 바르고 옷은 단정하였으니, 그가 학문에 뜻을 둔 것을 알 수 있다. 골짜기에 들어 남명 선생의 신도비를 보았다. 글 읽기를 마치고 곧바로 종손의 고택(古宅)을 방문하여 사당에 배알하였다. 다시 산천재로 돌아와 네 성현의 유상(遺像) 에 절을 올렸다. 주인이 점심을 내왔다. 진서(晉西) 지방의 여러 군자들이 소문을 듣고 찾아온 자들이 수십 명이었다. 한주와 조월고(趙月皐)가 곧바로 호서와 영남의 사칠 동이(四七同異)의 몇 가지 조목에 대하여 논하였다.


明日. 發向入德門. 鳴遠河君殷巨龍濟從焉. 殷巨河令之胤. 亦參前行者. 足繭未瘳. 又爲隨行. 其誠意之篤. 可尙也. 行餘里踰嶺. 夾左巨川登陶丘臺. 行數里得濯纓巖. 川水泓澄紺碧瀅澈. 異常冷然有怡神洗心之樂. 卸衣盤礡. 不知日之昳也. 轉向山天齋. 曹生衡七候於路左. 見其容儀端粹. 衣齊整. 可知其志學也. 入洞覽南冥先生神道碑. 訖直造祀孫古宅. 謁廟. 還入山天齋. 拜四聖賢遺像孔周程朱也. 主人進午饌. 晉西諸君子. 聞風來會者至數十.員 寒洲與趙月皐. 直敎論湖嶺四七同異數條.


* 繭. (발이)부르트다. 瀅澈 : 맑고 투명하다. 怡 : 1. 기쁘다 2. 즐거워하다, 기뻐하다 3. 기쁘게 하다 4. 온화하다(溫和--) 怡神 : 정신을 유쾌하게 하다. 卸 : 1. (짐을)풀다 2. (짐을)부리다 3. 낙하하다(落下--) 4. 떨어지다.  盤礡 : 키와 같은 모양으로 양다리를 죽 뻗고 앉음. 걸터앉음.  昳 : 1. 기울다 2. 해가 기울다 3. 뛰어나다 4. 훌륭하다

 

다음날 형칠의 집에서 점심을 먺었다. 명원은 등창이 나고 한율(寒栗)은 뒤에 떨어졌다. 드디어 길을 나섰는데, 대원사(大源寺)30리의 거리에 있었다. 걸음을 재촉하고 힘을 내서 날이 저물 때 장항령(獐項嶺)을 넘었다. 날이 컴컴해서야 상방(上方)에 도착하였는데, 퇴이와 후윤은 과연 오지 않았다.


翌日. 吃午于衡七家. 鳴遠背瘇. 寒栗落後. 遂發行大源寺在三十里遠. 促武用壯. 日昃度獐項嶺. 昏黑到上方. 退而厚允果不來矣.


* 上方 : 선종()에서 '주지'를 일컫는 말. 본래 산상의 절을 일컫던 말인데, 주지가 거처하는 곳이 그 절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으므로 이렇게 뜻이 바뀌었음.



[828] 다음날 바람이 갑자기 거세게 불고 하늘이 어두웠다.[어둡고 천둥이 쳤다]. 이곳에서 정상까지는 아직도 60리가 남아 있다. 정상을 우러러 보고 숨을 고르는데 하늘 위를 오르는 것 같았다. 절은 산의 동쪽 기슭에 있다. 골짜기는 매우 깊고 고요한데 세상에서 알지 못하고, 깊은 곳의 경치가 매우 아름다운데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하지 않는다. 바다에 아름다운 경치를 지닌 물()이 되는 것과, 성인의 문하에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이 그 어려움이 이와 같다. (지리산이라는 훌륭한 산에 있으니 어지간한 경치로는 아름답다고 불리지 못한다) 탑전(塔殿)은 꼭대기에 있는데 모두 12층이다. 비록 크고 화려하지는 않지만 매우 정치하였다. 분을 바른 담으로 둘렀으며 가는 돌을 깔아 깨끗하여 침을 뱉을 수가 없었다. 물으니, 부처의 이빨을 소장하고 있다고 했다. 내가 희롱하여, “부처의 나라에는 이빨을 숭상하는가? 내가 들으니 그대의 부처는 사람의 온전한 신체를 헛된 것[幻妄 : 헛된 망령]이라고 하는데, 하물며 이빨 한 개를 보관하는가? 영양의 뿔을 걸어 놓지 않은 것이 아쉽구나.”라고 하였다. 용추(龍湫)가 몇 궁()의 거리에 있는데, 시내와 큰 돌이 서로 이어져 있다. 천천히 내려가는 것은 바닥을 흘러 발이 되고, 급하게 내려가는 것은 한 곳에 모여져 폭포가 된다. 큰 웅덩이와 작은 웅덩이에 물이 차례로 차서 넘쳐흘러 내려간다. 깊은 것(흐르는 것은)은 어지러워 굽어볼 수 없고 옅은 것은 남청색과 검 푸른색으로 용()이 살고 있는 것 같았다. 비가 내리기를 빌면 효험이 있다고 한다. 그 아래에 또 큰 돌로 된 독이 있는데, 곧게 세 개의 구멍이 뚫려 있다. 그 입구는 좁고 가운데는 넓어 충분히 두어 석()의 곡식을 담을 수 있었다. 절의 승려가 그곳에 김치를 담그는데 봄과 여름이 지나도 상하지 않는다고 한다. 절에 돌아와 마음의 느낌을 읊어 한주와 더불어 시를 주고받았다. 날이 저물자 바람과 흙비가 점점 심해졌다. 승려가, “산꼭대기에 눈이 쌓여 매우 하얗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작은 승려와 따르는 소년이 교대로 인사하고 (구경을 하자고) 요청하였다. 동행한 동료들은 모두 힘을 다해 만류하였지만, 나와 한주는 목을 꼿꼿이 하고 동요하지 않으면서, “우리들이 마음을 가다듬고 묵묵히 기도한지 오래되었다. 일찍이 방장(方丈)이 중국의 형산(衡山)만 같지 못한다고 일렀는가?”라고 하였다.


 

翌日. 風氣猝緊天宇陰虺. 此去絶頂尙六十里. 瞻仰脅息如隔天上. 寺在山之東麓. 谷頗窈而世不知. 深景甚佳而人不叫奇. 蓋爲水於海. 爲人於聖門. 其難如是也. 塔殿在上頭. 凡十二層. 雖不侈大極精緻. 圍以粉牆. 鋪以細石. 潔不容唾. 問之曰. 佛齒所藏. 余戱之曰. 佛國亦尙齒乎. 吾聞爾佛以全軀爲幻妄. 而況於一齒乎. 恨無羚羊角觸之耳. 龍湫在數弓許. 溪身與巨石相終始. 緩則被而爲簾. 急則束而爲瀑. 大窪小窪隨科渟滀. 湥者眩不可俯. 淺者藍靑黛綠. 若有神物藏焉. 禱雨有驗云. 其下又有石甕. 大石直穿三穴. 隘其口寬其中. 可實數石穀. 寺僧用以淹菜. 經春夏不敗云. 還寺賦懷與寒洲相和日. 晡風霾漸劇. 僧言山頭積雪皚皚. 於是小闍梨及從行少年. 交謁夏諫. 儕朋皆苦口沮擋. 余與寒洲强項不撓曰. 吾輩潛心默禱久矣. 曾謂方丈不如衡山乎.

 

* 虺 : 1. 살무사(살무삿과의 뱀) 2. 큰 뱀 3. 우렛소리(=천둥소리), 천둥소리(천둥이 칠 때 나는 소리) 4. 성()의 하나 a. (말이)고달프다 (회) b. 말의 병() (회). 精緻 : 정교(精巧)하고 치밀(緻密)함. 脅息 : 몹시 두려워서 숨을 죽임. 隔天 : 1.[동사] 하루 거르다. 하루씩 거르다. 窈 : 1. 고요하다(조용하고 잠잠하다) 2. 그윽하다, 심원하다(--) 3. 얌전하다 4. 어둡다, 희미하다(--) 5. 구석지다 6. 아름답다, 아리땁다 7. 고상하다(--) 8. 누긋하다(성질이나 태도가 좀 부드럽고 순하다) 9. 고운 마음씨. 科 : 구멍, 웅덩이. 渟滀 : 물이 흐르지 않고 흥건하게 괴어 있는 곳. 淹菜 : 조선시대에는 김치무리를 저(菹)라 하고, 일부에서는 엄채(淹菜)라 하였으며, 양념을 가한 김치를 제(虀)라 하기도 하였다. 皚皚 : (서리나 눈 따위가)희고 흰 모양. 闍梨 : 절에 들어가 중이 된 총각을 높여 부르는 말임. 夏諫 : 크게 간청하다. 苦口 : 입에 쓰다. 2.거듭 간곡하게 권하다.



4. 쉬지 않고 올라 드디어 천왕봉에 오르다

 

[829] 다음날 과연 날이 환하게 개어 하늘에 바람이 없이 고요하였다. 일찍 밥을 먹고 산행을 나섰다. 그 고을의 여러 벗들은 모두 인사를 하고 돌아가고 성거는 집을 오랫동안 비웠다고 하여 돌아갔다. 명원은 병이 나서 따라오지 못하였으니, 산에 오른 자는 나와 한주, 단계, 효일, 광원, 은거, 원익(元益) 김기순(金基淳), 태극(太克) 조호래(趙鎬來), 곽성칠(郭星七)-(원문에 두 글자가 결락됨) [9명]이다. 식량, 기계, 두건, (옷과 이불보따리), 대자리(거적), 일산 등을 지고 따르는 종이 일곱 명이다. 생각해보니, 천천히 가면 이틀을 노숙해야 하고 빨리 가면 금일내로 곧바로 정상에 올라갈 수 있으니 하룻밤의 수고를 줄일 수 있다. 고개를 숙이고 발을 믿어 바퀴를 밀고 올라갔다. 단풍 숲이 끝이 없으며 시냇가 폭포는 다투어 떨어져 내린다. 10여 리 정도 가니 산골짜기가 조금 넓어졌다. 모옥 몇 십 채가 촌락을 이루고 있는데, 소와 돼지우리는 어두운 곳에 위치하고, 어린 아이들은 울고 있어 산 아래의 마을과 같았다. 물으니 유평촌(柳坪村)이라 하니, 우리의 여정이 아직도 평지에 있는 것을 알겠다. 10여 리 정도를 가니 산속의 한줄기 시내가 숲에서 흘러나오고, 가시나무가 옷을 잡아당긴다. 바위는 뾰쪽하고 우뚝 솟아 걷기가 매우 힘들었다. 유평촌으로부터 이곳까지는 비록 험준한 고개는 없었지만 대략 한 걸음 걸을 때마다 그 전보다 한 걸음 높아졌으며, 한 걸음 전보다 위험해졌다.


明日. 果大晴天靜無風. 早飯發上山行. 本鄕諸友皆辭去. 聖擧以日曠回程. 鳴遠病不能從. 登行者余/寒洲/端磎/孝一/光遠/殷巨/金生元益基淳/趙生泰克鎬來/郭生星七. 負資糧器械襆被苫蓋. 以從者七名. 念緩行則露宿當再. 疾行今可直造上頂. 可省一夜之勞. 低頭信足推穀[轂오자 정정]而上. 楓林無盡 澗瀑爭流. 行可十餘里. 見山谷稍衍. 茆屋數十自成村落. 牛欄豚柵位置不爽. 兒啼女哭宛如下界. 問之乃柳坪村也. 始信吾行尙在平地. 行十許里. 山磎線穿. 棘刺牽衣. 巖嘴犖确. 步屧極艱. 自柳坪至此雖. 無峻嶺. 而大約一步. 高於一步. 一步險於一步.

 

資糧 : 여행(旅行)의 비용(費用)과 식량(食糧). 襆被 : 보자기로 옷과 이불을 싸서 행장을 꾸리다. 苫 : 짚으로 만든 거적. 推穀[轂] : 뒤를 밀어 주어 앞으로 나아가게 함. 茆屋 : 茅屋. : 기분이 유쾌하지 못한 것을 말함.  기분이 유쾌하지 못한 것 . 宛如 : 마치. 흡사. 꼭. 완연히 ~과 같다. 犖确 : 산에 큰 돌이 많은 모양. 步屧 : 보첩의 원말. 천천히 걷는 걸음


말몰이꾼에게 명령하여 매단 것을 풀어놓고 점심을 준비하도록 하여, 밥을 먹고 시내를 따라 절벽을 붙잡고 올라가 애전령(艾田嶺)에 도달하였다. 고개의 밖은 호남의 지역이다.[오류] 잠시 쉬면서 서늘한 바람을 맞았다. 여러 산들이 각각의 구역에서 웅장하게 솟아 있는데, 모두 용모를 단정히 하고 기운을 엄숙히 하여 이곳을 향하여 공손함을 드러내고 있으니, 내가 위치하고 있는 곳이 상당히 높은 것임을 비로소 깨달았다. 10리 정도를 가서 험준한 고개를 넘었다. 절벽을 따라 서쪽으로 가니, 이제 반절은 된 듯 싶었다. 아래를 굽어보니, 많은 산줄기가 남쪽으로 뻗어 있는데 안개가 높이 끼어 아득했다.[두류봉, 말봉?] 서리 맞은 잎은 참으로 붉고, 시냇가 골짜기는 활짝 열려 밝다. 산허리에는 구름이 약간 피어올라 비가 내렸다 그쳤다 한다. (이런 경치를 바라보노라니) 마음이 상쾌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큰 돌이 우뚝 솟아 뚝 끊어졌는데 그 천 길 아래에 나무 등걸을 그을린 흔적이 있고, 가로막은 울타리가 아직도 남아 있다. 절벽의 면에는 개운암(開雲巖)’ 세 글자가 쓰여 있는데, 허남려의 이름이 옆에 있다. 앞에 행차하여 머물러 유숙한 곳으로 생각된다. 다가가 만져보니 매우 기뻐 그의 얼굴을 대하는 것 같았다.

 

命僕夫卸擔炊飯. 飯訖緣溪拚壁而上. 至艾田嶺. 嶺以外湖南界也[오류]小憩納涼見 群山之自雄於區域者. 皆斂容屛氣隱然. 有嚮化拱極之意. 已覺吾身之占地差高. 又行十里許踰峻嶺. 緣崖而西. 可想山之事已半矣. 俯見萬脊南流齊. 烟渺茫. 霜葉正酣. 磎壑通明. 斷雨殘雲起滅於山腰. 差覺臆間爽然. 大石陡斷. 千尺下有煤痕榾頭. 蓋障儲胥猶存. 崖面書開雲巖三字. 許南黎姓名在焉. 可想前行留宿處. 撞著歡喜如對眞面.


* 卸 : 풀사 1. (짐을)풀다 2. (짐을)부리다 3. 낙하하다(落下--) 4. 떨어지다. 斂容 : 자숙하여 조심스러운 몸가짐을 함. 屛氣 : 숨을 죽이고 가슴을 죔. 隱然 : 뚜렷하지는 않으나 어딘지 모르게 모양(模樣)이 드러남. 은근(慇懃)하고 진중함. 嚮化 : 向化 나아가 귀화()함. 1.묘망하다. 아득하다. 까마득하다. 감감하다. 2.막연하다. 막막하다. 正酣 바야흐로 무르익다. 臆 : 가슴. 가슴 억,마실 것 의 1. 가슴 2. 가슴뼈 3. 마음 4. 생각 5. (기운이)막히다 6. 억제하다(--) a. 마실 것 (의) b. 단술(=감주), 감주(: 엿기름을 우린 물에 밥알을 넣어 식혜처럼 삭혀서 끓인 음식) (의).  陡 : 1. 험하다(--) 2. 높이 솟다 3. 갑자기 4. 땅의 이름. 저서儲胥:군대의 진지에 설치한 울타리.  당착(撞着)은 ‘서로 맞부딪히다’라는 뜻.


5리를 가서 와응(囮鷹)이란 것을 보았다. 풀을 엮여 몸을 가려 (먹이를) 기다리는 것이 마치 알을 품는 닭과 같고 껍질을 벗은 매미와 같았다. 사람의 소리를 듣고 손을 흔들어 조용하게 하였다. 나는 이익과 욕심이 사람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저 또한 비릿한 피를 지녀 목숨을 가진 종류인데 달갑게 이곳에 처하여 산짐승과 더불어 살고 귀신과 더불어 이웃하다가, 발자욱 소리를 듣고 좋아 어쩔 줄을 모르다가 같은 사람인 것을 보고 나서 화를 내니, 이 어찌 하늘이 성품을 내려 종류를 다르게 한 것인가? 그렇게 된 것은 욕심의 구렁텅이에 빠져 그렇게 된 것이다. 멀리 큰 봉우리를 바라보니 우뚝 솟아 하늘을 받치고 있는데 짙은 안개가 그 중턱 아래를 감싸고 있으니, 아마 천왕봉으로 여겨진다. 물으니, 중봉(中峰)이라고 한다.


又行五里餘見囮鷹者. 葺草自翳潛身伺候. 如伏卵之鷄化穀之蜩. 聞人聲搖手止之. 余以爲利慾之迷人. 可哀也. 彼亦葷血涵生之類. 甘處於此. 獮猴之與居. 鬼魅之與隣. 聞跫音而不知喜. 見同類而見嗔恚. 此豈天之降衷爾殊也. 其所以陷溺者然也. 遙望巨峰突亢撑空. 宿霧漫其半面. 意其爲天王也. 問之乃中峰也.


葺草 : 풀을 엮다. 翳潛 : 숨기다. 가리다. 涵 : (물에)젖다, 적시다 2. 잠기다 3. (물에)담그다 4. 가라앉다 5. 포용하다 6. 너그럽다, 관용하다 7. 받아들이다. 突亢 ; 갑자기 높다.(솟다). 宿霧 : 전날(前-) 밤부터 낀 안개. 漫 : 1. 흩어지다 2. 질펀하다(질거나 젖어 있다) 3. 방종하다 4. 가득 차다 5. 넓다 6. 넘치다 7. 더럽(히)다 8. 멀다 9. 함부로

 

탄식하며 절구 한 수를 지었다. 일행이 배고 고파 기운이 떨어져 마른 떡을 내서 먹었다. 잠시 후에 힘이 생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힘차게 중봉에 오르니 이 몸은 이미 하늘의 중간에 있다. 하늘에는 바람이 불어 귀밑 털이 흩날린다. 숲의 나무들은 모두 옹삭이 지고 키가 작았다. 통나무만한 떡갈나무는 두께가 한 자가 되니[오역 숲의 나무들은 다 옹종이 걸린듯 키가 작고 무더기로 자란 나무들은 한 자 남짓 되는 것이] 마치 오래된 명령(榠欞) 나무와 같았다. 낙엽이 무릎까지 쌓였는데, 얼음이나 눈과 합쳐서 조금도 앞으로 나아가기가 아주 위험하였다. 이윽고 하늘이 맑아져서 어두운 기상(氣象)이 말끔하게 걷혔다. 저 멀리 커다란 꼭대기가 하늘에 솟아 있고 높은 바위가 거만하게 있는 것을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몸을 굽혔다. 천왕봉이 이곳에 있는 것을 알겠다. 종일 올라와도 그 진면목을 보지 못하더니 이제 비로소 우러러 봄에 더욱 높다는 탄식이 나왔다.

 

喟然吟一絶[영랑대에서 읊은시]. 一行飢乏出乾餠啖之. 頓覺生力. 趲上中峰. 此身已在半天. 天飇掠鬢飇飅. 林木皆癰腫. 樸樕盈尺者. 恰有榠欞之壽. 落葉沒脛和氷和雪. 銖步寸進極爲艱險. 俄而天宇澄. 肅氛霾淨盡(엄숙한 조짐과 흙비가 맑아지다). 望見巨標衝霄. 尊嚴倨肆. 不覺俯躬. 可認天王在此. 終日上征不見眞面. 今始有仰彌高之歎.



* 喟然 : 한숨을 쉬며 서글프게 탄식(歎息)하는 모양. 飢乏 : 기근(飢饉)이 들어 식물(植物)이 결핍함.  頓 : 갑자기. 趲 : 1. 놀라 흩어지다 2. 흩어져 달리다 3. 내닫게 하다.  掠 : 스쳐 지나가다. 癰腫 : 기혈()이 사독()을 받아 옹색()하여 통하지 않음으로써 국부적으로 일어나는 종창()의 증상임. 樸樕(복속) : 무더기로 자란 작은 나무를 말하는 것으로 평범하고 하찮으며 보잘 것 없는 사람을 비유하는데 쓰임. 榠 : 1. 풀명자나무(장미과의 낙엽 활엽 소관목) 欞 : 1. 격자창() 2. 처마(지붕이 도리 밖으로 내민 부분) 3. 추녀(처마의 네 귀에 있는 큰 서까래) 4. 난간(欄ㆍ欄) 5. 별의 이름. 盈尺 : 한 자 남짓. 한 자 미만(滿)의 넓이. 즉, 협소함을 뜻함. 銖 : 1. 저울눈수 2. 중량의 이름 3. 무디다.  [기운 분]1. 기운 2. 조짐(兆朕) 3. 재앙(災殃) 衝霄 : 하늘을 찌르다. 尊嚴 : 높고 엄숙()함. 倨肆 : 거만하게 곧게 찌르다.



5리를 가서 비탈진 길에 개미처럼 붙어 곧바로 올랐다. 그 위는 마치 대머리처럼 초목이 전혀 없고, 떨기로 모여 자란 작은 풀들은 모두 쇠잔하게 헝클어져 자라고 있었다. 돌의 겉면은 그을리고 긁혔는데, 태초의 눈으로 띠를 두른 듯 희었다. 거센 바람이 등 뒤에서 불어 신선이 날아가는 것처럼 양쪽 소매를 휘날리게 하였다. 발을 디디고 올라갔으나 바람이 거세 머물 수가 없었다. 눈 아래에 펼쳐져 있는 여러 산들이 들쭉날쭉 깎은 듯이 엎드려 있는데, 산등성이, 언덕, 돌이 모여진 곳, 만두처럼 생긴 것 등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달리 보인다. 아주 높은 곳에 도달하니 아주 미세한 차이를 다투는 형세였다.

 

行五里餘蟻附直上. 上頂如禿鬜絶無艸木. 叢生細毳皆衰爛鬖髿. 石皮焦騷瘒. 白如帶太始之雪. 剛飇媵背兩袂仙. 擧躡級躐登. 飄不可住. 群山之在眼底者. 瞥瞥剗伏岡陵焉. 培塿焉. 卷石焉. 饅頭焉隨步改觀. 蓋到極高 爭毫末尺寸勢也.


: 1. 대머리 2. 살쩍이 빠지다 3. 빈모가 빠지다 4. 머리 밀다. (헝클어질 삼) 1. 헝클어지다 2. (머리카락이)늘어진 모양. 髿 (머리 흠치르르할 사) 1. 머리 흠치르르하다 2. 머리 늘어진 모양. : (쇠할 쇠, 상옷 최, 도롱이 사) 1. 쇠하다(--) 2. 약하다(--) a. 상옷 () b. 줄다, 줄이다 () c. 도롱이(, 띠 따위로 엮어 허리나 어깨에 걸쳐 두르는 비옷) (). : (빛날 란, 빛날 난, 문드러질 란, 문드러질 난)1. 빛나다, 밝다 2. 화미하다(華美--), 화려하다(華麗--) 3. 곱다 4. 무르익다, (꽃이)흐드러지다 5. 문드러지다, 문드러지게 하다 6. (불에)데다 7. 너무 익다, 지나치게 익히다 8. 다치어 헐다 9. 부스러지다 10. 마음을 아파하다 11. 흩어지다 12. 썩다 13. 많은 모양 14. 화려하고 산뜻한 모양 15. 흩어지는 모양. (떠들 소) (말을)긁다, 긁어 주다 (어리석을 온) 1. 어리석다 2. 동상(凍傷)을 입다. 媵 : 1. 주다 2. 따라보내다 3. 전송하다(--) 4. 잉첩(: 시집가는 여인이 데리고 가던 시첩()) 躡 : 1. 밟다 2. 뒤쫓다 3. 따르다, 잇다 4. 연속하다(--), 계승하다(--) 5. 본받다 6. 이르다(어떤 장소나 시간에 닿다), 도달하다(--) 7. 오르다 8. 신을 신다 躐 : 1. 밟다 2. 디디다 3. 넘다 4. 뛰어넘다 5. 쥐다 6. 손으로 잡아 쥐다. 瞥瞥 : 1. (눈을)깜짝하다 2. 언뜻 보다 3. 힐끗 보다 4. 얼핏 보다 5. 잠깐 보다 6. 안정되지 못한 모양 a. 침침하다 (폐) b. (눈이)흐려 안보이다 (폐). (작은)언덕 (부)


문득 바위가 돌아 길이 끊어져 여정을 멈추었다. 눈꽃이 번뜩이며 피어나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걸음을 멈춰 생각해보니, 비로소 내가 이미 천왕봉에 올라와 있는 것을 깨달았다. 눈을 떠서 아래를 굽어 살펴보니 세상에는 텅 비어 아무것도 없었다. 그 광활함은 백사장 같고 흡사 물이 모인 것과 같아 아득하여 끝이 보이지 않는 지세(地勢)이다. 가로 세로로 아득하게 펼쳐지고 합하여 기운이 쌓여 혼원(渾圓)하니 마치 투권(套圈)과 같은 것은 유기(游氣)이다. 아래는 지축(地軸)이 자리잡고 위에는 유기가 점령하여 푸른 것이 융숭한 삿갓과 같은 것이 천형(天形)이다. 세 경계가 모이고 육합(六合) 이 고르게 둥근데, 내가 그 가운데 처하였다.


忽巖回路窮. 泊然而止. 眼花閃墜. 腦髓眩轉. 遂箚脚疑閼立. 始覺我已登天王峰. 開眼騁眺世間. 空無一物 .其漫如滾沙. 翕如聚漚坱漭. 無垠際者地勢也. 經緯轇輵交媾絪縕渾圓. 如套圈者游氣也. 下爲地軸所藉. 上爲游氣所占. 靑蒼如穹笠者. 天形也. 三界摺疊六合均圓. 我處其中.


閃墜 : 번득이고 떨어지다. 손상되다. : 1. 찌르다 2. 기록하다(記錄--), 적다 3. 닿다, 이르다(어떤 장소나 시간에 닿다) 4. 차자(箚子: 상소문) 5. 공문서(公文書) : 헤아리다, 짐작하다. 閼立 閼 (가로막을 알, 흉노 왕비 연, 한가할 어) 1. 가로막다 2. 그치다 3. 막다 4. 끝나다 5. 막히다 6. 틀어막다 a. 흉노 왕비 () b. 한가하다(閑暇--) () (설 립, 설 입, 자리 위) 서다, 멈추어 서다. (달릴 빙) 1. (말을)달리다 2. 펴다, 제멋대로 하다 3. 신장하다(伸張--) 4. (마음을)달리다, (회포를)풀다 5. 다하다, 이르다(어떤 정도나 범위에 미치다) (바라볼 조) 1. 바라보다 2. 보다, 뵈다 3. 알현하다(謁見--) 4. 회견하다(會見--) 5. 살피다. (흐를 곤) 1. (큰 물이)흐르다 2. 샘솟다 3. (물이)끓다 4. (물이 세차게)흐르는 모양. (모래 사, 봉황 사, 목 쉴 사) 1. 모래 2. 사막(沙漠砂漠) 3. 모래알 4. 모래땅 5. 단사(丹沙丹砂: 수은으로 이루어진 황화 광물) 6. 사공(沙工砂工) 7. 물가(물이 있는 곳의 가장자리). (담글 구, 갈매기 구) 1. 담그다 2. 향기(香氣)가 짙은 모양 3. 거품 4. ()의 이름 5. 갈매기(갈매깃과의 새) 6. 물새. (먼지 앙) 1. 먼지, 티끌 2. 끝이 없는 모양 3. 평평(平平)하지 않은 모양 4. 가득 찬 모양. (넓을 망) 1. 넓다 2. (들이나 수면이)평평(平平)하고 넓다 3. 어둑어둑하다. (시끄러울 교) 1. 시끄럽다 2. 거마(車馬) 소리가 요란(搖亂擾亂)한 모양 3. 달리는 모양 4. 앞서거니 뒤서거니하는 모양. (수레 소리 갈) 1. 수레의 소리 2. 거마(車馬)의 번잡(煩雜)한 모양 3. 달리는 모양. 交媾 [ 교구 ] 성교(性交) 氤氳 하늘 기운(氣運)과 땅 기운(氣運)이 서로 합()하여 어림  ②날씨가 화창(和暢)하고 따뜻함. 套圈 : 모범 답안지(套圈) 물미, 쇠테(ferrule) : 깃대나 창대 따위의 끝에 끼우는, 끝이 뾰족한 쇠. 깃대나 창대 따위를 땅에 꽂거나 잘 버티게 하는 데에 쓴다. 2 .지게를 버티는 작대기 끝에 끼우는 쇠. 游氣 : 음과 양의 기. 음양의 기는 항상 움직이고 있으므로 유기라고 함. (접을 접, 접을 절, 끌 랍, 끌 납) 1. 접다(=) 2. 꺾다 3. 부러뜨리다 4. (방향을)바꾸다 5. 돌리다 6. 주름 a. 접다(=) () b. 꺾다 () c. 부러뜨리다 () d. (방향을)바꾸다 () e. 돌리다 () f. 주름 () g. 끌다(=) () h. 끌고 가다. (거듭 첩, 겹쳐질 첩) 1. 거듭 2. 겹쳐지다, 포개다 3. 연속하다(連續--), 잇닿다(서로 이어져 맞닿다) 4. 접다, 포개어 개다 5. 흔들다 6. 두려워하다 7. 울리다, 진동시키다(振動---) 8. (가볍게)치다, (북을)두드리다 9. (죄를)결정하다(決定--).



맹자가 이른바 천하의 넓은 거처에 거하며 천하의 바른 자리에 서 있다.’고 말한 것이 이와 같을 것이다. 인하여 공자가 동산(東山)에 올라 노()나라를 작게 여기고 태산(泰山)에 올라 천하를 작게 여긴 것을 생각하였다. 태산이 비록 높으나 그 정상은 이미 태산에 속하지 않으며, 천하는 비록 넓으나 오히려 육합의 안에 속하니, 성인의 도에 견주어보면 오히려 양이 작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 극을 찬미하여, “하늘에 계단을 만들어 올라갈 수 없으며, 해와 달을 넘을 수 없는 것과 같다.”라고 한 것이다. 우리들은 도를 배웠으나 이르지 못하였고 도를 찾으나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지금 험준한 이 산에 와서 입을 벌리고 말을 토해내면서 천하의 지극히 높은 것이다.’라고 하니, 또한 큰 도를 깨우친 사람에게 비웃음을 살 것인가? 괴롭게 읊조리면서 댓구를 찾았다. 갑자기 태양이 서쪽으로 숨으니 만상(萬象)이 어둠을 향하였다. 급하게 대에서 내려와 수료리(水料理)에 들어가 밤을 지샜는데(?), 때가 오랫동안 가물어 젖줄 같은 물줄기가 이미 끊어졌으니,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孟子所謂. 居天下之廣居. 立天下之正位者. 其類是耶 因念孔子登東山. 而小魯. 登泰山. 而小天下泰山. 雖高其頂已不屬泰山. 天下雖廣猶是六合之內. 則比聖.道 猶有介量也. 故贊其極則曰. 如天之不可階而升也. 如日月之不可踰也. 吾輩學道而未至. 望道而未見. 故今乃呿口吐舌於玆山之峻. 謂天下至高. 無亦見笑於大方之家者乎. 沈吟覓句. 忽見曜靈西匿萬像嚮晦. 急下臺就水料理(?)經宿. 時久旱乳淙已絶. 錯愕不知所爲.


介量 : 적은 량.  呿1. 벌리다 2. 하품하다 a. 음역자(音譯字) (가). 大方之家 : 1.[성어] 견식이 넓거나 전문 지식이 있는 사람을 이르는 말. 嚮 : 向. 錯愕 [ 착악 ]①성급(性急)하게 놀람 ②뜻밖의 일로 놀람


어떤 두 사람이 우리 앞을 지나가는데, 기쁘기도 하고 괴이하기도 하였다. 누구냐고 물으니, 약초를 캐는 사람이라 하고, 날이 저물었는데 어디 가느냐고 하니, 거처하는 곳으로 간다고 하였다. 샘물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니 아래 몇 궁()의 거리에 있는 어떤 바위 아래에 있다고 자세히 가르쳐 주었는데,[천왕샘] 말을 마치자 문득 보이지 않았다. 그 말대로 하여 물을 찾으니, 일행이 기뻐하며 서로 축하하였다. 한편으론 솥을 걸고 밥을 지어야 하고 한편으론 땔나무를 주워 와야 하는데, 찍을 도끼도 없고 자를 낫도 없다. 어두운 밤 험준한 곳에서 지척도 구분하기 어려운데 바위틈은 입을 벌리고 있고 돌은 칼처럼 날카로워 발을 베고 정강이를 다친 자가 계속 나왔다. 겨우 근처의 몇 그루의 나무를 잘라 땔나무를 구해왔다. 머무는 곳은 잎이 많은 나뭇가지와 이어져 있으며 바위에 의지하여 지어져 있다. 사방에 막히는 것이 없고 오직 윗부분만 가릴 뿐이니, 바람이 점점 거세져 뼈에 한기가 스며들었다. 나와 한주와 단계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바싹 붙어 누워 거북이와 뱀처럼 오그리고 있고, 나머지 사람들은 불가에 두루 앉아 군색하게 추위를 이기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피곤하고 초췌하여 생기가 없었다. 모두들, “독은 비고 땔나무는 떨어지는데, 밤이 깊으면 한기가 모일 것이다. 어떤 방법으로 그것을 막을지 지극히 걱정된다.”라고 하였다.


有二人撞面前過. 且喜且怪問誰也. 曰採藥人. 日暮矣那裏.去 曰去處去. 泉源在甚麽. 曰在此下幾弓許. 某巖下指示甚詳. 言訖便不見. 如其言果尋得. 一行雀躍相慶. 一邊安鍋造飯. 一邊採取薪木. 斧未及斮. 鎌未及刈. 黑窣窣不辨咫尺. 巖竇谽谺. 石劍廉劌齧足傷脰者相繼. 僅取傍近數株折爲燎樵. 連條帶葉倚巖結構. 四無遮障. 惟蓋覆頭面而已. 風氣漸洌徹骨生寒. 余與寒洲端磎蒙被. 逼臥縮如龜蛇. 餘人列坐火邊. 窘兢姑息. 波波吒吒無生意. 僉曰甁罄薪盡. 夜湥寒總. 至恐無術. 以禦之已而.


甚麽 : 무엇. 무슨. 어떤. 1. 작다 2. 잘다 3. 가늘다 4. 그런가 5. 속어에 쓰는 의문 어조사(語助辭) 6. 어조를 고르는 어조사(語助辭) a. 작다 () b. 어리다 () c. 어둡다, 그윽하다 () d. 하나, 한 점 (). 窣窣 : 1. 구멍에서 갑자기 나오다 2. 느릿느릿 걷다 3. 느릿느릿 걷는 모양 4. 소리가 불안한 모양 5. 갑자기. 谽谺 : 입을 크게 벌리는 모양. 골짜기가 훤히 트인 모양. 廉劌 : 날카롭다, 예리하다(銳利--) 逼 波 : 물결 파, 방죽 피 눈빛, 눈길. : 꾸짖을 타 1. 꾸짖다, 나무라다 2. (혀를)차다 3. 슬퍼하다, 개탄하다(慨歎慨嘆--) 4. (입맛을)다시다 5. (음식 먹는 소리를)내다 6. (술잔을)올리다 7. 자랑하다, 과시하다(誇示--) : 빌경. : 흐를돌.



[830] 이윽고 문득 깨어 사지(四肢)를 조금 움직여 기지개를 하고 잠에서 깨어났다. 얼굴에 덮은 천을 치우니 따뜻한 기운이 낮의 해가 비출 때와는 달랐다. 떡과 탕을 내와 먹으니 배가 불르고, 등을 두루 적실 정도로 땀이 났다. 나는 샘물이 솟아나는 듯 기뻤으며 산이 솟아 있는 것처럼 기운이 뻗쳤다. 한문공(韓文公)의 시배형악묘(拜衡岳廟)를 낭랑하게 읊었다. 큰 소리로 읊조린 소리가 저 멀리 뻗어나가 산골짜기가 울렸다. 한주와 단계가 모두 깜짝 놀라 일어나 무릎을 마주 대고 앉아 시를 지으며 기쁜 마음으로 서로 즐겼다. 성이 소()씨인 노비가 앞으로 나서서 하례하며, “하찮은 제가 이런 여행을 모신 지가 열세 번인데, 날씨가 맑으면 혹간 불을 때지 않아도 따뜻한 날이 있으니, 오늘 저녁이 그러합니다. 이는 실로 여러 어르신들의 큰 복입니다.”라고 하였다.(하략)


忽覺四體微. 舒欠伸而寤除去. 面被融融與疇㫰異. 進餠湯頓飽. 背汗浹洽. 余喜如泉湧. 氣如山聳. 朗誦韓文公'拜衡岳廟. 詩曼聲高吟山谷響喨. 寒洲端磎. 皆驚悟起坐促膝酬. 唱驩然相樂. 傭僕姓蘇者前賀曰. 鄙人陪此行. 凡十三次日. 候淸明則或有之. 而不火而溫. 惟今夜爲然. 實荷列位洪福. (하략).

 

融融 : 따듯하다. 疇 : 접때, 이전 㫰(랑) : (볕을)쬐다. 喨 : 1. 소리가 맑다 2. 너무 많이 울어서 소리가 나오지 않다 3. 소리가 맑은 모양 4. 멀리 들리는 맑은 소리 鄙人 : 卑人 : ①낮고 천()한 사람. 문명()의 혜택()을 제대로 입지 못한, 먼 시골에 사는 사람. 야인()  (윗사람이나 남에게 대()하여) 자기()를 낮추어 이르는 말. 소인(). 荷 : 은혜()를 입다



* 박치복(朴致馥) [1824(순조24~1894(고종31). 조선 말기의 학자·문인. 자는 동경(董卿), 호는 만성(晩醒). 함안(咸安) 출생. 아버지는 박준번(朴俊蕃)이고, 어머니는 현풍곽씨로 곽심태(郭心泰)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문장으로 이름이 났으며, 노론(魯論)춘추(春秋)7년간이나 읽었다. 약관의 나이에는 대책(對策)으로 동당시(東堂試)에 합격하였고, 조모의 가르침을 따라 정재(定齋) 유치명(柳致命)문인이 되었다. 1849(헌종 15)에 어머니 상을 맞았고, 1853(철종 4)에는 아버지 상을 당했다.

 

1860(철종 11) 가족을 이끌고 삼가(三嘉)황매산(黃梅山)에 들어가 백련재(百鍊齋)를 짓고 김종직(金宗直)의 소학강규(小學講規)를 본받아 제자를 가르쳤다. 1864(고종 1)성재(性齋)허전(許傳)이 김해부사로 왔을 때 그를 스승으로 섬겼다. 1882년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888년 소를 올려 남명(南冥)조식(曺植)을 문묘에 종사할 것을 청하였고, 3월에 시폐소(時弊疏)를 올렸다. 1890성재집(性齋集)을 간행하고 또 성재연보를 찬하였다. 18946월 연동(淵洞)의 병촉당(炳燭堂)에서 향년 71세로 별세하였다. 그는 조선 말기 경상우도의 학문을 대표하는 학자로서 이 지역에 미친 영향이 크며, 특히 성재(性齋)허전(許傳)을 통해 기호노론계의 성리설 등을 받아 들여 이곳에 소개하였다. 그는 문학 방면에서도 대동속악부(大東續樂府)로 일찍부터 주목받은 바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박치복 [朴致馥]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金麟燮 (1827~1903)  본관은 상산(商山). 자는 성부(聖夫), 호는 단계(端磎). 아버지는 해기옹(海寄翁)()이며, 어머니는 함양박씨이다. 1862(철종 13)에 일어난 단성민란(丹城民亂)의 지도자이다. 1846(헌종 12)에 문과에 병과로 급제, 같은 해 12월 승문원권지부정자에 임명되었다. 다음 해 장녕전별검(長寧殿別檢)으로 옮겼다가, 1848년 벼슬을 그만두고 귀향하였다. 그러나 집안이 가난하여 부모를 봉양할 길이 없고, 또 조부와 부친의 권고로 다시 관직에 나아가 1851(철종 2)에 성균관 전적이 되었으나 귀향, 1852년에 다시 전적이 되었다가 곧이어 사간원정언에 옮겨졌다.

 

1854년에 다시 사직하고 귀향, 이 때 평소에 경모하던 영남 남인계의 대학자인 유치명(柳致明)을 안동으로 가서 찾아보고, 관직을 단념하고 학문에 힘쓸 뜻을 확고히 하였다. 이 해 겨울 온릉(溫陵) 전사관(典祀官)에 차출되었으나, 다음 해에 그만두었다. 이후로는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향리인 단성 단계리에서 생활하였다. 이 때 탐학한 관리들이 농민을 수탈함을 목격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1861년부터 감사와 현감에게 여러 차례 편지를 보내 농민들의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호소가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자 아버지와 함께 농민들을 지도하여 부정한 현감과 이서들을 축출하였다. 이로 인해 그는 의금부에서 신문을 받고 풀려났으나, 아버지는 전라도 영광의 임자도(荏子島)1년간 유배되었다.

 

1864(고종 1) 다시 사헌부지평에 임명되었으나 곧 체직(遞職)되었다. 민란 이후 새로 부임한 현감과 서리들의 모함을 받기도 하였으나 정원용(鄭元容)의 도움으로 화를 모면하였다. 1867년에는 어사 박선수(朴瑄壽)에 의해 무단토호(武斷土豪)로 지목되어 강원도 고성(高城통천(通川)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음 해에 풀려났다. 1882년 단성 향교의 강장(講長)에 추대되었고, 1894년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 1902년 통정에 올랐다.



*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1777∼1861)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성백(誠伯), 호는 정재(定齋). 아버지는 진사 회문(晦文)이며, 어머니는 한산이씨(韓山李氏)이다. 이상정(李象靖)의 외증손으로 외가인 안동의 소호(蘇湖)에서 출생하였다. 이상정의 문인인 남한조(南漢朝유범휴(柳範休정종로(鄭宗魯이우(李瑀) 등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05(순조 5)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부정자·성균관전적·사간원정언·사헌부지평·세자시강원문학 등을 거쳐 1831년 전라도 장시도사(掌試都事)가 되었다. 1832년 홍문관교리에 발탁된 뒤, 1835(헌종 1) 우부승지가 되었다. 그 뒤 초산부사·공조참의를 거쳐 1847년 대사간이 되고, 1853(철종 4) 가선계(嘉善階)에 오르고 한성좌윤·병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1855년 장헌세자(莊獻世子:思悼世子)의 추존을 청하는 상소를 하였다가 대사간 박내만(朴來萬)의 탄핵을 받고 상원에 유배되었고, 이어 지도(智島)에 안치되었다가 그해에 석방되었다. 1856년 가의대부(嘉義大夫)의 품계에 올랐으나 다시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1857년 제자들이 지어준 뇌암(雷巖)의 만우재(晩愚齋)에서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그 뒤 1860년 동지춘추관사가 되고, 다음해에 85세로 죽었다.

 

초산부사로 있을 때에는 진정(賑政)에 힘쓰고 환곡(還穀전결(田結)에 따른 시폐(時弊)를 교정하는 등 여러 가지 치적을 쌓아 그곳 사민(士民)들이 생사당(生祠堂)을 짓기도 하였다. 그는 경학(經學성리학·예학(禮學) 등 여러 분야에 정통하여 학문적으로도 큰 업적을 남겼다. 특히, 성리설에 있어서는 이상정의 학설을 계승하여 이()를 활물(活物)로 보고 이의 자발적 동정(自發的動靜)에 의하여 기()가 동정할 수 있다고 보았다.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에 있어서는 기발이승(氣發理乘)을 주장한 이이(李珥)의 학설을 공격하였다. 이는 능동능정(能動能靜)하는 신용(神用)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이의 자발적 동정으로부터 음양오행의 기가 나오며, 이가 우주의 무체적인 실재(實在)가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황(李滉)김성일(金誠一)장흥효(張興孝)이현일(李玄逸)이재(李栽)이상정으로 이어지는 학통을 이어받아 이진상(李震相유종교(柳宗喬이돈우(李敦禹권영하(權泳夏이석영(李錫永김흥락(金興洛) 등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다. 저서 및 편서로는 정재문집·예의총화 禮疑叢話·가례집해 家禮輯解·학기장구 學記章句·상변통고 常變通攷·주절휘요 朱節彙要·대학동자문 大學童子問·태극도해 太極圖解·대산실기 大山實記·지구문인왕복소장 知舊門人往復疏章등이 있다.

 

참고문헌

 

純祖實錄, 憲宗實錄, 哲宗實錄, 定齋文集, 朝鮮儒敎淵源. 朴錫武



* 조성가[趙性家(1824~1904)]조선 후기 및 개항기에 활동했던 하동 출신의 학자.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직교(直敎), 호는 월고(月皐)이다. 함안 조씨는 고려 시대 대장군을 지낸 조정(趙鼎)을 시조로 한다. 조선 전기 단종 때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알려진 어계(漁溪) 조려(趙旅)[1420~1489]의 후손이다. 고조할아버지는 조원기(趙元耆)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조경진(趙經鎭)이다. 증조할아버지 대에 진주 월횡리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할아버지는 조오(趙澳)이고, 아버지는 조광식(趙匡植)으로 동몽교관에 추증되었는데, 인자하고 은혜롭고 근면하고 검소하여 가업을 일으켰다. 어머니는 김석신(金錫信)의 딸인 김해 김씨이다. 조성가(趙性家)[1824~1904]1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조종규(趙宗奎)로 의금부도사를 지냈고, 딸은 권봉현(權鳳鉉)에게 시집갔다. 조종규는 아들 둘을 두었으며, 큰아들은 조용숙(趙鏞肅)이고, 둘째 아들은 조용우(趙鏞禹)이다.

 

조성가는 1824(순조 24) 216일 회산(檜山)[현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회신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견해와 발언이 어른들보다 나은 경우도 있었다. 약관의 나이에 제자백가의 글을 섭렵하였고, 문장은 간결하면서도 예스러웠으며, 시속의 말을 익히지 않았다. 월봉(月峯) 아래에 살았기 때문에 월고라고 스스로 호를 지었다. 조성가의 활동 사항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취수정(取水亭) 등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것이다. 취수정은 집의 동쪽 시냇가에 있었는데, 배우러 찾아오는 학생들이 문에 가득하였다. 당시 조성가는 학규가 구비되지 않은 것을 병통으로 여겨 강규(講規)를 정하였다. 봄가을 두 차례 만나 서로 읍을 하고 서책을 강론한 뒤 질의하고 난해한 곳을 논변하고서 향음주례를 행하는 것이었다. 이 강규를 분서강약(汾西講約)’이라고 명명하고 취수정에 비치하였다. 1893(고종 30) 진주목사가 경상도관찰사의 지휘를 받아 강약(講約)을 개설할 적에 간절히 청하여 조성가를 도약장(都約長)으로 삼았다. 그리고 학행이 있는 고을 자제들을 선발하여 강학하고 봄가을로 향교에 모여 함께 강학하도록 하였는데, 이는 모두 도약장이 주관하였다. 또 많은 유생들의 청으로 여러 곳에 가서 강의를 하였는데, 단성의 신안사(新安社)와 삼가의 관선당(觀善堂)이 가장 성대했다.

 

둘째는 지역 선현들의 문집을 간행하고 묘비를 세우는 등 문화 사업에 적극 참여하여 활동한 점이다. 조성가는 남명집(南冥集)중간에 참가하였고,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남명선생신도비명을 세우는 일을 주선하였으며, 환성재(喚醒齋) 하락(河洛)의 문집을 교정하고 간행하는 일에도 참여하였다.

 

셋째는 지역의 풍속을 순화시키고 문화를 발전시키는 일에 적극 참여하였다는 점이다. 1877(고종 14) 성주에 살던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이 사월리(沙月里)[일명 남사마을]에 내려오자 이 지역 남인계 학자들이 모여 강회를 갖고 향음주례를 거행하려 하며 조성가를 초청하였다. 조성가는 그 모임에 기꺼이 참석하여 강론을 하고 함께 예를 행하였다.

 

1883(고종 20) 도에서 경학(經學)’으로 천거하여 선공감가감역에 제수되었다. 1896년 삭발령이 내리자 그는 죽을지언정 상투를 자를 수 없다고 항거하였다. 1902(고종 39) 기로사(耆老社)에 들어가고 정3품 통정대부에 올랐다. 1904(고종 41) 66일 집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81세였다.

 

월고집(月皐集)

박학래, 월고 조성가의 생애와 학문(동양학42, 단국대 동양학연구소, 2007)

김봉곤, 노사학파의 형성과 활동(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7)

 

출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학중앙연구원 로고

[네이버 지식백과] 조성가 [趙性家]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원문을 재독하면서 巨儒의 문장임을 깨달았다. 눈을 떼지 못하고 사흘을 읽었으니 어찌하면 이리도 많이 안다는 말인가. 한주 이진상과 더불어 강우학파를 이끈 거대한 학문의 한 축이었다. 이황(李滉) ,김성일(金誠一), 장흥효(張興孝), 이현일(李玄逸), 이재(李栽), 이상정(李象靖),으로 이어지는 박치복은 定齋 柳致明의 문인으로 남명 조식, 한강 정구, 반계 유형원, 성호 이익, 순암 안정복, 성재 허전으로 이어지는데 성재 허전이 말년에 성호 이익과 순암 안정복 학통의 후계자로 만성 박치복을 지명하였다고 한다. 남려 허유와 명원 곽종석도 만성 박치복의 제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