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점필재길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과 기행시를 좇아서(170503~06)[3박4일]

도솔산인 2017. 5. 16. 21:56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과 기행시를 좇아서(3박4일)

 

 

         [1472년 점필재 김종직선생 유루류 일정]

 

 

    : 1472년(성종) 08월 14~ 8월 18일(4박 5)(陰曆)

★ 날   씨  : 맑음,흐림,비,안개, 맑음 

★ 동    행 : 10(유호인.조위,임대동.한인효,승려 해공,법종,아전 옥종,용상,노비)

★ 일    정 : 8/14 : 함양군 관아 - 엄천 - 화암 - 지장사 - 환희대 - 선열암 - 신열암 - 고열암(1박)

                 8/15 : 고열암 - 쑥밭재 - 청이당 - 영랑재 - 해유령 - 중봉 - 마암 - 천왕봉 - 성모사(2박)

                 8/16 : 성모사 - 통천문 - 향적사(3박)

                 8/17 : 향적사 - 통천문 - 천왕봉 - 통천문 - 중산(帝釋峰) - 沮여汝原(세석?) ​- 창불대 - 영신사(4박)

                 8/18 : 영신사 - 영신봉 - 한신계곡 - 백무동 - 실택리 - 등구재 - 함양 관아

 

◆ 점필재 지리산력: 1472년 42세, 고향땅 두류산이 처음이라 습함 적은 중추가절에 천왕봉에서 보름달을 보고자 함.

 

 

 

 

         [2017년 점필재 김종직선생 복기산행 일정]

 

 

          ▣ 일   시 : 20170503~ 06(34)

          ▣ 날   씨 : 맑음, 오전에는 맑고 오후에는 흐리고 밤에는 비, 안개비, 맑음

          ▣ 동   행 : 3(미산선생님, 송연목씨)

          ▣ 코   스 : 5/3 : 동강마을-적조암-지장사터-환희대-선열암-신열암-의논대-고열암-독녀암-사립재-새봉(1)

                        5/4 : 새봉 - 독바위 - 청이당 - 1618- 영랑대(2)

                        5/5 : 영랑대 - 하봉(소년대) - 중봉 - 상봉 - 향적사지 - 촛대봉 - 세석 - 음양수 - 미산대(3)

                        5/6 : 미산대 - 창불대 - 영신암지 - 한신능선 - 백무동

         ▣ 공장비 : 젤트, 타프(송연목씨), 취사장비(), 타프, 은박지(미산선생님)

         ▣ 식   량 : 800g, 육류 1kg, 김치. 밑반찬, 술 자기량

         ▣ 무게 : 송연목(22kg), 도솔(21kg), 미산님(18kg)

 

​​         ◆ 연소재 지리산력 : 200박 이상은 되지 않을까. 더 늦기 전에 미완의 점필재 길을 완성하고자,....

 

 

2017년 3박 4일간 구롱길을 복원하기 전 3박4일간 유두류록 길을 답사한 기록입니다. 

 

# 1. 프롤로그

 

 

우리는 모두 희망하는 일을 이루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우리 안에 있는 영혼이 인도하는 길은 걷지 않으려 한다.

- 톨스토이의 <살아가는 날들을 위한 공부 중에서>-

 

산행의 열정이 조금씩 식어가도 새 봄이 돌아오면 여지없이 마른 가지에 수액을 채워 올리는 나무들처럼 아쉬움이 남는 일들에 대한 열망은 여전히 꺼지지 않는 불씨로 남아 내면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약 10년이란 시간 동안 마음 속에 담고 있었던 점필재의 길, 그 미완의 길에 대한 아쉬움 또한 내게는 그러한 일들 중의 하나였다. 한편으로는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이 나이에도 반드시 걸어보야겠다는 소망을 간직하게 해 준 지리산의 길이 남아있다는 것이..... <열정이 남아있는 한 청춘!>이라는 사무엘 울만( Samuel Ulman) 詩句가 아니더라도 아직은 배낭을 멜 힘이 남아 있고 걷고 싶은 산길에 대한 열정이 있으니 지리산을 걷는 날까지는 청춘이라고 믿어보자.  

 

나는 일찍이 산을 알았으나 지리산을 본격적으로 다니기 시작한 것은 30대 중반이었고, 유두류록을 통해 점필재를 안 것은 이로부터도 10년이 지나서이다. 지리99  탐구 팀의 열정적인 선답과 촘촘한 보고서 덕분에 점필재의 길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꾸준히 동북부의 길들을 훑고 다녔지만 온전한 루트를 한 번에 밟아보지 못했다. 그러던 차에 점필재의 기행시를 찾아 읽게 되었는데, 그것은 관료로서의 점필재가 아닌, 사림의 종조 문인으로서의 또 다른 면모를 엿보는 것 같아 큰 감동을 받았고, 그 구체적인 루트에 대해 더욱 더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점필재는 4박 5일의 두류산행을 하면서 느낌이 있는 곳마다 詩를 지어 총 11首의 산행시를 남겼으니, 산길을 걸으며 시를 지었던 지점마다 멈추어 서서 話者의 마음을 느끼고 음미해 보는 재미도 적지 않을 듯하다.

그리하여 마침내, 핏빛 진달래 피고 두견새 슬피 우는 5월에 옛사람과 한마음이 되어, 좋은 산친들과 한걸음이 되어, 3박 4일 아름다운 지리 산천의 한 시절을 향유하게 되었으니,  이제, 점필재 선생이 42세가 되던 濕함이 사라진 가을날에 처음 걸은 그 길을, 545년이 지난 현재의 나는 만물이 생동하는 봄날에 그 길을 완성해 보고자 한다.  

 

 

 

꽃봉산

 

화암에 대한 판단은 보류합니다.

유림면 유평리에 화암이라는 지명이 있습니다.

 

 

# 2. 동강마을을 출발하여 새봉에서 자다. <170503 : 1일차, 날씨 쾌청>

 

 

석탄일이기도 한 출발하는 첫날은 더 할 나위없이 쾌청하여 모든 미세 먼지가 사라진 것 같으니 신록의 수목들 사이로 빛나는 오색의 연등은 더욱 더 그 빛을 발하였다. 한껏 여유로운 걸음으로 동강을 따라 걷자니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華山 12曲의 새로움들을 알아가는 탐구자들의 희열과 즐거운 모습들이 강물따라 흘러간다. 사람이 살아가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으나, 그렇게 어느 한 곳에 매진할 수 있고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순수함을 간직할 수만 있다면 세파의 찌든 때 정도는 얼마든지 씻어내며 살아갈 수 있는 일 아니겠는가.  어쩌면 나의 이 산행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이다.  동강 다리를 건너면서 꽃봉산을 바라보니 그 위로 비스듬히 이어진 시멘트 포장도로가 눈에 들어왔다저 길이 구시락재에서 운서마을로 이어지는 길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동강을 따라 운서마을로 가는 길을 걸어 들어갔다.

강물 속으로 뿌연 물빛 속에 팔뚝만한 물고기가 눈에 들어왔다. 저것이 전설의 가사어인지 감수재의 산행기에 나오는 錦麟魚(금린어)인지 모르겠으나 얼핏 금린어라 불리는 황쏘가리(錦鱗魚:비늘鱗)와 닮아 보인다. 감수재는 물고기에게 왜 기린자를 썼는지 궁금했는데 지난 겨울 생초 어탕집 수조에서 자세히 본 쏘가리는 비늘이 없고 맨살에 기린의 문양을 하고 있었으니, 감수재가 사물을 보는 예리함이 새삼 놀랍다. 함께 길을 걷는 미산님께 물고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니 "물이 썩었네." 라는 동문서답이 되돌아왔다. 서로가 다른 생각을 하며 강물을 보고 있으니 그럴 수도 있는 일이지. 直江의 제방은 논과 냇물를 갈라 시멘트 포장도로로 곧게 뻗어 자연 제방의 입을 봉해 버렸고 만약, 동강에 댐을 만든다면 이 동강 마을도 물에 잠겨 버리고 말 것이니, 캄캄한 생각이 들었다.

 

 

 

 

 

운서마을을 지나며 미산님이 '어데 막걸리 한 잔 먹었으면 좋겠다.'고 하시기에 혹시 쉼터가 있을까 둘러보지만 산골마을의 구불구불한 포장도로 뿐인데, 마침 <산지골펜션>이라는 팻말이 눈에 들어왔다. 산지골님은 4년 전 뵌 적이 있고 연배도 비슷한데다가 최근 화산 12곡을 통해 동강에 대한 유쾌한 글도 접한 덕에 생소하지 않았다. 물이라도 한 잔 얻어 마실 요량으로 안으로 불쑥 들어서니 마침 마당에서 꽃에 물을 주고 계시다가 이른 아침의 불청객을 반갑게 맞아주셨다귀농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대봉 곶감을 내오시고, 인사를 하고 출발을 하려는데 곶감 한 상자를 선듯 내주신다. 염치없는 인간이 되었지만, <그 친절한 환대를 잊지 않겠습니다.^^>

 

님 댁을 지나치는데 말끔하게 새로 지은 건물에 데크 공사를 하고 있어 혹 밖에 계시면 인사를 드릴까했지만,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대로 지나쳐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올라갔다. 초파일이라 적조암에 오르는 차량이 많아서 미산 선생님은 히치를 할 수 있을까 기대하셨지만 수포로 돌아갔고, 한쟁이골 입구에서 상대날등으로 오르는 길을 지나쳐 적조암을 향했다. 능선 길의 상태가 어떤지는 잘 모르겠으나 상식적으로 대형 배낭을 메고 오르는 것만 해도 불편할 것 같은데, 그 옛날 점필재 일행이 말을 타고 능선 길로 올라간다는 것은 나뭇가지에 걸려 낙마를 했을 수도 있을 것이기에 능선 길보다는 적조암 앞을 통과하는 길을 걸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함께 걷는 또 다른 산친 송연목씨는 전 치밭목 대피소 민대장님의 거창 某산악회 직속 후배이다. 치밭목 대피소에 4년간 머무르기도 한 전천후 트래커인데 사업차 외국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지만 국내에 들어올 때마다 여전히 지리산을 찾으며 근자에 함께 산행을 많이 해왔다. 이번 점필재 길의 완주에도 마침 시간이 맞아 동참하게 되었으니 산정은 더 깊어지리라 싶다. 앞서 걷던  그 연목씨가 적조암 아래 <해동검도장 펜션> 마당에 세워진 노란색의 남근목과 여근목을 보고는 주춤거리더니 폰을 꺼내 사진에 담았다. 모양새가 얼마나 노골적인지 민망하기 짝이 없었지만 자연의 섭리란 본디 음과 양의 조화로 이루어져 있으니 그리 이상할 일도 아닐 런지 모르지. 출산율이 저조한 요즘 세태에 다산을 권장하고 기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동족상잔의 비극에서 희생된 장정들의 넋을 위로하는 것인지, 만든 이의 의도는 모르겠으나 보는 이에 따라 생각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적조암

 

 

원초적인 풍경을 벗어나자마자 적조암으로 발길이 이어진다. 초파일을 맞은 적조암 경내는 형형색색의 연등속에 많은 불자들로 분주해 보였다. 대형 배낭을 지고 들어선 우리들의 모양새가 자연스럽지는 못했을 텐데 툇마루에 배낭을 내려놓자마자 보살님들이 공양을 권하시기에 못 이기는 체하고 넉살 좋게 비빔밥과 떡, 과일을 먹었고  커피까지 마셨으니 정유년 사월 초파일, 적조암에서 부처님의 공덕을 입은 것이나 다름없어라. 벌여 놓은 잔치에 맛있게 먹고 봉축을 기원하였으니 축하객으로서의 의무는 다한 셈이라 여겨도 무방할는지!      

 

배부르게 먹고 적조암을 막 나서는데 어떤 남자 분이 다급하게 쫓아 나와 "등산로 외에는 절대 들어가면 안 됩니다."라고 외쳐서, "염려하지 마십시오."라고 말씀을 드리고 계곡을 따라 오른쪽 등로로 올라섰다. <꼭대>님의 '선인들의 옛길은 인간과 자연의 타협이다'라는 말씀처럼 점필재의 길은 부드럽고 유순하다. 나는 점필재의 노래에 따라 발을 맞추고 발걸음의 장단에 맞춰 점필재는 노래를 불렀다. 이내 그의 가사는 열두 폭의 그림이 되어 원시림과 바위 병풍을 만들었고 우리는 그 병풍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노장동 돌배나무

 

 

선답자들이 발표한 헛 지장사지

 

♣ 지장암지에 대하여


지난 산행에서 한 번 짚었던 내용으로 유두류록의 구두점에  오류가 보이는 부분이다. 다시 읽어보니 점필재 일행이 지장사에 들른 것이 아니고 지장사 갈림길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짚신으로 갈아 신은 것이다.  또한 선답자(지리99)들이 지장암지라고 발표한 곳은 물이 없기 때문에 암자의 입지로 설득력이 떨어진다.

 

亦令導行至地藏寺路岐舍馬著芒鞋策杖而登林壑幽窅已覺勝絶一里許有巖曰歡喜臺


또한 길을 인도하게 하여 지장사 갈림길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버리고) 짚신을 신고 지팡이를 짚고 오르는데 숲과 구렁이 깊고 그윽하여 이미 경치가 매우 뛰어남을 깨닫게 되었다. 일리를 나아가니 바위가 있는데 환희대라 하였다.


나는 지장사가 가까운 계곡에 물이 흐르고 석축이 있는 곳이라고 추정하며, 지장암에서 하룻밤 묵으며 시를 남긴 노진의 시를 그 근거로 제시한다. 그래서 우리는 일부러 물이 흐르는 계곡가 석축이 있는 곳에서 점심을 먹었다. 옥계(玉溪) 노진(盧禛)[1518~1578]의 시는 다음과 같다.

 

 

夜宿地藏庵

 
                      노진(盧禛)[1518~1578]

山中無俗物 : 산중이라 세속의 잡된 일 없어
煮茗聊自飮 : 차 끓여 심심찮게 따라 마시며
坐愛佛燈明 : 앉아서 환한 불등 고이 보다가
深宵始成寢 : 깊은 밤 가까스로 잠이 들었지
還有石泉響 : 헌데 또 바위틈의 샘물 소리가
冷然驚曉枕 : 돌연 새벽 단꿈을 놀래 깨우네

                                       <玉溪集>

 

점필재의 유두류록에 '지장사 갈림길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짚신을 신고 지팡이를 짚고 올라갔다.'라는 내용을 근거하여 점필재의 지장사 경유설에 동의하지 않는다. 지장암의 위치는 노진의 시에서 '바위틈의 샘물소리가 새벽 단꿈을 깨우네.'의 구절로 미루어 계곡 가까이에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지리동부대학 점필재학과 졸업산행(170810~13) :  물소리 들리는 곳의 석축

 

 

 

 

 

환희대

 

 

노장동 돌배나무에서 좌측으로 틀어서 산죽과 너덜겅을 건너 미역 덩굴을 뚫고 금낭화 군락을 지나 상대날등 아래 지장사에 닿았다. 예전에는 박쥐굴에서 능선으로 올라 상대날등에서 내려왔던 가물가물한 기억이 다 소진이 되었고, 오래된 아날로그의 기억으로는 도저히 찾기가 어려워 시간을 지체했점필재는 이 곳 지장사 갈림길까지[지장사에 들른 것이 아님] 말을 타고 올랐으며, 이 길 이후에는 가팔라서 짚신을 신고 지팡이를 짚으며 길을 올랐다고 한다. 본격적으로  지장사에서 돌아 나와 환희대에 올라 잠시 휴식을 한 후, 선열암에 들러 조용히 점필재의 선열암시를 암송했다.  비가 내리던 어느 해 여름날 이곳 선열암에서 '구름이 뿌리내린 바위'를 확인한 적이 있으니 점필재가 이곳을 찾았던 날의 일기도 흐린 날씨였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선열암

 

 

 
    제1수 : 先涅庵[선열암]


   문은 등라 덩굴에 가리고 구름은 반쯤 빗장을 질렀는데 / 구름이 뿌리내린 우뚝 솟은 바위의 촉촉수 소리는 맑고도 깨끗하구나
   ​하안거를 마친 고승은 석장을 날리며 돌아가고 / 다만 숲은 한가로운데 은거하는 선비들이 놀라는구나. 
 

 

 

* 雲根矗矗冷冷(운근촉촉수영령) : 구름이 뿌리내린 우뚝 솟은 바위의 촉촉수 소리는 맑고도 깨끗하구나.

* 矗矗水 : 톡톡 떨어지는 물방울. * 冷冷(영령) :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맑고도 깨끗하구나.

 

 

선영암의 矗矗水와 동심원

 

【선열암의 우뚝 솟은 바위에서 톡톡(矗矗 : 촉촉) 떨어지는 矗矗水(촉촉수)를 확인하기 위함이다. 촉촉수 다음에 이어지는 시어 '冷冷(냉냉)'冷冷(영령)으로 읽어야하고, "선열암 암벽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맑고도 깨끗하다.'"라고 읽혀지니 矗矗(촉촉)은 우뚝 솟은 바위의 형태인 의태어와 물방울이 떨어지는 청각적인 의성어가 결합된 절묘한 시어라고 생각한다.(171009)】

 

 

 

독녀암(노장대) 함양독바위는 근거가 없는 이름이다.

 

 

그동안 얼마나 여러 번 이곳을 찾았던가. 고운 최치원선생(857~?)과 김종직선생(1431~1492)이 500년 넘는 차이를 두고 함양 학사루에서 만났듯 시공을 초월한 한시 기행은 글의 에너지가 500년이 넘게 흐른 뒤에도 내 마음과 몸속에 살아 꿈틀거렸다. 단계석 고운 벼루에 정화수를 붓고 지그시 눈을 감고 둔탁한 등산화로 먹을 갈아 붓이 머금은 먹물을 화선지에 완전히 토해내듯, 발끝에 힘이 다할 때까지 점필재는 숙고열암을 노래 부르고 나는 배낭을 메고 춤을 췄다. 마음속의 때를 완전히 씻고 선생의 유두류기행시를 음미하며 나는 오늘 먹이 벼루를 뚫을 때까지 두 발로 점필재 길을 걸으리라.

 

獨女巖에 이르러 배낭을 내려놓고서도 한참을 창 꽂힌 짐승이 되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함양독바위는 왜 獨女巖독녀암이라고 하였을까. 유두류록에는 한 부인이 이 바위 사이에 돌을 쌓아 거처를 만들어 살면서 도를 닦아 하늘로 날아올라 독녀암이라 부른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오늘 아침 해괴한 풍경을 본 것이 禍根인지 독녀암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異견들이 솟아난다. 환희대를 지나면 두개의 석문이 있는데, 독녀암 석문을 지나면 안락문 아니 悅樂의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니음양의 이치에 따라 선인들은 이 石門을 性門으로 보았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혹 독녀암과 안락문은 여성의 생식기를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상상의 나래를 펴며 걷는 산길을 나와 10년 넘게 산행을 하신 <미산>선생님조차 이해하지 못한다. 독바위 아래에서 배낭을 지킨다는 핑계를 대며 신열암과 고열암, 의논대에 다녀오는 것을 생략하고 따스한 햇볕 아래에서 잠시 오수를 즐기셨으니, 어떤 일이든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의 입장에서 이해를 구하기는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선인들의 유산기 또한 매 한가지라 더더욱 이해하기 어렵다. 쉽게 이해되는 곳도 있으나 의논대에 서서 유두류록의 향로봉과 미타봉을 끝내 풀지 못했으니 향로봉은 향로처럼 생긴 오뚝이 바위가 있는 상내봉 삼거리이고, 彌陀峯은 阿彌陀佛의 준말로 부처라는 뜻으로 와불산이고, 그럼 의논대 2句에 나오는 소림선방은 선녀굴이 아닌가 다시 생각하다가 내 능력이 거기까지라고 판단하고... 1472년 8월 14일 가을바람이 부는 상상 속으로 들어가 금방 의논대의 정서에 몰입하였다.

 

 

 

의논대에서 바라본 미타봉(와불산)

 

 

 

독녀암(함양독바위)

 

 

      
     제2수:議論臺[의논대]
 
   호로중 두 사람이 장삼을 어깨에 반쯤 걸치고 / 바위 사이 한 곳을 소림선방이라고 가리키네
   석양에 삼반석(의논대) 위에 홀로 서 있으니 /​ 소매 가득 가을 바람이 들어와 나도 신선이 되려하네.


 

雜생각에 사로잡힌 채, 서쪽 능선을 걸어 고열암에 도착했다. 10년 전 지리동북부 처음 산행에서 지장사에 들렀다가 상대날등으로 올라와 고열암에 처음 찾았을 때의 점필재의 숙고열암 시는 너무도 강렬했다. 점필재는 이날 처음으로 험한 20리의 길을 걷고 너무 困하여 일찍 잠들었다가 한밤중에 깨어났는데, 보름을 하루 앞둔 달빛이 환하게 봉우리를 삼킬듯 빛났고 거친 솔바람 소리에 雲霧가 용틀임하듯 솟아나는 풍경을 보며 감동을 주체하지 못해 "숙고열암"이라는 시를 남겼다. 신진 사림으로 훈구파와의 갈등 속에서 정쟁을 피해 함양군수로 내려왔고, 몸이 병약해있는 상태에서 서책이나 가까이 하던 이가 그리 길게 걸었으니 몸은 얼마나 피곤했겠으며, 한밤중 산에서 맞이한 달빛 아래 빛나는 준봉들과 운무의 춤사위에 얼마나 큰 감동을 받았겠는가.

 

기회가 된다면 나도 소나무 물결 들끓는 음력 814일 달빛 아래 고열암에서 의논대와 솔봉능선에서 들려오는 솔바람 소리를 듣고 싶다. 그날 상황으로 보아 낮에는 구름이 있었지만 시계는 좋아서 의논대에서 마천에서 농부들이 가을걷이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 어두워지면서 바람이 불어 구름을 걷히고 보름달이 떠올라, 話者가 보름 달빛이 솔가지 위에서 들끓는 거친 바람소리를 들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점필재는 다음날 아침 고열암 스님에게 천황봉에 오르라고 권유하는 [贈古涅僧(고열암 스님에게 주다)] 한 수를 읊고 고열암을 출발하여 약 9km나 되는 천왕봉을 향한다.

 

 

 

고열암 암굴


 

 
     제3수 : 宿古涅庵[고열암에서 자다.]


   지친 몸 지탱하려고 / 잠시 포단 빌려 잠을 자는데
   ​소나무 물결 달빛 아래 들끓으니 / 곡선경에 노니는 듯 착각하였네
​   뜬 구름은 또한 무슨 뜻인가 /한밤중에 산 골짜기 닫혀있구나
​   오직 올곧은 마음을 가진다면 / 혹시 산신령의 살핌을 얻으려나

 

 

 
     제4수:贈古涅僧[고열암 중에게 주다.]

     명예를 구하고 이익을 따르는 것은 둘 다 어지러우니 / 지금은 승려와 속인을 구분하기 어렵구나
     모름지기 두류산 최고봉에 올라보게나 / 세간의 흙먼지는 그대를 배부르게 하지 못한다네.
 

 

 

 

 

 

독녀암(함양독바위)

 

 

안락문의 버튼

 

 

안락문

 

 

이제 우리도, 독녀암 근처에 있는 점필재의 발자취를 돌아본 후 안락문을 지나 점필재의 길을 재촉했다. 안락문은 유두류록에서 언급한 것이 없으니 점필재는 고열암 우측으로 곧장 올라갔는지는 모르겠다. <송연목>씨가 안락문 오른쪽에 있는 주먹만 한 바위 돌기를 보고 '안락문을 여닫는 버튼이 있다.'고 가리키며 버튼을 눌러도 문이 닫히지 않자 내가 '버튼이 고장 난 것 같다.'고 弄을 하였다. 상내봉 삼거리 조금 못미처 香爐 모양의 오뚝이 바위에 올라 사방을 내려다보았다.

 

 

 

 

오뚝이 바위

 

 

 

 

 

비록 이곳에서는 상봉이 보이지는 않지만 성불능선을 따라 영랑재에 올라가면 비로소 보이는 하봉과 중봉, 천왕봉이 거대한 三佛帝釋이고 천왕봉을 法王이라고 하였을 때 이 오뚝이 바위는 향로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닐까. 향로는 유교와 불교 무속에서도 공통적으로 쓰는 제기인데 오늘따라 이 오뚝이 바위는 내 눈에 향로로 보였고, 근세에 와서는 빨치산들의 훌륭한 망바위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천왕봉의 성모상과 성모사, 제석봉의 제석대와 향적대, 영신봉의 영신대, 노고단, 종석대, 만복대 등 토속 신앙에서 지리산은 인간과 신이 접신하는 장소였고 유·불·선과 토속신앙이 공존하는 세계였다. 그래서 선인들은 산을 심지어 인간 세계의 군신 관계에 비유하였고  또한 불국토의 극락세계로 이해하였을 것이다.

70년이 가까운데도 참호의 흔적이 지리 곳곳에 아직도 남아 있으니, 살기 위해 파 놓은 흙구덩이에서 주검이 되어 사라진 생명들이 수두룩했을 것이다. 삶과 죽음의 차이는 다만 아무것도 아니고 자연의 섭리가 생사를 넘나들며 윤회하는 것이며, 산에 대한 열정도 기운이 쇠하면 사라지듯 영원한 것이 없으니 마음이 악착같이 검소하고 자린고비처럼 인색해서 무엇을 하겠는가. 때 마침 <미산>선생님이 명퇴금을 사모님 몰래 꼬불쳐 놓고 곶감 빼먹듯이 빼서 '피엘라밴 바지를 샀다,'고 자랑하시더라. 이 세상에 내 것은 없으니 남에게 신세지면 갚고 폐를 끼치지 않고 살면 그뿐이다.

 

체력이 어느 정도 소진이 되었으나 그렇다고 '산에 들어 편안함을 구하고 체력을 아껴둔들 무엇하랴. 아끼는 것보다 차라리 쓰다 죽는 것이 낫다.'고 외치고 곰샘에서 물을 5리터나 취수하여 새봉으로 올라갔다. 젤트를 설치하니 해는 뉘엿뉘엿 지고 어둠이 내리더니 석양의 지는 해와 임무교대한 상현달이 떠오르고 뭇별들이 나뭇가지 사이로 초롱초롱한 눈망울처럼  빛났다. 젊은 산친들과 산을 다니다 보니 밥을 할 기회가 적었는데 이번에는 아홉 끼 당번을 자청했다. 산에 들어 배부름을 구하거나 크게 취하지 말라. 평소 먹지 않는 특별한 음식을 준비하여 위장을 놀라게 하거나 목에 때를 벗겨 식도에 광낼 필요는 없다. 필요한 칼로리만 섭취하면 그만이다.

 

 

 

 

 

 

 

 

 

지장사를 놓치지 않은 것은 순전히 <미산>선생님의 오룩스 맵 덕분이다. 분명히 능선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찾아내려왔을 것인데 시간과 체력을 아낄 수 있었다. 산에서의 잠자리는 대단히 중요하다. 역학을 하시는 스님이 내가 '터를 볼 줄 알고 땅에 문리가 트였다.'고 하는데 '나는 잘 모르겠다.'고 하니 ‘문리가 트인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아는 것이다.라고 하며 명리학 공부를 권하여 손사래를 치고 웃어넘긴 일이 있다. 분명한 것은 눈 속에서 러셀을 잘하는 것이 아니라 눈 속에 길이 보이기 때문에 제 길을 찾아 가는 재주가 있어 헛걸음으로 체력을 낭비하지 않는다.

사립재를 지나며 이곳이 초령인지 새봉이 초령인지 아무튼 감수재와 점필재가 138년의 차이를 두고 이곳에서 스쳐 지나갔다. 박여량이 두류암 갈림 길을 지나 이곳을 향했으니 <진양지>에 상류암을 기술하며 조개골은 써리봉(서흘산)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흐르고, 감수재는서쪽에 높은 대(독바위)가 보인다고 하였으니 조개골과 써리봉이 보이고 사철 물이 흐르는 <독바위양지>가 유력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지장사지 또한 점필재길의 최단거리에서 다소 벗어나 있으니, 돌배나무 부근 무속의 흔적이 있는 '금낭굴과 환희대 갈림길이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을까.'하는 의문이 싹텄다. 점필재는 유두류록에서 그 내용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그래서 그 또한 길을 인도하게 하여 지장사(地藏寺)에 이르니 갈림길이 나왔다. 여기서부터는 말[馬]에서 내려 짚신을 신고 지팡이를 짚고 오르는데,(?)또한 길을 인도하게 하여 지장사 갈림길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버리고) 짚신을 신고 지팡이를 짚고 오르는데 】 숲과 구렁이 깊고 그윽하여 벌써 경치가 뛰어남을 깨닫게 되었다. 이로부터(지장사) 1리쯤 가서 환희대(歡喜臺)란 바위가 있는데....[김종직선생의 유두류록에서 발췌]

 

 

이렇게, 점필재의 첫날은 흐림과 맑음이 교차되었다가 한밤중에는 환한 달빛이 사방에서 빛났고, 고열암에서 지친 몸을 쉰 것으로 여정이 끝난다. 나는 상현달이 일찍 떠 오른 초팔일에, 온종일 명쾌한 날씨와 조망 속에 머무른 하루였으며 고열암을 거쳐, 새봉의 안락한 젤트 안에서 이런 저런 끝없이 피어나는 지리에 대한 생각에 골몰하다가 문득, 잠이 들었다. 

 

 

 

 

# 3. 甕巖 지나 영랑대의 달빛 <170504 : 2일차, 맑고 흐리다가 한밤중엔 雨>

 


​1472년, 신묘년 仲秋가절 한가위 날, 점필재의 이틀째 여정은 고열암에서 동부 능선 주요 지점을 거쳐 천왕까지[약9km] 오르고 성모사에 두 번째 잠을 자는 것으로 되어있다. 그가 더 병약해지기 전에, 가을날을 택하여 첫 두류산 산행을 감행한 가장 큰 연유 중의 하나가 천하가 내려다보이는 천왕봉에서 한가위 보름달을 보겠다는 열망을 품은 것으로 보아, 길고 험한 길을 무리해서라도 천왕까지 오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재의 나는 가장 편안한 마음의 쉼터, 영랑대에서의 2박을 예정해 두고 있다. 박지는 다르나 그 길은 점필재의 루트를 그대로 따라가는 여정이 될 것이다.

 

 

 

 

 

 

 

 

 

 새봉 너럭바위에서의 조망

 

 

새봉의 아침은 안온했고, 젤트의 문을 여니 아침 해가 막 떠오르고 있었다. 새봉은 일출 포인트가 없어 차를 한 잔 마시고 너럭바위로 조망 겸 산책을 나갔다. 이곳에서 차를 끓여 마셨으면 좋았을 텐데 생각이 미치지 못했으니 다음에 오게 되면 잊지 않도록 기억해 두어야겠다. 너럭바위의 조망은 생각보다 훌륭했다. 로는 동부능선과 두류능선이 흐르고 정면에는 중봉과 써리봉능선, 로는 황금능선이 구곡산까지 한 눈에 들어왔다. 써리봉과 중봉에서 발원한 조개골이 큰조개골과 작은 조개골, 청이당 계곡, 모든 실 계곡의 물을 사양하지 않고 받아들여 동으로 굽이쳐 흐른다.

 

 

 

 

 

 

 

 

 

 

옹암에서 바라본 새봉

 

 

 

 

 

옹암(진주독바위)

 

 

새봉에서 아침을 보내고 길을 나선지 얼마 되지 않아 ''하고 소리가 나더니 배낭이 오른쪽으로 기울었다. 오른쪽 배낭 어께 벨트가 끊어진 것이다. 조여진 허리벨트 덕분에 겨우 등에 붙여오긴 하였으나 허리벨트를 풀자 중량이 오른쪽으로 쏠려 몸이 흔들렸다. 예전에는 구두를 꿰메는 바늘과 실을 가지고 다녀 덕유산에서 배낭끈을 꿰매 본 일이 있으나 요즘은 배낭끈이 끊어지는 일이 거의 없으니 망연자실 산행을 포기해야 할 상황에 이른 것이다. 배낭을 내려놓고 확인하니 쇠가 부식되어 떨어져 나갔고 수습이 어려워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미산>선생님의 4mm 잡 끈을 주셔서 배낭을 겨우 응급조치를 하였으나 산행 내내 불안을 감출 수 없었다. 甕巖(진주독바위)에서 긴 휴식을 하며 배낭도 쉬고 나도 쉬었지만 왼쪽 어깨벨트 또한 쇠가 삭아서 마음을 놓을 수 없었는데 집에 도착해서 왼쪽마저 끊어졌으니 지금 생각해도 다행이 아닐 수 없다. '공자님께서 주역을 여러 번 읽어 책을 묶은 끈이 세 번이나 끊어졌다.'는 고사[위편삼절(韋編三絶)]가 내게는 배낭 어깨 끈이 세 번 끊어졌으니 얼마나 험하게 산행을 하고 다녔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을 일이다.

 

 

 

 

 

김종직선생이 쉬어간 청이당 앞 溪石

 

 

 

청이당터 석축

 

 

시간을 일부러 지체하여 오후 4시가 다 되어 청이당에 도착하였고 청이당 계류 반석에 배낭을 공손히 모셔놓고 이곳이 항상 점필재 일행이 쉬어간 곳이 분명하다고 생각하던 차에 건너편 아래 계곡 가에 인공 석축의 흔적을 발견했다. <송연목>씨에게 '인공 석축이 분명히 맞지요?'라고 묻고 '석축이 맞습니다.'라는 대답이 돌아오기도 전에 가까이 가보니 석축의 바위 겉면에 검버섯이 피어 계곡의 바위와 구분하기가 어려웠고 개다래 덩굴에 가려진 채 500년 넘는 세월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었다청이당에서 하봉 옛길로 가는 방향으로 계류 가운데 넓은 반석에서 아래쪽으로 건너편을 보면 석축의 흔적이 확연하다. 석축 위로는 지대가 다소 높은데 아마 이곳에 판자로 지은 청이당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반석 위에서 쉬고 간 적이 수십 번도 넘을 텐데 오늘에야 비로소 눈에 띄다니 점필재 선생의 기행시를 읊으며 산행을 한 것이 허사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일행 두 분도 함께 기뻐하였고 참으로 의미 있는 '우연의 발견'이라고 생각한다.

 

 

 

 

 

 

'봉의선기'를 인용한 구간

 

 

청이당에서 하봉 옛길로 올라가면서 마암에 잠시 들렀는데 이곳은 점필재와 감수재의 기록과는 상이한 곳으로 기록에 근거한다면 중봉샘이 마암이 아닌가 생각한다. 능선에 올라서 1618봉에 오르니 날씨는 흐려지고 있었고 비가 오려고 하는지 습도 높은 바람이 불어왔다. 점필재의 유두류록에도 둘째 날 이 지점에 이르러 구름이 갓을 스치고 풀과 나무가 비가 오지 않는데도 젖어있었다고 기록되어있으니 높은 곳까지 올라왔기에 흔히 일어나는 현상일 수도 있겠으나, 영랑대에 올라 중봉과 상봉을 바라보니 온통 안개구름에 휘감겨 있어 오늘은 비의 전조 증상임이 역력하였다.

 

 

 

 

영랑재

 

 

 

 

 

 

 

 

 

 

 

젤트를 두 분에게 부탁하고 하봉 쪽 전망 바위에 올라 영랑대의 사진을 담았다.  의미 있는 산행이니 일행에게는 미안하지만 양해를 구하고 영랑대 위에 서 계신 사진을 폰에 담았다. 내가 이곳에 온 것은 횟수로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지나간 것까지 모두 합치면 100회는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사계절 우천불문하고 이곳만을 찾았으니 사람들은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는데 이곳에 오면 마음에 평화를 찾고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다.

 점필재 선생은 이곳을 지날 때에 일기가 좋지 않아 시를 남기지 않은 것 같고 고열암에서 이곳까지 가까운 거리가 아니니 많이 지쳐있었을 것이다 이곳을 점필재는 영랑재라고 기록하고 있다. 의 한자가 중국에서 사용하는 한자가 아니고 우리나라에서 만든 國字로 지명에서 사용되었다. 사천 와룡산 민재봉에서 이 한자를 쓰고 있고 금강산 유점사에서는 '절점'으로 쓰였으며 내가 사용하고 있는 젤트의 이름도 永郞齋라고 하는데 이곳의 이름을 차용하였고 마지막 글자를 로 한 것은 집, , 공부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점필재가 정오 무렵 영랑대를 지나쳐 천왕으로 걸음을 나아간 것과 달리 우리는 이곳에서 두 번째 밤을 보내게 되었다. 초저녁 달빛은 잠시 구름을 헤집고 나오더니 이내 자취를 감추었고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영랑대 정상의 외로운 구상나무 한그루는 시름시름 앓더니 고사목이 되어 앙상하게 마르고 있었고 머지않아 살을 발라낸 생선가시처럼 하얀 뼈를 드러내고 말 것이다. 나무도 때가 되면 죽거늘 하물며 사람의 일이야. 잠이 오지 않는 영랑대의 밤, 여러 번 젤트 밖으로 나와 추성과 마천 쪽을 불빛을 내려다보면서 지난 날 폭설 속에서 이곳을 찾았던 기억을 되살려 보았다.

검게 먹을 칠한 듯한 삼봉의 위용은 어둠속에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고 있으니 내가 앞으로 이곳에 얼마나 올 것인지는 장담할 수 없다. 아귀악신처럼 지킨들 못 가겠냐마는 산행에 대한 즐거움은 차츰 줄어들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정도가 예전만 못하니, 시간이 더 오래 지체되면 점필재의 복기산행을 하기 힘들까 염려되어 이번 산행을 애써 서둘렀다. 보통 1년이면 25회 정도 지리산 산행을 하는데 5월 초까지 9회에 불과하니 얼마나 지리에 들게 될지도 의문이고 무엇보다 박산행을 법적으로 허용하지 않으니 마음 또한 떳떳하지 않아 불편하다.

그러나 어쩌면 이 모두가 다 핑계이고 산에 다니는 열정이 예전 보다 많이 식었다는 뜻이 될테고, 모처럼 타프에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니 생경스럽고도 새로웠다. 이렇게 둘째 날의 밤은 깊어 갔고 착한 나라 어른들이라 술도 사양하고 적당한 시간에 잠자리에 들었다.  

 

 

 

4. 안개비 속에 두견화 슬피 우는 沮洳原(細石)으로 가는 길 <170505 : 3일차, 온종일 안개비>

[注] 沮汝源이라고 기록된 곳이 있는데 沮汝는 沮洳로 옮긴이의 오기인듯 하다. '낮고 습기있는 지대'를 뜻하는데 <詩經 魏風>篇에 '彼汾沮洳 言采其莫' 라는 시구에서 인용하였고 沮洳原은 '물이 많은 습지 고원'쯤으로 이해하면 된다. 1545(乙巳)년 4월 점필재의 길을 역으로 오르며 천왕봉까지 점필재가 간 곳을 빠짐없이 답사한 良(1517~1563)이 남긴 錦溪集에도 細石을  沮洳原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언제부터 세석이라고 하였는지는 모르겠다. 

 

 

 

 

 

 

 

 

 

소년대

 

 

선암

 

 

새벽 5시에 일어나 침낭을 넣고 이른 아침을 먹었다. 메뉴는 된장찌개로 집 된장에 멸치가루 넣고 표고버섯, 양파, , 다진 마늘, 다시다, 청량고추 썰어 넣고 뚝딱 밥을 해서 먹고 나 혼자만 고량주 한 잔을 마셨다. 배낭을 꾸려 길을 나서는데 비인지 이슬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안개비가 내렸다. 하봉 헬기장에서 조금 가면 사람 형상을 한 바위가 있는데 이것을 점필재는 船巖이라고 하였다. 이곳은 지리산에 드나드는 약초꾼들이나 현지인들이 잔을 올리고 절을 하는 곳이라는 이야기를 추성휴게소 <허상옥>사장에게 들었다. 맞는지는 잘 모르지만 이곳 주민들이 안전 산행을 기원하며 절을 하는 곳이니 일단 미역줄기 덩굴을 걷어내고 주변을 정리한 후 술을 한 잔 올리고 목례를 드린 후 이곳을 지나갔다.

 

 

 

 

중봉에 올라가 배낭을 내려놓고 한참을 쉬었다. 우리는 영랑대에서 아침을 해 먹고 올라왔으므로 여유도 있고 아침 기운 가신 오전이지만, 점필재는 고열암에서 이 곳 중봉까지 가파른 길을 올라오느라  무척 지쳐있었을 것이고 늦은 오후가 되었을 것이다. 중봉의 맨머리가 닳고 다져지도록 이 곳에 많이도 섰고 박도 했기에 추억들도 적지 않다. 지는 해를 걸어주던 고사목은 벼락을 맞아 쓰러져서 다시는 그런 진풍경을 볼 수가 없으니 다져진 세월만큼 풍경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고, 심설을 뚫고 올라왔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피어났다. 중봉의 바람소리는 마치 폭풍이 불듯 굉음을 내지만 가문비나무 아래는 생각보다 바람이 없는 곳이다. 어느 해 겨울 젤트를 치다가 눈과 나뭇가지가 위에서 떨어져 올려다보니 곰 한 마리가 가문비나무 꼭대기에 대롱대롱 매달려 안간 힘을 쓰는 것을 보고 자리를 양보한 일이 있었다. 미니 들통을 가지고 올라가 만두와 찐빵을 쪄서 먹기도 하고 냉동실처럼 성에가 낀 젤트 안에서 함께 체온을 나누었던 岳友들은 <미산>님만 남고 모두 산을 떠났다.

 

 

 

중봉샘

 

 

 

 

 

중봉샘으로 내려가면서 나는 이곳을 기록에 따라 마암이라고 생각했다. 산에도 생명을 주는 땅이 있고 죽음을 주는 땅이 있다. 음습한 곳은 어리석은 영혼이 잠시 머물다가 죽음을 당하거나 떠나는 곳이다. 작은 조개골 상부에 있는 마암 각자가 있는 바위 아래가 그렇다. 그곳은 주민들이 말하는 말바우인지는 모르겠고 중봉샘이 마암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미혹한 자의 개인적인 의견이라 믿을만한 것이 못되니 옛 점필재와 감수재의 유산기를 다시 읽어 볼 필요가 있다.

사진을 찍고 중봉 샘에서 물을 마시고 다시 올라왔다. 배낭 어깨 벨트가 아직은 온전하여 산행을 돕고 있으니 조심스레 올라섰다. 감수재는 이곳을 甑峰증봉이라고 하였으니 중봉이 상봉에게 떡을 바치는 시루라고 생각한다. 甑峰은 이곳 말고도 여러 곳에 있으니 다 상봉이 올려다 보이는 봉우리다. 이름이 맞고 틀리고가 무슨 대수이겠는가. 지리에 들어 사물의 이름을 가지고 인간이 송곳니를 드러내고 다툴 필요는 없을 것이다. 굳이 알고 싶다면 내가 아는 것은 새도 아는 것이니 이곳에 사는 날짐승을 불러 물어보면 될 일이 아닌가? 상봉 가까이 비스듬한 암반에는 계단이 놓여있었고 상봉은 인증 샷을 남기기 위해 줄을 선 행렬이 장사진을 이루었다. 이곳부터 주능선 길은 대형 배낭이 눈총을 맞으며 걷는 길이다. 비도 아닌 것이 얼굴을 스쳐 지나가지만 그렇다고 우의를 입기도 그렇고 그냥 비를 맞기로 작정하니 마음이 편안했다.

 

​1472년 선생은 고열암에서 9km나 되는 먼 산길을 무리하게 걸어 올라와 천왕봉에서 운무와 안개가 가득하여 보름달을 보지 못하니 아쉬움이 컸을 것이다. 유두류 기행시에 한가위 달을 보지 못한 심경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제5수: 中秋天王峯不見月(중추절 천왕봉에서 보름달을 보지 못함)
 
    공무에서 잠시 벗어나 높은 산에 올랐는데 / 좋은 날 조물주 강한 새암을 받는구나.
   ​ 운무는 천지에 넘쳐서 팔방(팔굉)이 바다이고 / 바람이 바위에 몰아쳐 뇌성벽력을 치네
    천왕봉 달맞이 놀이(승유) 계속되기 어려워 / 경대의 맑은 꿈(천왕봉 달맞이) 다시 함을 헤아리지 못하겠네
    때때로 무지막지한 구름 잠시 틈을 만들지만 / 누가 능히 보름달을 취해 가슴에 품고 올 수 있으리...

 

 

우리는 천왕봉에서 내려와서 제석봉 조망 데크에서 잠시 쉬고 장터목 취사장에서 점심을 먹고 제석당 터에 다녀왔다. 대나무 말뚝이 설치되어 있던 이곳은 예전 그대로이고 다만 석간수가 흐르는 바위틈에 낙엽이 수북이 쌓여있어 청소를 하였다. 갈라진 바위틈에서 물이 나오는데 이상한 생각을 하고 돌아보니 <송연목>씨 또한 같은 생각을 했는지 나를 보고 피식 웃으며 '정말 닮았네요.'라고 하더라. 바위 면에서 제석대라는 석각을 보았는데 각자가 조잡했으나 제석대가 분명했다.

 

 

제석당터

 

 

 

제석당터 샘

 

 

 2006년 이곳에서 박을 하면서 가위에 눌린 경험이 있다. 함께 간 분이 소리를 질러 잠에서 깼는데 '마른 체형의 남자가 목을 누르며 자리를 비켜달라.'고 하더란다. 잠시 후 눈을 뜨고 별을 보다가 언뜻 잠이 들었는데 무언가가 비비색을 잡아 당겨 내 다리가 옆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다리를 놓으라.'는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지를 않아 발로 여러 번 찬 후에야 잡아당기는 느낌이 없어졌다. 산행 후 돌아와 퇴마사를 하는 친구를 만났는데 '어깨에 귀신이 붙었는데 어깨가 아프지 않느냐?' 물어 '아프다.'고 하니 귀신을 떼어 준다며 손을 머리에 얹었는데 손에서 뜨거운 열기가 몸속으로 들어오는 느낌을 받았다. 그곳은 바위 아래 무속인들이 기도를 하는 평평한 자리였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기억이 생생하니 귀신이나 혼령이 어찌 없다고만 할 수 있을까.  나올 때는 장터목에서 제석봉 올라가는 초입으로 나왔다.

 

안개비가 굵어지기 시작했는데 우의를 입기도 안 입기도 참 애매했다. 전에는 향적사지 초입에 안테나가 세워져 있었는데 없어진지 오래이니 <미산>님의 오룩스맵을 길돌이로 삼았다. 산희샘에서 내려오는 계곡을 건너니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초입에서 트래버스를 하다가 위로 올라가면 바로 향적대가 나오는데 초입만 잘 찾으면 된다. 이곳을 다녀간 것도 오래 전이나 나아갈수록 희미한 기억들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점필재는 천왕봉에서 일출을 못 보고 이곳에서 3일째 밤을 보내고 천왕봉으로 다시 올라가 일출을 보았다. 중이 떠난 빈 절에서 찾아와 시를 남겼으니 시는 글로 그리는 한 폭의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희미한 안개 속에서 금강대에 송년목씨가 올라갔고 나는 사진을 찍었다.

 

 

 

향적사터

 

 

금강대

 

 

 

 

 
      제6수:香積庵無僧已二載[중이 떠난 지 이미 2년이 넘은 향적암에서]
 
    손을 잡고 운무로 뒤덮인 문을 두드리니 / 속인의 발자국이 혜란초를 더럽히네
​    아직 실개천 샘터에는 홈통이 남아있고 / 타다 남은 향도 아직 쟁반에 쌓여있어라
​    지팡이를 의지하니 가을빛은 차가운데 / 바위를 붙잡고 (금강대에)오르니 온 세상이 넓구나
​    은근히 猿鶴(은둔자)에게 알리노니 / 내가 다시 오르는 것을 용납해다오.

 

 

 

 
    제7수:宿香積夜半開霽[향적암에서 자는데 한밤중에야 활짝 개다.]
 
   선학이 표연히 날고 별안간 구름 소리가 나더니 / 천길 산꼭대기(천왕봉)엔 보름달이 밝구나
​   도인이 불어대는 轟鐵철적(날라리) 소리에 화답하여 / 다시 회도인을 만나러 신선이 사는 봉래와 영주를 찾으리라.

 

 

 

김종직 선생은1472년 8월15일 천왕봉 성모사에서 자고 8월16일 향적사로 내려와 날이 개는 것을 보고 다음날 향적사에서 다시 전왕봉에 올라 再登天王峯을 노래한 후 다시 내려와서 제석봉(중봉)에서 남해바다의 여러 섬들을 조망한 다음 영신사로 향한다. 천왕봉에서 한가위 보름달과 일출을 보지 못한 아쉬운 심경이 시에 담겨있다. 천왕봉에 다시 올라서서 맞이하는 동서남북으로 뚫린 조망의 명쾌함과 호연지기 가득한 채워진 섬세한 묘사를 고금을 통틀어 이보다 더 멋들어지게 그려낸 시는 보지 못하였다.  

   

 

   
     ​제8수:再登天王峯[다시 천왕봉에 오르다.]
  


    오악이 중원을 진압하고 / 동쪽 대산(동악, 태산)이 뭇 산의 종주인데
    어찌 알았으리요? 발해 밖에 / 바로 웅장한 두류산이 있음을
    곤륜산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 지축地軸이 동서로 통하고
    줄기가 머리와 꼬리를 연결했으니 / 조화의 공을 상상할 만하구나
    아! 나는 신선의 골상이 되기는 모자라 / 속세에서 오래도록 떠돌아다니다
    옛 속함(함양) 고을의 수령이 되었는데 / 이산이 함양 관내에 있을 줄이야
    마천 구석의 가을걷이를 살피는데 / 계절은 가을의 정 중앙이라
    시험 삼아 두 세 제자를 거느리고 / 천왕봉에 달구경 간다네
    등나무 넝쿨 잡고 멋대로 오르다 지쳐서 / 발의 힘을 짧은 지팡이에 맡겼는데
    산신령이 연극하는 것과도 같아서 / 안개비에 아울러 세찬바람까지 불어대는구나
    마음을 깨끗이 하고 또 마음속으로 기도하여 / 거의 가슴의 답답함을 씻어버렸네
    오늘 아침에는 홀연(문득) 맑게 개이니 / 산신령이 내 정성을 살펴주신 것이라
    드디어 다시 오르는 수고를 잊고서 / 정상에서 천지자연의 광대함을 엿보고
    넓고 넓은 우거진 숲을 굽어보니 / 천지의 새장을 벗어난 듯하구나
    여러 산들은 멀리서 조회하듯 / 눈 아래 높은 것이 하나도 없어라
    북쪽으로 백옥경(한양)을 바라보는데 / 남쪽으로 날던 기러기는 사라지네
    큰 바다는 바로 지척이라 / 하늘 끝에서는 청동을 연마하네.
    오랑캐 섬들과는 멀리 떨어져 / 구름과 바다의 조화가 몽롱하구나
    먼 곳을 보면 방향이 헷갈린 듯하나 / 가까이 읍하면(보면) 기이한 만남(구경)이 기쁘구나
    푸르고 굽은 소나무 절벽 위에 춤추고 / 붉은 태양은 날 개인 하늘에 낮게 드리우네
    만 구렁(골짜기)의 물은 세차게 흘러서 / 구불구불 옥무지개를 끌어당기고
    십주는 쌓인 주름(골짜기)에 숨어있어 / 가까이에서 보면 저마다(면면이) 같구려
    여러 봉우리는 모두 너그러워 / 마치 자손이 (부조를) 따르고
    반야봉은 높이를 다투려고 하여 / 자개가 축융의 경우와 같구려
    그립구나! 청학동이여! /천년토록 신선의 자취 숨겼기에...
    길게 읊조리며 위험한 산비탈 내려가니 / 청학동의 선동을 만날 것만 같구나
    棧道(사다리)에 광풍이 부니 안개는 가볍게 일고 / 빛이 반사되어 단풍이 밝구나
    비록 단정한 달(한가위 보름달)은 없었지만 / 선도의 본원은 이제 이미 다 궁구(탐색)하였네
    갑자기 구름이 끼었다가 갑자기 날이 개이니 / 정중한 마음으로 천제님께 편지를 올리려네
    발 부르튼 건 족히 근심할 것도 없고 / 진실로 청련궁(사찰)에서 이틀 밤을 묵었나니
    내일 아침에는 연하선경을 떠나서 / 공무로 다시 바쁘리라.

 

 

 

 
     제9수:中峰望海中諸島[중봉에서 바다 가운데 여러 섬들을 바라보다]
 
    앞에 섬은 가로 놓이고 뒤 섬은 서서 있으니 / 파란 하늘과 아득한 바다가 서로 접하여 이어져있네
    구름 돛단배는 새보다 빠른 듯하니 / 예로부터 도를 깨달은 신선이 탄 뗏목이네
    신선이 사는 대여산과 원교산은 또 어느 곳인가? / 거오(큰 자라) 움직이지 않으니 응당 단잠이 들었나보다
    자색 봉황새에 편지를 보내어 옛 친구에게 묻노니 / 지금 또한 나는 방장산 정상에 있다네.

 


 

 

향적대에서 다시 나와  장터목에서 몸을 추스른 후 서둘러 장터목을 출발했다. 연하선경을 지나는데 비가 차츰 굵어져서 우의를 입었지만 이미 등산화 속으로 물이 들어와 개구리 소리가 났으나 이 정도의 어려움은 이번 산행에 장애가 될 수 없었다. 단비를 맞으며 연하선경을 지나 촛대봉에 이르니 세석의 고원은 진달래가 만발하여 천상의 화원을 방불케 했으나 사진을 담을 수 없어 안타까웠다. 세석 진달래의 절정 시기는 음력 사월초파일로 기억해 두면 될듯하다. 세석산장 뒷길을 잰걸음으로 하이패스하여 헬기장을 지나 조금 올라가는데 파란색 우의를 입은 사람이 따라오더니 '어디를 가느냐?'고 물었고 '벽소령 가는 시간이 지났다.'고 하여 미련 없이 돌아섰다.

 

 

 

음양수

 

 

우리는 음양수 샘으로 방향을 틀었고 <미산대>에서 세 번째 밤을 보냈다. 점필재가 향적사에서 세번째 밤을 보내고 다음 날 재등천왕하여 영신사에서 4박을 하고 다음 날 하산하는 일정을 우리는 미산대에서 3일차 밤을 보낸 후, 4일차에 영신대 일대를 둘러보고 바로 하산하게 된다.  <미산대>는 영신봉에서 창불대를 지나 음양수로 갈라지는 삼거리에서 음양수로 가지 않고 100m정도 직진하면 조망터 아래에 바로 위치해 있고, 이곳이 곰의 길목이라 주변에 곰을 촬영하는 카메라가 있으며 박 터 위쪽의 조망 바위에 올라가면 대성골과 반야봉, 남부능선과 세석평전을 두루 조망할 수 있다. 올라오면서 사방에 방금 멧돼지가 파놓은 흔적이 즐비했는데 젤트 가까이까지 와서 위협하기에 호각을 불어도 물러나지 않더니 젤트에 등을 켠 뒤에야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계속 내리던 비가 잠자리에 들 무렵에야 그쳤다. 온몸이 다 젖어 상의만 하나 갈아입고 바지는 입은 채로 말렸으나 옷이 축축하여 알몸으로 침낭에 들어가니 그 촉감이 여인의 살결보다도 부드럽더라.

 

 


 

# 5. 영신암에서 하산음까지 <170506 : 4일차, 맑음>

 

 

새벽이 되어 여명 무렵에야 잠을 깼고 다섯 시에 짐을 대충 정리하고 아침을 먹고 일찍 출발하였다. 아침 바람에 타프는 다 말랐고 젤트 구석에 물이 한 컵 정도 고여 있는데 배낭에서 흘러내린 것 같았다. 등로 주변에는 사초가 10cm 자라서 어젯밤 비에 사초의 색감이 뚜렷했고 진달래가 곳곳에 피어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백운거사 이규보의 '그대 입술과 핏빛 중 어느 것이 짙은가?'라는 시구처럼 진달래는 슬픈 사연과 함께 한이 깃든 꽃이다.

두견새는 촉나라 망제(望帝)의 넋이라고 한다. 촉나라 망제가 나라를 잃고 한을 품고 죽어서 두견새가 되어 밤마다 우는데, 두견새가 토한 피로 물들여진 진달래는 망국의 혼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창불대 주변 진달래가 군데군데 붉게 피었는데 이병주의 지리산에 나오는 국군의 토벌대에 쫓긴 여자 빨치산들의 마음이 아마 이러했을 것이다. 여자 빨치산이 뛰어내린 자살바위가 바로 이곳에 있다. 점필재는 창불대 꼭대기에 올라가니 영양의 배설물이 있고 두원곶과 여수곶, 섬진강이 보인다고 하였으니 이것도 다시 한 번 읽어보아야 될 것 같다. 이곳은 바로 '영신암'시의 첫 연의 배경이기도 하다. '전괄과 거상을 산책하고 돌아가니'라는 시구에서 창불대는 전괄에 해당되고 앞에 있는 병풍바위 아래 천길 낭떨어지 계곡은 거상으로 표현했다. 일부 지리 매니아들은 이 골짜기를 '나바론계곡'이라고 하는데 그 자세한 연유는 모르겠고 한 번 내려가면 다시 올라올 수 없는 난공불락의 요새와 같다는 의미이다. 

 

 

 

무명 기도터

 

 

 

 

 

 

 

 

 

창불대(전괄)

 

 

거상

 

 

 

 

 

 

 

 


 

[注]箭筈車箱 : 전괄은 화살 끝처럼 좁은 산마루를 말하고, 거상은 마치 수레의 짐칸처럼 우묵한 골짜기를 말하는데, 또는 전괄령(箭筈嶺)과 거상곡(車箱谷)의 명칭으로도 쓰는바, 두보(杜甫)의 망악시(望岳詩)거상의 골짝에 들어서니 돌아갈 길이 없고 전괄로 하늘을 통하는 문 하나가 있구려[車箱入谷無歸路 箭筈通天有一門]” 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杜少陵詩集 卷六 

 

 

 

내 핸폰은 이미 방전되었고 두 분의 카메라와 핸폰도 방전 직전이라 사진을 여러 장 찍을 수 없었다. 영신봉 쪽으로 오르지 않고 왼쪽 샛길로 영신대로 접어들었다, 늘 건성으로 다녀갔는데 오늘은 영신대 아래쪽 암자터도 돌아보고 옥천도 찾아볼 요량이다. 급경사를 내려서서 영신대로 내려가니 예전 그대로이고 석문으로 들어가는 통나무 다리가 썩어서 무너져 내려 석문 안쪽은 돌아보지 않고, 대신 여기에 처음 온 <송연목>씨만 썩은 통나무를 밟고 다녀왔다. 영신대에서 서쪽 아래로 내려가니 암자터가 될 만한 평지가 있고 그 옆에 샘이 있는데 이것이 점필재가 기술한 것과 玉泉과 일치하니 다시 확인해 보아야겠다. 밧데리가 방전되어 사진을 찍을 수 없으나 개의치 않기로 하였다. 어느 해인가 봄에 와서 제단에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돌로 눌러놓고 갔는데 가을에 오니 18,000원으로 18배의 수익을 올려 대성골에서 막걸리를 마신 일이 있어, ‘봄에 씨앗을 뿌려야 가을에 거둘 것이 있다.’고 하며 이번에는 기도터 제단마다 1,000원씩 3,000원을 투자했다.

 

영신사지에 대한 열쇠는 점필재의 '영신암'에 그대로 나와 있다.

 

 

 

 

 

영신대

 

 

石門

 

 

靈溪

 

 

玉泉

 

 

 

 석가섭

 

 

 

 

 



     제10수:靈神庵[영신암]


    전괄(창불대)와 거상(대성골)을 산책하고 돌아오니 / 방장(주지승)의 노선사가 석문을 열어주네
​    내일 아침이면 속세의 길 다시 밟으리니 / 모름지기 산도(세석촌장)을 불러서 술이나 받아오게. 
    청학 탄 신선은 어느 곳에서 사는고? / 홀로 청학을 타고 동서로 마음껏 다니겠지
​    흰 구름 골에 가득하고 소나무 삼나무가 모여 있으니 / 몇 사람의 유산객만 들어와도 저절로 길을 헤맨다네. 
    천 년의 세월 속에 일인자인 한녹사는 / 붉은 절벽 푸른 고개서 얼마나 노닐었던고
​    조정 가득한 경상(정승판서)들은 노예와 포로 됨을 감수하는데 / 처자들을 이끌고 들어와 함께 백발이 되었네.
    쌍계사 안의 고운을 생각하니 / 어지러웠던 당시의 일을 알 수가 없구나
​    해동으로 돌아와 도리어 유랑했던 발자취는 / 다만 야학이 군계 속에 있었던 연유로다.

 

 

 

점필재의 <하산음>을 이해하기 위해 영신대를 나와 하산을 시작했다.  우리는 1-39 표지목을 찾아 칠선봉 쪽으로 향했다. 지리의 忘年之友<김자준>씨에게 산행 전 하산 로를 물었는데 영신봉과 영신대를 조망할 수 있는 첫 바위가 한신능선 출발 지점이라고 했으니 크게 염려할 것이 없었다. 얼마 가지 않아 등로 옆에 낮은 조망바위가 나타났고 몇 사람이 바위 위에서 쉬고 있었다. 이미 하산로는 확인했고 그동안 궁금했던 '徑由直旨而下'의 문구가 얼음이 녹듯이 풀렸다. 直旨는 생각했던 것처럼 '直指'였던 것이다. 直旨는 사용된 용예가 전혀 없고 直指는 사용된 用例가 더러 있어 2011년 지리99 지명 탐구방에 [유두류록] 탐구 팀을 몇 년간 붙잡고 늘어졌던 두 글자[직지(直旨)](지명탐구방129)[지명탐구 Re129]로 글을 올렸는데 글이 아예 사라졌었다. 산행기방에도 같은 내용을 올렸는데 최근 [지명탐구129]를 다시 읽어 보니 내용이 오공능선에서 한신능선으로 슬그머니 바뀌었더라

 

 

 
   # [유두류록] 탐구팀을 몇 년간 붙잡고 늘어졌던 두 글자 [직지(直旨)](지명탐구방129)
 
     [지명탐구 Re129]에 올렸는데 사라진 내용 


    遊頭流錄 '徑由直旨而下'國譯에 대하여....  
    곧바로 지름길을 따라서(통하여)(그래서) 내려왔다.
 
   * : 곧바로, * : ~을 따라서, ~을 통하여 * 直旨 : 直指 빠르게 감. 빠르게 가는 길(지름길), 똑바로 향함. 곧장 나아감.
   * 를 써야하는데 로 빌려씀{대신 를 쓰듯, 舍其路而不由[맹자]} * : ~하여(그래서) * 直旨 : 왕이 직접 내린 명령이라는 뜻이
     있는데 문맥과 전혀 연결이 되지 않고, 語尾句末에 어조를 고르게 하기 위해 쓰이는 어조사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음.
     직지봉은 없으니 아닌 듯하고 있다면 그 해석이 맞습니다.

 

 

 

 

 

 

 

Girl木(잣나무)

 

 

 

 

 

 

 

한참을 쉬면서 종주하는 분들의 배낭을 털어 쑥 가래떡을 얻어먹었고 낙엽이 수북한 능선이 생각보다 짧지 않았는데 내려오면서 제석봉 뒤로 천왕봉이 보이고 우리가 걸어온 동부능선이 바라보이니 점필재선생 역시 감회는 이루 말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길은 완만하다가 갑자기 가파르기도 하고 바위가 있는 곳은 대부분 왼쪽으로 우회하면 되고, 지리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시그널이 있어 초행자도 길을 잃을 염려가 없다. 계곡의 물소리가 가깝게 들리는데도 능선 길은 계속 이어져 한참을 내려가고 또 내려가도 끝없이 길게 느껴졌다. 계곡에 내려서서 배낭을 내려놓고 세수를 하고 하산음 시에 나오는 굽은 물가에 앉아 탁족을 하고 濯纓(갓끈을 씼음) 대신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은 후 점필재의 '下山吟'을 홀로 주절주절 읊었다.

 

 

 

 

 

下山吟에 나오는 굽은 물가

 

 

 

점필재 濯纓之所로 추정

 



     제11수:下山吟[산에서 내려와 읊다] 


    명아주 지팡이 짚고 겨우 산에서 내려오니 / 갑자기 맑은 연못이 산객을 담그게 하네
​    굽은 물가에서 앉아 내 갓끈을 씻으니 / 시원한 바람이 겨드랑이에서 나오는구나
​    평소 산수에 대한 욕심을 부렸는데 / 오늘에야 나막신 한 켤레가 다 닳았네
​    여정을 함께한 제자들을 돌아보고 말하노니 / 어찌 육체의 노역에 나아갔다고 하겠는가.

 

 

  

모든 전자기기가 다 방전되어 사진을 남길 수 없는 것이 아쉽지만 '食魚無半이지(생선은 반쪽만 먹는 것)'라는 말로 자신을 위로했다, 나는 마음과 몸이 하나가 되어 점필재선생이 걸었던 길을 복기한 것으로 만족하고 한동안 충만감에 젖어 한동안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무 말 없이 절벽에 가까운 곳을 통해 정규 등로에 올라서니 백무동 1.5 km 지점이다. 이번 산행의 감격을 처음 누구에게 말할 수 있을까. 백무동으로 내려와서 <미산>선생님의 트럭을 타고 마천으로 나가 늦은 점심을 먹었다. 아직 하루가 남은 연휴 妻城子獄으로 들어가기보다 하루 더 지리에 머물고 싶었지만 다들 개인 사정이 있으니 헤어질 수밖에...

 

 

 

함양 학사루

 

 

차량 회수를 위해 동강마을로 가서 곶감을 두 박스나 내주신 <산지골>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오도재를 향하다가 지리산롯지에서 <마야고>님에게 차 한 잔을 더 얻어 마시고 조리용 죽염까지 받았다, 오도재 휴게소에 차를 멈추고 눈을 감고 생각하니 산행의 감격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함양으로 홀로 나와 석양에 학사루에 올라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앉아 있다가 학사루를 떠났다. 대전으로 돌아와 집으로 들어가는데 배낭이 대문에 걸려 왼쪽 어깨 벨트마저 ''하고 끊어졌다. 거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가족들이 냄새가 난다고 아우성을 치기에 옷과 디팩을 고무 다라에 넣고 세제를 넣고 밟다가 샤워를 마치고 연소서재로 올라와 침대에 누우니 내 몸과 마음은 청학과 백학이 되어 훨훨 날아갈 것만 같더라.

 

 

 

# 6. 에필로그​

 

 

채 가시지 않는, 쉬이 내보내기 싫은 <목적 산행 완성>의 여운을 붙잡고 산행기를 정리하는 일주일간 매우 행복한 시간 속에 머물렀다. 날씨가 4일 모두 화창했다면 더 좋았을지도 모르나, 점필재가 거닐던 4박 5일의 날씨도 절반은 흐리고 절반을 맑아서 평행 이론처럼, 이번의 산행 날씨와 닮아있어 부족함은 없었다. 단 한 번의 완성으로 모든 것을 다 보고 느꼈다고 말하기는 어불성설이나, 마치, 초행자가 첫 지리종주를 마쳤을 때의 만족감처럼, 숙제로 남아있던 마음의 물음표를 느낌표로 바꾸고 나니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선인들의 유산기나 기행시를 읽고 산행을 하는 것은 덤으로 시원한 사이다 한 병을 배낭 속에 더 넣고 산행하는 것과 같다.

 

산행기를 정리하는 동안 우연찮게 금계 황준량의 <遊頭流山 紀行詩>를 읽게 되었는데 그의 시가 내 마음에 채찍질을 하는데다가, 지난번 하산 길에 밧데리 방전으로 사진을 남기지 못한 지점들의 아쉬움이 남아 확인도 할 겸, 일주일 후, 다시 배낭을 꾸려 당일 산행을 다녀왔다. 초가을 아침처럼 청량하고 맑은 날씨에 바람은 어찌나 불어대는지, 마음에도 쉴 새 없이 봄바람이 불어오는 듯 했다. 황준량은 1545년 음력 4월에 지리산을 유람하고 총 13제 16수를 남겼는데, 그가 남긴 시의 계절적 배경이 딱 지금이고 산행 루트가 점필재의 하산 길과 비슷하였기에 백무동에서 세석으로 올라 영신대를 다시 찾고 바람 부는 창불대에 서 보니, 그의 시가 한층 더 입에 감기듯 들어붙고 공감이 갔다. 일주일 만에 다시 선 山頂에서 사방을 내려다보니 그새 신록은 더 푸르러졌고 평원을 물들이던 진달래도 아직 그 빛을 다 잃지는 않고 있었다. 연달래와 철쭉들이 바통을 받아 피어나고 있으니 세석은 한층 더 연분홍 꽃밭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

 

 

 

 바람난 말

 

 

 
       乙巳夏四月遊山川[을사년 초하 4월에 산천을 유람하다


                                                                         黃良(1517~1563)
 
       風馬春脫羈 : 바람난 말이 봄날 굴레에서 벗어난듯
       野鶴秋開籠 : 들판의 학이 가을 새장에서 풀려난듯
       軒昂自任宇宙寬 : 높은 곳에 스스로 오르면 우주는 넓고도 넓으리니
       誰鎖玉脛鞭雲? : 말 엉덩이에 채찍질하는 것을 누가 금하리
 
       -하략-

 

 

 

질풍노도처럼 달리는 준마(風馬)가 엉덩이를 흔드는 바람난 말로 둔답 시킨 최석기 교수님의 해석이 무척 재미있는데, 나를 비롯하여 지리를 미친 듯 찾아 헤매는 모든 지리매니아들 또한 바로 저 풍마와 다름없음이 아니런가. 시작하면서 옮겨본 톨스토이의 명언은 우리가 후회 없을 삶을 살아내는데 있어 반드시 새겨보아야 할 구절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이루고 싶고 희망하는 일들이 있었기에, 내 영혼이 인도하는 내면의 마음 길을 따라, 걸어본 점필재의 길... 그가 첫 두류 산행을 다녀온 후 남긴 "가슴이 탁 트이고 시야가 넓어짐을 느낀다."는 감상은 그동안의 숱한 지리산행을 하며 자주  느껴온 바들이고, 정유년 나의 봄은 저 금계의 시에 등장한 굴레에서 벗어난 바람난 말이 되어, 새장에서 풀려난 들판의 학이 되어 바라던 희망 하나를 이루었기에 후회 없는 삶의 한 시절을 보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상촌 신흠선생(1566-1628)의 人間三樂 중 세 번째 글귀로 긴 산행기를 마무리한다. "가장 큰 즐거움은, 門을 나서서 마음에 끌리는 곳을 찾아가는 것이다."  -20170515.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