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감수재길

1610년 박여량의 두류산일록에 나오는 신광선(愼光先)

도솔산인 2021. 7. 21. 18:25

 

1610년 박여량의 두류산일록에 나오는 신광선

 

 

감수재 박여량과 두류산 유람을 함께 했던 신광선(愼光先, 1559~?)의 字는 경원(慶源), 본관은 거창(居昌), 지곡마을(유림면 손곡리 지곡마을) 사람이다. 박여량은 고대 정경운에게 사정이 생겨서 하루 늦게(9월 2일)  함양군 수동면 도천(현 도북리)을 출발한다. 어은정에서 고대 정경운을 만나 목동 마을(휴천면 목현리) 첨지 박춘수의 집에서 1박을 하고, 다음날(9월 3일) 지름길로 잔닥재를 넘어 탄감촌을 지나 용유담으로 향한다. 하루 먼저 출발한 박명부 일행은 92지곡마을에서 하루를 묵고 신광선과 함께 다음날 용유담에서 박여량, 정경운과 합류한다. 9월 3일 군자사에서 묵고, 9월 4일 제석당, 9월 5일 천왕당, 9월 6일 상류암에서 숙박을 하고 두류산을 유람한다.

 

注 도계천(桃溪川)의 이름을 따서 도계촌(桃溪村)이라 불렸다고 한다.

 

97일 상류암을 출발하여 초령을 넘어 방곡의 상류로 내려와 엄천(박여량의 두류산일록에는 임천으로 기록함)을 건너 지곡마을에서 하루를 머문다. 지곡마을은 두류산 유람을 위해 일행들이 집결한 곳이고, 9월 8일 두류산 유람을 마치고 해산한 장소이다. 신광선이라는 인물을 조사하다가 손곡 마을에서 효자 신효선과 조목단을 만났다. 신광선과 신효선이 어떤 관계인가 궁금했다. 지인의 도움으로 후손(부산 거주 신한성님, 56세)에게 거창신씨 세보에서 확인한 결과 두 분은 형제 관계이다. 신광선(愼光先, 1559~?)은 휴천면 손곡리 효자정려와 조목단의 주인공 덕재 신효선(愼孝先, 1557~1602)의 아우이고 3형제(셋째 佑先) 중 둘째로 거창 신씨 참판공파 20세손(시조)이다.

 

감수재 박여량(1554~1611)과 고대 정경운(1556~?)은 덕재 신효선(1557~1602), 신광선(1559~?) 형제와 아주 돈독했던 관계로 추정된다. 정경운은 그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고대일록에 '신효선(愼孝先)의 부음을 듣고 마음이 아팠다. 백원(百源)은 부모님의 喪에 거하여 매우 애통해하다가 중병이 들어 죽었으니, 가련하기 짝이 없다.'라고 기록하였다. 박여량은 감수재집 천령 효열록에 신효선의 이름과 효행의 행적을 남긴다. 또한 그의 장례를 치르는데도 적극적으로 돕는다. 감수재는 천령 효열록에 당시의 상황을 '그 장례를 치를 때 내가 본도(경상도)의 좌막(비장, 보좌관)이 되어 효자를 위해 힘쓸 것이 없음을 슬퍼하였다. 또 그가 가난하여 땅에 매장할 수 없음을 가련히 여겨 군대를 징발하여 묘를 썼다.'라는 기록을 남긴다. 전쟁이 끝났지만 정유재란의 참상을 짐작할 만하다. 전란으로 사람들이 다 죽어 묻어줄 사람이 없어 장례를 치르지 못하자 군대를 징발하여 매장했다는 의미로 이해가 된다.     

 

신효선(愼孝先, 1557~1602)신광선(愼光先, 1559~미상)의 생몰년대는 거창신씨 참판공파 세보와 고대일록을 참고하였다. 세보(世譜)에 두 분 다 몰년(沒年)이 나오지 않는다.

 

 

1. 1610년 박여량의 두류산일록

 

○ 9월 2일

용유담에 이르러 얼마쯤 지난 뒤에 박여승(박명부)이 동생과 사위 및 신광선(愼光先)박명익(朴明益) 등과 함께 왔다.

 

○ 9월 7일

방곡의 上溪까지 내려오니 종들이 말을 가지고 와서 기다렸다. 시내에 앉아서 각각 마음을 진정시키는 것을 마치고 남여를 버리고 말을 탔다. 방곡촌(方谷村)을 지나는데 마을의 집들은 다 대나무를 등지고 집을 지었으며 감나무로 둘러 싸여있고 인가와 접하였으나 두루 속세를 벗어난 지경과 같았다. 임천을 건너 신광선(愼光先)의 정자에 도착하여 술을 서너 순배 마시고, 최함씨의 계당으로 가서 묵기로 하였다. 저녁밥을 차려놓았는데, 동네 여러 벗들이 술과 안주를 가지고 모여들었다. 술을 마시며 환담을 나누다 2경이 되어서 파했다. 계당은 작은 시냇가에 있는데 시냇물을 끌어다 연못을 만들고, 매화나무∙대나무∙소나무∙국화가 그 주위에 가득했다. 최생을 속인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내가 보기엔 속된 사람이 아닌 듯하였다.

 

올 가을에는 장마가 계속되어 하루도 개인 날이 없었다. 우리들이 비에 흠뻑 젖어 곤궁함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모두들 생각했고, 우리들도 그렇게 여겼었다. 그런데 산에 오른 뒤로는 개이지 않은 날이 없어서 일출과 일몰을 유쾌하게 보았고 먼 곳까지 모두 다 보았으니 내 생애 말년의 큰 행운이라고 하겠다. 서로 술잔을 들어 자축하였다.<중략>


○ 9월 8일

좌수(*) 최응회씨가 우리에게 아침 식사를 대접하였다. 최군은 어려서부터 나와 친한 사이였다. 중풍으로 걷기가 어려웠지만 우리들을 위하여 엄뢰대(嚴瀨臺)까지 찾아왔다. 엄뢰대 아래에는 큰 내가 있었는데 이 내는 두류산에서 흘러 내려온 물이다. 이곳에 이르러 몇 리나 되는 맑은 못을 이루었는데, 물고기를 헤아릴 수 있을 정도로 맑고 배를 타고 다닐 수도 있을 정도로 깊었다. 시험삼아 대추를 던져보았더니 돌아다니던 물고기가 많이 모여들었다. 물결 위로 유유히 헤엄치는 비단 물고기도 많았다.

 

* 좌수 : 조선 시대, 지방의 행정 단위인 주, 부, 군, 현에 두었던 향청(鄕廳)의 우두머리


야외에 술자리를 마련하고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를 시작할 즈음, 강가에는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마을에는 안개가 갓 피어올라 또 하나의 빼어난 경관을 이루었다. 대체로 이번 유람 중 줄곧 맑다가 이제 비가 내리니, 천신과 산신령이 우리들에게 좋은 일을 많이 베풀어준 줄 알겠다.

일행 중 남쪽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이곳에서 떠나갔다. 동쪽으로 가는 사람은 나와 정덕옹과 박여승이었는데, 정덕옹은 상사(上舍) 정여계(鄭汝啓)의 집 에 남았고, 나와 박여승은 큰 나무가 있는 시냇가에 이르러서 말머리를 돌려 작별하였다. 이 시내는 바로 뇌계(㵢溪)의 하류(하림교)였다. 16일에 척서정(滌暑亭, 수동면 우명리 구라마을)에서 다시 만나 함께 유람한 이야기를 하기로 하였다. 척서정은 남계(灆溪)의 상류에 있다.

 

 

2. 感樹齋先生文集券之五 雜著 天嶺孝烈錄

 

愼孝先字百源。居池谷村。以善父母友兄弟。見稱於人。父母有疾。雖流離困頓中。憂悸之色。常在於面。藥餌之物。傍求必致。連遭父母喪。啜粥過哀。遂不起。其葬也。余佐幕本道。哀孝子之無勸。且憐其窮無以入土。發軍窆之。事聞㫌閭。<感樹齋先生文集券之五 雜著 天嶺孝烈錄> 출처 : 고전번역원

 

신효선의 자는 백원(百源) 지곡촌(池谷村)에 살았다. 부모님을 잘 봉양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어서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았다. 비록 떠돌며 가난한(困頓) 가운데에도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빛이 항상 얼굴에 있었다. 약이 되는 음식(藥餌之物)을 가까운데서 구하여 반드시 이루었다. 연달아 부모의 상을 당하여 죽을 마시며 애통함이 지나쳐 마침내 일어나지 못하였다. 그의 장례를 치를 때 내가 본도(경상도)의 좌막(비장, 보좌관)이 되어 효자를 위해 힘쓸 것이 없음을 슬퍼하였다. 또 그가 가난하여 땅에 매장할 수 없음을 가련히 여겨 군대를 징발하여 묘를 썼다. 이 일을 조정에 보고하자 정려를 내렸다. <감수재선생문집권지오 잡저 천령효열록>

 

注 佐幕(좌막) : 조선시대 감사·절도사 등 지방장관이 데리고 다니던 막료(幕僚). 막비(幕裨), 막객(幕客), 막빈(幕賓), 막중(幕中), 좌막(佐幕)

 

 

3. 1656년 정수민(鄭秀民)의 천령지(天嶺誌)

 

 

천령지 인물

 

愼孝先字百源。居昌人。居於郡南池谷。好讀書。事父母孝。友于兄弟。庭無間言。連遭內外艱。啜粥過哀。竟不起惜也。天之所以勸善人者。何在耶。理固難諶。尙欠(缺)旌表。尤可惜哉。○ 今上庚辰旌表門閭。출처 : 천령지

 

신효선(愼孝先)의 자는 백원(百源) 본관은 거창이다. 고을의 남쪽 지곡(池谷 유림면 모실마을)에 살았다. 글 읽기를 좋아했고, 부모를 효성으로 섬기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어 가정 안에 흠잡을 말이 없었다. 연이어 부모님 내외분의 초상을 당했는데, 죽을 먹고 지나치게 슬퍼하다가 마침내 일어나지 못했으니 애석하다. 하늘이 착한 사람을 권유하는 뜻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이치는 진실로 믿기 어렵다. 아직까지도 정려를 받지 못하니 더욱 안타깝다. <지금 임금(인조, 1623~1649)  경진(1640)년에 마을 입구에 정려를 내렸다.>

 

 

4. 정경운의 고대일록 제3권 / 임인(壬寅, 1602) / 겨울 12월

 

○ 12월 15일 임인(壬寅)
신효선(愼孝先)의 부음을 듣고 마음이 아팠다. 백원(百源)은 상에 거하여 매우 애통해하다가 중병이 들어 죽었으니, 가련하기 짝이 없다.

 

 

5 신효선 효자 정려(愼孝先孝子旌閭) [소재지 : 경상남도 함양군 유림면 손곡리 663-1]

 

신효선(愼孝先)의 자는 백원(百源) 호는 덕재(德齋)이며 효성이 매우 지극하였다. 부모님의 병환이 위중할 때 변을 맛보면서 부모를 간호하였다. 하늘에 자신이 부모를 대신하여 아프게 해달라고 기도하였다. 연달아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같은 날에 상을 치르는데 냇물이 불어나 건널 수 없자 통곡하니 물의 흐름이 끊겼다. 시묘살이로 몸이 약해져 본인이 임종할 때 부인이 오자 물리치고 벽을 보고 사망하였다고 전한다. 이에 1820년(순조 20)에 정려(?)가 내려졌다. 정려가 내려진 이후 후손 신병홍이 1925년 중건하고 정려기 및 중건기를 지었다.

 

참고문헌

문화유적분포지도함양군(함양군·경남대학교박물관, 2006)

함양군사(함양군사편찬위원회, 2012)

 

※ 신효선에게 정려를 내린 연도가 천령지에는 1640년(庚辰), 함양군사에는 1820년(庚辰)으로 상이하다. 감수재집 효열록에 '이 일을 조정에 보고하자 정려를 내렸다.'라는 기록으로 미루어 1640(庚辰)년일 가능성이 크지만 확인할 필요가 있다.

 

 

조목단

 

 

6. 조목단(棗木壇)

 

덕재 愼孝先(1557~1602)은 거창 신씨의 후손으로 1557(명종 12)에 손곡 마을에서 태어났다. 신효선은 어려서부터 재치 있고 민첩하며 어른을 공경하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중략> 아버님이 노환으로 병석에 누워 돌아가실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겨울에 마을을 지나가던 도인이 아버님의 병환에 풋대추가 약으로 좋다고 하였다. 며칠을 괴로워하다가 마을 앞 우물가에 있는 대추나무 아래로 갔다. 차디찬 겨울밤 추위를 무릅쓰고 밤새도록 울며 기도하였다. 날이 새고 아침이 되어서 대추나무를 쳐다보니 이 추운 겨울날 풋대추 수십 개가 주렁주렁 열려있었다. 효선의 기쁨은 헤아릴 수 없이 기뻤고 무릎이 닳도록 하느님께 감사의 절을 하고는 그것을 달여 들여서 병세가 호전되었다.

 

그 후 세월이 흘러 신효선도 세상을 떠났다. 마을에서 이 대추나무를 베어다가 다리를 놓았는데 그 이듬해 여름에 비가 많이 와서 이 다리가 떠내려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다른 나무는 다 떠내려갔는데 대추나무만은 떠내려가다가 마을 앞으로 거슬러 올라오는 기적을 낳았다. 마을 사람들은 이 광경을 보고 효선의 지극한 효성이 어려 있는 대추나무를 하늘이 알고 떠내려가는 것을 막아주었는데 우리가 천대할 수 없다 하여 대추나무가 섰던 본래의 자리에 단을 쌓고 세웠다. 지금도 그 마을에 가면 조목단(棗木壇)이라 하여 신효자 대추나무 단이 있다출처 : 함양 문화원

 

 

注 거창신씨(居昌慎氏)는 중국의 천수(감숙성)에서 시작된 성씨이다. 거창 신씨의 시조 신수(慎修 또는 慎脩)는 고려 문종 때 송나라 사신으로 와서 고려에 정착하였다. 그는 문과에 급제하여 수사도(守司徒)와 좌복야(左僕射)와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역임하였으며, 1101년 사망하자 고려 숙종이 공헌(恭獻)의 시호를 내렸다. 6세손 신집평(慎執平)이 강화도 천도 기간 중 신호위대장군(神虎衛大將軍)으로 몽골에 항전하였고, 1258(고종 45)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화주지역(지금의 함경도)의 항몽전쟁을 지휘하던 중 조휘(趙暉)탁청(卓靑)의 반란으로 순직하였다. 그의 아들 신성(慎成)은 군기감사(軍器監司)를 역임하였으며 아버지가 사망하자 거창에 내려가 살면서 거창 신씨의 시원이 되었다. 참판공파(參判公派), 서령공파(署令公派), 양간공파(襄簡公派)가 있다. 출처 :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