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감수재길

1877년 <허유>의 [두류록] 조개골/개운암/늦은목이/안내원

도솔산인 2017. 7. 27. 01:56

 

1877년 허유의 <두류록> [조개골-천왕봉-늦은목이-안내원]

[지리99 옛산행기방]

 

 

 

산행 및 여정일자 : 187785~15(음력).(10일이나 된다)

산행코스 : 합천 가회 오도리 본가~산청 강루리~남사마을~대포리~[대원사~새재마을~쑥밭재~하봉옛길~마암~중봉~천왕봉]~신선너덜~황금능선 늦은목이~국사봉~안내원~덕산~이후 산청 원지 차황 법물리를 거쳐 가회면 본가 귀가

▣ 허유(퇴이, 1833-1904), 곽종석(명원, 1846~1919), 문진영(자 성중, 호 효효재. 1826 - 1879), 물천(勿川) 김진호(金鎭祜, 치수 1845~1910), 조석진(중소, 1837~?), 이도묵(치유, 1843~1916), 이도추(경유, 1847~1921), 조원순(형칠, 1850~1903), 조도형(자?), 하용제(은거, 1854~1919), 규호(찬여, 1850~1930), 권규집(學揆, 1850~1916)와 권상찬(敬七, 1857~1929)

 

☞ 조석진(曺錫晉, 1937~?) 字 중소(仲昭) 號 성계(惺溪), 조원순(曺垣淳, 1850~1903) 字 衡七(형칠) 호 복암(復菴) 대포리 거주 남명의 10세손 허전과 이진상의 문인

 

 

두류산은 우리 해동의 남악(南嶽 : 단순히 남쪽에 있는 산이라는 뜻이 아니라, 남쪽에 있는 대표적인 명산이라는 )이다. 내가 일찍이 다녀오고 싶었으나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었는데, 올해 가을에 명원(鳴遠)1)이 편지를 보내어 가기를 약속하고자 하니 내가 곧바로 답장을 보내어 허락하였다. 기약한 때가 되어 문성중(文聖中), 김치수(金致受)와 함께 떠났는데, 그 때는 정축년(丁丑年 : 1877 고종 14) 8 5이다.

 

* 곽종석(郭鍾錫) [1846~1919] 조선말의 주자학자·독립투사. 본관은 현풍. 자는 명원(鳴遠), 호는 면우(傘宇), 유석(幼石). 단성(丹城) 출신. 이진상(李震相)의 문인.

 

 

길을 가는 도중에 김치수지경(知敬 : 유교의 수행 덕목인 경()을 아는 것을 말한다.)의 묘함에 대하여 논하며 30리를 가서 강루(江樓)2)에 도착하여 권척(權戚 : 자 우윤(禹潤))의 집에 들어갔다. 우윤이 (여러 사람들과 더불어) 무리를 지어 좇으며 나에게 적벽(赤壁 : ‘붉은 절벽이라는 뜻이다.)3)에서 뱃놀이 하기를 요청하였다. 적벽은 강향(江鄕 : 일반적으로 강을 끼고 있는 고을이지만, 여기에서는 강루를 가리킨다.)에서 경치가 뛰어난 곳으로, 예전에는 이름이 신안(新安)이었지만 지금은 적벽이라고 하는데, 어디에서 따온 것인지는 모르겠다. 절벽에는 적벽(赤壁)’이라는 두 글자가 크게 씌어 있는데 송문정(宋文正 : 송씨로서 문정이라는 시호를 받은 이로는 송준길(宋浚吉 : 16061672)과 송시열(宋時烈 : 16071689)이 있는데,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의 글씨라고 한다. 이날 밤 가을 강물은 넓어 아득하고 북두칠성과 별들은 맑고 밝게 빛나는데 배를 풀어 오르내리니 마음 또한 몹시 유쾌하였다. 치수는 상복을 입는 중이어서 배에 오르지 않았다.(소동파의 적벽부를 떠올리게 하는 뱃놀이임)


6

 

남사(南泗)4)를 향해 떠났다. 우윤이 시로써 가는 길에 노잣돈을 보탰다.[시를 지어 배웅하였다는 뜻이다.] 이십리를 가서 시현(矢峴)5)을 넘어 문천(汶川)을 따라 초포(草浦)6)로 들어가니 명원의 형과 아우가 술을 마련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오후에 망추정(望楸亭)에 올랐는데, 이 정자는 박씨의 재실로서 마을 뒷산 산허리 높은 곳에 있어서 멀리까지 바라볼 수 있었다. 남사의 어진 이들이 모두 다 왔고, 밤에는 하우석(河禹碩 하용제의 부)공이 우리가 산에 간다는 말을 듣고 술과 안주를 크게 갖추어 보내어서 밤새 이야기하며 먹고 마실 거리를 삼게 하였으니, 예를 갖추는 마음이 매우 치밀하였다.

 

술을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춘추(春秋)>에 미치게 되어, 내가 명원에게 물었다.“<춘추>가 은공(隱公) 때부터 시작한 것은 무슨 뜻이 있는 것인가?[<춘추>는 노()나라의 제후인 은공이 자리에 오른 해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이렇게 물은 것이다.]”명원(곽종석)이 말하였다. [“맹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가 없어진 뒤에 <춘추>를 지었다하셨으니, 대개 주()나라 왕실이 동쪽으로 옮겨간 뒤에[도읍을 서쪽의 장안(長安)에서 동쪽의 낙양(洛陽)으로 옮긴 것을 말한다.] 왕의 자취가 그쳤고,[제후들의 세력이 강해져서 실질적으로 왕이 더 이상 지배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되었음을 말한다.] 왕의 자취가 그친 뒤에 시가 없어졌는데, 은공이 자리에 오를 때가 바로 시가 없어진 뒤에 해당한다. 이것이 <춘추>(은공에게) 가탁하여 시작된 까닭이다.”내가 말하였다.]

 

큰 뜻은 진실로 그러하다. 그렇지만 노나라 혜공(惠公) 초년에 주나라는 이미 동쪽으로 옮겨갔다. (주나라가) 동쪽으로 옮겨간 것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왜 혜공 때부터 시작되지 않고 반드시 은공 때부터 시작되어야 하는가? 대개 주나라가 동쪽으로 옮겨간 초기에는 천자의 명령이 아직도 살아 있어서 제후국들이 천자께 봄 가을로 조회하는 일이 아직 바뀌지 않았으니, ()나라 문후(文侯)의 일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그러다가 은공에 이르러서는 안으로는 앞선 군주에게서 나라를 이어받지도 않고, 위로는 하늘이나 왕에게서 명령을 받지도 않은 채, 여러 대부들이 자기를 끌어다 세우서 마침내 군주의 자리에 서게 되니, 주나라의 전례가 이때부터 땅바닥이나 쓸게 되었다.[땅에 떨어졌다는 뜻이다.]

 

앞선 군주의 뜻도 아니고, 하늘이나 왕의 명령이 아닌데도 군주가 될 수 있게 되었으니 나라를 어지럽히는 신하와 아비를 해치는 자식들이 꺼려 못할 짓이 무엇이 있겠는가? <춘추>가 은공 때부터 시작된 것은 또한 어지러움을 없애고 올바름으로 되돌아가려는 뜻에서 그런 것인데, 뒷시대에 이르러 이런 뜻이 밝게 드러나지 않으니 어찌 탄식하지 않겠는가?”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깊이 그러하다고 여겼다.

 

 

 

일식에 대하여 논하였다. 내가 말하였다. “역가(曆家 : 요즘으로 치면 천문학을 연구하는 집단을 말한다.)에서는 마땅히 일식이 일어나야 할 때에 반드시 일식이 일어난다.’고 말하고, 주자(朱子) 또한 마땅히 일식이 일어나야할 때를 말하였는데, 어떤 이는 <시경>시월지교(十月之交)’ [소아(小雅)>에 들어 있으며, 일식에 대해 읊고 있다.]에 대한 집전(集傳 : 주자의 주석으로서, ‘일식에 정해진 법도가 있다 하여도 정치가 제대로 되고 되지 않음에 따라 일어나거나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풀이하고 있다.)의 내용을 주자 초년의 아직 확정 되지 않은 이론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주장은 어떠한가?”


명원이 말하였다. “일식은 본디 정해진 법도가 있다. 그러나 만일 정해진 법도가 있다하여 (일식이) 재앙이 아니라고 하고, 마땅히 일식이 일어나야할 때에 반드시 일식이 일어난다고 말하고, 또 주자께서 초년에는 아직 천문을 제대로 관찰하지 못하였다고 한다면 이는 매우 그렇지 못하다. 만일 일식이 재앙이 아니라면 <시경>에서 말하는 역공지추(亦孔之醜 : ‘몹시 나쁘다는 뜻으로, 일식이 일어난 것은 몹시 나쁜 일이라는 뜻)’우하부장(于何不臧: ‘어찌하여 이렇게 안 좋은가?’라는 뜻으로, 이날 일식이 일어났으니 어찌 이리 안 좋은 일이 생겼는가라는 뜻)’이라는 말이 다만 잠꼬대 같은 말에 지나지 않게 되고, <춘추>에서 일식이 일어날 때마다 반드시 기록한 것 또한 그저 여러 가지 많은 일들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게 된다.{훗. 현상은 현상일 뿐이다. 를 정확히 간파하고 있는 옛사람도 있었고만!)

 

 

<춘추>240년 동안에는 일식이 겨우 36번 일어났을 뿐인데, ()나라의 290년 동안에는 일식이 100번 남짓 일어나기에 이르렀다. <춘추>를 마땅히 일식이 일어날 때의 정해진 법도로 삼는다면 당나라의 100번 남짓에는 마땅히 일식이 일어날 때가 아닌데도 일식이 일어난 경우가 반드시 있을 것이고, 당나라를 정해진 법도로 삼는다면 <춘추>36번은 마땅히 일식이 일어나야할 때이지만 일식이 일어나지 않은 경우가 있는 것이다. 이렇다면 무엇을 기준으로 삼을 것인가? 이런 뜻에 대해서는 (주자께서) <시경>의 집전에서 자세하게 말씀하였다.

 

또 주자어류(朱子語類>[주자의 말을 기록한 책]에서 전자산(錢子山)예로부터 일식과 월식을 재이(災異 : 재앙이나 좋지 않은 괴이한 일을 말한다.)로 여겼지만, 오늘날 역가들은 오히려 이를 미리 계산하여 알아내는데, 이는 어떠합니까?’라고 묻자, ‘단지 대체적으로 계산해서 알 수 있을 뿐이고, 또한 본디 맞지 않는 경우가 있어서 역가들 가운데에는 마땅히 일식이 일어나야 하지만 일어나지 않는 경우도 있고, 마땅히 일식이 일어나야 하는 때가 아닌데도 일식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니 주자께서 천문에 대하여 어찌 아직 살피지 못한 바가 있었겠는가? (주자의) 초년과 만년을 구별하는 것은 아마도 옳지 않을 것이다.”

 

치수가 말하였다. “이미 정해진 법도가 있으면 비록 성인이 위에 있다 하여도[성인이 임금이 되어 통치한다는 뜻이다.] 어찌 하늘의 일정한 법도를 옳기거나 바꿀 수 있겠는가?”

 

명원이 말하였다. “화해로운 기운이 아래에 가득하면 재앙은 위에서 날마다 없어진다. 이것은 바른 사람이 반드시 하늘을 이기는 경우이다.”(천문학은 철학을 이길 수 없나니...........ㅎ)

 

내가 말하였다. “명원의 주장이 아마도 옳은 듯하다. 우리 유학자들이 만일 오로지 역가들의 견해를 주로 한다면 왕형공(王荊公 : 북송시대의 재상 왕안석(王安石)을 말하며 제도개혁을 통하여 송나라의 정치를 새롭게 하고자 하였으나, 보수적인 지식인들의 저항에 부딛쳐 결국 실패하였다. 주자 계통의 성리학자들은 왕안석과 정반대의 정치적 입장에 서 있다.)‘(일식은) 두려워할 만하지 않다는 주장은 괴이할 것이 없게 되고, 송나라 휘종(徽宗)‘(일식은) 정해진 운수에 따른 것이니 재앙이 될 만하지 않다조서는 진실로 마땅한 것이 될 것이다. 그러면 어찌 형공에게 죄를 주고, 휘종을 책망할 수 있겠는가?

 

이설(異說 : 본디 다른 주장이라는 뜻이지만, 여기에서는 단순히 다른 주장이 아니라, 유교의 정통적인 학설에 대립되는 주장이라는 뜻이다.) 이 왕정(王政 : 본디 왕의 통치라는 뜻이지만, 단순히 왕이 다스리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유교의 올바른 정치적 이념과 수단에 따라 이루어지는 이상적인 통치를 말한다.)을 해치는 것이 어찌 심하지 않겠는가?” 다음으로 인()에 관한 주장들을 논하였으며, 밤이 깊어지자 저마다 자러 갔다.

 


7

 

아침에 박성효(朴性孝)군이 술과 안주를 준비하여 일행에게 예를 차렸다. 밥을 먹은 뒤에 산으로 나섰는데, 함께 떠난 여러 사람들은 우리 세 사람[허유, 문성중, 김치수]과 치유, 경유, 명원, 찬여, 은거이다. 짐을 질 하인 네 사람이 술과 안주, 식량, , 이불, 천막을 갖추어 지고 따라왔다. 치유가 나에게 오죽(烏竹 : 검은 대나무)으로 만든 지팡이 한 자루를 주면서 이 지팡이는 윗사람만이 더불어 같이 갈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웃으면서 받았는데, 몸을 떠받쳐 지탱하는 데 꽤 힘이 되었다.

 

작은 냇물을 건너고 니구(尼丘)를 지나 서쪽으로 가면서 내가 명원에게 말하였다. “<춘추>에 나오는 등자(滕子 : 등나라의 제후를 말한다.)가 천자에게 와서 조회하였다고 한 뜻에 대하여 여러 주장들이 서로 다른데, 내가 생각하기에, 등나라는 후작(侯爵)의 나라인데 뒤에 초()나라에 신하로서 복속되었기 때문에[양자강 유역에 있던 초나라는 황하 유역에서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던 주()왕조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 왕()을 칭하며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호칭을 자()로 낮춘 것이니,[중국 주나라 봉건시절에 제후들의 작위는 높은 것부터 () () () () ()의 다섯 등급이 있었는데, 원래 후작이었던 등나라의 제후를 두 등급 아래인 자작이라고 낮추어 불렀다는 뜻이다.] 이는 등나라를 오랑캐로 여긴 것이다.”

 

명원이 말하였다. “당시에 초나라에 신하로서 복속된 나라는 진()나라, ()나라 같은 부류들이 모두 그러하였는데 어찌하여 유독 등나라 만을 라고 낮추어 불렀겠는가? 대개 등나라는 작은 나라이다. 춘추시대에 제후들이 회동하여 맹약할 때에 대개 후작의 나라는 후작의 예물을 썼고, 자작의 나라는 자작의 예물을 썼는데, 등나라는 힘이 약하여 후작의 예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스스로 낮추어 자작의 나라가 된 것이다. 그래서 성인[<춘추>를 지었다고 하는 공자를 가리킨다.]이 사실에 근거하여 있는 그대로 썼을 뿐이지, 자기 마음대로 낮춘 것은 아니다.”

 

고개 하나를 넘고 조연(槽淵)8)을 지나서 도구대(陶邱臺)9)에 올랐는데, 도구대는 옛날 처사 이제신(李濟臣 15361583)이 머물던 곳이다. 긴 강은 아래에서 돌아 흘러 모이고, 깎아지른 낭떠러지는 우뚝 치솟았다. 예전에는 소나무 수십 그루가 있었는데, 근래에 도구(陶邱 : 이제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의 후손이라고 불리는 이 씨 성을 가진 사람이 남김없이 모두 베어가 버리고, 대도 따라서 허물어져버렸으니, 이로써 세상이 변하였음을 볼 수 있다.

 

그러다가 비가 내려서 술집에 들어가 잠시 쉬다가 비를 무릅쓰고 산으로 들어갔다. 온 하늘에서 비가 내리는데 허리를 구부리고 비틀거리며 걷는 모습이 또한 그림거리가 될 만하였다. 중소(仲昭)[조석진(曺錫晉, 1837~?) 字 중소(仲昭) 號 성계(惺溪)]가 나와서 보고 위로하면서 집으로 맞아들여 술을 몇 순배 돌렸는데, 술자리에서 우발적으로 지각(知覺)에 관한 논의가 일어났다. 내가 사물을 끌어다가 비유하여 말하려 하였는데, 이를 제지하면서 곧바로 말하고, 비유는 들지 마시오.”라고 하는 이가 있었다.

 

이에 명원이 옛말을 들어 장난스럽게 말하기를, “그대가 ()에 대하여 모르는데, 지금 그대에게 에 대해 설명하면서 탄과 같다고 하면 그대가 알 수 있겠습니까? 반드시 탄은 활 비슷하게 생겼습니다라고 말한 뒤에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설명하는 사람은 본디 듣는 사람이 이미 알고 있는 것으로써 아직 알지 못하는 것을 비유하여 깨우쳐 주어 그가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니, 말을 할 때 비유를 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매우 큰 사실입니다.”라고 하니,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그가 비유를 잘 들어 깨우쳐주는 것에 탄복하였다.

 

점심을 먹고 나서 대포(大浦)10)를 향해 떠났다. 형칠(衡七) [조원순(曺垣淳, 1850~1903) 字 衡七(형칠)]이 냇가로 나와 맞이하여 자리를 펴고 술동이를 열었는데, 몸가짐이 단정하고도 여유로운 것이 참으로 현명한 주인이었다. 이날 저녁 초승달은 서쪽에 걸려 있고 맑은 바람은 상쾌하게 불어왔다.

 

나와 치유, 치수는 바깥 건물에 솥발처럼 셋이 앉아 경권(經權)’ 두 글자에 대하여 논하였다. 내가 말하였다. “배우는 이들은 마땅히 경(: 정상적인 올바른 법도를 말한다.)을 지킬 따름이지, (: 경을 쓸 수 없는 특별한 상황에서 임시적으로 사용하는 법도를 말한다.)은 논할 만한 것이 아니다. 세상 사람들의 수많은 잘못이 모두 권에서 나왔으니, 미세한 일을 만나기만 하면 곧바로 구차한 마음으로 변통할 방도만을 생각하여 이는 권도이다라고 말하면서 권 쓰기를 그치지 않아서, 끝내 보잘 것 없는 소인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장횡거(張橫渠)의 시에서 천오백년 동안 공자 같은 사람이 없는 것은 모두 변통만을 일삼는 노회한 이들 때문이네라고 한 것 또한 이를 말한다.”

 

명원이 말하였다.[앞에서는 치유, 치수와 더불어 셋이 있었다고만 하였고, 명원이 있었다는 말은 없었는데 갑자기 등장하였으니, 중간에 합석한 듯하다.] “세상 사람들은 권이 될 수 없는 것을 가지고 권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 어르신께서 반드시 을 타파하고자 하시는 것이다.” 내가 여러 현인들이 등불 앞에 죽 늘어 앉아 있는 가운데 화목하고도 단엄한 기상이 있는 것을 보니 매우 즐거워할 만하였다. 밤이 깊어 자리를 파하였다. 이날은 30리를 걸었다.

 

8

 

날씨가 몹시 맑았다. 밥을 먹은 뒤 길을 떠났다. 형칠이 길 가는데 소용되는 물품 가운데 아직 갖추지 못한 것을 챙겨 갖추게 해주었다. 북천(北川)을 건너 십리를 간 뒤 송객정(送客亭)11)에서 쉬었다. 옛날 노선생[남명(南冥) 조식(曺植)을 가리킨다.]이 덕계(德溪 : 오건(吳健))를 보낼 때에 반드시 멀리 이 정자까지 같이 왔기 때문에 이로써 이름을 붙인 것이다.[‘송객정이라는 이름이 손님을 배웅하는 정자라는 뜻이다.]

 

지금도 늙은 나무가 정정하고 위에는 낙마파(落馬坡)면상촌(面傷村)12)이 있다. 전하는 말로는 덕계가 선생께 하직하고 물러나와 동문의 여러 선비들과 실컷 마시고 헤어져서 가다가 자기도 모르게 말에서 떨어져 얼굴을 다쳤는데, 이 때문에 땅 이름을 그렇게 붙였다고 한다.[‘낙마파말에서 떨어진 언덕이라는 뜻이고, ‘면상촌얼굴을 다친 마을이라는 뜻이다.]

 

십리를 가서 평촌(坪村)의 가게에 들어가 한 순배 돌려 마신 뒤 장정령(獐頂嶺)을 지나 정운정(淨雲亭)에 오르니 전에 갔던 대원암(大源菴)이 멀지 않았다. 길은 숲의 나무 꼭대기 너머로 올라가고, 물은 바위 사이에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흘러내려 길을 가는 이들로 하여금 마치 구름이나 안개를 타고 올라가 신선에게 인사라도 하는 듯이 아득한 느낌을 갖게 하였다. 석교(石橋)에 이르러 문득 옛적에 내가 성양(聖養)과 이곳에서 만나서 서로 몹시 즐거웠던 일을 생각하니, 오늘은 혼자 온 것이 또 어찌 이리도 슬픈가! 이에 돌 축대에 잠시 앉아 쉬면서 입에서 나오는 대로 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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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모(李正模)

 

1846(헌종 12)1875(고종 12) 1217. 조선 후기 문인. 자는 성양(聖養)이고 호는 자동(紫東)이다. 본관은 고성(固城)으로 경상남도 의령군(宜寧郡) 석곡리(石谷里)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이운규(李雲逵)이다. 고모부인 만성(晩醒) 박치복(朴致馥)의 문하에서 56년을 공부하면서 문장과 식견이 탁월해져 인근 지역까지 명성이 자자하였다. 1866(고종 3)에는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의 학문을 듣고 의령(宜寧)에서 경상북도 성주(星州) 한개[大浦]로 찾아가 제자의 예를 갖추었다. 다음 해인 1867(고종 4) 22세 때에 자미산(紫微山) 아래 도당곡(陶唐谷)에 조그마한 집을 짓고 자도재(紫陶齋)’라고 이름을 지어 수양에 뜻을 두었다.

 

1874(고종 11) 29세 때 여름 금산(金山) 동당시(東堂試)에 참가하였다. 시관이 그를 도장원으로 뽑으려고 성명 문건을 요구하였는데 문건을 주고 장원으로 뽑힌다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응하지 않고 물러났다. 그해 겨울 서울에 갔으나 시대의 변화를 보고 과거를 보지 않기로 결심하고 경학에만 전념하였다. 곽종석(郭鍾錫)을 비롯하여 허유(許愈)윤주하(尹胄夏)김진호(金鎭祜)이승희(李承熙)장석영(張錫英)이두훈(李斗勳) 등과 함께 주문팔현(洲門八賢: 퇴계의 학통에 연원을 두고 그의 학설을 심화시킨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의 제자들)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저서로 자동선생문집(紫東先生文集)63책이 있다.

 


 

蒼山無古今 : 푸른 산은 옛날도 지금도 없는데

丹鳳逝不來 : 붉은 봉황새는 가더니 오지 않네

秋風數行淚 : 가을 바람 자주 눈물을 뿌리는데

斜日獨登臺 : 해질녘이 되어 홀로 대에 올랐네.

 

곧 일어나 절 문에 이르니 승려 한 명이 나와서 맞이하여 불당의 동쪽 건물에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이 암자는 대원(大源)’으로 이름을 삼았고, 누각들은 천광(天光)’ ‘운영(雲影)으로 이름을 삼았는데, 불교의 절이면서도 유교의 용어들을 사용하였으니 몹시 기이한 일이다.

 

명원이 평촌에서 꼴찌로 이르렀고, 중소의 동생 도형(道亨)이 뒤쫓아 이르렀다. 저녁 종이 울린 뒤에는 두 소년이 와서 뵈었는데, 권학규(權學揆)권경칠(權敬七)이며, 우리가 간다는 말을 듣고 뒤를 밟아 왔다고 하였다. 내가 이 암자에서 와본 지가 겨우 4년인데 절의 승려들 가운데에는 아는 사람이 없었으며, 다만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이름을 잊어버려 기억나지 않는 한 늙은 승려가 특별히 은근한 뜻을 베풀어 다과를 제공하였다.

 

9

 

새벽에 일어나 밥을 재촉하였다. 밥을 먹은 뒤에 암자 뒤로 해서 탑전(塔殿)을 지나는데 어떤 늙은 선승이 탑을 향해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하면서, 사람들이 지나가도 못 본 듯하였다. 탑전을 돌아 옆문으로 해서 암자를 나오니 열 명 남짓한 승려들이 길가에 늘어서서 배웅하였으며, 길을 가르쳐줄 사람을 한 명 뽑아 앞장서서 이끌어가게 하였는데 성이 ()씨라고 하였다.


용추(龍湫)를 지나갔는데 아래로 내려가 보지는 못하였다. 여기서부터 산은 더욱 깊어지고 물은 더욱 빨라져서, 늙은 소나무들이 구름처럼 모여 있고, 빠른 물줄기가 우레치듯 우르릉거렸으며, 굽이굽이마다 기이하고 뛰어나서 이루 다 감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찬여가 말하기를, “이른바 천 개의 바위가 다투어 솟아 있고, 만 개의 골짜기에 다투어 흘러내린다.’고 하는 것이 참으로 이것이다.”라고 하였다. 십리를 가서 하유평(下柳坪)16)에 이르니 사람 사는 집이 서너 채 있었는데, 나무에 의지해서 집을 얽어 지었으니 먹고 사는 방도는 말할 것도 없었다.

 

석천(石川)을 건너 서북쪽으로 가니 벼랑이 갈수록 가팔라져서 발걸음 옮기기가 몹시 힘들었다. 폭포 위에서 잠시 쉬면서 일행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냇물을 따라 서쪽으로 갔으며, 또 꺾어 돌아 왼쪽으로 가서 풀숲에 난 길을 찾아 몇 리쯤 따라가니 문득 닭 울음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들렸는데, 이곳이 상유평(上柳坪)이라고 하였다.애전령(艾田嶺)18)이 얼마쯤 되는지 물어보니 아직도 십리는 더 가야 한다고 하였다.

 

떨쳐 앞으로 나아갔는데 겨우 5리쯤 갔을 때 검은 구름이 모이더니 갑자기 비가 쏟아져 내려 앞으로 나아갈 수도 뒤로 물러날 수도 없게 되었으므로 나무에 의지하고 바위에 기대어서 갈지 머물지를 헤아려 보았다. 형칠이 벽송사(碧松寺)가 멀지 않으니 그곳으로 가서 묵는 것이 어떻습니까?”라고 말하였고, 명원이 오늘 이 산행은 물러날 수는 없다고 말하였다. 비를 무릅쓰고 앞으로 나아가는데, 바위 골짜기는 깊숙하고 어두우며, 구름과 나무가 울창하게 뒤덮으니, 쭈뼛하니 마치 사람 세상이 없어진 듯한 생각이 들었다. 길을 가다 골짜기 물가로 난 길에 [조금 평평한 곳]에 이르러 비가 조금 잦아들기를 기다리며 보따리를 풀어 점심을 먹었다.

 

애령(艾嶺19)으로 올라갔는데, 고개가 몹시 험준하여 애써 서로 의지하며 조금씩 조금씩 나아갔다. 산꼭대기에서부터 거의 15 를 기어 내려오니(오역) (최석기역 : 산능선을 따라 기어서 느 릿느릿 15리쯤 가자) 그곁에 산신을 모신 목패가 있어서  이곳이 산신께 기도했던 산막 터임을 알 수 있었다." 큰 바위가 있는데 밑의 형세가 넓어서 의지하여 묵을 만하였다. 옆에는 나무로 만든 산신의 위패가 있어, 이곳이 산신령에게 기도하던 천막이 있던 곳임을 알 수 있었다. 하인에게 명하여 한편으로는 땔감을 가져다 밥을 짓게 하고, 한편으로는 나무를 베어 천막을 치게 하였으며, 무명옷을 입고 장작을 쌓아 불을 지펴 밤을 지샐 계책을 삼았다.

 

명원이 말하기를, “이 바위가 이처럼 궁륭(穹窿 : 둥근 지붕처럼 가운데는 높고 솟고 주변은 낮게 드리운 것을 말한다.)하였는데 지금까지 이름이 없으니, 이름을 지어주었으면 한다.”고 하였다. 내가 감히 그럴 수 없다고 사양하였지만 여러 사람들이 강권하여, “이번 산행에서 마음 속으로 말없이 비는 것이 단지 구름이 걷히는 한 가지 일이니 개운(開雲)이라고 이름 짓는 것이 어떻겠는가.” 라고 하였다  * 개운(開雲 : ‘구름이 걷힌다는 뜻이다)

 

이에 은거가 붓을 적셔 크게 썼는데, 쓰기를 마치자 검은 구름이 흩어졌으며, 서쪽 하늘의 해는 이미 지려하고 있었다. 명원이 말하기를, “그대의 정성이 비록 형산(衡山)의 구름은 걷히게 하였지만, 다만 내일 화산(華山) 꼭대기에서 미쳐날뛸까 두렵다라고 하였는데, 대개 한퇴지(韓退之 : 중국 당나라시대의 문장가 한유(韓愈)를 말한다.)의 일을 끌어다 나를 놀린 것이다. 한 밤중에 술이 깨니 추위가 심하여 명원을 일어나게 하여 더불어 이야기하였는데, “세상에서 유학자로서 (살아가며 해야 할) 일이 가장 어렵다고 말하니, 명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10

 

바위 아래에서 밥을 먹었다. 바위에서부터 쓸리듯이 절벽에 바짝 붙어 발을 옆으로 하여 걸어갔다.(마암에서 1618봉 안부로 직접 올라감) 이날 구름과 안개가 산골짜기에서 솟구쳐 올라와 빠르게 지나갔는데, 마치 큰 바다에서 배를 타고 있는데 물결이 용솟음치는 것만 보이는 듯이 아득하여 동서남북을 분간할 수 없었다. 10리 남짓 갔을 때 중소(仲昭)[조석진(曺錫晉) 字 중소(仲昭) 號 성계(惺溪)]가 소매를 들어 상봉(上峰)이 보인다.”고 말하였다. 내가 바야흐로 흥이 나서 성큼성큼 걷다가 문득 몸을 돌려 돌아서서 남쪽을 바라보니 언뜻 여러 봉우리가 높이 솟아 꼭대기를 드러내는데 마치 늙은 용이 몸을 나타나 보이는 듯하여 여러 가지 괴이한 광경이 펼쳐졌다. 내가 그 기이함에 크게 소리를 질렀다.

 

몸을 숙이고 앞으로 길을 나아가 한 마음으로 천왕봉을 향하여 위로 올라갔다. 5리쯤 가서 앞의 길잡이에게 상봉이 가까운가?”하고 물어보니, “아직도 10리는 가야합니다라고 답하여서, 중소가 말한 상봉이 바로 중봉(中峰)임을 바로 깨달았다. 형칠[조원순(曺垣淳, 1850~1903) 字 衡七(형칠) 호 복암(復菴) 대포리 거주 남명의 10세손 허전과 이진상의 문인]이 술을 따라 올려서, 취한 기분을 타고 중봉의 산허리를 거쳐 구불구불 점점 위로 올라가니 잠시 뒤 천왕봉의 참된 모습이 하늘처럼 높이 솟아 있었다. 중소가 함부로 말을 하길래, 내가 규제하며 천왕(天王)은 존엄한데 어찌 쉬이 모독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니, 중소가 사죄하였다.

 

마침내 천왕봉에 올라 허공에 의지하여 크게 한번 소리를 질렀다. 올 때에는 구름과 안개 때문에 자못 걱정했었는데, 이곳에 이르러 보니 하늘과 땅 사이에는 밝은 빛이 가득한 가운데, 다만 땅이 다한 곳에 하얀 기운이 마치 하나의 동그라미처럼 빙 둘러 있는 것만을 보았을 뿐이었다. 어떤 이는 이를 바다 빛깔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이를 기기(氣機 : 여러 가지 뜻이 있지만, 여기에서는 식물들의 생기’ ‘자연의 기운정도의 의미로 보인다.)라고 하였다.

 

봉우리 위에는 일월대(日月臺)가 있고, 대 옆에는 남쪽을 향해 앉아 있는 돌로 만든 사람(성모상?)이 있었는데, 생각하기에 이것이 천왕당(天王堂 ; 천왕을 모시는 당집을 말한다.)인 듯하다.[돌로 만든 사람만을 말하고 건물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천왕당이 있던 자리라는 뜻으로 보인다.]

 

천왕이 세상에 나타나지 않은 지 오래 되었으니 북쪽으로 신주(神州 : 중국의 중원지방이나 도읍을 가리키기도 하고, 중국 자체를 가리키기도 한다.)를 바라보면서 어찌 나라가 망한 것에 대한 한탄이 없을 수 있겠는가?[천왕은 불교에서는 하늘에 사는 중생들의 왕을 가리키지만, 유교적으로는 하늘이 내린 올바른 왕을 뜻한다. 지리산의 천왕봉이 어떤 의미를 취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글쓴이는 이를 유교적인 의미로 해석하고 중화주의(中華主義)적인 관점에서 한탄한 것이다. 즉 중국에 하늘에서 내린 올바른 왕이 나타나지 않은 지가 오래되어, 한족(漢族)의 왕조인 명()이 망하고, 중국인들이 오랑캐라고 불렀던 만주족(滿洲族)의 왕조인 청()이 중국을 지배하고 있는 현실을 한탄하고 있는 것이다.]

 

마침내 몇 잔의 술을 통음하였는데 바람이 차갑게 불어 머물러 있을 수가 없어서 산 아래 백 걸음쯤 되는 곳으로 내려와 밥을 지어 먹고 배고픔을 달랬다. 치유, 치수, 명원, 경유, 은거와 더불어 다시 위로 올라가 같이 온 사람들 이름을 적어서 돌벽 사이에 감추어 두었는데, 바람의 위세가 더욱 엄혹하여 사람이 서 있지를 못하게 하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산을 내려왔다.

 

석문(石門)에서 10리쯤 가서 사자령(獅子嶺)에 이르러 바위 아래에서 묵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해돋이가 가장 볼만하다고 하였지만, 추워서 다시 거동하기가 몹시 어려웠다. 또 생각해보니 우리들이 이 산을 한번 둘러본 것은 또한 가슴에 품었던 것을 해소하고 마음을 한번 장쾌하게 한 것으로 충분하니 어찌 꼭 대상에 부림을 받아서 번거로움을 꺼리지 않아야만 하는 것이겠는가?[일출이라고 하는 관광의 대상에 얽매여서 번거롭게 움직일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옛날 주부자(朱夫子 : 주희(朱熹)를 높여 부르는 말이다.)께서 장경부(張敬夫 : 송나라의 사상가 장식(張栻)으로 주자와 교유하였다.)와 더불어 축융봉(祝融峰)에 오른 뒤에 청련궁(靑蓮宮)으로 돌아와서 이렇게 시를 지었는데, 이 또한 이런 뜻에서 그랬을 것이다.

 

내일 아침 다시 맑아지면

다시 올라가는 것에 대해 어찌 힘든 것을 꺼리리오만은

즐기며 노는 것 또한 무슨 이익이 있을까?

세월은 지금도 도도히 흐르네.

 

무릇 주부자의 인지지요(仁智之樂 : <논어(論語)>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한다.[仁者樂山 知者樂水]’는 말이 있는데, 이 경우는 어질고도 지혜로운 사람이 산과 물을 좋아하는 것을 말한다.)로서도 무슨 이익이 있을까라는 탄식이 있었으니, 하물며 우리들이겠는가?

 

11

 

해가 뜨기 전에 언덕에 올라가 해돋이를 보면서 치수와 더불어 성경일제(聖敬日躋 : ’성스러움과 공경함이 날마다 올라간다.’는 뜻으로 은()왕조를 세운 탕()임금은 그 덕이 날마다 증진되었음을 찬양하는 말이다.)’의 뜻에 대하여 논하였다.

 

밥을 먹은 뒤에 길을 떠났다. 여러 사람들이 깊은 숲 속으로 달려 들어가 지팡이를 구해왔는데, 명원이 청려(靑藜 : 명아줏대를 말하며, 명아줏대로 만든 지팡이를 청려장(靑藜杖)이라고 한다.) 한 자루를 나에게 주었다. 10리 남짓 가서 면 옷을 풀어 헤치고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술동이가 바닥이 나도록 술을 마셨다.

 

신선적(神仙磧)에 이르니 그 아래로 맑은 냇물이 폭포처럼 흐르고 갖가지 돌들이 숲처럼 서 있었다. 마침내 멈추어서 점심을 먹었다. 숲의 나무 너머로 아직도 천왕봉의 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명원이 은거에게 청하여 솟은 바위에 앙미대(仰彌臺)라고 쓰게 하였는데, ()나라의 논(: <논어>를 가리킨다.)에서 따온 것이다.[<논어>에 공자의 덕을 찬양하는 뚫으려 하면 할수록 더욱더 단단해지고, 우러러보면 볼수록 더욱더 높아진다.[鑽之彌堅 仰之彌高]는 말이 있는데, 여기에서 따온 것이다.] 물속에 있는 돌에는 은여탄(銀餘灘)이라고 쓰게 하였는데, 명옹(冥翁)의 시에서 ‘10리나 되는 은하수를 다 마시고도 남음이 있다.[銀河十里喫有餘]는 구절의 뜻을 갖다 쓴 것이다. 냇물을 따라 내려오는데 사죽(莎竹)이 가득 차 있어서(황금능선의 산죽) 사람이 걸어가는데 어깨가 보이지 않았다. 모두 옛날 화전(火田)을 일구던 곳이라고 한다. 숲을 헤치고 5리쯤 가니 큰 고개가 앞에 있는데, ‘국수봉(菊首峰)’23)이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국수(菊首)’라는 이름은 별 뜻이 없으니, 아마도 국사(國士 : 나라의 큰 선비)’가 잘못 전해진 것이 아닌가 한.”라고 하였다.

 

고개는 몹시 험준하고 가파르고, 풀에 묻혀 길이 없으며, 나무가 구름처럼 울창하였다. 느릿느릿 걸어서 갔는데, 서너번 뒨 뒤에야 고개에 오를 수 있었다. 여기부터는 지세가 조금 평탄하고 길 또한 갈수록 열려서 괴로움에서 벗어나 쾌활한 상태로 들어가니 기뻐할 만하였다. 처음 여러 사람들이 산에 오를 때에는 극히 험난한 곳을 지나가면서도 한 사람도 차질을 빚은 이가 없었는데, 발 가는대로 편안하게 걸어갈 수 있는 평탄한 곳에 이르러서는 도리어 마음이 풀어져서 발을 헛디뎌 뒤에 오던 이가 앞서 가기도 하고, 앞서 가던 이가 뒤처지기도 하였으니, 이로써 험난하고 평탄한 곳에서 마음을 다잡는 것과 풀어진 것이 다름을 알 수 있었다.

 

내원(內源)에 이르니 냇가에 흩어져 있는 온갖 바위들이 곳곳마다 사랑스럽고, 냇가의 버드나무는 푸른 빛깔이 시들며, 산의 나무[원문에서 산() 다음 글자가 뭉개져서 해독할 수가 없기 때문에 무슨 나무인지는 알 수 없다.]는 점점이 붉게 물드는데, 들판에 우거진 풀 사이로는 종종 홀로 외로이 서 있는 탑이 있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이곳이 옛날 절터였음을 알게 해주었다.

 

20리쯤 가서 만폭동(萬瀑洞)25)을 지났는데, 만폭동 어귀에는 정명암(鄭明菴 : 정식(鄭拭, 1683-1746). 문집으로 <명암집(明菴集)>이 있다.)명홍대(冥鴻臺)26)가 있다. 이 대는 바위인데, 위에는 몇 자 높이의 외로운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고, 대 아래에는 물이 빙빙 돌면서 흘러가니 술잔을 흘려보낼 만하며 경치 또한 뛰어나다. 명암은 나의 외가쪽 선조인데, 명나라가 망한 뒤 벼슬자리에 나아가려 하지를 않고, 자연 속에서 방랑하며 생애를 마쳤다. 그래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를 둘러싸고 있는 유명한 산과 큰 물가에는 명암이 글자를 새겨 넣은 돌이 없는 곳이 없다고들 한다.

 

술집에 들어가 술을 사서 갈증을 해소한 뒤, 저녁나절에 길로 나아갔다. 이때 빛은 희미하고 풍경은 황홀한데 냇가의 길이 조금 험난하여 몇 사람이 횃불을 들고 앞에서 인도하여 따라 들어갔는데 곧 형칠의 집이었다. 덕천(德川)27)에서 5리쯤 떨어졌는데, 덕천의 금구(今邱) 터에 가깝다.

 

주부자의 <북산시(北山詩)>에서 말한 이번의 유람으로 부유해졌지만 / 도리어 가슴에 상심을 품게 하네”[‘좋은 경치를 구경하여 마음이 풍족해졌지만, 그 경치를 두고 떠나오니 마음에 상실감이 남는다.’는 뜻으로 해석된다.]라는 구절이 바로 이를 위해 준비한 말 같다.

 

형칠은 부자(夫子) 집안의 후손으로서[일반적으로 부자(夫子)’는 스승을 높여 이르는 말이지만, 유교에서 부자라고만 쓸 경우에는 유교의 영원한 스승 공자(孔子)를 가리킨다. 따라서 이 구절은 형칠의 성이 공자와 같은 씨라는 것을 말한다.] 현명하면서도 행하는 바가 있어서 우리들이 공경하는 이였다. 그래서 갈 때와 올 때 모두 들어갔는데 번거롭게 자주 온다고 싫어하지 않았다.

 

여러 날 밤을 바위 구멍 속에서 자는 듯 마는 듯하다가 오늘은 침상 위에서 편안하게 잤지만 오히려 꿈 속에서 혼이 일월대(日月臺) 위를 돌아다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저마다 시로써 이별하는 마음을 풀어내고서 길을 떠났다. [명홍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아래에 이르러 일 때문에 형칠과 갑자기 헤어지니, 몹시 섭섭하였다. 중소의 집에 들어가 흠뻑 마시고 산천재(山天齋)28)로 나와 잠시 쉰 뒤 중소의 형제들과 더불어 따로 길을 가서 탁영대(濯纓臺)29)에 이르렀는데, 이 대 또한 명옹(冥翁 : 남명 조식을 가리킨다.)이 노닐며 쉬던 곳이다.

 

지팡이를 들고 잠시 쉬는데, 권경칠(權敬七)군이 갓을 벗어 그 갓끈을 씻었으니, 그 뜻이 또한 사랑할 만하였다.[‘갓끈을 씻는다.’는 표현은 굴원(屈原)<>어부사(漁父辭)><맹자>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그 의미는 사뭇 다르다. 먼저 <맹자>이루 상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아이들이 노래하여 말하기를, ‘창랑의 물이 맑으니 내 갓끈을 씻을 만하고, 창랑의 물이 흐리니 내 발을 씻을 만하다하였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들 이 노래를 들어봐라. 맑으면 갓끈을 씻고, 흐리면 발을 씻으니, 모두 스스로 취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무릇 사람은 반드시 스스로 모욕한 뒤에 다른 사람이 그를 모욕하고, 집안은 반드시 스스로 무너진 뒤에 다른 집안이 무너뜨리며, 나라는 반드시 스스로 정벌한 뒤에 다른 나라가 정벌한다. <태갑>에서 말하기를, ‘하늘이 지은 재앙은 오히려 피할 수 있지만 스스로 지은 재앙은 살아날 수 없다.’고 한 말이 바로 이를 말하는 것이다.” 즉 갓끈을 씻는 물이 되는 것도 발을 씻는 물이 되는 것도 모두 자신에게 달린 것이니, 스스로 잘 닦아야 함을 이른 것이다.

 

<어부사>는 어부가 꼿꼿하게 처신하다가 쫓겨난 굴원에게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듯이세상이 어지러우면 어지러운 대로, 올바르면 올바른 대로 같이 뒤엉켜 살 것을 권하는 내용으로, <맹자>와는 반대되는 뜻을 담고 있다. 글쓴이가 유학자이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맹자>의 의미로 한 말이다.]

 

대에서 위아래 10리로는 돌이 검고 푸른 옥이 영롱한데, 이로 말미암아 경치가 절묘하게 뛰어나서 사람들로 하여금 돌아갈 것을 잊어버리게 만든다. 도구대에 이르러 치수와 학규, 경칠은 입석(立石)30)으로 향하고, 나와 성중은 사상(泗上)31)으로 들어갔는데, 하우석공이 사람을 시켜 도중에 맞이하게 하였다. 마침내 은거를 따라가서 그 집에서 저녁을 먹고 물러나와 찬여(瓚汝)의 집에서 묵었다. 하우석공은 강계(江界)에서의 생활[유배생활인 듯하다.]을 마치고 돌아와 집에서 밥을 먹은 지 여러 해가 되었는데도 언제나 격앙되고 강개한 것이 나라의 큰 선비로서의 풍모가 있었다.

 

13

 

길을 나서니 여러 현인들이 멀리 숲 밖까지 함께 왔다. 내가 은거에게,개운암(開雲巖)에서의 일에 힘쓰라.”고 말하니, 은거가 알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원지점(院旨店)32)에 이르러 치수를 기다렸는데 오지 않았다. 먼저 지나간 것이 아닌가 싶어서 길을 나아가 진태점(進台店)33)에 이르렀는데, 치수가 뒤쫓아 와서 말하기를, “어른이 뒷사람을 이처럼 버리면, 뒷사람은 누구에게 기대야 합니까?”라고 하여, 내가 나는 그대가 먼저 올라갔나보다 했는데, 뒤에 있었는가?”라고 말하였다.

 

술을 따라 서로 위로한 뒤, 권성거(權聖擧)형을 염계(剡溪 : ‘은 땅이름으로 읽을 때에는 으로도 읽기 때문에, ‘섬계일 수도 있다.)로 찾아가 만났다. 저녁나절에 법물(法勿)34)로 들어가 치수의 서당에서 묵었으며, ()과 지()가 서로 다른 점에 대하여 논하였다.

 

14

 

성중과 헤어져 귀산(龜山)의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께서는 평안하셨다.

 

15

 

한가위 차례(茶禮)를 행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어떤 이가 지리산이 기이한가?”라고 묻기에, “기이하지 않다.”고 답하였더니, “기이하지 않다면 무엇을 구경하였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이렇게 답하였다. “기이하지 않기 때문에 크게 볼만한 것이 되는 것이다. 이는 아는 사람하고는 더불어 말할 수 있지만, 알지 못하는 사람하고는 더불어 말하기 어렵다.”

 


5일날[이 글을 쓴 달의 5일인 듯한데, 언제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1877년 <朴致馥>의 [南遊記行]를 보면 한주 이진상과 천왕봉에 오르기 위해 남사마을에서 25일 만나기로 한 것으로 미루어 25일로 추정됨] 한주(寒洲 : 이진상(李震相)선생이 도남정사(道南精舍)로 나를 찾아왔다. 남사(南沙)를 향해 가고 있는 중인데, 또한 뜻이 천왕봉 꼭대기에 올라가는데 있으며, 은거가 따라 가서 내 성명을 일월대에 새기겠다고 하였다. <>

 

* 수록문집 : 후산선생문집속(后山先生文集續)>

 

 

*

1) 명원(鳴遠) : 한말의 학자, 독립운동가 면우 곽종석.

2) 강루(江樓) ; 현 산청군 단성면 강루리.

3) 적벽(赤壁) : 현 산청군 신안면 하정리 적벽산 아래의 강.(강변 벼랑에 송시열이 쓴 적벽이라는 각자가 있음)

4) 남사(南泗) : 현 산청군 단성면 남사리.

5) 시현(矢峴) : 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배양이 마을에서 상사리로 넘어가는 고개(일명 쌀 고개. 화살고개로 불림)

6) 초포(草浦) : 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초포마을.

7) 니구(尼邱) : 남사리 북쪽에 있는 높이 238m의 산으로 경치가 아름답다.

8) 조연(槽淵) : 청계계곡 하류지점(단속사부근)에 있는 소(). ()의 구유처럼 생겼다고 해서 일명 구씨소라고도 불린다.

9) 도구대(陶邱臺) : 남명의 수제자로서 산청의 선비였던 도구 이재신 선생(1510~1582)이 낚시질을 하였던 곳이라고 전한다. 현 단성면 백운리 태소마을 앞 덕천강변 벼랑에 위치한 곳으로 도로확장공사로 인해 벼랑의 절경이 훼손된 상태이다.

10) 대포(大浦) : 현 산청군 삼장면 대포리.

11) 송객정(送客亭) : 진양지에 이르기를 송객정은 진주서쪽 삼장면 덕교리에 위치해 있으며, 덕계 오건이 건립하고 남명선생의 전송을 받을 때 필히 들렀던 곳이라고 했다.

12) 면상촌(面傷村) : 현 산청군 삼장면 평촌리 명상부락.

13) 평촌(坪村) : 현 산청군 삼장면 평촌리.

14) 장정령(獐頂嶺) : 평촌리에서 대원사로 넘어가는 고개. 일명 노루목으로 불림.

15) 대원암(大源菴) : 현 지리산 대원사.

16) 하유평(下柳坪) : 현 산청군 삼장면 유평리.

17) 상유평(上柳坪) : 현 유평리 새재부락.

18) 애전령(艾田嶺) : 지리산 쑥밭재.

19) 애령(艾嶺) : 쑥밭재.

20) 석문(石門) : 법계사~천왕봉등로의 개천문.

21) 사자령(獅子嶺) : 법계사에서 천왕봉 오르는 도중에 만나는(법계사 출발 20여분의 지점에 위치) 천불암터 혹은 야전병원 장소라고 하는 바위굴 뒤의 고개를 일컫는 듯함.

22) 신선적(神仙磧) : 지리산 순두류 상부에 위치한 신선너덜.

23) 국수봉(菊首峰) : 지리산 황금능선상의 국사봉.

24) 내원(內源) : 현 산청군 삼장면 내원리.

25) 만폭동(萬瀑洞) : 내원사 입구 계곡을 일컫는 듯함.

26) 명홍대(冥鴻臺) : 내원사입구 계곡가 명홍대각자가 새겨져 있는 너럭바위를 두고 일컬은 듯함.

27) 덕천(德川) : 덕산을 일컬은 듯함.

28) 산천재(山天齋) : 산청군 시천면 사리에 위치한 남명선생의 유적지.

29) 탁영대(濯纓臺) : 산청군 단성면과 시천면의 경계 지역 덕천강변에 위치하며, 바위에 濯纓臺 글자가 새겨져 있음.

30) 입석(立石) : 현 산청군 단성면 입석리.

31) 사상(泗上) : 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배양이마을의 옛 이름.

32) 원지점(院旨店) : 현 산청군 신안면 하정리. 조선시대까지 고을 원이 있었으며 지금도 통상 원지라고 불림.

33) 진태점(進台店) : 현 산청군 신안면 문태리 진태마을.

34) 법물(法勿) : 현 산청군 차황면 법물리.

 

* 저자 : 허 유(許愈 1833-1904)


합천군 가회면 오도리에서 태어났다. 자 퇴이(退而), 호 후산(后山) 남려(南黎), 본관은 김해이며, 한말의 대표적인 유학자 가운데 한 명인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의 문인으로서, 학풍이 깊고 덕망이 높아 합천은 물론 인근 성주.산청.함양 등지의 각 서당과 서원에서 강독을 하여 후배양성에 힘을 쓰면서 남명집 교정에도 참여를 한 재야 선비이다.  박치복(朴致馥), 곽종석(郭鍾錫), 이승희(李承熙) 등과 교유하였다. 가회면에 후학들이 세운 후산서당이 있다. 저서로 후산선생문집(后山先生文集)>/후산선생문집속(后山先生文集續)>이 있다.)

 

* 옮긴이 : 박해당 /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객원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