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산행기록

눈 내리는 중북부능선(160116~17)

도솔산인 2016. 1. 18. 09:32

 

눈 내리는 중북부능선(160116~17)

 

일 시 : 20160116~ 17

코 스 : 음정 - 벽소령임도 - 도솔암 - 벌바위 - 영원령 - 영원봉 - 빗기재 - 상무주암 - 삼불사 - 실상사

인 원 : 5(진정화씨, 김자준씨+1, 둘리님)

 

 

 

 

1. 가사 도우미에서 탈출

 

   71일 방학에 이틀을 출근하니 나에게 부여된 소명을 알고 가사에 매진하고 있다.

   평친이 점점 살림에 손을 떼는줄 알았더니 본래 어머니께서 하셨던 일이었고 공백이 된 살림을 채울 수밖에...

 

   친구 모친상으로 3일 동안 용두머리 잔혹사 멤버들을 거개 만났고 장지까지 다녀왔다.

   그리고 친구 사무실에 들렀다가 유성 장날이라 장 구경을 하고 생선을 사와 조림을 하였고,

   실갈치는 산반찬을 할 요량으로 소금에 살짝 절였다가 반건조해서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

 

   가족을 만들어 놓고 속인으로 살아가니 현실을 외면하고 살 수는 없다.

   어머니의 집착은 손자에게 향했고 나에게 관심이 덜하시니 다행스럽다.

   그 속의 희노애락 또한 나의 운명인 것을....

 

   병원에 어머니를 모시고 가서 영양제 놔드린 후 벌떡 일어나 배낭을 챙기기 시작했다.

   나라를 훔친 조상을 두었으니 하룻밤 지리 애인을 훔친들 반역의 죄가 될리 만무하다.

  

 

 

 

 

 

 

 

 

 

 

 

 

 

 

 

 

 

2. 나의 산행은 默契

 

  주말이면 통속한 세상에서의 탈출이 나의 일상이니 가족들에게 나의 산행은 묵계다.

  오히려 집에 있는것이 이상스러운 외도이니 생각을 바꾸고 살면 온가족이 화목하다.

  주말 가족들의 먹거리는 나의 몫이고 늘 창조적인 생각을 현실로 만들어 그들을 감격시키면 그만인 것이다.  

  주말 해가 뜨면 산에 들고 해가 지면 산에서 자고 놀고 먹는 일이 이와 같으니 사람들은 나를 기괴하다고 한다.

 

  오늘은 默契 <印悟>스님의 수행처 <도솔암>이 그 첫 목표다.

  [두류산일록]에 등장하는 <도솔암>과 <상무주암>에도 들를 예정이다.

  그래서 차량 한 대를 실상사에 두고 음정으로 올라갔다.

 

 

 

 

 

 

  솔밭길을 걸어 임도에 이르니 겨울이 고픈 지리에 눈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 코스는 눈이 내리고 눈보라가 치는 날 쌓인 눈을 발로 차고 걸을 때 묘미가 있다.

  눈이 살짝 내려 반쯤은 녹고 반쯤은 얼어 낙엽길과 너덜길은 매우 미끄러웠다.

 

 

 

 

 

 

도솔암

 

 

도솔암

 

 

도솔암

 

 

 

 

드디어 도솔암에 이르렀다. 출발 중량(22kg)이 무거운 <둘리>님은 배낭을 내려놓자마자 나타나니 힘이 정말 좋다는 생각을 했다.

 

兜率庵에서 默契 <印悟>스님이 수행했다는 내용이 감수재 박여량이 [두류산일록]에서 언급한 것으로 미루어 유학자들에게도 공경 받았던 인물로 높은 정신세계를 가지고 있었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구국의 전선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아마 왕실이나 지배계급을 위해서라기보다는 민초들의 무수한 주검을 보다 못해 조일전쟁에 뛰어들었을 것이다.

 

印悟 : 자 묵계(默契). 호 청매(靑梅). 휴정(休靜)의 제자이다. 1592(선조25) 임진왜란 때 3년 동안 의승장(義僧將)으로 왜적과 싸워 공을 세웠다. 왜적이 물러가자 부안(扶安) 요차봉(了嵯峯)의 마천대(摩天臺) 기슭에 월명암(月明庵)을 짓고 살다가, 지리산(智異山) 연곡사(鷰谷寺)로 옮겨 거기에서 말년을 보냈다. 저서에 청매집(靑梅集)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인오 [印悟]

 

[두류산일록] 경술(1610) 94일 을사일 맑음

 

西望百里餘有新刱蘭若二在無住之西曰靈源在直嶺之西曰兜率率乃僧舍印悟所築而自居者也悟以吾儒書爲世俗文只以識佛經爲諸僧立赤幟足跡不出洞門云

 

서쪽으로 1백여 리쯤 되는 곳을 바라보니 새로 지은 두 절 이 있는데, 무주암 서쪽에 있는 절을 영원암(靈源庵)’이라 하고, 직령(直嶺) 서쪽에 있는 절을 도솔암(兜率庵)’이라 하였다. 도솔암은 승려들이 수행하는 집으로 인오(印悟)가 지어 살고 있는 곳이다. 인오는 우리 유가의 글을 세속의 문장으로 여겨, 단지 불경(佛經)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여러 승려를 위하여 암자 앞에 붉은 깃발을 세워두었고, 발자취가 동구 밖으로 나간 적이 없다고 한다.

 

두류산일록 9月 五日의 기록에 '사찰로써 말한다면 금대암무주암두류암 외에 영원암도솔암상류암(上流庵)대승암(大乘庵) 등은 예전에 없었던 절이다.'라는 기록으로 미루어 영원암과 도솔암은 왜란 이후에 세워진 것 같다. 박여량이 20대에 '정덕옹과 금대암안국암(安國庵)군자사무주암 등의 여러 절에서 글을 읽었고 두류암에도 다녀갔다.'고 했으니 사실에 근거한 기록일 것이다.

 

 

 

 

 

 

 

  멀리 보이는 영원사를 핸폰으로 스캔한 후 영원사 능선으로 올라갔다.

  능선에 닿아 진정화님은 별바위등까지 다녀왔고 나는 망설이다가 배낭을 메고 내려섰다.

 

  눈이 없다 생각하고 캠프라인을 신고 왔다면 칠암자 고난의 행군을 했을 것이다.

  산행기에서만 보았던 이 길은 생각보다 길었고 두 군데는 위험한 구간도 있었다.

 

 

 

 

 

 

 

 

 

 

 

 

 

罰바위(사진 김자준님)

 

 

 

 

 

 

 

 

 

 

 

 

 

 

 

 

 

 

 

 

 

3. 눈이 내리는 칠암자 길

 

  해가 질 무렵에야 간신히 숙영지에 도착했다.

 

  시계가 흐려 조망도 일몰도 없었지만 산죽길을 헤치고 해질 무렵에 이곳에 서니 반야봉은 코앞에 있었고

  동쪽으로는 멀리 동부능선과 천왕봉이, 서쪽으로는 서북능선이 머지 않은 곳에 있었고 지리 전체가 한눈에 들어왔다.

  낙낙장송 또한 일품이었는데 바위에 옹골차게 뿌리를 내렸고 오랜 세월 고난의 흔적이 온몸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이곳까지 오면서 산죽길을 많이 지나왔는데 일부 구간은  이전에 이미 고사했고

  죽실이 일부 매달려 바람에 하늘거리는 것으로 보아 작년에 꽃이 핀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했다.

  '대나무에 꽃이 피면 죽는다.' 라는 삼필사설을 생각하니 사람의 삶도 유한하기에 인생무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잠시 감수재 박여량의 포로가 되었으니 [두류산일록]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자신을 포로로 삼는 것보다 선인의 글에 포로가 되어 시간 여행을 하는 것은 어떠하리...

 

 

 

 

 

 

 

 

 

 

 

 

 

 

 

 

 

 

 

 

 

 

 

 

 

 

 

 

 

 

 

 

 

상무주암의 창건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예전 무주암으로 불렸다고 한다. '無住는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의 장엄정토분(莊嚴淨土分)에 나오는 '應無所住 以生其心'[마땅히 머무는 바가 없어야 그 마음이 나온다]에서 따온 말로 '無住란 사람의 본성이 찰나마다 얽매이지 않는다'는 뜻이니, '찰나마다 어떤 생각이 일어나도 그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한 찰라라도 얽매이게 되면 모든 찰나에 얽매이게 되니 이것을 속박이라고 한다. 모든 것에서 어떤 찰나에도 얽매이지 않으면 속박이 없으니 그래서 무주를 근본으로 삼는다'는 의미이다. <김천령의 지리오지암자기행>[펌]

 

 

♣ 上住庵 :  건립시기 고려 중엽 12세기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인 해인사의 말사이다. 고려 중기에 보조국사()가 약간의 수행승들과 함께 창건하고 일체의 바깥 인연을 끊고 내관()에만 힘썼다. 이 때 보조국사는 『대혜보각선사어록(錄)』 가운데 “선이란 고요한 곳에도 있지 않고 또한 시끄러운 곳에도 있지 않고 사량분별()하는 그 어느 곳에도 있지 않다.”고 하는 글귀를 읽고 크게 깨달았다고 한다. 그 뒤 1200년에 조계산 송광사로 옮겨 수선사()를 만들었다. 보조국사의 대오 이후 이 절은 성지화 되어 많은 승려들의 수행처가 되었으나 역사는 뚜렷이 전하지 않는다. 현존하는 당우는 인법당()만이 있으며, 절 왼편에는 작고 불완전한 삼층석탑 1기가 있다. 이 탑은 고려 말의 고승인 각운()의 필단사리탑()이다. 각운이 『선문염송설화()』30권의 저술을 완료하였을 때 붓통 속에 떨어졌다는 사리를 봉안한 탑으로서 서광을 발하였다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상무주암 [上無住庵]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아무런 인기척이 없는 상무주암을 지나며

  釋氏의 진리는 무지한 나를 나무라는 말인지 자유롭게 살라는 말인지 아리까리하지만

  '入此門內 莫存知解' '이 문안에 들어서면 모든 지식과 견해 놓아버려라'고 하였으니 무념무상할 뿐이다. 

 

 

 

 

 

 

 

 

 

 

 

 

 

 

 

  문수암을 출발하는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만약 지리에 눈이 없다고 한숨만 쉬고 길을 나서지 않았다면 이 풍광을 어찌 만날 수 있으랴.

  삼불암를 지나면서 눈발이 굵어지기 시작하여 암자를 올려다보니 한 폭의 그림을 연출했다.

 

 

 

 

 

 

 

 

 

 

 

 

 

 

 

 

 

 

 

 

 

 

 

 

문수암에서 최종 목적지 눈 내리는 실상사에 쉼없이 내려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산행을 종료했다. 영원사는 멀리서만 바라보았고 약수암은 그냥 지나쳤으니 칠암자 순례산행이라고는 할 수는 없다. 옛 사람은 이미 갔지만 박여량선생의 七絶이 한 수 남았으니 오늘의 산행이 헛된 걸음은 아니었다.

 

 

贈上無住僧詩 : 상무주암 스님에게 준 시

 

박여량(1554~1611)

 

雨後晴嵐翠似蒸 : 비 개인 뒤 푸른 빛 기운이 피어나는데

林間忽見上方僧 : 숲 속에서 문득 상무주암 승려 만났네

從容話及頭流約 : 조용히 두류산에 함께하자고 약속하니

身在雲山第一層 : 이 몸은 구름이 서린 제일봉에 있구나

 

 

 

 

 

 

 

 

 

  일행을 태우고 인월을 에둘러 함양 터미널에 내려주고 급히 좌회전하여 비 내리는 학사루를 올려다보니 중년의 점필재가 홀로 앉아 있더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