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2년 점필재길 지리산역사문화조사단 화첩산행I(180720~22)
▣ 일 시 : 2018년 07월 20일~22일
▣ 코 스 : 화암-적조암-지장사지-환희대-선열암-독녀암-신열암-고열암-의논대-안락문-향로봉-곰샘-새봉-옹암-청이당-행랑굴-영랑대-선암-중봉-상봉-장터목-백무동
▣ 인 원 : 6명(최석기교수님, 臭田선생님, 이호신화백님, 이상운님, 정혜종님), 2일차 합류 2명(송연목님, 정삼승님), 3일차 합류(조중제님)
▣ 날 씨 : 찜통, 맑음
사람의 인연은 윤회하고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것인지... 늘 마음속으로만 품어왔던 지리산 인문학의 종장 최석기 교수님과 山淸 南泗에 은거한 한국화가 玄石 이호신 화백님을 모시고 지리산 역사문화조사단 화첩산행을 하였다. 546년 전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길을 2박 3일 걸으며 느꼈던 소회를 어찌 글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선인들의 유람록을 따라 답사한 나의 기록에 혹 오류가 있다면, 後生可畏라고 하였으니 후답자가 바로잡고 미비한 부분은 증보하기를 기대한다. 폭염에도 불구하고 함께 산행을 하신 분들과 서울과 수원, 부산에서 2, 3일차 합류한 세 분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지장사 추정 터는 돌배나무에서 약 200m(직선거리 178m) 지점에 있다. 와편과 도기편, 고려 말 청자편이 지표에 흩어져 있었고 무엇보다 주춧돌이 육안으로도 보이는데, 작은 암자의 규모는 아닌 듯하다. 돌배나무에서 들어가다 보면 샘터의 흔적이 있는데 匚形의 석축이 암자 규모를 말해 준다. 샘에 주목하는 것은 지장암에서 하룻밤을 지낸 옥계(玉溪) 노진(盧禛)[의 '夜宿地藏庵' 詩가 있기 때문이다.
夜宿地藏庵
노진(盧禛)[1518~1578]
山中無俗物 : 산중이라 세속의 잡된 일 없어
煮茗聊自飮 : 차 끓여 심심찮게 따라 마시며
坐愛佛燈明 : 앉아서 환한 불등 고이 보다가
深宵始成寢 : 깊은 밤 가까스로 잠이 들었지
還有石泉響 : 헌데 또 바위틈의 샘물 소리가
冷然驚曉枕 : 돌연 새벽 단꿈을 놀래 깨우네
<玉溪集>
노진(盧禛)[1518~1578] 조선 중기 남원에서 활동한 문신. 옥계(玉溪) 노진(盧禛)[1518~1578]은 조선 중기 명종과 선조 연간에 주로 활약한 문신으로, 30여 년 동안 청현(淸顯)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지례현감과 전주부윤 등 외직에 나가서는 백성에게 선정을 베풀어 청백리로 뽑히기도 하였다. 성리학과 예악에 밝았다. 노진은 1518년(중종 13) 함양군 북덕곡 개평촌에서 태어났으나 처가가 있는 남원에 와서 살았다. 효심이 뛰어나 노모를 봉양하느라 지병이 악화되어 1578년 향년 61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엄천과 화암[지리동북부 선열암 촉촉수를 찾아서(171009)]
♣ 김종직 선생 유두류록과 기행시 발췌
[국역]
○ 14일, 무인일. 덕봉사(德峯寺)의 승려 해공(解空)이 와서 그에게 길을 안내하게 하였고, 또 한백원(韓百源)이 따라가기를 요청하였다. 마침내 그들과 함께 출발하여 엄천(嚴川)을 지나 화암(花巖)에서 쉬고 있는데, 승려 법종(法宗)이 뒤따라왔다. 그에게 지나온 곳을 물어보니 험준함과 꼬불꼬불한 형세를 매우 자세하게 알고 있었다.
[원문]
○ 十四日戊寅. 德峯寺僧解空來. 使爲鄕導. 韓百源請從. 遂歷嚴川. 憩于花巖. 僧法宗尾至. 問其所歷. 阻折頗詳.
노장동 돌배나무
추정 지장사터<사진 이상운님>
[국역]
그래서 그에게도 길을 인도하게 하고 지장사(地藏寺)에 이르니 갈림길이 나왔다. [亦令導行。至地藏寺路岐。: 또한 길을 인도하게 하여 지장사 갈림길에 이르러] (여기서부터는) 말에서 내려 짚신을 신고 지팡이를 짚고 오르는데, 숲과 구렁이 깊고 그윽하여 벌써 경치가 뛰어남을 깨닫게 되었다.
[원문]
亦令導行至地藏寺. 路岐.[亦令導行。至地藏寺路岐。] 舍馬著芒鞋. 策杖而登. 林壑幽窅. 已覺勝絶.
환희대
[국역]
여기서 1리쯤 더 가니 환희대(歡喜臺)란 바위가 있는데, 조태허와 한백원이 그 꼭대기에 올라갔다. 그 아래는 천 길이나 되는데, 금대사(金臺寺), 홍련사(紅蓮寺), 백련사(白蓮寺) 등 여러 절이 내려다보였다.
[원문]
一里許有巖. 曰歡喜臺. 太虛,百源. 上其巓. 其下千仞. 俯見金臺,紅蓮,白蓮諸刹.
선열암
[국역]
선열암(先涅菴)을 찾아가 보니, 암자가 높은 절벽을 등지고 지어져 있는데, 절벽 밑에 두 샘이 있어 물이 매우 차가웠다. 담장 밖에는 물이 반암(半巖)의 부서진 돌 틈에서 방울져 떨어지는데, 너른 바위가 이를 받아서 약간 움푹 패인 곳에 맑게 고여 있었다. 그 틈에는 적양(赤楊) 과 용수초(龍須草)가 났는데, 모두 두어 치〔寸〕쯤 되어 보였다. 그 곁에 돌이 많은 비탈길이 있어, 등덩굴〔藤蔓〕 한 가닥을 나무에 매어 놓고 그것을 부여잡고 오르내려서 묘정암(妙貞菴)과 지장사(地藏寺)를 왕래하였다. 승려 법종이 말하기를, “한 비구승이 있는데, 결하(結夏)와 우란(盂蘭)을 파하고 나서는 구름처럼 자유로이 돌아다녀서 간 곳을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돌 위에는 소과(小瓜) 및 무우〔蘿葍〕를 심어놓았고, 조그마한 다듬잇방망이와 등겨가루〔糠籺〕두어 되쯤이 있을 뿐이었다.
[원문]
訪先涅菴. 菴負峭壁而構. 二泉在壁底極冽. 墻外. 水自半巖缺泐. 津溜而落. 盤石承之. 稍坳處. 瀅然渟滀. 其罅生赤楊龍須草. 皆數寸. 傍有磴路. 繫藤蔓一條于樹. 攀之上下. 以往來于妙貞及地藏. 宗云. 有一比丘. 結夏盂蘭. 罷後雲遊. 不知所向. 種小瓜及蘿葍於石上. 有小砧杵糠籺數升許而已.
先涅庵(선열암)
門掩藤蘿雲半扃 : 문은 등라에 가리고 구름은 반쯤 빗장을 질렀는데
雲根矗矗水冷冷 : 우뚝 솟은 바위의 촉촉수 소리 맑고도 깨끗하구나
高僧結夏還飛錫 : 하안거를 마친 고승은 석장을 날리며 돌아갔는데
只有林間猿鶴驚 : 다만 깊은 산속에서 은거하는 선비가 놀라는구나
♣ 촉촉수 : 높은 바위에서 톡, 톡, 톡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
♣ 지리동북부 선열암 촉촉수를 찾아서(171009) : http://blog.daum.net/lyg4533/16487843
의논대에서 바라 본 독녀암[지리동부대학 점필재학과 졸업산행(170810~13)]
독녀암(노장대)
[국역]
암자(신열암)의 동북쪽에는 독녀(獨女)라는 바위 다섯 개가 나란히 서 있는데, 높이가 모두 천여 자나 되었다. 법종이 말하기를, “들으니, 한 부인(婦人)이 바위 사이에 돌을 쌓아 놓고 홀로 그 안에 거처하면서 도(道)를 연마하여 하늘로 날아올라갔으므로 독녀라 호칭한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는데, 그 쌓아놓은 돌이 아직도 남아 있다. 바위 중턱에 잣나무가 서 있는데, 그 바위를 올라가려면 나무를 건너가서 그 잣나무를 끌어 잡고 바위틈을 돌아 등과 배가 바위에 부딪힌 다음에야 그 꼭대기에 오를 수 있다. 그러니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는 올라갈 수 없었는데, 종리(從吏) 옥곤(玉崑)과 용산(聳山)은 능숙하게 올라가 발로 뛰면서 손을 휘저었다. 내가 일찍이 산음(山陰)을 왕래하면서 이 바위를 바라보니, 여러 봉우리들과 다투어 나와서 마치 하늘을 괴고 있는 듯했다. 지금 내 몸이 직접 이 땅을 밟아보니, 모골이 송연하여 정신이 멍하고 내가 아닌가 의심하였다.
[원문]
菴東北有巖. 曰獨女. 五條離立. 高皆千餘尺. 宗云. 聞有一婦人. 累石巖間. 獨棲其中. 鍊道沖空. 故爲號云. 所累石猶存. 柏生巖腰. 欲上者. 梯木挽其柏. 廻繞巖闕. 肯腹俱盪磨. 然後達其頂. 然不能辦命者. 不能上. 從吏玉崑聳山. 能上而超足麾手. 予嘗往來山陰. 望見是巖. 與諸峯角出. 若柱天然. 今而身跨玆地. 毛骨愯然. 恍疑非我也.
신열암 터
[국역]신열암(新涅菴)을 찾아가 보았더니 승려는 없고, 그 암자 또한 높은 절벽을 등지고 있었다. [원문]訪新涅. 無僧. 亦負峭壁.
고열암[지리동부대학 점필재학과 졸업산행(170810~13)]
[국역]
여기서(신열암) 조금 서쪽으로 가 고열암(古涅菴)에 다다르니, 이미 해가 지고 어스름하였다...이 날에 나는 처음으로 산행을 시험하여 20여리를 걸었는데 극도의 피곤으로 깊은 잠을 잤다. 한밤중에 깨어 보니, 달빛이 나왔다 들어갔다 하며, 여러 산봉우리에서 운기(雲氣)가 솟아오르고 있어, 나는 마음속으로 기도를 하였다.
[원문]
稍西迤抵古涅菴. 日已曛矣...是日. 余初試險. 步幾二十里. 極勞憊. 熟睡夜半而覺. 月色呑吐諸峯. 雲氣騰湧. 余默慮焉.
宿古涅庵(숙고열암)
病骨欲支撑 : 지친 몸 지탱하려고
暫借蒲團宿 : 잠시 포단 빌려 잠을 자는데
松濤沸明月 : 소나무 물결 달빛 아래 들끓으니
誤擬遊句曲 : 구곡선경에 노니는 듯 착각하였네.
浮雲復何意 : 뜬 구름은 또한 무슨 뜻인가?
夜半閉巖谷 : 한밤중 산 골짜기 닫혀있구나
唯將正直心 : 오직 올곧은 마음을 가진다면
倘得山靈錄 : 혹시 산신령의 살핌을 얻으려나.
病骨(병골) : 지친 몸, 蒲團(포단) : 부들로 만든 둥근 방석, 浮雲(부운) : 간신. 인생의 덧없음. 不義로 富貴榮達을 누림. 句曲(구곡) : 강소성(江蘇省)에 있는 己山 또는 茅山(모산)이라고 함. 巖谷(암곡) : 고열암, 將 : 持也(가질장), 倘 : 혹시당. 錄 : 省(살핌)也
의논대에서 바라본 미타봉
議論臺(의논대)
兩箇胡僧衲半肩 : 참선승 두 사람이 장삼을 어깨에 반쯤 걸치고
巖間指點小林禪 : 바위 사이 한 곳을 소림 선방이라고 가리키네
斜陽獨立三盤石 : 석양에 삼반석(의논대) 위에서 홀로 서있으니
滿袖天風我欲仙 : 소매가득 천풍이 불어와 나도 신선이 되려하네
향로봉(170503)
[국역]
의론대(議論臺)는 그 서쪽 등성이에 있었는데, 유극기 등은 뒤떨어져, 나 혼자 삼반석(三盤石)에 올라 지팡이에 기대어 섰노라니, 향로봉(香爐峯), 미타봉(彌陀峯)이 모두 다리 밑에 있었다. 해공(解空)이 말하기를, “절벽 아래에 석굴(石窟:선녀굴)이 있는데, 노숙(老宿) 우타(優陀)가 그 곳에 거처하면서 일찍이 선열암, 신열암, 고열암 세 암자의 승려들과 함께 이 돌에 앉아 대승(大乘), 소승(小乘)을 논하다가 갑자기 깨달았으므로, 이렇게 칭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원문]
議論臺. 在其西岡. 克己等後. 余獨倚杖于三盤石. 香爐峯,彌陁峯. 皆在脚底. 空云. 崖下有石窟. 老宿優陁居之. 嘗與三涅僧. 居此石. 論大小乘. 頓悟. 仍以爲號.
♠ '향로봉과 미타봉이 발 아래에 있다.'는 기록은 오류로 보인다.
天禮碭(1924년 강계형)
청이당 터 석축
청이당 계석(170702~03)
[국역]
구롱을 다 지나서는 문득 산등성이를 타고 가는데, 가는 구름이 나직하게 삿갓을 스치고, 초목들은 비를 맞지 않았는데도 축축이 젖어 있으므로, 그제서야 하늘과의 거리가 멀지 않음을 알았다. 이로부터 몇 리 가지 않아 등성이를 돌아 남쪽으로 가면 바로 진주(晉州) 땅이다. 그런데 안개가 잔뜩 끼어서 먼 곳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청이당(淸伊堂)에 이르러 보니 지붕이 판자로 만들어졌다. 우리 네 사람은 각각 청이당 앞의 시내 바위를 차지하고 앉아서 잠깐 쉬었다.
[원문]
度九隴訖。便由山脊而行。行雲低拂篢子。草樹不雨而濕。始覺去天不遠也。不數里。循脊南。乃晉州之地也。烟霧瀰漫。不能眺望。抵淸伊堂。以板爲屋。四人各占堂前溪石上。小憩。
1472년 점필재의 유두류록과 기핼시를 좇아서(170504)
♣ 1610년 감수재의 행랑굴/1871년 배찬(裵瓚)의 마암/1877년 후산 허유의 개운암이라고 함. : http://blog.daum.net/lyg4533/16487748
영랑재(永郞岾)
[국역]
이로부터 영랑재(永郞岾)에 이르기까지는 길이 심하게 가팔라서, ‘봉선의기(封禪儀記)’에서 말한, “뒷사람은 앞사람의 발 밑을 보고, 앞사람은 뒷사람의 정수리를 보게 된다.”는 것처럼, 나무뿌리를 부여잡아야만 비로소 오르내릴 수가 있었다. 그래서 이미 한낮이 지난 뒤에서야 비로소 영랑재로 올라갔다. 함양(咸陽)에서 바라보면 이 봉우리가 가장 높아 보이는데, 여기에 와서 보니, 다시 천왕봉(天王峯)을 올려다보게 되었다. 신라(新羅) 때 화랑(花郞)의 우두머리였던 영랑이 3천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산과 물을 찾아 노닐다가 일찍이 이 봉우리에 올랐었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 한 것이다.
소년대(少年臺)는 봉우리가 곁에 있어 푸른 절벽이 만 길이나 되었는데, 이른바 소년이란 혹 영랑의 무리가 아니었는가 싶다. 내가 돌의 모서리를 안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곧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종자(從者)들에게 절벽 난간에 가까이 가지 말도록 주의를 주었다. 이 때 구름과 안개가 다 사라지고 햇살이 내리비추자, 동서의 계곡들이 모두 환하게 트여 여기저기를 바라보니, 모두가 삼나무, 노송나무, 소나무, 녹나무로 그 중 3분의 1이나 말라 죽어 뼈만 앙상하게 서 있었다. 간간이 마치 그림처럼 단풍나무가 섞여 있었다. 그리고 등성이에 있는 나무들은 바람과 안개에 시달려서 가지와 줄기가 모두 왼쪽으로 치우쳐 주먹처럼 굽었으며 잎이 거세게 나부끼었다. 승려가 말하기를, “여기에는 잣나무〔海松〕가 더욱 많으므로, 이 고장 사람들이 가을철마다 잣을 채취하여 공물로 충당하는데, 금년에는 잣이 달린 나무가 하나도 없으니, 만일 정한 액수대로 다 징수하려 한다면 우리 백성들은 어찌 하겠습니까? 수령께서 마침 보았으니, 이것은 다행한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여기에는 곳곳에 서대초(書帶草)와 같은 풀이 있었는데, 부드럽고 질기면서 매끄러워 이것을 깔고 앉거나 누울 만하였다. 청이당 이하에는 오미자나무 숲이 많았지만, 이곳은 오미자나무는 없고, 다만 땅두릅〔獨活〕과 당귀(當歸)만이 있었다.
[원문]
自此至永郞岾。道極懸危。正如封禪儀記所謂後人見前人履底。前人見後人頂。攀挽樹根。始能下上。日已過午。始登岾。自咸陽望。此峯最爲峻絶。到此。則更仰視天王峯也。永郞者。新羅花郞之魁。領三千徒。遨遊山水。甞登此峯。故以名焉。
少年臺。在峯側。蒼壁萬尋。所謂少年。豈永郞之徒歟。余抱石角下窺。若將墜也。戒從者勿近傍側。時雲霧消散。日脚下垂。山之東西谿谷開豁。望之無雜樹。皆杉檜松枏。槁死骨立者。居三之一。往往間以丹楓。正如圖畫。其在岡脊者。困於風霧。枝榦皆左靡拳曲。雲髮飄颺。云。海松尤多。土人。每秋採之。以充貢額。今歲。無一樹帶殼。苟取盈。則吾民奈何。守令適見之。是則幸也。有草類書帶。柔韌而滑。可藉以坐臥。在在皆然。淸伊以下。多五味子林密。而到此無之。只見獨活,當歸而已。
소년대(少年臺)
선암
선암(船巖)
[국역]
해유령(蟹踰嶺)을 지나면서 보니 곁에 선암(船巖)이 있었는데, 법종(法宗)이 말하기를, “상고 시대에 바닷물이 산릉(山陵)을 넘쳐흐를 때 이 바위에 배〔船〕를 매어두었는데, 방게〔螃蟹〕가 여기를 지나갔으므로 이렇게 이름 한 것입니다.”하였다. 그래서 내가 웃으며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때의 생물들은 모두 하늘을 부여잡고 살았단 말인가?” 라고 하였다.
[원문]
歷蠏踰嶺。傍有船巖。宗云。上古海水懷襄時。船繫于玆巖。而螃蠏過之故名。余笑曰。信汝之言。其時生類。盡攀天而活耶。
지실련 셰프 조중제님
마암당터(추정)
삼국시대 도기편부터 한말 와편이 산재해 있음
마암(170503)
중봉샘(170503) 1980년대 초반 김경렬선생이 붙인 이름
[국역]
또 등성이의 곁을 따라 남쪽으로 중봉(中峯)을 올라가 보니, 산중에 융기하여 봉우리가 된 것들은 모두가 돌로 되었는데, 유독 이 봉우리만이 위에 흙을 이고서 단정하고 장중하게 자리하고 있으므로, 발걸음을 자유로이 뗄 수가 있었다. 여기에서 약간 내려와 마암(馬巖)에서 쉬는데, 샘물이 차고 맑아서 마실 만하였다. 가뭄이 들었을 때, 사람을 시켜 이 바위에 올라가서 마구 뛰며 배회하게 하면 반드시 비를 얻게 되는데, 내가 지난해와 금년 여름에 사람을 보내서 시험해 본 결과, 자못 효험이 있었다.
[원문]
又並脊南登中峯。山中凡隆起爲峯者。皆石。獨此峯。戴土而端重。可以布武焉。稍下步。憩馬巖。有泉淸冽。可飮。値歲旱。使人登此巖。蹈躪便旋。則必致雷雨。余前年及今夏。遣試之。頗驗。
♣ 참고자료
1472년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과 기행시 http://blog.daum.net/lyg4533/16488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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