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감수재길

박여량의 두류산일록 상류암지에 대하여

도솔산인 2015. 11. 11. 12:36

 

 

 박여량의 두류산일록 상류암지에 대하여

 

 상류암에 대해서 【진양지】 불우조(佛宇條)에서는 『장항동(獐項洞) 위쪽에 있는데, 난후(亂後)에 중건(重建)하였다(在獐項洞上, 亂後重建)』고 하였고, 산청군지(山淸郡誌)】내고장 전통(傳統)편 寺址 목록에서 『上流庵址는 삼장면 油坪里에 있다』고 하였다. 진양지 산천조의 덕산동(德山洞) 지명에서는 『서흘산(鉏屹山)으로부터 동쪽으로 흘러 상류암(上流菴)을 거쳐 장항동(獐項洞)이르고 남쪽으로 흘러 삼장천(三壯川)이 되어 살천(薩川)으로 더불어 양당촌(兩堂村)앞에서 합하니 이를 덕천(德川)이라 이른다.』고 했다. [출처 : 지리99 가객님 상류암지] 

 

1. 99탐구팀이 찾은 상류암지는 박여량의 두류산일록과 일치되는 부분이 없다. 우리는 여기에서 유생 신광선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신광선의 집은 일행들 중 방곡마을에서 가장 가깝다. 임천 신광선의 집에서 방곡의 상계, 사립재, 상류암과 두류암의 갈림길을 역추적하면 상류암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

 

 [누락부분9/7] 방곡의 上溪까지 내려오니 종들이 말을 가지고 와서 기다렸다. 계곡 가에 앉아서 각각 마음을 진정시킨 후에 남여를 버리고 말을 탔다.[下至方谷之上溪。奴輩以馬來待矣。臨溪而坐。各罷鎭心。舍輿乘馬。] 방곡촌(方谷村)지나는데 마을의 집들은 다 대나무를 등지고 집을 지었으며 감나무로 둘러 싸여있고 인가와 접하였으나 화평함이 속세를 벗어난 지경과 같았다. [村舍皆負竹爲家。繚以柿木。鷄鳴犬吠。洽一別境也。]임천을 건너[越瀶川] 신광선의 정자에서 술을 서너 순배 마셨다.

 

• 9/6 : 천왕봉 - 甑峰 - 마암 - 소년대 - 행랑굴 - 두류암과 상류암 갈림길 - 상류암

9/7 : 상류암 - 초령[새봉] - 방곡촌(方谷村) - 신광선(愼光先)의 정자 - 최함씨의 계당(溪堂)

 

 9월 6일 일정에서 부축을 받고 열 걸음을 걷고 한번 쉬어야하는 박여량이 천왕봉에서 유평까지는 불가능한 거리다. 유평에 상류암이 있다면 지도를 보아도 확연한 코스 이탈이다. 지금은 도로가 있지만 길도 없는 길을 만들며 조개골을 따라 유평까지 내려왔다가 다음날 다시 올라갔다는 것은 한마디로 소설이다. 그리고 청이당에서 내려갔다면 이미 艾田嶺(쑥밭재)이 있어 왕래하는 길이 있었을터, 두류암과 상류암 갈림길에서 상류암까지 길이 없다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새재마을도 삼장면 유평리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한다.

 

 

2. 초령은 함양과 산음의 분기점이다. 산음은 산청의 옛이름이다. 그렇다면 초령은 새봉(사립재)다. 9/7일 일정은 여유 있는 일정이었다. 계곡에 앉아 숨도 돌리고 임천을 건너 일행인 신광선의 정자에서는 술도 서너 순배 마셨고 최함씨의 계당에서 묵었다. 9/7일 유평에서 출발해서 초령(새봉)을 넘어 방곡 상류 - 임천의 일정은 절대 불가능한 거리이다.

 

3. 鉏屹山은 鉏耒峰(서뢰봉 써리봉)이다.

 

【진양지】와 【산청군지】의 기록을 근거하여 추정한다면 상류암은 청이당 계곡을 따라 내려와 조개골 가까운 곳[독바위양지나 독바위골]에 암자가 있었을 것이다.【진양지】에 나오는 鉏屹山(서흘산)은 써리봉을 가리킨다. 지금의 鉏耒峰(서뢰봉)의 옛 이름이 鉏屹山(서흘산)이고 서뢰(鉏耒)는 농기구의 일종으로 경상도 방언으로 써리 또는 써레로 발음되어 써리봉이 된 것이다. 상류암 위치는 새재마을보다 그 위에 위치해 있다고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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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개골에서 바라본 독바위능선

 

 

 

 

4-1. 두류산일록 是年是月之日。書于桃川之感廬 의 국역 오류I

 

 모년 모월 모일 도천의 감수재(感樹齋)에서 쓰다.

 

* 是年是月之日(제년제월지일) : 是月(제월)은 월말 그 달의 끝 무렵을 뜻한다. 모년모월모일은 국역의 오류인듯 싶다. 是年(제년)은 같은 해이고 是月(제월)은 같은 달 월말이니 9월 그믐을 뜻한다. 같은 해 경술년(1610년) 9월 그믐 무렵에 쓰여졌다. 감수재 박여량은 산행 후유증과 감기로 9월 16일 척서정 산행 강평 모임에도 나가지 못했고 최소한 20일 넘게 심하게 앓았다는 증거다. 是는 齊와 同字로 齊로 읽어야하고 처음 접하는 어휘다. 두류산일록에서 간지와 날짜가 하루 차이가 있는데 만세력이 틀린 것이 아니고 감수재 박여량의 오류일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산행을 한 후 몸이 좋지않은 상태에서 시간이 지난 뒤에 기록했기 때문이다. 

 

4-2.  두류산일록 국역의

7일 무신일 맑음 맑음 [1610년 10월 23일 土 霜降]
[원문]將盥僧請湯水而沃盥。余辭之。乃就水槽水。掬淸注而頮之。菴西有臺頗可觀。臺上有檜三四株。其大僅一掬。其長已三四丈矣。旣以無曲之根。又得養之而無害。其爲他日有用之材可知矣

 

[국역]세수를 하려는데 이 암자의 승려가 물을 데워 세수물을 준비하겠다고 하였다. 나는 사양하고 물통으로 가서 맑은 물을 움켜 낯을 닦았다. 암자 서쪽에는 너럭바위가 있는데, 주위의 경치가 제법 볼만했다. (국역오류) 그 곁에 臺 위에 회나무 서너 그루가 있었는데 이제 겨우 한 움큼 정도의 굵기였고 길이는 서너 장쯤 되었다. 밑동이 곧기 때문에 해를 입지 않고 잘 자라고 있으니 뒷날 유용한 재목이 되리라는 것을 알겠다.

 

戊申일은 만세력과 하루 차이가 난다. 만세력에는 己酉일이다. 새로 국역하면 암자 서쪽에는 臺가 있는데 자못 볼만했다. [두류산일록] 원문과 국역의 차이가 너무 분명하게 확연하다. 너력바위에 (올라가보니) 주변 경치가 제법 볼만하다.고 했는데, 이것은 국역의 오류로 보인다.

 

4-3.  두류산일록 국역의 오류III

○7일 무신일 맑음. [1610년 10월 23일 土 霜降]

踰草嶺。此乃咸陽山陰兩路之所由分也。

 

[지리99엣산행기]초령(草嶺)을 넘었다. 초령은 함양과 산음(山陰)으로 나뉘는 두 갈래길의 분기점이었다.

 

초령(草嶺)을 넘었다. 이곳은 바로 함양과 산음(山陰) 두 길의 갈림길이 시작되는 곳(분기범)  곳이다.

 

 

1610년 당시 지리동부의 행정구역은 천왕봉에서 중봉 하봉 1618봉 쑥밭재 새봉 사립재 군계능선 서북쪽은 함양군이고 천왕봉에서 중봉 하봉 1618봉 쑥밭재 새봉 새재 왕등재 밤머리재 동남은 단성현이고 군계능선 사립재 새봉 새재 왕등재 밤머리재 동북은 산음현의 영역이다.

 이후 산음현은 1767년(영조43년)에 산청현으로 개칭 되었고, 갑오경장이후에 두 현이 산청군과 단성군으로 승격되었다가 1914년 일제시대에 단성군이 산청군에 흡수되어 산청군이 된 것으로.알고 있다. 그렇다면 초령이 외고개나 새재라면 단성현과 산음현의 분기점(경계)이라고 기록했을 것이다. 산행을 한 일행 8명이 모두 그 지역 출신 유생들이니 지명의 오류 가능성은 매우 적다. 지리99 옛산행기 두류산일록의 누락 부분에 나오는 방곡의 상류에서 남여를 버리고 말을 갈아탄 곳 또한 초령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을 것 같다. 위 원문과 국역을 다시한 번 읽어볼 필요가 있다. 초령이 공교롭게 외고개와 새재가 아니고 새봉이라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왜냐하면 새봉이 함양과 산음 두갈래 길 처음으로 나누어지는 곳이기 때문이다.

 

 옛 선인들의 기록에 오류가 있을 거라고 막연히 예상하는  분들이 있는데 記라는 문체는 사실에 근거해서 객관적으로 기록하기 때문에 쓰여진 후에 함께 산행한 일행들에게 수 차 수정과 보완을 통하여 검증된 것이다. 백두대간이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않았으나 지명과 강과 산의 개념도가 그분들의 글속에 세세히 나타나 있다. 안광지배하지 못하고 어찌 1회성 산행 이라 오류가 있을 것이라고 단정하고 참고할 뿐이라고 하겠는가? 선인들들의 기록을 믿는 것도 믿지 못하는 것도 그 사람의 소양이다.

 

5, 청학연못과 영신암지&영랑재처럼 고증이 되지 않은 내용이 온라인을 타고 순식간에 퍼지면 그 수습은 걷잡을 수 없고 오류가 오류를 재생산하는 지명에 대한 혼란을 초래할 것이다. 안타깝게도 지리99의 지리산길 지도4,1에 아직도 1618봉 안부가 영랑재라고 표기되어 있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잠시 멈추고 지나온 것들을 다시 돌아보아야 한다. 자기중심적인 사고로 바라보았던 산에 대하여 타인의 생각은 어떤지 묻고 듣고 생각해야할 것이다. 진짜와 구분이 되고 비슷한 것은 가짜라는 뜻이다. 거울에 형체를 비추면 좌우가 상반되고 물에 형체를 비추면 아래 위가 상반되어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가? 상류암이 장항동(노루목)의 위쪽에 있다고 하여 유평 인근 무명 암자터를 상류암이라고 한들, 산을 알고 글을 아는 자는 더 더욱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끝.

 

6. 계룡도맥을 이은 修行者 淸風人 曰 '독바위 동남쪽 300m~350m지점에 큰바위 아래 숨은 기도처가 있다. 일반 사람들은 근접해도  발견하기 어렵다. 백두산의 기운이 대간을 타고 내려와 두류산(상봉)에서 뭉쳤다가 중봉 하봉 영랑대 동부능선을 타고 내려와 독바위에서 소멸하는 곳이라 이자리에서 수행을 해도 득도하기는 어려운 자리다. 두 개의 폐암자터가 있다.' 라고 하였다. 그의 말은 믿거나 말거나 신빙성은 없다.

 

 

* 초령이 새봉이더라...(작성일190925)

 

 두류산일록에서 행랑굴과 두류암 갈림길과 초령을 먼저 풀어야 대략 상류암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 2015년 상류암이 독바위 능선이나 독바위 양지에 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써리봉과 진주독바위 새봉을 여러 차례 찾았다. 써리봉에서 독바위를 바라보면 거리가 멀어서 육안으로 지형을 살피기 어렵고 조개골로 올라가며 독바위 아래를 살펴보면 아래서 위를 바라보기 때문에 지세를 정확하게 볼 수 없었다. 2017년 9월 고 마등자님이 청이당 능선에서 독바위 능선을 찍은 사진을 보고, 상류암터가 독바위 능선에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독바위 능선과 독바위 양지는 미답이라 민대장님과 상류암에 대하여 여러 차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 끝에 오래 전에 남명연구소 소장을 하셨던 경상대 최원석  교수와 어떤 문집에 나오는  진주암을 찾으러 독바위 아래를 간 일이 있다고 하셨다. 고전번역원에서 다운 받은 원문 파일에 '踰草嶺. 此乃咸陽山陰兩路之所分也.로 나와있어 '分'이 국역이 안되었는데, 영인본을 확인하니 '踰草嶺. 此乃咸陽山陰兩路之所分也.'였다.  '초령을 넘었다. 이곳이 바로 함양과 산음 두 길의 갈림길(分)이 시작되는(由) 곳(所)[(분기점)]이다.'의 의미로 초령은 새봉이다. 따라서 독바위능선에 있는 암자터는 상류암터로 추정한다. 이렇게 되면 행랑굴-두류암 갈림길(청이당, 쑥밭재)-상류암-초령이 자연스럽게 연결이 된다. 선답자들의 나에게 온갖 모함과 비난을 펴붓고 낯을 들고 지리에 나타날 수 있을지 궁금하다. 그냥 생각이 자기네와 다르다고 했으면 좋았을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