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산행기록

어찌 도리행화와 봄을 다투랴(160220~0221)

도솔산인 2016. 2. 22. 06:28

 

매화는 도리행화와 봄을 다투지 않는다(160220~0221)

 

  

▣ 일   시 : 2016년 02월 20일 ~ 02월 21일

▣ 코   스 : 안한수내마을 - 절터골(우골) - 전망바위 - 선교사 폐별장 - 좌골 - 안한수내마을

▣ 인   원 : 6명(미산님, 진정화님, 둘리님, 덕자님+1)

▣ 날   씨 : 아침 최저 기온 영하6도

 

 

 

구례 시외버스 터미널에 모여 한수교에서 좌틀 한수 안골 마을에 차를 대고

마을길 어귀 산행 초입에 半開한 靑梅를 보고 마음은 온통 南冥梅를 향했다.

 

자연은 질서가 있어서 해와 달이 어김없이 뜨고 지면서 봄으로 치닫고 있다.

우렁찬 한수 개울 물소리를 들으며 고로쇠 작업 길을 따라 천천히 올라갔다.

 

화전민들이 일군 따비밭과 다랭이논에는 인공으로 재배한 고로쇠나무마다

호스가 달린 빨대를 꽉 물고 겨울 끝자락에서 춘풍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인간이 불과 도구를 사용하면서 만물을 지배하고 약탈하지 않는 것이 없으니

땅을 쥐락펴락하면서 나무의 생명을 주관하고 고로쇠에게도 헌수를 강요한다.

 

만약 神이 있다면 인간들의 凶暴한 처사에 대해 是非를 가리겠지만

신은 사람들이 신고 다니거나 신발장에 모두들 모여 있으니 말이다.

고로쇠야 애닳고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 타고난 운명대로 살거라.

 

  

 

 

 

 

 

 

 

 

 

 

노고단에에서 남쪽으로 뻗어내린 산줄기는 왕시루봉에서 멈추었다가

좌로는 봉애능선 우로는 왕시루봉 능선이 이어져 섬진강에 와 닿는다.

 

그 사이 지능선 거대한 巖塊 아래 닭 울음과 개 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에

하룻밤 묵어갈 집을 짓고 미세 먼지로 가득한 희미한 섬진강을 내려다 보았다.

 

이정도면 저승갈 때 서운치 않을 만큼 산행을 했으니 아쉬울 것도 없다.

이 길고 긴 외로운 彷徨의 끝은 어디이고 언제쯤 멈출 것인가에 대하여

생각하고 생각하다 일행들과 떨어져서 洋夷 선교사의 폐별장을 찾았다.

 

 

 

 

 

 

 

 

우리 땅 염험한 지리산 높은 곳 왕시루봉에 서양의 神을 모시고 들어온 사람들의 별장이 있다니

신기한 것도 없었고 이미 낡아 허물어지기 직전의 건조물을 바라보는 느낌은 곧 바로 일그러졌다.

몇 푼의 돈에 가래로 터를 닦고 지게로 자재를 운반했을 민초들의 고통이 눈에 선했기 때문이다.

 

천년을 버텨온 사찰과는 달리 폐별장 위치는 왕시루봉 아래에 있어 곳곳에 물이 솟아나는 수맥이 흐르는 곳이다.

서양의 신을 섬기는 자들일지라도 사람이 살 수 없는 멧돼지 목욕탕에 집을 지었으니 소멸이야 자연의 섭리이다.

 

출입 제한 구역의 선교사 별장에는 치외법권 특혜를 주고 내국인의 출입은 불법이라고 하며

자기땅에 살면서 출입을 못하게 하니 동서고금 어느 나라 법에 자국민을 차별한다는 말인가?

 

그러고도 지리산을 좀먹었던 외세의 종교 침략을 유적지라고 논하고 있으니 가당치 않은 일이다.

왕시루봉 유적지에 대한 설명이 관리동 건물 벽에 너스레 붙어있지만 읽어보지도 않고 돌아섰다.

 

 

 

 

 

 

 

 

 

 

 

 

 

 

이 과자를 아시나요? 먹어봐야 옛맛을 안다.

 

 

초저녁 기온이 떨어지고 눈발이 성성 날리더니 동산 위에 둥근 달이 떠올랐다.

정월 대보름이 곧 내일 모레이니 등을 밝히지 않아도 막영지의 주변이 훤했다.

섬진강의 윤곽과 강변의 작은 마을, 심지어 하동의 불빛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10시가 조금 넘어 자리를 罷했고 솔바람 소리를 들으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마 오늘쯤 덕산의 산천재 남명매가 꽃망울을 터트렸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3시에 잠이 깼고 일행이 불편할 것 같아서 3시간 반이나 오래 여명을 기다렸다.

젤트 안이 밝아져서 문을 여니 어제 밤 솔바람의 주인공이 떡 버티고 서있었다

동녘 하늘은 이미 붉게 물들었고 공교롭게 앉아서 일출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점점 더 밝아오면서 명불허전 一名 왕의 강인 섬진강의 悠長한 모습이 서서히 드러났다.

카메라와 다리를 챙기려고 했지만 부질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 순간 후회가 되었다.

산행에 있어서 중량에 너그럽지 못하니 눈과 마음에 담아도 된다고 억지로 위안을 했다.

 

 

* 왕의 강 : 왕시루봉에서 바라본 섬진강을 줄인 말.

               온라인 상에서 섬진강 사진에 어느 분이 단 댓글에서 유래했다고 함.

 

 

 

 

 

 

 

 

 

 

 

 

 

 

 

일출을 본 후 젤트로 들어와 일행들과 차와 이과도주를 한 잔씩 나누고 몸을 녹였다.

아침을 먹고 암반의 슬랩에 내려가 하늘에 떠있는 구름과 바람과 섬진강을 탐닉했다. 

 

산에 들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운무가 끼나 안개속에서도 즐겁지 않은 때가 없으니

폭풍과 같은 운우지락을 어찌 자연에서 소요하며 진리를 탐구하는 즐거움에 비하랴!

 

천성과 취향이 별나서 나는 오얏꽃 이물질이라는 것을 요즘은 대체적으로 인정한다.

교직의 말미 교감, 교장을 마다하고 天命之九에 덥석 2학년 부장을 한다고 하였으니

열심히 하는 자는 학교가 변할 것이라고 희망을 걸고 교피아들은 전전긍긍하고 있다.

 

71일 방학 중 이틀간 학교에 나갔고 산에 드나들며 나머지는 늦게 둔 아이들을 보살폈다.

연소재는 때가 되면 누구에게나 밥을 해서 주고 간식을 주니 늘 애들 친구들로 북적인다.

애들이 밖에 나가서 노는 것보다 집에서 오순도순 노는 것이 안전하기 때문에 허용한다.

 

어릴 때 성장기에 친구 집에 놀러가서 때가 되면 밥을 주는 집 친구들은 지금들 잘 살고

同務들을 외면했던 부자집 아이들은 동창회도 나오지 못하니 神은 心만 못한 것 아닌가?

 

아쉬운 것이 없는 산행을 했고 고도1,000m 천혜의 막영지를 한 번 돌아보고 내려서는 길은

어제 올라온 길보다는 수월했지만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이따금 흔들리는 시그널 뿐이었다.

  

 

 

 

 

 

 

<미산>선생님

 

 

 

 

안한수내마을 초입에서 연로한 노인 한 분이 쪼그리고 앉아서 고로쇠물을 받고 계셨다.

고도가 높은 곳에서 호스를 타고 내려와 저 파란 물 탱크가 고로쇠 집수 탱크인 셈이다.

날씨가 때에 맞으면 고로쇠물은 이른 봄 한 철 산골 마을의 짭짤한 수입원이 될 것이다.

 

네 병이 들어가는 1박스에 50,000원, 통 값을 제외하면 순 수입은 40,000원쯤 될 것이다.

'하루쯤 숙성을 시키면 맛이 달다.'고 하시고 이방인에게 선뜻 한 바가지나 건내주셨다.

 

돌담 너머 봉고차만한 바위를 장독대로 만들어 쓰는 집이 있어

무용한 바위를 유용하게 쓰는 인간의 지혜를 핸드폰에 담았다.

   

 

 

 

 

 

구례 방향으로 나와 토지면 구산리 [구례 맛집] 토지우리식당에서 점심으로 올갱이국(특10,000원)을 먹고

<미산>님&<자준>씨와 작별하고 일행을 구례구역과 시외버스터미널에 내려주고 섬진강을 따라 내려갔다.

봄은 이미 겨울 산의 계곡을 타고 내려와 섬진강에 모여 본격적인 봄나들이(春游)를 준비하고 있었다.

 

 

 

 

산천재

 

남명매

 

 

 

산을 넘고 계곡을 건너 두 시간을 달려 산천재에 이르러 남명매를 만났다.

만고풍상을 겪은 남명매는 전신에 깁스를 하고도 의연하게 꽃을 피워냈다.

 

남명 사후 산천재를 지킨 守愚堂 최영경 선생은 기축옥사에서 억울한 주검이 되었지만

수우당의 넋은 석양 빛이 내리는 산천재에서 덕천강 바람에 날카로운 쇳소리를 내면서

'매화는 도리행화와 봄을 다투지 않는다.' 라는 叱打가 허공에 맴도는 것 같았다.  끝.

 

 

 

* 崔永慶[1529(중종 24) ~ 1590(선조 23)] 본관은 화순(和順). 자는 효원(孝元), 호는 수우당(守愚堂). 서울 출생. 조식(曺植)의 문인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재질을 보였으며, 여러 번 초시에 합격했으나 복시(覆試)에서 실패하였다. 학행으로 1572(선조 5) 경주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이듬해 주부에 제수되었으나 역시 나가지 않았고, 연이어 수령·도사·장원(掌苑) 등의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1589년 정여립 역옥사건(鄭汝立逆獄事件)이 일어나자 그는 유령의 인물 吉삼봉(吉三峯)으로 무고되어 옥사(獄死)하였다. 당시 정적 정철과의 사이가 특히 좋지 않아 그의 사주로 죽은 것으로 의심을 받았다. 그러나 1591년 신원(伸寃 :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되어 대사헌에 추증되고, 사제(賜祭)의 특전이 베풀어졌다. 1611(광해군 3) 산청의 덕천서원에 배향되었다.[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己丑獄事 : 기축년(己丑年)1589(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이 반란을 꾀하고 있다는 고변(告變)에서 시작해서 1591년까지 그와 연루된 수많은 동인(東人)의 인물들이 희생된 사건이다. 정여립의 사건과 관련된 국문(鞠問)3년 가까이 계속되었는데, 동인 1,000여 명이 화를 입었으며, 동인은 몰락하고 서인이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조식(曺植)의 문인들도 큰 피해를 입었는데, 조식의 제자인 최영경(崔永慶)은 역모의 또 다른 괴수로 인식된 길삼봉(吉三峯)으로 몰려 옥사(獄死)를 당했다. 1591서인들의 지나친 세력 확대에 반발한 선조가 정철을 파직함으로써 기축년에 시작된 옥사(獄事)가 마무리되었다.[출처:두산백과]

 

1588년(무자년) 수우당 최영경선생이 한강寒岡 정구鄭逑선생의 초대로 함안 백매원百梅園을 방문하였을 때 늦게 만개한 매화를 보고 '매화는 도리행화와 봄을 다투지 않는다.'고 叱打를 한 후 도끼로 매화를 자르려고 한 일화가 전해진다.[수우당실기]

 

守愚堂 최영경 선생은 1565년 남명의 문하에 들어 진주 도동에 집을 짓고 守愚堂이라고 이름 하였다. 守愚자신의 재능과 지혜를 감추고 어리석은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즉 스스로 자신이 어리석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재능과 지혜 이상의 것을 욕심내거나 구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남명 제자 5현이 있는데 덕계 오건, 수우당 최영경, 래암 정인홍, 동강 김우옹, 한강 정구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