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산행기록

지리동부 영랑대&중봉골I(160130~0201)

도솔산인 2016. 2. 2. 01:06

 

지리동부 영랑대&중봉골I(160130~0201)

 

 

▣ 일   시 : 2016년 01월 30일 ~ 02월 01일

▣ 코   스 : 새재 - 치밭목산장 - 영랑대 - 중봉 - 중봉골 - 중산리 

▣ 인   원 : 3명(도필락님, 산수원님)

▣ 날   씨 : 최저기온 영하10도

 

 

 

1. 하루에 갈 길을 사흘을 걸어도

 

40대 후반 晩婚을 하는 月獨을 축하해주기 위해 식장 들렀다가 홀로 지리에 들었다.

하늘은 회색 빛이고 안개가 자욱한 익산 장수 간 고속도로에 신속하게 차를 올렸다.

논산에서 출발(12:00)하여 터널을 몇 개 빠져나오고 진안을 지나는데 시계가 트였다.

 

 

 

 

 

 

덕산에서 점심 먹고 어림잡아 새재 3시 출발 치밭목 5시 반 도착...

사는 거 별거 있어. 연잎 위의 이슬처럼, 산마루의 구름처럼 살다가면 되는 거지.

 

아직은 마음만 먹으면 통금시간이 지나도 산에 들 수 있는 곳이 있고

이런 자유를 누릴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하루에 갈 길을 사흘간 걷겠다고 작정했다.

덕산에 차를 놓고 택시를 타고 새재로 올라간 것은 원점 회귀를 하지 않겠다는 의사이다.

 

 

 

 

 

 

 

 

 

 

 

2. 지리○○ 전사들과의 만남

 

어느덧 치밭목 대피소에 닿았다.

늦은 시간인데도 여러 사람들이 마당에 서 있었다.

공손히 인사를 하고 취사장에 들어가 배낭을 내려놓고 나오니

마침 <마등자>님이 계셔서 인사를 하였는데 치열한 산행의 흔적이 보였다.

여러 번 산길에서 스친 인연으로 눈과 입을 마주했고 커피도 얻어 마셨다.

 

무슨 갈증이 있어서 이렇게 치열한 산행으로 삶을 노래하는지...

가슴에 쌓인 삶의 울분과 한을 온몸으로 노래하는 지리의 할배 할매 전사들...

산행의 방법은 다르지만 그들의 눈에서 전해오는 傳音을 느낄 수 있었다.

한 해가 또 저무는 것이 서러워서 집단으로 몸부림을 치는 것이겠지.

 

지리산에는 일진회가 군웅할거하고 있다.

 

주경야독 지리산 인문학을 탐구하는 자

우천불문 구중심처를 놀이터로 삼는 자

심산오지 험로를 극한산행하는 전차군단     

배고픈 서러움을 산에서 풀려고 하는 자

입산의 경지를 넘어 예술로 표현하는 자

 

사람마다 천인천색이라 다 열거할 수는 없지만

산이기에 속세의 모든 티끌들을 포용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아무튼 산은 목마른 자와 땀 흘린 자에게 시원한 물과 바람을 선물한다.

다들 흔적을 남겨 공명를 얻고자 하지만 산은 사람을 탓하지 않는다.

 

부끄러운 산행기를 올리고 후회하지 않은 적이 없으니

나 또한 영험한 선계에 들어 통속적이기는 마찬가지다.

 

해는 저물어 가는데 일행이 조개골로 올라온다고 하였으니

물을 받으며 조개골 쪽의 적설을 확인하고 괜한 걱정이 들었다.

얼마 후 만나기로 한 일행은 다행히 유평에서 올라왔다고 했다.

 

10시경 잠시 뒷마당에 나오니 사태지역 한 곳에서 불빛이 보였다.

조난인가 싶어 불빛으로 신호를 보냈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지리○○>팀의 전사들이 길을 열어 놓았으니

조난의 염려는 없다는 판단에 신경 쓰지 않았다.

 

 

 

 

 

 

 

3. 이른 아침의 치밭목 산장

 

산객들이 빠져나간 치밭목산장에 아침의 고요한 침묵이 흘렀다.

 

얼마 전 비선대 산장이 이미 철거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30년 외길을 걸어오신 <민대장>님에 대해서 가급적 언급하지 않겠다.

마지막 민간대피소인 치밭목의 운명도 금년을 넘기지 못할 것이다.

 

원두커피 분쇄기 소리가 들리더니 <庄主>님이 커피를 내오시며...

'돈 줄 생각 하지마라. 이건 내가 사는 거다. 돈 내면 콱 죽여삔다.'

평생 입으로 저렇게 벌통을 차니 어떻게 달콤한 꿀을 얻겠는가?

 

어젯밤 늦게 올라온 <최정호>님은 새재로 다시 내려갔고

지리 전차군단 전사들의 발자국을 따라 사뿐사뿐 나아갔다.

 

올라가면서 지난 밤 사태지역에서 주무신 분을 만났는데 <유랑자>님이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전에 칠선에서 만난 일을 상기하고 말씀하셔서

'2006년 9월 23일 마폭에서 만났다.'라고 답변하니 깜짝 놀라시더라.

 

아무튼 오늘의 산행 거리는 짧은데다가 길이 열려있으니 여유가 있었다.

평소 산에서 덕을 쌓은 것이 없는데 수고하신 선답자에게 감사할 뿐이다.

 

 

 

 

 

 

 

 

 

 

헬기장에서 잠시 쉬는데 심설을 헤치고 갑자기 나타난 네 분...

어제 오후 치밭목 산장에서 만났던 <지리선녀>님, 거창의 화랑 소년 <만길>님에 이어서

언제나 편안한 童顔의 <심마니>님, 德이 넉넉해서 외롭지 않다는 <德不孤>님이 나타났다.

 

 

 

 

 

 

 

 

 

 

 

 

4. 지리의 九重深處 영랑대 

 

지리산은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흘러내려 마천령(磨天嶺)∙마운령(磨雲嶺)∙철령(鐵嶺) 등이 되었고, 다시 뻗어내려 동쪽으로는 오령(五嶺)∙팔령(八嶺)이 되고 남쪽으로는 죽령(竹嶺)∙조령(鳥嶺)이 되었으며, 구불구불 이어져 호남과 영남의 경계가 되었으며, 남쪽으로 방장산(方丈山)에 이르러 그쳤다. 이 산을 ‘두류산’이라 한 것이 이런 연유 때문이다.[두류산일록]

 

나는 풍수를 알지 못하지만 육산은 바위에 암산은 흙이 있어야 기가 모이는 곳이니

숙영지로 친다면 영랑대보다는 그 아래에 가문비나무 숲과 하봉 안부가 더 편안하다.

 

백두산에서 발원한 큰 산줄기가 수천리 굽이굽이 이어져 마지막으로 지리산 상봉에서 육중하게 멈추었다가

중봉과 하봉, 영랑대를 만들고 직선으로 뻗어 내린 두리봉에서는 천년 용송을 기르고 추성리에 이르러 백두산이 소멸한다.

우리는 이것을 두류능선이라고 하는데 그 연유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감수재의 생각을 곰곰이 읽어보는 것이 좋겠다.

 

드디어 영랑대에 도착했다.

일행 한 분의 다리가 깊은 눈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나오지 못하자 도필락씨가 내려가서 도왔다.

크러스트 된 눈길에 빠지면 정강이가 성할 날이 없으나 오늘은 그래도 상당히 양호한 편이었다.

 

지리의 깊은 산속 구중심처 영랑대와 나는 무슨 인연이 있어서

永郞岾와 끝없는 사랑은 깊어 가고 아울러 永郞과의 交感도 깊어만 갔다.

 

아마 12시가 넘어서 바람소리를 들으며 깊은 잠이 든 것 같다.

새벽에 일어나 젤트 밖을 보니 덕산과 단성, 원지 멀리는 진주의 야경이 눈에 들어왔다.

 

이번에 셰프를 두 명이나 대동하고 호화 먹방 산행을 하였으니

몇 년 전 미혼이던 승균이가 한 말이 떠올랐다

'또 미역국입니까? 선생님! 승균이 젖 돌아요.'

 

승균이는 인터넷 비박 산악회의 산중 호화 만찬이 부러웠을 것이다.

이제 어엿한 두 아이의 아빠가 되었고 가족들의 부양을 위해 살고 있으니

통화만 가끔 하고 얼굴을 본 것이 오래 전의 일이다.

 

 

이번에는 멋진 일몰과 일출이 없어서 박여량의 두류산일록에 사실적으로 묘사한 기록이 있어 다음과 같이 인용해 보았다..

 

[일몰]

然黑雲一隊。橫亘西隅。作奇峰恠壑千萬狀。又有紫雲一帶復橫亘黑雲之外。狀態無窮。變化區測。(1610년9월5일丙午晴)


검은 구름 한 무리가 서쪽 하늘가에 가로질러 뻗어있고 기이한 봉우리와 괴상한 골짜기가 수많은 형상을 만들었다. 또한 붉은 구름 한 줄기가 다시 검은 구름 밖으로 길게 뻗어나가서 모양과 형태가 무궁하여 변화를 예측할 수 없었다.

 

[일출] 

黑雲紫雲。桓亘東隅者。復如前夕日入之狀焉。日輪轉上。雲氣漸散。一天之下。輝暎光明。(1610년9월6일丁未晴)

검은 구름과 붉은 구름이 동쪽 하늘가에 크게 뻗어 있는 것이 어제 저녁 해가 질 때의 모양과 같았다. 해가 솟아오를수록 구름 기운이 점차 흩어져 온 하늘 아래는 찬란한 빛이 밝게 비추었다.

 

읽으면서 한폭의 그림이 저절로 떠오르니 사진기 대신 화공을 대동할 수도 있었겠지만 

'옛 선인들은 글로 멋진 일몰과 일출 장면을 묘사하는 능력이 탁월하다.'고 말할만하다.

 

아무튼 이번 산행에서 멋진 일몰과 일출이 없으면 어떠랴.

'손과 발을 수고롭게 하는 것보다 젤트 안에서 차 한 잔 마시는 것이 낫다.'고 서로 위안했다.

 

 

 

 

 

 

 

 

 

 

 

 

 

 

 

 

 

 

 

 

 

 

 

 

5. 중봉골로 스며들다.

 

중봉으로 오르는 길은 눈이 깊었지만 습설이 얼어서 헛발질을 하지 않았다.

高手의 足跡 눈계단이 만들어져 있어 짐승처럼 거친 숨을 내뿜지도 않았다.

시리도록 파란하늘에 고사목 하나 있어 좌우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온갖 해찰을 다하면서 얼마간 시간을 중봉에 머물렀는지 모른다.

가문비나무 아래 무인텔이 나를 부르지만 중봉과의 사랑은 다음으로 미루고

나는 <마등자>님 군단의 러셀을 좇았고 <도필락>님은 직선으로 치고 내려갔다.

正러셀이든 犬러셀이든 눈길에서 선답자의 흔적을 만나면 안도감을 느낀다.

 

 

 

 

 

이곳은 2008년 2월 16일 심설을 헤치고 올라와 배낭을 깔고 앉아서 마지막으로 쉬었던 곳이다.

결국 산파트너와의 결별의 始發이 되었던 중봉골은 골이 깊은 만큼 아픔도 추억도 많은 곳이다.

 

사태로 지형은 많이 변했지만 스틱을 접고 오체투지 기어올랐던 계곡을 우회하는 설 사면은

아직도 그대로 그 자리에 있었고 오래 전 지나간 길이지만 기억 또한 뇌리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 당시 '사람은 고쳐서 다시 쓸 수 없다.'는 결론이 옹졸한 것이 아니었는가를 생각해 보았다.

 

 

 

080215~17(마야계곡&통신골)

 

 

 

 

 

 

 

 

 

빙폭 구간이 끝나고 막탕에서 물 흐르는 소리를 들으니 그곳이 그날 취수하였던 곳이었다. 

일행에게 점심을 먹을 것인가를 묻고 마지막 남은 감 말랭이로 허기를 달래고 서둘러 내려섰다.

뚜렷한 등산로가 나타나고 천왕봉 동릉 초입 사면 길을 지나서 목책을 조심스레 넘어섰다.

자연학습원 승차장에 도착하니 16:30  평일 막차(17:00)를 타고 중산리로 내려왔다. 

 

지리의 전사들이 하루에 걷는 길을 사흘을 걸어도 영혼의 갈증은 끝내 해소되지 않더라.

덕산에서 이번 산행에 대한 寸評을 하고 일행에게 후한 식사 대접을 받고 올라왔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