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감수재길

1610년 <박여량>선생의 [두류산일록]을 읽고

도솔산인 2017. 7. 24. 13:00

 

1610년 <박여량>선생의 [두류산일록]을 읽고


일   시 : 1610년(광해 2) 09월 02일 ~ 09월 08일

▣ 대상산 : 지리산
동   행 : 박여량[57세](전世子侍講院文學), 정경운[55세](남계서원임), 박명부[40세](합천군수), 박명계, 신광선, 박명익, 이윤적, 노륜,

             안국사 승려(처암, 운일), 악공(윤걸), [박여승의 종(혜금연주), 신광선의 종(피리연주), (박여량의 종(옥로, 손득)]등외(15명외)
▣ 일정&코스

• 9/2 : 함양 도천- 어은정- 목동 박춘수의 집(1박)

• 9/3 : 목동(함양군 휴천면 목현리) - 탄감촌(휴천면 문정리) - 용유담 - 군자사(마천면 군자리)
• 9/4 : 군자사 - 백모당 - 하동암(우리동) - 옛제석당터 - 제석당

• 9/5 : 제석당 - 향적사(서천당) - 중봉(제석봉) - 천왕봉 - 천왕당

• 9/6 : 천왕봉 - 甑峰 - 마암 - 소년대 - 행랑굴 - 두류암과 상류암 갈림길 - 상류암

9/7 : 상류암 - 초령[사립재] - 방곡촌(方谷村) - 신광선(愼光先)의 정자 - 최함씨의 계당

9/8 : 최함씨의 계당 - 엄뢰대(嚴瀨臺) - 상사(上舍) 정여계(鄭汝啓)의 집 - 뇌계() - [남계(灆溪)척서정(滌暑亭)] - 도천 감수재(感樹齋)

 

 

 경술년(1610) 8월 중순이 지난 뒤에 합천(陜川)의 박명부(朴明榑) 여승(汝昇), 고대(孤臺)의 정경운(鄭慶雲) 덕옹(德顒)과 함께 9월 초하루에 두류산 유람을 하기로 약속하였으나 이 날 정고대(정경운)에게 일이 생겨 다시 다음날로 약속하였다.

 

# 본래 9월1일에 출발하려고 하였으나 고대 정경운에게 일이 생겨 9월 2일 출발함. 감수재 박여량, 고대 정경운, 汝昇 박명부 3인이 주축임. 감수재 박여량과 고대 정경운은 김일손의 탁영서실에서 함께 동문 수학했고 내암 정인홍의 문인(남명의 수제자)이다. 박여량은 삼척박씨, 박명부는 본관이 밀양박씨로 혈연관계는 아님. 이 세 사람은 임진왜란 정유재란에 국난극복을 위해 의병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박여량은 1608년 함양 도천으로 낙향했으며, 박명부는 寒岡 鄭逑의 문인. 합천군수로 합천 출신인 북인의 영수 정인홍과는 정치적으로 소원한 관계였다고 한다. 특히 1614년(광해군 6)에 이이첨(李爾瞻정인홍 등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고 인목대비(仁穆大妃)도 유폐시키자, 직언으로 항소하다가 삭탈관직을 당했다. 그는 인조반정이후 관직에 나아갔다가 병자호란 뒤 벼슬을 버리고 덕유산 아래 함양 안의로 낙향하여 농월정을 짓고 소요했다.

 

 

 

<학맥도> 兜率 작성(151007)


2일(계묘).

도천(桃川)을 출발하여 어은정(漁隱亭)에 도착했다. 정덕옹(정경운)이 먼저 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말머리르 나란히 하고 앞으로 나아가 목동(木洞) 이수(李秀)씨 집 앞에 있는 오래된 정자에 닿았다. 목동 사람들이 모두 모였다. 박여승은 전에 초하룻날 떠나자는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어제 그의 아우 박명계(朴明桂), 사위 노륜(盧)과 함께 와서 이수 씨의 집에서 자고 지곡(池谷)을 향해 출발한 지 한 식경쯤 지났다고 하였다.

우리가 그를 좇아가려 하였으나 이수 씨가 술을 가져와 마시고, 비도 올 것 같아 출발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첨지(僉知) 박춘수(朴春壽) 씨의 집에서 묵었다. 첨지는 나의 선군(先君)과 동갑으로 76세나 된 노인인데도 귀와 눈이 밝고 기력이 강건하여, 젋은이처럼 우스갯소리를 곧잘 했다. 내가 옛 친구의 아들이라고 매우 정성껏 대접해주었으며, 하룻밤 묵어가라고 붙잡았다. 나 또한 아버지의 옛 친구이기 때문에 매우 공손히 대하였다.

 

3일(갑진) : 용유담에서 박명부 박명계, 신광선, 박명익,이윤적 노륜등이 합류함.


 맑음. 이수 씨가 동생과 조카를 데리고 아침 일찍 와서 인사를 시켰다. 아침식사가 준비되어 그들과 함께 먹었다. 이수 씨가 두 아들이 지은 부(賻)를 꺼내 보였는데, 형식미를 추구하는 취향이 많이 있었다. 식사를 한 뒤 곧바로 출발하여 박대주(朴大柱)로 하여금 앞장서게 하였다. 박첨지 집 뒤의 고개를 넘어 곧장 용유담(龍遊潭)으로 향했다. 박대주는 박첨지의 아들이다. 탄감촌(炭坎村) 앞에 이르러 정덕옹과 박대주가 거기서 박여승을 기다리려 하였다. 나는 허락하지 않고 “먼저 가서 용유담에 자리를 잡고 주인으로서 손님을 기다리는 것이 좋겠네”라고 하였다.

 

 

* 박대주 : 첨지 박춘수의 아들. 첨지는 첨지중추부사의 준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는 조선시대 중추원에 속하는 정삼품 무관이다.


 용유담에 이르러 얼마쯤 지난 뒤에 박여승(박명부)이 동생과 사위 및 신광선(愼光先)∙박명익(朴明益) 등과 함께 왔다. 우리들은 먼저 왔다는 이유로 자못 뽐내는 기분이 들어 그들에게 우쭐댔다. 피리꾼 두 사람이 말머리에서 피리를 불었는데, 한 사람의 박여승의 종으로 혜금도 함께 탔고 한 사람은 신광선의 종으로 또한 피리를 잘 불었다.

 

* 박여승의 종(혜금), 신광선의 종(피리)

 우리는 바위에 오르기도 하고, 냇물을 굽어보기도 하고, 서성이며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앉아서 휘파람을 불기도 하였다. 동쪽으로 보나 서쪽으로 보나 그 장엄한 경관이 빼어났고 수석도 기괴하였다. 내가 둘러앉아 신군이 가져온 술을 마시자고 하였다. 좌중 한 사람이 말하기를 “이곳은 용이 놀던 곳이라서 이런 기이한 자취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천지가 개벽한 뒤에 물과 돌이 서로 부딪치고 깎여 돌출되거나 구멍이 뚫리거나 우뚝 솟거나 움푹 패여 저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내가 대꾸하기를 “다만 세상에서 전하는 대로 보는 것이 옳지, 굳이 다른 의견을 낼 필요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박수를 쳤다.

 용유담에서 동남쪽으로 조금 치우친 곳에 용왕당(龍王堂)이 있었는데,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외나무다리를 설치해 왕래하는데, 박여승과 그의 사위는 그 다리를 건너 가장 높은 바위 꼭대기로 올라갔다. 그러나 나는 스스로 발을 뗄 수 없을 만큼 정신이 아찔하였다. 또 따라가는 종들에게 위험한 곳에 가까이 가지 말라고 주의를 시켰다. 나는 늘그막에 이르러 지세가 험한 곳에 이르면 천천히 지나도 두려운 마음이 항상 마음속에 가득하다. 그러나 박여승은 40세의 한창 때인지라 기운이 왕성하고 의지가 강해 나갈 줄만 알고 두려워할 줄 모르기 때문에 그런 바위 위로 올라간 것이다.

 이곳에서 군자사(君子寺)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었다. 별감(別監) 박대일(朴大一)에게 노래 부르는 기생과 악공을 데려오라고 했는데, 제때에 오지 않았다. 박대주가 술자리를 마련해놓고 기생과 악공이 오기를 기다리려 하였다. 나는 날이 저물어 출발하면 산길이 험해서 반드시 곤경에 처하거나 넘어지는 걱정을 면치 못할 것이라 생각하여, 먼저 길을 떠나 금대사(金臺寺) 밑에 이르러 절구 한 수를 읊조렸다.(시는 문집에 있음) 나는 타고난 자질이 시를 잘 짓지 못하는 데다 또 게을러서 시를 읖조리길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다. 이는 여러 사람들이 모르는 사실이다.

 

* 별감(別監) 박대일(朴大一) 조선시대 유향소(留鄕所)에 소속된 관직. 박대주는 고을 수령(마천 현감), 박대일은 마천 유향소의 관리인 듯하다. 유향소는 조선 초기에 악질 향리(鄕吏)를 규찰하고 향풍을 바로잡기 위해 지방의 품관(品官)들이 조직한 자치기구.


 예전에 나는 정덕옹과 금대암∙안국암(安國庵)∙군자사∙무주암 등의 여러 절에서 글을 읽었는데, 그때 금대암을 구경한 것이 한 번, 영신사(靈神寺)에 오른 것이 한 번, 천왕봉에 오른 것이 두 번이었다. 손가락을 꼽아가며 기억해보니 대체로 정축년(1577) [23세] 가을 9월부터 갑신년(1584)[29세] 여름 4월 사이였다. 옛날 유람했던 바위∙봉우리∙시내∙계곡 등이 30년이 지난 지금에는 까마득히 잊혀져 생각나지 않았다. 지금 다시 이 길을 지나게 됨에, 처음에는 긴가민가 하더니 중간에 생각이 되살아났고 나중에는 기억이 또렷해졌다. 내가 이를 풀이하여 “옛 사람이 산을 유람하는 것은 글을 읽는 것과 같다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인가 보다. 글을 읽을 적에 처음에는 다 기억할 수 없고, 거듭해서 여러 번 읽은 뒤에야 앞에서 잊었던 것이 떠오르고 전에 기억했던 것이 확실해지며 오래도록 읽은 뒤에야 본래 내가 가지고 있는 것처럼 되니, 산을 유람하는 것과 글을 읽는 것이 동일하다는 것은 같은 이치이다. 옛 사람의 말은 참으로 거짓이 없다”라고 하였다.

군자사 앞에 있는 시내는 험악하여 말을 타고 건너기에는 넘어질까 염려스러웠다. 산골 백성 중에 건장한 자들을 불러다 업고 건너게 하여, 먼저 절 앞의 남쪽 누각에 올랐다. 한참 뒤에 박여승과 정덕옹 등이 노래하는 기생과 피리 부는 악공을 앞세우고 도착하였다. 절의 승려가 산에서 나는 과일과 오미자차를 내왔다.


 

* 기생 2명, 악공 윤걸


이윤적(李允迪)과 박대주는 저녁밥을 먹은 뒤에 술자리를 베풀었다. 악공들의 연주와 기생들의 노래가 어우러져 한창 즐거울 무렵 나는 먼저 승방(僧房)으로 갔다. 취해서 자고 있을 때 웃고 즐기며 노래하고 북 치는 소리가 들렸다. 한밤중이 되도록 아무도 자러 오지 않았다. 정덕옹 이하 여러 사람들이 모두 일어나 춤추고 놀았기 때문이다. 술자리가 파한 뒤에 박여승이 내 방으로 와서 청원향(淸遠香) 두 개를 가져갔다. 박여승의 오늘밤 계획(?)은 끝내 이루지 못했으며[終不入手 : 끝내 손도 집어넣지 못했다] 청원향 두 개도 자신이 사르지 못하고 두 기생의 소매 속으로 들어갔다고 하니, 웃을 만한 일이다.

군자사는 옛 이름이 영정사(靈淨寺)이다. 신라 진평왕이 즉위하기 전에 어지러운 조정을 피해 이 절에 와 거처하였다. 그때 아들을 낳게되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고 한다. 안국사(安國寺)도 이때에 그 이름을 얻은 듯하다. 전란을 겪은 뒤에 중창한 것은 법당∙선당(禪堂)∙남쪽 누각 뿐이다.

 

# 고을의 수령이 기생을 불러서 접대를 했는데 술이 너무 취해 오늘밤 계획을 끝내 이루지 못했다는 군자사에서 해프닝이 그대로 묘사되어 있다.

 


4일(을사).

맑음. 박대주박대일이 고을 수령(?)의 일 때문에 두 기생을 데리고 절의 문밖에서 작별하였다. 우리는 승려에게 업혀 실덕탄(實德灘)을 건넜다. 실덕탄의 좌우에 실덕∙마촌(馬村)∙궁항(弓項) 등의 마을이 있었다. 곳곳에 감나무가 서 있는데, 감이 한창 익어 산골짜기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산 속에 사는 백성들이 이 감을 따서 생계를 꾸려간다. 길이 매우 울퉁불퉁하였다. 말에서 떨어지지 않고 겨우 백모당(白母堂)에 도착했다. 차를 마신 뒤에 안국사의 승려 숭혜(崇惠)가 술과 과일을 대접하겠다고 하였다.

말을 놓아두고 나막신을 신고서 따라온 자들에게 단단히 일러 방곡(方谷)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지팡이를 짚고 비로소 산을 오르기 시작하였다. 얼마쯤 올라 지나온 곳을 굽어보니 점점 높고 멀게 느껴져, 이른바 “높은 곳에 오르려면 반드시 낮은 데로부터 시작한다”는 말을 실감케 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비탈길을 따라가는데 해를 가린 나무들이 거의 수십 리나 늘어서 있었다. 바로 우리동(于里洞)이었다. 우리동 중간쯤에 바위가 우뚝 솟아 있고 그 밑은 조금 움푹하였는데 ‘하동암(河東巖)이라 불렀다. 세상에 전하기를 하동태수가 이곳에 이르러 지쳐서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하고 이 바위 아래서 묵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도 매우 피곤하여 열 걸음에 한 번씩 쉬었는데, 쉴 때마다 너무 오래 앉아 있어서 일어나지 못하였다. 함께 간 승려가 쉴 적마다 재촉하기를 “해가 서쪽으로 지려 하는데 갈 길은 아직도 멀었습니다. 우리도 이 바위 밑에서 자는 것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장난 삼아 말하기를 “예전부터 ‘하동암’이라 불러왔지만, 이제는 ‘합천암(陜川巖)’이라고 고쳐 부르는 것이 좋겠네”라고 하였다. 박여승이 합천군수를 지냈기 때문에 한 농담이었다. 하동암에서 겨우 5, 60보쯤 오른 뒤 스스로 안도의 숨을 쉬면서 “우리들은 하동암을 지나 꽤 멀리 올라왔네”라고 하였다. 이른바 “50보 달아난 자가 1백 보 달아난 자를 비웃는 꼴”이었다.

겨우 겨우 제석당(帝釋堂) 에 도착하였다. 올라서 좌우의 바위와 골짜기를 조망하고, 산과 내의 형세를 가리키며 둘러보았다. 온 산에 보이는 것이라곤 푸른 회나무가 아니면 붉게 물든 나무였으며, 붉게 물든 나무가 아니면 저절로 말라죽은 나무였다. 푸르고 붉고 희고 검은 색깔이 뒤섞여 서로 비추어서 마치 비단에 수를 놓은 것 같았다.


서쪽으로 1백여 리쯤 되는 곳을 바라보니 새로 지은 두 절이 있는데, 무주암 서쪽에 있는 절을 ‘영원암(靈源庵)’이라 하고, 직령(直嶺) 서쪽에 있는 절을 ‘도솔암(兜率庵)’이라 하였다. 도솔암은 승려들이 수행하는 집으로 인오(印悟)가 지어 살고 있는 곳이다. 인오는 우리 유가의 글을 세속의 문장으로 여겨, 단지 불경(佛經)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여러 승려를 위하여 암자 앞에 붉은 깃발을 세워두었고, 발자취가 동구 밖으로 나간 적이 없다고 한다.

몇 년 전 윤 아무개가 함양군수로 나왔을 때, 청렴한 정사를 베풀어 작목(作木)으로 받은 녹봉은 한 푼도 자기 집에 들여놓지 않았다. 딸을 시집보낼 때에도 자기의 말을 팔아 혼수를 장만하였다. 인오가 그 말을 듣고 지은 시에 “옛날 사람 송아지를 두고 갔다 들었는데, 오늘 이분 말을 팔아 딸 시집 보낸다네”라 하고, 마지막 연에 “산승이 맑은 덕을 도울 길 없으니, 향로 앞에 홀로 서서 극락왕생 축원하네”라고 하였다.

 

 

옛 사람이 송아지를 두고 갔다 들었는데

오늘 이 분 말을 팔아 딸 시집 보낸다네

山僧이 맑은 덕으로 도울 길이 없으니

향로 앞에 홀로 서서 극락왕생 축원하네

 


무릇 비석을 세워 칭송하고 입으로 전하여 사모하는 것은 이 고을 백성들이 할 일이다. 세상 일에 전혀 뜻을 두지 않고 혼자 외롭게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까지도 우러러 흠모하는 정을 바쳤으니, 덕을 좋아하는 마음은 누구나 함께하는 것으로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걱정할 것이 아니라 알아줄 수 있게 되기를 구해야 한다”고 하겠다.

여러 사람들이 모두 풀을 깔고 둘러앉아 물을 마시고 밥을 먹기도 하고 술을 따라 마시기도 하였다. 다시 억지로 일어나 산을 올랐다. 여기서부터는 우리동만큼 길이 험하지는 않았지만, 반 이상 올라와 정상이 머지 않은지라 다리의 힘이 빠져 발걸음이 무거워짐을 절감하였다. 젋은 두 종으로 하여금 단풍나무를 꺾어들고 앞서가며 춤을 추게 하고, 악공들로 하여금 계속 피리를 불게 하였다. 이는 대체로 심한 피로감을 잠시나마 잊기 위해서였다. 두 종 가운데 하나는 관청에 딸린 관동(官童) 옥로(玉老)였고, 다른 하나는 서울에서 온 손득(孫得) 이었는데 모두 내가 데려온 종들이다.

 

* 박여량이 데리고 온 종 관동 옥로와 손득


제석당을 향해 오를 때 길이 매우 가팔라 한 걸음 한 걸음 내딛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부축하게 하기도 하고,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게 하기도 하였다. 내가 “비록 달아나려 해도 달아날 수 없겠구려”라고 하였는데, 이는 예전 분이 “도망친 죄인을 잡아오는가?”라고 농담하였기 때문에 한 말이다.

산봉우리를 바라보니 보이는 곳곳에 매를 잡는 움막이 설치되어 있었다. 실제로 매를 잡은 사람 수를 물어보니 한두 사람밖에 안 된다고 하였다. 아! 움막을 엮고 덫을 설치하여 만리 구름 속을 나는 매를 엿보니, 높고 낮은 형세로 말하자면 현격한 차이가 나는 듯하지만, 매가 끝내 덫에 걸림을 면치 못하는 것은 욕심이 있기 때문이다. 무릇 천하의 만물 가운데 욕심을 가진 놈은 제압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 됨을 어찌 돌이켜보지 않으랴? 또한 기구를 설치해놓고 기다리는 자들은 모두 자신이 매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끝내 매를 잡는 사람은 한두 사람에 불과하니 잡히는 매의 수도 알 수 있겠다.

제석당 앞에 이르자 날이 이미 어두워졌다. 온 골짜기에 안개가 짙게 깔리고 바람소리가 윙윙거렸다. 바라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막막하고 어렴풋한 세계에 허다한 생물들이 은연중 그 속에서 살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할뿐, 인간의 지혜로서는 세세한 것을 헤아릴 수 없었다. 이곳에 올라보니 더욱 기이하게 느껴졌다. 여러 사람들과 함께 동쪽∙서쪽 방을 나누어 차지하고서 곤히 한숨 자고 난 뒤 저녁밥을 먹었다.

제석당의 규모는 제법 넓어 들보의 길이가 거의 23~4자 정도나 되었다. 좌우의 곁방을 제외하고 가운데 삼 칸의 대청이 있었다. 지붕은 판자로 덮었는데 못을 박지 않았고, 벽 또한 흙을 바르지 않고 판자로 둘러놓았다. 다시 지은 연유를 물었더니, 한 노파가 돈을 내어 한 달도 되지 않아 완성하였다고 한다. 미약한 노파의 힘으로 사람들을 감동시켜 순식간에 큰일을 이루었으니, 미혹되긴 쉽고 이해하긴 어려운 사람 마음에 대해 참으로 탄식할 만하다.


5일(병오).

맑음. 일찍 일어나 조반을 재촉해 먹고 출발하려는데, 제석당의 주인인 노파가 고하기를 “ 본 고을의 유향소에서 잡으러 온다는 전갈을 마천리(馬川里)의 색장(色掌)[조선시대 성균관 소속의 임원]이 전해왔습니다. 참으로 근심스럽고 괴롭습니다”라고 하였다. 우리들이 함께 그 명령을 늦추어 달라고 유향소에 서신을 보냈다.


제석당 뒤에는 바위 구멍에서 흘러 나오는 샘이 있었다. 돌을 쌓아 물을 막아놓았는데 물맛이 매우 시원했다. 남쪽으로 뻗은 능선을 따라 1리쯤 가서 남쪽 묏부리 위에 올라서니 그 밑에 서천당(西天堂)과 향적사(香積寺)가 있었는데 매우 볼 만한 경관이었다. 서천당은 새로 지었고 향적사는 옛날 그대로였다. 박여승과 여러 사람들은 곧바로 서천당과 향적사로 내려가 둘러보았다. 하지만 나는 정덕옹과 함께 예전에 가본 적이 있다고 사양하고서 곧장 중봉(中峰)[제석봉]에 이르렀다. 여기는 높이가 엇비슷하여 별반 차이가 없었다. 멀리서 보는 것이 가까이서 자세히 보는 것만 못함을 알겠으니, 직접 밟아보지 않고 높낮이를 함부로 논할 수 없는 일이다.

또 몇 리를 가서 석굴[통천문]을 빠져나왔는데, 사람의 마음을 황홀하게 했다. 다시 올라 정상에 도착하니 이곳이 바로 천왕봉(天王峯)이었다. 각자 바위를 부여잡고 비탈길을 올라 인간 세상을 굽어보니, 아련히 세상을 버리고 속세를 떠나왔다는 생각과 유쾌히 낭풍(閬風)과 현포(玄圃)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낭풍(閬風)과 현포(玄圃) : 閬風瑤池의 준말. 신선이 산다는 곳, 玄圃積玉의 준말. 사물의 정수가 한데 모인 것을 비유하는 말. 곤륜산 신선이 산다는 현포에는 옥이 많이 있다는 전설에서 유래함. 신선의 거처 현포에는 기이한 풀과 괴이한 모양의 바위가 많다고 함.  


[천왕봉 유래] ‘천왕봉’이라는 명칭에 대해 세상 사람들은 신상(神像)이 모셔져 있는 곳이어서 그렇게 부른다고 생각한다. 내 나름대로 생각해보건대, 이 산은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흘러내려 마천령(磨天嶺)∙마운령(磨雲嶺)∙철령(鐵嶺) 등이 되었고, 다시 뻗어내려 동쪽으로는 오령(五嶺)∙팔령(八嶺)이 되고 남쪽으로는 죽령(竹嶺)∙조령(鳥嶺)이 되었으며, 구불구불 이어져 호남과 영남의 경계가 되었으며, 남쪽으로 방장산(方丈山)에 이르러 그쳤다. 이 산을 ‘두류산’이라 한 것이 이런 연유 때문에 더욱 극명해진다. 하늘에 닿을 듯 높고 웅장하여 온 산을 굽어보고 있는 것이 마치 천자(天子)가 온 세상을 다스리는 형상과 같으니, 천왕봉이라 일컬어진 것이 이 때문이 아니겠는가?

봉우리 위의 판잣집이 있는데, 이 또한 전에 본 그 모습이 아니었다. 전에는 단지 한 칸으로, 지붕은 판자를 덮고 돌로 눌러서 비바람에 날아가지 않게 한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 규모를 넓혀 세 칸 집을 지었는데, 판자에 못을 박고 판자로 둘러친 벽 바깥에 돌을 에워싸 매우 견고하게 만들었다. 그 안에는 수십 명이 앉을 수 있었다.

임진왜란을 겪은 뒤 사람들이 백에 하나도 남지 않을 정도로 죽어 마을이 쓸쓸해져서 다시는 옛날의 모습이 아닌데, 세상 밖에 사는 무당이나 승려 같은 무리들은 옛날에 비해 더욱 번성하고 있다. 사찰로써 말한다면 금대암∙무주암∙두류암 외에 영원암∙도솔암∙상류암(上流庵)∙대승암(大乘庵) 등은 예전에 없었던 절이다. 사당으로써 말한다면 백모당∙제석당∙천왕당(天王堂) 등은 모두 옛날에 화려하게 지은 것이고, 용왕당(龍王堂)∙서천당 등은 새로 지은 것이다. 노역을 피해 숨어든 무리와 복을 비는 백성들이 날마다 구름처럼 모여들어 봉우리와 골짜기에 낱알이 어지러이 널려 있는데도 나라에서 금지할 수 없으니, 참으로 탄식할 만한 일이다.

따라온 승려들에게 저녁밥을 지으라고 하였더니 솥이 숨겨져 없다고 하였고, 샘을 찾으라고 하였더니 물통이 절벽 아래로 떨어져서 없다고 하였다. 이 모두 한 늙은 무녀가 사람들을 골탕 먹이려고 솥을 숨기고 물통을 떨어뜨려, 배고파도 밥을 해먹을 수 없고 목이 말라도 물을 떠 마실 수 없게 한 것이다. 그 이유를 캐물었더니 승려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상봉은 진주와 함양의 사이에 있어서 지역으로 말하면 천왕봉 중앙이 경계가 되고, 천왕당으로 말하면 사당의 중앙이 경계가 된다. 그러므로 사당을 짓고 판자를 덮은 사람은 함양의 화랑(花郞)이었고, 못을 박아 견고하게 한 사람은 진주의 늙은 무녀였다. 진주는 병영(兵營)이 있는 곳이고, 함양은 그 병영에 속한 군이다. 화랑과 무녀가 이익을 다투어 서로 싸우는 바람에 이 봉우리의 사당이 싸움의 빌미가 되었다. 무녀는 사당을 진주의 것이라고 여겨 다른 일로써 화랑을 무고하여 함양의 감옥에 갇히게 하였다. 그리고 사당에 있던 솥을 숨기고 물통을 없애 유람하는 사람들과 시인들이 먹고 마실 수 없게 하였으니 무녀의 죄는 이것만으로도 매우 크다.

 

* 花郞 : 무당의 남편


병마절도사는 한 도의 군사를 거느리는 사람인데, 도리어 하찮은 무녀의 무고만을 믿고 허튼 소리를 들어 무녀를 도운 것은 어찌된 일인가? 나는 화랑이 죄도 없이 무거운 형벌에 처해진 것을 가엾게 여겨 절도사에게 편지를 보내 함양의 감옥에 갇힌 그를 풀어달라고 하였다. 사당에는 돌로 만든 신상[성모상]이 있었는데 북쪽 벽 아래에 의젓하게 앉아 있었다. 거적으로 신상을 덮은 뒤에 우리는 자리를 잡고 앉았다.

따라온 사람들이 말하기를 “해가 지려 합니다. 나가서 구경하지 않으시렵니까?”라고 하였다. 우리들은 모두 천왕당을 나와 서쪽 바위 위에 앉아서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 떠가던 구름 한 떼가 서쪽 하늘가에 길게 뻗치고 석양에 봉우리와 골짜기가 천만 가지 기이한 형상을 자아냈다. 다시 붉은 구름 한 줄기가 검은 구름 밖으로 길게 드리우더니 그 모양이 끝없이 변해 예측할 수 없었다. 잠시 후 해가 엄자산(崦嵫山)으로 넘어가니, 온 세상이 어두워지고 별과 달이 희미하게 비추고 바람도 거세어졌다. 마치 혼돈(混沌) 속에 있는 것처럼 어슴푸레하였다.

 

* 崦嵫山 : 중국 甘肅省 天水縣 서쪽에 있는 산으로 전설에 의하면 이곳으로 해가 져서 들어간다고 한다.


천왕당에 들어가 각자 잠자리를 잡고서 이불을 끌어안고 두 줄로 마주 앉았다. 등불을 매달고 향을 피운 뒤 한두 순배 잔을 돌렸다. 다시 악기를 연주하고 따라온 승려와 종들에게 번갈아 일어나서 함께 춤을 추게 하였다. 어떤 자는 화상체(和尙體)를 추기도 하였는데 그 중에서 안국사의 승려 처암과 운일의 춤사위가 가장 빼어났다. 온 좌중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한바탕 크게 웃었다. 피리 부는 악공 윤걸계면조(界面調)를 잘 연주하였는데, 후정화∙영산회상∙보허사 등은 각각 질박한 맛이 있었다.

 

* 안국사 승려 처암, 운일, 악공 윤걸

* 계면조(界面調) : 계면(界面)이라고도 한다. 이익(李瀷)은 『성호사설』 속악조(俗樂條)에서 “계면이라는 것은 듣는 자가 눈물을 흘려 그 눈물이 얼굴에 금을 긋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라고 설명하였다. 허균(許筠)도 『성소부부고 惺所覆瓿藁』에서 “김운란이 아쟁을 잘 타서 사람의 말처럼 하였다. 그 계조를 들으면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라고 기록하여 계면이 슬픔을 나타내는 곡이라고 하였다.

 

9/6일(정미).

 맑음. 새벽에 일어나 의관을 정제하고, 추로주(秋露酒)를 한두 잔 마셨다. 따라온 사람들이 또 “동방이 이미 밝아옵니다”라고 하여, 나는 여러 사람들과 동쪽 바위 위에 올라가서 해가 뜨기를 기다렸다. 검은 구름과 붉은 구름이 동쪽 하늘가에 드리웠는데, 어제 저녁 해가 질 때의 모양과 같았다. 해가 솟아오를수록 구름 기운이 점차 흩어졌다. 온 하늘 아래는 찬란한 빛이 밝게 퍼져, 마치 임금이 임어할 때 등불이 찬란하고 궁궐이 삼엄하며, 오색구름이 영롱하고 온갖 관리들이 옹립해 오위하며, 아랫사람들이 제자리에 서 있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감히 거만하지 않고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하는 것과 같았다. 멀리 보이는 물은 섬진강 하류와 두원곶(豆原串) 이남의 대양인 듯하고, 산은 계립령(鷄立嶺) 이남의 동쪽으로는 팔공산(八公山)과 서쪽으로는 무등산(無等山)에 이르기까지 모두 한눈에 들어왔다. 점필재(佔畢齋)의 유람록에 상세히 기록해놓았으므로 여기서는 군더더기 말을 하지 않겠다.

* 추로주(秋露酒) : 맑은 술


 이 봉우리의 동남쪽으로 긴 골짜기가 1백여 리쯤 뻗은 곳에 ‘덕산(德山)’이라는 고을과 ‘덕천(德川)’이라는 내가 있는데,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이 터를 잡고 사셨던 곳이다. 선생의 묘와 사당이 모두 그곳에 있다. 사당이 있는 서원의 현판은 ‘덕천’인데 지금의 임금께서 하사하신 것이다. 천 길이나 되는 봉우리 위에서 선생의 크게 은둔하신 기상을 상상해보건데, 천 길 봉우리 위에서 또 천 길 봉우리를 바라보는 격이다.

 오늘 상류암(上流庵)으로 가려고 몇 번이나 밥을 재촉했으나 점점 늦어졌다. 따라온 자들이 “늙은 무녀가 물통을 밀어버려 밤새 물을 받지 못했고, 바위틈에서 떨어지는 물도 한 방울씩 떨어져 밥짓는 것이 자연히 늦어졌습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세상일을 돌본 뒤로 세상살이를 하면서 가는 곳마다 곤궁하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끝내 하찮은 한 무녀에게 곤란함을 당했으니 이는 실로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다.

 이윤적(李允迪)은 다시 군자사로 되돌아가겠다 했고, 우리들은 증봉(甑峯)을 거쳐 내려와 마암(馬巖)에 이르렀다. 따라온 종 손득이 물을 마시러 갔다가 당귀(當歸)를 많이 캔 관아의 의원을 만나 그 중 서너 뿌리를 얻어 가지고 와서 나에게 올렸다. 당귀는 내가 평소 좋아하는 것이어서 종들로 하여금 잘 간수하라고 주의를 시켰다. 아!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가야 하는데 돌아갈 수 없구나. 단지 ‘當歸’라는 약초만을 좋아할 뿐이니, ‘當歸’를 좋아함이 그 이름에 걸맞다고 할 수 있겠는가?


當歸 : 당귀는 마땅히 돌아가야한다는 뜻이다.

 점필재와 박여랑의 기록으로 보면 지금의 마암은 기록과 전혀 다르다. 중봉과 상봉 사이 작은 봉우리가 甑峰이라면 중봉샘이 馬巖이고 점필재와 감수재의 기록과 일치한다. 현재 마암이나 중봉샘이나 하봉샘터 아래나 다 당귀가 자생할 수 있는 환경이나 중봉샘이 유력하다. 중봉 신하가 상봉 왕에게 떡을 올리는 형국이라 甑봉이며 중봉샘은 떡시루 옆에 놓인 물(泉)이 된다.

 

* 박여량의 종 손득

 

소년대(少年臺)를 지나 행랑굴(行廊窟)에 도착했다. 각자 물을 마시고 밥을 먹었다. 천왕봉을 되돌아보니 이미 바람난 말이나 소일지라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까마득하게 멀뿐만 아니라[已不啻風馬牛之不及矣], 한번 걸음을 옮긴 사이에 이렇게 멀리 내려왔으니, 이른바 “악(惡)을 따르는 것은 산에서 내려오는 것처럼 쉽다는 말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행랑(行廊)은 회랑(回廊)과 같은 어휘로 종교 건축이나 궁전 건축 따위에서 건물의 중요 부분을 둘러싸고 있는 벽이 없고 지붕이 달린 복도(통로)를 뜻한다. 감수재는 바위 상단부가 튀어나와 비를 피할 수 있는 형태의 암벽을 일컬은 말로 馬巖 산막터를 행랑굴(行廊窟)설명한 것이다. 187789일 후산 허유와 함께 이곳에서 하룻밤 묵어간 면암 곽종석은 馬巖을 모양을 穹窿(활 무지개처럼 높고 길게 굽은 형상 또는 그런 형태로 만들어진 천장이나 지붕)으로 묘사하였고, 허유는 개운암이라고 이름을 지었고, 면우 곽종석의 제자 하용제가 개운암이라고 바위에 쓰고, 허유의 부탁으로 같은 해 8월 29일 석각을 하기위해 박치복 일행과 다시 이곳을 찾았으나, 천왕봉까지 하루에 올라갔기 때문에 개운암 각자를 새기지 못한다. 아무튼 行廊窟은 고유명사로서 行廊窟이 아니라 '오버행의 바위로 비를 피할 수 있는 모양'으로 이해하면 된다.


 천왕봉으로부터 이곳에 이르기까지 다른 나무는 없고 단지 회나무∙잣나무와 붉은 나무와 단풍나무만 보이고, 사이사이 마가목(馬檟木)이 섞여 있었다. 어떤 사람은 마가목을 취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돌 틈에서 작은 회 나무를 캐기도 했는데, 제대로 자라지 못한 수령이 꽤 오래된 것들이었다. 정덕옹과 혜보는 많이 캐었는데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

이 두 종류의 나무는 모두 높은 봉우리나 깊은 골짜기에서 자유롭게 자라난 식물이다. 그 중 하나는 세상 사람들에 의해 반듯하다고 하여 베여졌고 또 다른 하나는 구부정하기 때문에 캐어지게 되었으니, 온전한 삶을 얻거나 잃게 된 것이 목안(木鴈)과 다를 바 없다. 그렇다면 회나무가 캐어진 것은 온전한 생을 얻은 것인 듯하다. 그러나 그 나무를 캔 사람이 좋은 땅을 골라 잘 키우지 않는다면 생을 얻은 것이 도리어 생을 잃는 격이 되어, 차라리 사람을 만나지 않고 높은 산, 깊은 골짜기에서 저절로 태어났다 저절로 죽는 것보다 오히려 낫지 않으리라는 것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그러니 이 나무가 생을 제대로 얻은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는 일이다. 아! 식물은 생사를 자기 뜻대로 할 수 없고 권한이 사람에게 있으니 사람들은 이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두류암과 상류암으로 가는 갈림길에 이르렀다. 두류암은 예전에 내가 유람하며 쉬었던 곳이지만, 상류암은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이라 나는 여러 사람들에게 상류암으로 가는 길을 선택하도록 강요하였다. 상류암은 묘운이 새로 지은 곳으로, 상봉에서 내려가는 길이 아직 나지 않았다. 숲 속에 난 한 갈래 도랑길을 겨우 찾아 등성이를 넘기도 하고 골짜기를 따라가기도 하면서 물고기를 꿴 것처럼 한 줄로 내려갔다. 한 낭떠러지에 이르렀는데 위로는 잡을 만한 것이 없었고, 아래로는 몇 길이나 되는 절벽이었다. 다른 사람들과 따라온 승려들 모두 개미 떼처럼 절벽에 붙어 내려갔는데, 나는 발을 내딛지 못했다. 어쩔 줄 몰라 안절부절하고 있을 대, 멀리서 나무를 베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는 산을 잘 타는 승려들이 내가 못 내려오리라 짐작하고 기구를 설치하여 나를 내려가게 하려는 것이었다.

 

☞  상류암은 두류암과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것을 암시한. 유평에 있다는 류암에 의문이 든다. 천왕봉에서 유평까지의 거리로 보아 늦은 아침을 먹고 출발했는데 나막신과 짚신을 신고 헤드랜턴도 없이 어떻게 내려갈 수 있었을까? 축지법을 쓰는 보붓상단도 불가능한 거리다. 박여량은 지리산 산행을 한 이듬해에 죽었다. 그의 건강과 체력으로 불가능하다. 박여량의 산행기를 들고 왜 99탐구팀이 유평으로 갔을까.


상류암에 이르렀을 때는 일행이 모두 기진맥진했다. 이 암자의 승려가 차와 과일을 내왔는데, 모두 산에서만 맛볼 수 있는 것들이었다. 저녁을 먹은 뒤 묘운이 청하기를 “이곳에서 조금 서쪽으로 가면 한 암자가 있는데, 제법 정결하며 뜰에 가득 국화를 심어 노란색, 흰색 국화꽃이 한창 피어 있습니다. 그곳에 가서 주무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정덕옹∙박여승∙혜보와 함께 피곤함을 무릅쓰고 일어나 횃불을 들고 그 암자로 갔다. 여러 사람들도 모두 우리를 따라왔다. 가보니 묘운이 말한 대로 암자는 정결하고 국화는 만발해 있었다. 우리들은 횃불을 들고 이리저리 비춰가며 꽃을 구경하였다. 그런 뒤에 한두 송이를 꺾어 병에 꽂아 침상 머리에 두었더니 꽃 그림자가 너울거렸다. 여러 사람들이 인사를 하고 상류암으로 간 뒤 나와 네 사람은 잠자리에 들었다.

 

* 상류암 승려 묘운, 눌혜(묘운아우), 혜보


군자사에서부터 여기에 이르기까지 한 번 오르고 한 번 내릴 때마다 얼마나 많이 쉬면서 왔던가? 사람들은 모두 내가 오르지 못할 것이라 말했지만, 중도에서 그만두거나 넘어져 다치지 않을 수 있었던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내가 도천(桃川)에 있을 때부터 이미 두류산을 유람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산을 오르는 노고를 시험해보고자 나막신을 신고 지팡이를 짚고서 산수간을 매일같이 왕래하며 하루도 쉬지 않았다. 이것이 곧 노고를 익힌 것이다. 젊었을 때 읽은 책에 고인이 “산을 유람하는 데는 요령이 있으니, 천천히 걸으면 피곤하지 않고 조심해서 걸으면 넘어지지 않는다라고 한 말을 나는 항상 가슴속에 새겨두었다. 지금 나는 미리 익힌 힘으로 옛 책에서 말한 방법을 시험한 것이니, 이것이 중도에 포기하거나 넘어져 다치지 않게 된 까닭이다. ‘습(習)’이라는 한 글자는 논어 첫머리에 나오는 말로 고인이 경계한 뜻이 어느 경우인들 해당되지 않음이 없음을 알 수 있다.

 

# 두류산 유람을 위해 오랜기간 철저한 준비를 했다는 것이 놀랍고, 이미 rest 스텝을 이미 터득했다는 것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또한 무사히 천왕봉에 오르게 되었던 데에는 기대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천하의 일은 뜻을 세우는 것이 우선이다. 뜻이 지극해진 뒤에는 기(氣)가 따르게 마련이다. 나는 일찍이 상무주암의 승려를 만나 시 한 수를 지어준 적이 있는데, 그 시에 “비 개인 뒤 푸른 기운 저 멀리 피어날 때, 숲 속에서 우연히 암자 승려 만났네. 두류산 오르자고 은근히 약속하니, 구름 서린 제일봉에 이내 몸이 있다네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신체를 미리 단련한 것 뿐만 아니라, 제일봉에 오르겠다는 뜻을 평소에 다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上無住詩 : 상무주암 스님에게 준 시

 

雨後晴嵐翠似蒸 : 비 개인 뒤 푸른 빛 기운이 피어나는데

林間忽見上方僧 : 숲 속에서 문득 상무주암 승려 만났네

從容話及頭流約 : 조용히 두류산에 함께하자고 약속하니

身在雲山第一層 : 이 몸은 구름이 서린 제일봉에 있구나

 

 

7일(무신)[1610년 10월 23일 土]

맑음. 세수를 하려는데 이 암자의 승려가 물을 데워 세수물을 준비하겠다고 하였다. 나는 사양하고 물통으로 가서 맑은 물을 움켜 낯을 닦았다. 암자 서쪽에는 너럭바위가 있는데,(×) 臺(대)가 있는데(○) 주위의 경치가 제법 볼만했다. 그 곁에 회나무 서너 그루가 있었는데 이제 겨우 한 움큼 정도의 굵기였고 길이는 서너 장쯤 되었다. 밑둥이 곧기 때문에 해를 입지 않고 잘 자라고 있으니 뒷날 유용한 재목이 되리라는 것을 알겠다.

다시 암자로 돌아와 혜보에게 청해 이 암자의 벽에 이름을 썼는데 모두 8명(*)이었다. 박여승은 불가의 책 한 권을 보고 있었다. 그 책에는 ‘삼필사설(三必死說)’이 있었는데, 대나무는 열매를 맺으면 반드시 죽고, 소라는 새끼를 가지면 반드시 죽고, 사람은 병이 있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하였다. 묘운과 아우 눌혜는 문자를 제법 알고 불서도 잘 외웠다. 그들은 유생들 가운데 가장 뛰어났었는데, 전해 받은 농토와 집을 모두 팔고서 승려가 되어 성씨를 버리고 집안을 돌보지 않았으니 매우 미혹된 자들이라고 하겠다.

 

(*)  박여량, 정경운, 박명부, 박명계, 신광선, 박명익, 이윤적(?), 노륜


상류암으로 가서 아침밥을 먹었다. 내가 피곤하여 잘 걷지 못할까 염려해서 따라온 승려들이 남여(藍輿) 두 대를 구해놓았는데, 하나는 박여승을 위한 것이었다. 남여를 타기도 하고 걷기도 하다가 한 곳에 이르러 쉬었다. 울창한 숲에 넝쿨이 기어오르고 나무 위에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일행 중 한 승려와 종이 마치 원숭이처럼 나무를 잘 탔다. 그들이 나무위에 올라가 흔들어 떨어뜨린 열매는 서리를 맞아 매우 달았다. 모두들 실컷 먹었다.

초령(草嶺)을 넘었다. 초령은 함양과 산음(山陰)으로 나뉘는 두 갈래길의 분기점이었다. 내려오는 길에 오미자가 많이 보였다. 따라온 자들로 하여금 넝쿨을 뜯고 그 열매를 따게 하고서, 나는 먼저 시냇가의 앉을 만한 반석으로 갔다. 또한 따라온 자들에게 산포도(山葡萄)를 따오게 하고, 나는 반석 위에서 여러 사람들을 기다렸다. 몸을 씻거나 거닐며 소요할 만한 시내와 바위가 어우러진 곳이 한둘이 아니었다.

 

[누락부분]방곡의 上溪까지 내려오니 종들이 말을 가지고 와서 기다렸다. 시내에 앉아서 각각 마음을 진정시키는 것을 마치고 남여를 버리고 말을 탔다.[下至方谷之上溪。奴輩以馬來待矣。臨溪而坐。各罷鎭心。舍輿乘馬。] 방곡촌(方谷村)지나는데 마을의 집들은 다 대나무를 등지고 집을 지었으며 감나무로 둘러 싸여있고 인가와 접하였으나 두루 속세를 벗어난 지경과 같았다. [村舍皆負竹爲家。繚以柿木。鷄鳴犬吠。洽一別境也。]임천을 건너[越瀶川]

 

 신광선(愼光先)의 정자 에 도착하여 술을 서너 순배마시고, 최함씨의 계당으로 가서 묵기로 하였다. 저녁밥을 차려놓았는데, 동네 여러 벗들이 술과 안주를 가지고 모여들었다. 술을 마시며 환담을 나누다 2경이 되어서 파했다. 계당은 작은 시냇가에 있는데 시냇물을 끌어다 연못을 만들고, 매화나무∙대나무∙소나무∙국화가 그 주위에 가득했다. 최생을 속인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내가 보기엔 속된 사람이 아닌 듯하였다.

올 가을에는 장마가 계속되어 하루도 개인 날이 없었다. 우리들이 비에 흠뻑 젖어 곤궁함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모두들 생각했고, 우리들도 그렇게 여겼었다. 그런데 산에 오른 뒤로는 개이지 않은 날이 없어서 일출과 일몰을 유쾌하게 보았고 먼 곳까지 모두 다 보았으니 내 생애 말년의 큰 행운이라고 하겠다. 서로 술잔을 들어 자축하였다.

우리나라의 산은 묘향산(妙香山)∙구월산(九月山)∙금강산(金剛山)∙지리산(智異山)이 사방의 진산이 되는데, 지리산이 곧 두류산이다. 옛날에는 금강산∙변산(邊山)∙두류산을 ‘삼신산(三神山)’이라 했는데, 두류산은 곧 방장산이다. 두보의 시에 “방장산은 바다 건너 삼한(三韓)에 있네”라는 구절이 있는데, 나는 처음에 이 말을 믿지 않았다. 나중에 주(註)를 보니 “방장산은 대방국(帶方國)의 남쪽에 있다”고 하였는데, 대방국은 지금의 남원부(南原府)이다. 나라에서 지리산에 제사를 지내는 곳도 남원의 경내에 있다. 이를 종합해 보건대 두공부의 시구는 참으로 허튼 말이 아니며, 옛날 사람들이 박물(博物)에 해박했던 점을 또한 알 수 있다.

이 산의 남쪽에는 신흥사(神興寺)∙쌍계사(雙溪寺)∙청학동(靑鶴洞)과 같은 빼어난 경관이 있는데, 일찍부터 마음속에 담아두고 잊지 못하던 곳이다. 나는 한 번만이라도 기이한 곳을 찾고 진경을 탐방하여 ‘쌍계석문(雙溪石門)’ 큰 네 글자를 손으로 만져보고, 팔영루 아래의 맑은 물에 발을 씻고, 아득한 옛날의 유선(儒仙)을 불러보고, 천 길 절벽에서 학의 등에 올라타고서 선경(仙境)을 유람하여 내 평생의 숙원을 풀고 싶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세속의 굴레에 얽매여 몸을 뺄 수 없었고, 게다가 점점 늙어가고 있으니 어찌 훗날 소원을 이루리라 장담할 수 있겠는가? 서로 더불어 한번 축하한 뒤에 이런 생각을 하니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초령이 문제를 푸는 관건이다. 오봉리까지 가장 가깝고 편한 길이라면 초령은 사립재가 아닐까?(초령은 새봉임) 상류암에서 남여를 타기도 하고 걷기도 하면서 초령을 넘어 시내를 따라 내려가다가 방곡촌을 지나서 신광선의 정자에 도착했다. 안가봐서 모르지만 오봉리 방곡촌, 신광선의 정자, 최항씨의 계당, 엄뢰대, 다음날 아침식사를 대접한 친구 최응수, 뇌계에서 일행들과 작별하며 8일 후 9월 16일 남계의 하류 척서정에서 만나기했다. 엄뢰엄천강을 말한다.


8일(기유).

좌수(*) 최응회씨가 우리에게 아침 식사를 대접하였다. 최군은 어려서부터 나와 친한 사이였다. 중풍으로 걷기가 어려웠지만 우리들을 위하여 엄뢰대(嚴瀨臺)까지 찾아왔다. 엄뢰대 아래에는 큰 내가 있었는데 이 내는 두류산에서 흘러 내려온 물이다. 이곳에 이르러 몇 리나 되는 맑은 못을 이루었는데, 물고기를 헤아릴 수 있을 정도로 맑고 배를 타고 다닐 수도 있을 정도로 깊었다. 시험삼아 대추를 던져보았더니 돌아다니던 물고기가 많이 모여들었다. 물결 위로 유유히 헤엄치는 비단 물고기도 많았다.

 

* 좌수 : 조선 시대, 지방 행정 단위 , , , 두었던 향청() 우두머리


야외에 술자리를 마련하고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를 시작할 즈음, 강가에는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마을에는 안개가 갓 피어올라 또 하나의 빼어난 경관을 이루었다. 대체로 이번 유람 중 줄곧 맑다가 이제 비가 내리니, 천신과 산신령이 우리들에게 좋은 일을 많이 베풀어준 줄 알겠다.

일행 중 남쪽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이곳에서 떠나갔다. 동쪽으로 가는 사람은 나와 정덕옹과 박여승이었는데, 정덕옹은 상사(上舍) 정여계(鄭汝啓)의 집 에 남았고, 나와 박여승은 큰 나무가 있는 시냇가에 이르러서 말머리를 돌려 작별하였다. 이 시내는 바로 뇌계(㵢溪)의 하류였다. 16일에 척서정(滌暑亭)에서 다시 만나 함께 유람한 이야기를 하기로 하였다. 척서정은 남계(灆溪)의 상류에 있다.

 

(*) 상사(上舍·소과에 합격한 사람


산중에서 유람하며 지은 시를 찾는 사람이 있어서, 나는 다음과 같은 시로 응답했다.


 

新自頭流頂上歸 : 새로 두류산에 올라 정상에서 돌아오니

雄峰絶壑夢依依 : 높은 산 깊은 계곡 꿈속에서도 아른아른

傍人莫道無佳句 : 사람들아 아름다운 싯구 없다고 말하지 마소

佳句難輸千萬奇 : 미사여구로는 수많은 기이함 옮기기가 어렵다네

 
是年 是月 是日(같은 해 같은 달 그믐)에 도천감수재(感樹齋)에서 쓰다.


 

 16일(정사)

척서정의 모임에 나는 감기로 인해 가지 못하여 벗들이 서운해했다. 그래서 정덕옹과 여러 벗들이 편지를 보내 기억을 도와주었다.

 

출처 :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최석기외)

 

 

[후기]

 남계는 덕유산에서 내려오고, 뇌계는 백운산에서 내려오고, 임천은 지리산에서 내려와 마천 엄천을 거쳐 경호강과 합류한다. 三一川하여 경호강이 시작된다. 남계서원은 남계 중류 함양군 수동면에 일두 정여창을 기려 세운 서원으로 박여량과 함께 산행을 한 고대 정경운은 정유재란때 소실된 남계서원을 중건하였고 1617년 서원의 원장이 되었다고 한다. 고대 정경운은 현실정치에는 참여하지 않았으나 임진· 정유재란 때에 의병에 적극 참여했으며, 학문적인 교류나 역량이 중추적인 역할을 했고 남계서원 중건에도 공헌했으며 경상우도 유림의 실력자였다.

 

 감수재 박여량과 고대 정경운은 남명의 수제자인 대북의 영수 내암 정인홍의 문인이고 여승 박명부는 남명과 퇴계의 제자인 한강 정구의 문인이다. 내암 정인홍은 퇴계를 찾았다가 야성이 있다고 퇴짜를 놓자, 남명이 그를 찾아가 야성을 도려내라며 경의검을 주고 수제자로 삼았고, 남명은 동강 김우옹에게 성성자를 주었다고 한다. 정인홍, 김우옹, 정구 이 세 사람은 남명 조식의 제자로 임진 정유의 국란을 극복하였고 국가를 위해 헌신했던 대학자이며 정치가였다. 결국 박여량, 정경운, 박명부는 남명 조식의 의 私淑人인 셈이다.

 

  박여량과 정경운, 박명부는 점필재 김종직, 탁영 김일손, 일두 정여창, 남명 조식선생 등 私淑을 삼은 스승의 발자취를 따라 천왕봉에 올랐다. 私淑이란  어떤 사람으로부터 직접 가르침 받지는 않았지만, 사람 행적이나 사상 따위 마음으로 본받아서 학문 닦음 이르는 말이다. 점필재와 138년의 시간 여행에서 그분들의 자연관과 학맥을 엿볼 수 있었다. 광해가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오른 1610년(광해 2년), 20대에 천왕봉을 두 번, 영신암을 한 번 오른 경험이 있는 박여량과 정경운은 젊은 피 지족당 박명부를 수혈하여 15명이 넘는 많은 인원을 이끌고 안국사 승려(처암, 운일)의 안내로 7박 8일의 지리동부 산행을 무사히 마쳤다. [두류산일록]을 읽으면서  감수재 박여량 선생의 말대로 “다만 세상에서 전하는 대로 보는 것이 옳지, 굳이 다른 의견을 낼 필요가 있겠는가?” 덕산 산천재 남명기념관에 들러 남명학맥도를 다시 확인해야겠다.  끝.

 

 

[참고]

朴汝樑[1554(명종 9)1611(광해군 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삼척(三陟). 자는 공간(公幹), 호는 감수재(感樹齋)  함양 출신. 아버지는 승사랑(承仕郎) 현좌(賢佐)이며, 어머니는 합천이씨(陜川李氏)로 충순위(忠順衛) ()의 딸이다. 노상(盧祥)의 문인이다.

 

1600(선조 33)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을 거쳐, 예조·병조·형조의 낭관과 북청판관에 이어 1608년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세자시강원문학(世子侍講院文學) 등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때 곽재우(郭再祐)가 의병을 일으킨다는 소문을 듣고 격문을 돌려 많은 지원을 하였고, 정유재란에는 의병으로 황석(黃石)에 들어가 여러 고을에 통문을 돌려 군량을 조달하였다.

 

평생을 성리학과대학의 무자기(毋自欺 : 자기 자신을 속이지 말 것)에 심혈을 기울였고, 정온(鄭蘊오장(吳長박이장(朴而章박성인(朴成仁) 등과 교유하였다. 1613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감수재문집(感樹齋文集)이 있다.

 

 

鄭慶雲(1556- ?)來庵 정인홍 門人  본관 진주(晉州). 자 德顒(덕옹), 소성(昭聖). 호 고대(孤臺). 경남 함양 출생. 호군(護軍) 학수(鶴壽)의 아들이며, 정인홍(鄭仁弘)의 문생이다. 주변에 절승(絶勝)을 이룬 소고대(小孤臺)가 있어서 ‘고대’라 자호하였다. 청년기에 함양의 탁영서실(濯纓書室)에서 학문을 닦고, 26세 때 정인홍의 문하 에 들어갔는데, 이때 함께 교유한 인물은 박여량(朴汝樑) ·노사상(盧士尙) ·오장(吳長) 등이다. 정인홍의 《내암집(來庵集)》에 정경운의 시가 12수 남아 있을 정도로 정인홍과의 관계는 친밀하였지만 정치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 탁영서실은 김일손이 세운 서당이다. 정경운은 벼슬에 나아가지는 않았으나 점필재의 제자 김일손과 내암의 학문을 이어받은 재야의 명망있는 유학자다. 당시 서원의 위세가 고을 수령 위에 있다는 것이 흥미롭고 직접 기생까지 데리고와서 사찰에서 향응과 접대를 했다는 것은 눈 여겨볼 일이 아닐 수 없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노사상 등과 함께 함양에서 의병을 일으켜 1천여 의병을 모집, 김성일(金誠一) ·김면(金沔)의 휘하에서 활약하면서 군량보급과 군기조달에 주력하여 경상도 지역의 왜적을 격퇴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1597년의 정유재란 때는 남계서원(藍溪書院)이 병화로 소실되자 이 서원의 유사(有司)로서 정여창(鄭汝昌) 등의 위패를 모셔두었다가 뒤에 위패를 다시 봉안하는 데 큰 역할을 했으며, 1617년에는 남계서원의 원장에 올랐다. 저술로는 임진왜란 때의 상황을 일기체로 기록한 고대일록(孤臺日錄)》이 있고,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 등 임진왜란 때 의병의 사적을 기록한 여러 저술에 그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朴明傅 박명부[1571(선조 4)-1639(인조 17)]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여승(汝昇), 호는 지족당(知足堂), 아버지는 증호조참판(贈戶曹參判) ()이며, 어머니는 증정부인(贈貞夫人)문화유씨(文化柳氏)로 판관(判官) 희필(希畢)의 딸이다. 정구(鄭逑)의 문인이다. 1590(선조 23)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에 급제, 교서관 부정자(校書館副正字)에 보직되었다가 이듬해에는 저작(著作)에 제수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김성일(金誠一곽재우(郭再佑) 군막에 왕래하면서 군무(軍務)에 많이 협찬했으며, 1593년에는 의주(義州)로 호종(扈從)하였다가 환도(還都) 후 박사(博士)를 제수 받았다.

 

그 뒤에 호조좌랑(戶曹佐郞해주판관(海州判官예빈시첨정(禮賓寺僉正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거쳐 합천군수(陜川郡守)로 나갔는데, 당시 합천에 정인홍(鄭仁弘)이 있었으나 그의 집에는 출입하지 않았다. 1614(광해군 6)에 이이첨(李爾瞻정인홍 등이 광해군을 종용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살해하고 인목대비(仁穆大妃)도 유폐시키자, 그는 직언으로 항소하다가 관직을 삭탈 당하고 축출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부수찬(副修撰)으로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자 그 해 여름에는 대구부사(大邱府使)로 임명되었다. 그 뒤에 죽산부사(竹山府使형조참의(形曹參議좌부승지(左副承旨공청도관찰사(公淸道觀察使) 등을 역임하다 예조참판(禮曹參判)으로 재임 중에 병자호란을 당해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강화(講和)를 반대하였다. 끝내 성하지맹(城下之盟)이 맺어지자 그는 벼슬을 버리고 물러나 농월정(弄月亭)을 짓고 은거(隱居)하다가, 1638(인조 16)에 예조참판(禮曹參判한성좌윤(漢城左尹도승지(都承旨) 등에 연이어 제수되었다. 저서로는 지족당문집3책이 있다.

 

함양남계서원 [咸陽灆溪書院]1552년(명종 7)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정여창(鄭汝昌)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566년(명종 21)에 ‘남계(濫溪)’라고 사액되었으나,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으로 소실되었다. 1603년에 나촌(羅村: 현재 함양군 수동면 우명리 구라마을)으로 옮겨 복원하였다가 1612년 옛 터인 현재의 위치에 중건하였다. 1634년(인조 12) 별사(別祠)를 건립하여 강익(姜翼)을 제향하고 1642년(인조 20) 유호인(兪好仁)과 정온(鄭蘊)을 병향하였다. 그 뒤 1677년(숙종 3)에 정온을, 1689년(숙종 15)에 강익을 본사(本祠) 올려 배향하고, 1820년(순조 20) 정홍서(鄭弘緖)를 별사에 모셨다. 이후 1868년 별사는 훼철(毁撤)되었다. 이 서원은 소수서원(紹修書院)에 이어 두 번째로 창건되었으며,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 출처 : 네이버 백과 등

 

 

☞  생몰년 비교

이름 생몰년 비고
1 佔畢齋 金宗直 1431~1492
2 寒暄堂 金宏弼 1454~1504
3 一蠹 鄭汝昌 1450~1504
4 濯纓 金馹孫 1464~1498
5 冥 曺 1501~1572
6 來庵 鄭仁弘 1535~1623
7 鄭逑 1543 ~1620
8 東岡 金宇顒 1540∼1603

 

 

 

[원문] 感樹齋先生文集卷之六 雜著 頭流山日錄

 

庚戌八月中旬之後。與朴陜川明榑汝昇,鄭孤臺慶雲德顒。期以九月初吉。作頭流之遊。而是日以孤臺有故。更約以明日

 

○二日癸卯。

發自桃川。至漁隱亭。德顒已先至待我矣。遂幷轡而前。至木洞李秀氏家前古亭。木洞人皆來會。汝昇以前有一日之約。昨日與其弟明桂,其婿盧腀來宿李家。發向池谷纔食頃云矣。余等欲追及之。而李君以酒來飮之。又將有雨勢不果發。因宿于朴僉知春壽氏之家。僉知於吾爲先君同年生也。年今七十六。而耳目開朗。氣力尙健。能爲少年言以作戱。以我爲故人子。待甚欵而請食宿。我亦以先君故人。極致敬感焉。

 

○三日甲辰晴。

李秀氏與其弟姪早朝來見。具朝飧邀喫。出示其二子所爲賦。多有步趣。食罷卽發。使朴君大柱爲先路。踰堂後堂徑向龍遊潭。大柱乃僉知子也。至炭坎村前。德顒與朴君欲留待汝昇。余不許曰不如先往據龍潭。以主待客可也。至踰時。汝昇與其弟若婿及愼光先,朴明○益來會。余等以先登。頗有矜氣以加之。笛奴二手在馬前而奏技。一爲汝昇奴。兼彈嵇琴。一爲愼家奴。且善其才。諸君或攀巖或俯流。或行歌或坐嘯。自(目)東自(目)西。極其壯觀。水石奇恠。余請列坐。行愼君所帶酒。坐有一人言曰。此爲龍之所遊而有此奇跡云。無乃開闢之後。水石相擊磨。突者竅者呀者陷者。自成形歟。余答之曰第依世俗所傳而觀之可也。何必生異議乎座中皆搏手。潭之少東南偏。有龍王堂。創未久也。設略約以往來。汝昇與其○婿能越畧約而驀上最高石。余則神魂○然。非徒不能自放足。又戒其從行童僕等。勿使近危。盖余年迫衰遅。涉險已多。危懼之心。常積於中。汝昇則方年四十。氣銳而志強。能知進而不知懼故也。此去君子寺尙遠。朴別監大一使歌兒皷手來而時未至焉。朴君大柱將設以酒肴。以待歌皷之至。余以爲若犯昏暮則山路險阻。必未免窘迫顚踣之患。首發着鞭。先至金臺寺下。心吟一絶。詩在集中 余性拙於詩。又懶不喜吟。盖諸君莫之知也。昔年累與德○顒讀書金臺安國君子無住諸刹。而訪臺巖者一。跨靈神者一。登上峰者二。屈指記得。盖在丁丑秋九月甲申夏四月間也。巖巒溪壑。曾所遊歷者積三十年餘。茫不記憶。今而經過。初而疑焉。中而覺焉。終乃了然。余乃解之曰古人所謂遊山如讀書者。謂以是耶。夫讀書。初覽不可盡記。至於一再三四過而後。前之所忘者覺焉。所記者實焉。久久而後。若固有之。遊山讀書。同一揆矣。古人之言。信不誣也。君子寺溪前水石險惡。以馬則恐有顚蹶之患。招山氓之有健力者。○負之而渡。先據寺前南樓。久之汝昇,德顒諸君以歌以笛先導而至。寺僧以山果及五味茶進之。李君允迪,朴君大柱以酒繼夕飯而設之。手口之樂交奏當歡。余則先就僧房醉睡。時聞歡笑歌皷之聲。至半夜而未至。盖德顒以下諸君皆起舞焉。旣罷汝昇就我。取淸遠香二炷而去。汝昇今夜之計。終不入手。淸遠二炷。亦不能自燒。而爲二歌兒袖裏之有云可笑。君子者。古之靈凈寺也。新羅眞平王避亂居此寺生子。因改以今名。其曰安國寺者。亦因其時而得此稱歟。○兵火之後。所重刱者。法堂禪堂南樓而已。

 

○四日乙巳晴。

朴大柱,朴大一以方任官事。卛二歌兒作別于沙門外。又令僧負渡實德灘。灘之左右。乃實德馬村弓項等村也。處處柿木。結子方紅。照耀明谷。山內之民以是而資生。路甚硌确。僅免仆墜。至白母堂茶點訖。安國僧崇惠請進酒果。舍馬理屐。各戒從者使期會于方谷。乃携杖始事登陟。俯視所歷。漸似高遠。所謂登高必自卑者也。步步緣磴。樹木蔽日者幾數十里。乃于里洞也。洞之半有巖屹立。其底稍欿。號曰河東○也。世傳河東太守至此。困不前進。遂宿巖下。因稱焉云。余等亦困極。十步一憩。憇必久坐不起。從僧每趣之曰日將西而遠。又未免宿此巖乎。余戱之曰古有河東巖。今將喚做陜川巖可也。以汝昇曾歷陜川故也。纔過巖五六十步。余等又自幸之曰儂輩過河東已遠矣。所謂以五十步笑百步也。始達古帝釋堂舊基。登眺左右巖壑。指點山川形勢。滿山所見。非蒼檜則紅樹也。非紅樹則自枯木也。靑紫白黑。參錯相暎。如錦繡然。西望百里餘。有新刱蘭若二。在無○住之西曰靈源。在直嶺之西曰兜率。率乃僧舍印悟所築而自居者也。悟以吾儒書爲世俗文。只以識佛經。爲諸僧立赤幟。足跡不出洞門云。前數年。尹君爲咸陽守。有淸政。作木之俸。一不入已。嫁女賣馬爲資粧。悟有詩云昔時得聽留黃犢。今日更看賣玉蹄。其末聯山僧無計贊淸德。獨對金爐祝香西。夫立石以頌。口傳以思。乃郡民之事也。至於枯槁無意世事者。亦能致其景慕之情。可謂人同此好德之心。而不患莫己知。求爲可知者也。諸君皆藉草列坐。或水飯或○盃酒。又強起而行。自是以後。雖不似于里之險急。去絶頂已過十分之五。尤覺脚力之不能自任。使兩奚童手執紅樹。作舞前行。琴笛之手。使不絶聲。盖欲少忘困頓之勞也。兩奚者一爲官僮玉老。一爲京兒孫得。皆余所帶也。將至帝釋堂。路極懸危。一步難於一步。或使人扶之。或前挽後推。余曰雖欲脫去不可得也。盖古人拿逋客之戱也。見峯頭處處設捕鷹幕。問其捕得之數。則不過一二人焉。噫結豐蔀而設片具。伺飛隼於萬里雲霄。以高下之勢言之。則似相懸絶○矣。而終不免架上之所掣者。以其有慾也。凡天下之物。有欲者無不見制於人。人爲最靈者。寧不反觀焉。且設具以伺者。人人皆自以爲得之。而畢竟所捕不過一二人。則得失之數。亦可見矣。至前。日已昏黑矣。萬壑烟冥。萬竅風號。使望之者只認其大包冲漠之間。有許多生植之類。隱然含蓄之量。而人莫之測也。到此境界。尤可奇也。與諸君分占東西房。困睡一塲後。乃喫了夕飯。堂之制頗宏濶。樑之長幾至二十三四尺矣。除左右夾房外。作廳三大間。上以板覆之而○下釘。旁亦以板子圍之而無泥壁。問其改刱之由。則有一老媼爲化主。不一月而成之云。老媼幺麽之力。能使人感之。而作一鉅役於咄嗟之間。人心之易惑難解。良可歎矣。

 

○五日丙午晴。

早起趣食將發。堂主老媼告曰有本官留鄕所。推捉文字馬川里色掌所傳也。誠可悶迫云。余等共致書于鄕所。使緩其令。堂後有泉。出自巖穴。築石而貯之。極淸洌。迤南而行一理許。出南岡之上。其下有西天堂香積寺。極可觀也。堂則新設。而寺則舊制也。汝昇諸君卽下。遊于西○天香積。余與德顒辭以曾所遊歷。直至中峰。同其高峻。無有差別。至此而望見上峯則突兀層霄。高下絶等。可見遠視不如近視之詳。而非親履之。不可妄論其高下也。又行數里。穿石窟而復出。令人心神怳然。復行至絶頂。此乃天王峯也。各攀危磴。俯視人寰。飄然有遺世出塵之想。快然有閬風玄圃之思焉。天王之稱。世以爲神像所居而云也。余則竊以爲玆山發於白頭山。流而爲磨天,磨雲,鐵嶺等關。關東爲五嶺八嶺。南爲竹嶺鳥嶺。逶迤而爲湖嶺之界。南至方丈而窮焉。以其頭流者以此。而尤極穹隆䧺偉。俯臨諸山。如天子臨御宇內之像。其稱以天王者。無乃以此耶。峰上有板屋。亦非舊制也。前者只有一間架。上覆板子。以石壓之。使免風雨飄落之患。今則頗宏其制。架屋三間。以釘下板。板壁之外。累石圍之。極其堅緻。其內可坐數十人。經亂之後。人民死亡。百不存一。閭落蕭條。無復舊時風烟。而方外異類。視昔日尤爲盛。以其僧刹而言。則金臺無住頭流之外。靈源,兜卛,上流,大乘則古所無也。以其神舍而言之。則白母,帝釋,○天王諸堂。皆務侈前作。而龍王,西天新所設也。逃役之輩。祈福之氓。日以雲集。粒米狼戾峯壑之間。而國家不能禁。誠可歎也。命從僧使炊夕飯。則鼎匿而無有。使尋泉源則桶落於絶壁。盖一巫姥欲困人。匿而落之。使不得飢而食渴而飮也。窮詰其由則上峯爲晉州,咸陽之間。以地而言之則峯之中爲界。以堂而言之則堂之中爲界。故作堂而板之者。咸之花郞也。下釘而固之者。晉之婆也。晉爲兵營而咸爲屬郡。郞與婆爭利相閧。峰頭神室。爲一爭闘之所。而婆爲晉○物。瞞告郞以他事。旣使之捕囚于咸獄。又匿其鼎而絶其水。以困遊人騷客之食飮。婆之罪於是至矣。兵相爲一道主師。反信眇媼瞞訴。聽淫辭而助之攻者何也。余憐其無罪而就重究也。折簡兵相。以解咸獄之囚。堂有神像。以石爲之。儼然在北壁下。以物蔽之後打坐。從者曰日將落矣。盍往觀諸。共出坐西臺上而俟餞。然黑雲一隊。橫亘西隅。作奇峰恠壑千萬狀。又有紫雲一帶復橫亘黑雲之外。狀態無窮。變化區測。俄而日匿崦嵫。寰宇沈冥。星月掩暎。風力又䧺。恍○然如在混沌之中矣。八處堂中。各占寢席。擁衾相對。作兩行坐。懸燈燒香。行酒一二巡。復奏皷吹。令從僧行童迭起隊舞。或作和尙體。其中安國僧處巖,雲逸最善舞態。一坐皆極笑焉。笛手淪乞能奏戒面調,後庭花,靈山會相,步虗詞等各樸調。

 

○六日丁未晴。

晨起整衣冠。酌秋露一二盃。從者又告曰震方已啓矣。余與諸君。各占東邊石上。以竢賓焉。黑雲紫雲。桓亘東隅者。復如前夕日入之狀焉。日輪轉上。雲氣漸散。一天之下。輝暎光明。如人君出御。燈燭煌煌。宮闕森○嚴。五雲玲瓏。千官擁衛。百隷執物。令人起敬而不敢慢也。以水則如蟾津豆串。南之大洋。以山則鷄立嶺以南及東之八公。西之無等。皆在眼底。而佔畢齋之錄。已詳盡矣。今不復贅焉。峯之東南。長谷百里許。有洞曰德山。有水曰德川。南冥曺先生所卜築也。墓與祠皆在于此。祠之額曰德川。今上所賜也。方在千仞峰頭。而想像先生肥遯氣象。千仞峯頭。又望千仞峯也。以今日將向上流菴。累累促飯。漸至日晩。從者曰桶子推去。水無宿儲。巖隙所落。點點成涓。炊之自不○及時也。余自省事以來。行乎世路。無往不困。而率乃見困於一眇媼。此實意慮之所不到也。李君允迪復取君子路告歸。余等由甑峯而下。至馬巖。從童孫得就水而飮。遇一官醫多採當歸。取三四本以來進之。當歸是我素所好者。戒使勿遺。噫歸而不能歸。只好草之當歸。可謂好之得其實乎。歷少年臺行廊窟。各進水飯。回望天王峰。已不啻風馬牛之不及矣。一轉足之間。已至於此。所謂從惡如崩者也。可不懼哉。自峯上至此。無他樹木。只見檜栢赤木楓樹。間以馬○檟木。諸君或取馬檟。或採稚檜之生於石隙年多矮曲而不能自長者。德顒惠甫尤能多採。終始不舍。彼兩箇木。同是高峰窮谷自由之物。一以俗方而見伐。一以矮曲而見採。其得失無異於木鴈矣。然則檜之見採似得矣。而採之者不能擇地而培養之。則又焉知其得之者。反爲失之。而不猶愈於自生自死於高山窮谷之中。寧不見遇於人。而任其自然者乎。其得未可知也。吁植物不能自爲得失。而其權在於人。諸君勖之哉。至頭流上流兩庵之路。頭流昔余所遊息。○上流則未也。余請諸君強取上流之路。上流乃妙雲所新創。而於上峯路未出者也。僅尋樹陰下一條潦路。或由岡脊。或臨壑谷。魚貫而下。至一懸崖。上無所攀。下可數丈。諸君與從僧皆蟻附而下。余則不得着足。周章之際。遠聞伐木聲。盖巖僧已慮其如此。設機械而令我下來也。旣至菴一行俱困。寺僧進茶果。皆山味也。食罷妙雲請曰少西有庵稍精灑。且種菊盈庭。黃白多開。可往宿焉。余與德顒,汝昇,惠甫。耐困而起。秉火而行。諸君皆從之。庵與菊果如雲所言。以○火來照而觀之。旣又取一二莖揷甁而置之床。花影婆娑焉。諸君辭去上流。余四人遂就寢。自君子至此。一陟一下。幾數息程也。人皆謂余不能達。而得免中廢顚躓者有二焉。余在桃川。已有頭流之計。欲試步陟之勞。以杖屐往來于山南水北者。日不輟焉。此乃豫習其勞也。少時讀書。古人有曰遊山有術。徐行則不困。審足則不跲。余常置之心下矣。今而以豫習之力。試古書之方。此所以免廢躓之患也。可見習之一字。爲論語開卷第一說。而古人垂戒之意。無往而不○在也。抑又有待焉。天下之事。立志爲先。志若旣至。氣當次之。余甞遇上無住僧。贈之以詩曰雨後晴嵐翠似蒸。林間忽見上方僧。從容話及頭流約。身在雲山第一層。然則非但身勞之豫習。其第一峰之志。定之雅矣。

 

○七日戊申晴。

將盥僧請湯水而沃盥。余辭之。乃就水槽水。掬淸注而頮之。菴西有臺頗可觀。臺上有檜三四株。其大僅一掬。其長已三四丈矣。旣以無曲之根。又得養之而無害。其爲他日有用之材可知矣。還至菴。請惠甫書名于北壁。盖八員矣。汝昇取僧○家一書而觀之。有三必死之說。竹有實必死也。螺有孕必死也。人有疾必死也云。雲與其弟訥惠稍解文字。又能誦佛書。爲諸斯文最。但盡賣其家傳田宅。又兄弟爲僧。以絶其姓而莫之恤。可謂惑之甚者也。至上流喫朝飯。從僧慮我困不能步。具藍輿二。一則爲汝昇也。或乘或步。至一處休焉。見林密蔓附樹上。垂實頗盛。行中有僧一童一。能緣木如猿猱狀。應搖而落者。得霜方甜。人皆屬厭而罷。踰草嶺。此乃咸陽山陰兩路之所(오류→)分也。沿路多見五味子。令從者或取○其蔓。或取其實。先至溪石可坐處。又命取山葡萄。以俟諸君。溪澗巖石。可濯可沿者。非一二矣。下至方谷之上溪。奴輩以馬來待矣。臨溪而坐。各罷鎭心。舍輿乘馬。過方谷村。村舍皆負竹爲家。繚以柿木。鷄鳴犬吠。洽一別境也。越瀶到愼君光先之亭。飮以酒三四巡。就宿崔生涵溪堂。具以夕飯。洞友亦多以酒肴來會。夜二更而罷。堂臨小溪。因溪爲池。蒔以梅竹松菊盈階焉。人或謂崔生爲俗而自謂非俗。今年秋霖潦不絶。無一日開霽。人皆謂我輩必免草露沾濡之○困。而我輩亦自料之矣。入山之後。無日不晴。快睹日之出入。又盡眼力所及。可謂此生晩計之一幸也。相與擧酒而賀之。且我國之山。妙香九月金剛智異。爲四方之鎭。而智異乃頭流也。金剛邊山頭流。爲古所謂三神山。而頭流乃方丈也。杜詩有方丈三韓外之句。初以謂未信。及見註則方丈在帶方國之南。帶方卽今之南原府也。國家祀智異在南原之境。合此而觀之。則工部之詩。信不虗矣。而古人博物之該。亦可見矣。玆山之南。如神興,雙溪,靑鶴洞之勝。盖甞往○來于懷而不置者也。一欲搜奇訪眞。手摩雙溪石門四大字。足濯八詠樓下之淸波。喚儒仙於千古之上。乘鶴背於千仞之壁。以償吾平生宿債。而惜乎俗累塵韁。未免纏身。又加以老將至矣。豈能保其必遂願於他年也。相與一賀之後。不能無發歎也。

 

○八日己酉。

崔座 應會氏邀以朝飯。崔君少與相好者也。以風腫艱於行步。而爲余輩往會于嚴瀨臺上。臺下長川。乃頭流水也。到此作澄潭數里許。魚可數而舟可行也。試取棗子而投之。遊魚多聚焉。錦麟游泳於波○上者亦多。野酌方設。歌皷方張。而江雨微灑。村烟乍起。添一勝槩。此行之一晴一雨。可見天與山靈餉我以多少好箇事也。諸君之在南者。皆自此而弦矢。從而東者。德顒與汝昇。而顒則後於鄭上舍汝啓之家。昇則至大樹溪邊。引馬首相別。溪乃之下流也。又期以十六日會話于滌暑亭。以申同遊之好。亭在蘫之上流。人有索山中詩者。余答之曰新自頭流頂上歸。䧺峯絶壑夢依依。傍人莫道無佳句。佳句難輸千萬奇云。是年是月之日。書于桃川之感廬。

 

十六日丁巳

滌暑之○會。余因風感未赴。爲諸友齎恨。德顒及諸友。因以書相訊。

 

[원문]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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庚戌년
丙戌월
        亢1
8.15丁亥
추석
氐2
8.16戊子
房3
8.17己丑
04:04 망
心4
8.18庚寅
16:30 행성합
화성 달
황위차이=1.632˚
尾5
8.19辛卯
19:51 강황교점
수성
箕6
8.20壬辰
20:03 근지점
斗7
8.21癸巳
牛8
8.22甲午
00:07 행성합
천왕성 달
황위차이=1.449˚

20:58 寒露

황경=195.000˚
女9
8.23乙未
02:39 승교점
虛10
8.24丙申
00:27 하현

11:54 행성합
목성 달
황위차이=-1.626˚
危11
8.25丁酉
室12
8.26戊戌
壁13
8.27己亥
奎14
8.28庚子
16:30 행성합
해왕성 달
황위차이=-3.859˚
婁15
8.29辛丑
16:16 원일
수성
胃16
8.30壬寅
昴17
9.1癸卯
04:08 삭

11:15 서구
목성
18
9.2甲辰

03:12 원일
금성

14:43 행성합
수성 달
황위차이=-5.465˚
19
9.3乙巳
10:53 충
화성
20
9.4丙午
17:47 행성합
금성 달
황위차이=-4.094˚
21
9.5丁未
22
9.6戊申
09:59 유(역행종료)
토성

16:03 원지점

19:37 강교점
23
9.7己酉
22:40 霜降

황경=210.000˚
24
9.8庚戌
張25
9.9辛亥
04:39 상현달
翼26
9.10壬子
11:37 행성합
토성 달
황위차이=2.255˚
軫27
9.11癸丑
角28
9.12甲寅
亢29
9.13乙卯
氐30
9.14丙辰
房31
9.15丁巳
10:00 행성합
화성 달
황위차이=3.459˚
          1610년
10월
庚戌년
丙戌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