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산행기록

獨夢雪岳 홀로 설악에서 꿈을 꾸다(150814~16)

도솔산인 2015. 8. 17. 09:26

 

獨夢雪岳 홀로 설악에서 꿈을 꾸다(150814~16)

 

 

일 시 : 20150814~ 16

코 스 : 용대리 - 백담사 - 가야동계곡 - 공가골 - 1275봉 샘터 - 노인봉 - 신선대 - 양폭 - 설악동

인 원 : 홀로

 

 

  본래 흑염소와 동행하려고 했는데 산행 준비도 하지 않고 늑장을 부려 木요일 저녁에 출발하지 못하고 앞으로 당신하고 산에 가는 일 없을 거야.’라는 말을 듣고 새벽 일찍 홀로 떠납니다. 여인 천하에 사는 대한민국 남자들 요즘 힘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밥은 밥이되 밥이 아닌 식사를 제공받아도 요즘 아침 차려주는 아내는 천연기념물이라고 자화자찬을 하니 (*)擧案齊眉(가안제미)의 시대는 이미 지나갔고 甲과 乙의 운명으로 甲을 성심껏 섬기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시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擧案齊眉 : 밥상을 눈 위로 들어올린다. 아내가 남편을 공경하여 받든다는 뜻.

 

 遮蔽一言(차폐일언)하고 홀로 떠나는 시간여행이라 절로 신이 납니다. 솔직히 함께 가자는 것은 인사 치례였고 함께 가도 좋고 안가면 더 좋다는 뜻이었는데 이틀 동안 씻을 물이 없다는 말에 스스로 포기한 것 같습니다. 고속도로는 의외로 길이 술술 뚫리더니 그러나 홍쳔부터 서울에서 춘천을 거쳐 오는 차량으로 인해 병목현상으로 가다 서기를 반복하다 여섯 시간 만에야 용대리에 닿았습니다. 용대리 <메아리황태>에 주차를 하고 12시가 넘어 출발합니다. 마을버스의 거친 호흡소리 다소 불안하기는 하지만 믿고 맡길 수밖에요. 헐떡이는 엔진소리와 백담계곡의 세찬 물소리가 뒤섞여 어느덧 불안감은 사라지고 창밖의 풍광에 마음을 빼앗기고 맙니다.

 

 

수렴동계곡

 

 

 

흑선동계곡 초입

 

 

 

귀때기골 초입

 

 

 '布衣處士로 시골학교에서 선생질이나 하다 늙어가는 억울해. 천하를 두루 주유하며 산수 유람이나 실컷 하면서 즐겁게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지.' 오늘은 배낭이 평소보다 무겁습니다. 23일 두 사람의 식량과 공장비, 흑염소를 위해 과일까지 넣고 지고 나왔으니, 하기사 걷기 싫으면 그 자리에 자리를 펴면 그만, 한 시간쯤 걸으니 영시암, 오세암 방향 한 고개 넘고 두 고개 넘고 그만 주저앉아 참외를 깨어 무는데 첫 고개에서 지나친 세 사람이 지나가면서 오늘의 박지를 물어 보길래 1275봉이라고 답하고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니 가야동으로 간다고 하네요.

 

 

가야동계곡 가는 길

 

 

 구미가 당기지만 나는 내 갈 길로 가련다.’라고 생각하고 참외를 먹다가 집어던지고 갑자기 일어나서 曰 나 마음 변했어. 가야동 call’하고 배낭을 메고 따라붙습니다. 수렴동 희미한 옛길 찾아 작은 지능선에 삐삐선줄 흔적을 발견하고 급경사 비탈을 내리꽂다가 땅벌에 양쪽 다리에 두 방이나 쏘이고 그중 음흉한 놈은 반바지 속으로 들어와 추행을 시도하다 나의 저항에 온몸이 부서져 최후를 맞습니다. 이정도 시련과 고통쯤이야. 그러나 설악산 땅벌은 흑염소보다 몇 배 사납더군요.

 

 

 

 

 

 

 

 

 용대리에서 한 홉의 곡식을 먹었으나 석 되의 땀을 흘린 후에야 도달한 가야동 계곡 明鏡止水에는 옥구슬이 흐르는데... 아기자기한 에 감탄! 또 감탄! 또 감탄! 탄성이 절로 나와 입이 다물어지지 않습니다. 흑염소를 떼어놓고 온 일과 가야동으로 방향을 급선회한 일은 이번 산행에 탁월한 최고의 선택과 판단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천황문

 

 

  천황문 아래 남녀 커플 한 쌍을 만났는데 민망한 듯한 표정이 불편을 주는 것 같아 미안했습니다. 사람도 자연의 일부이거늘 남녀가 자연에서 사랑을 나눈들 어떻습니까?. 만물도 성하면 쇠하듯 사랑도 차면 기울고 변하는 것을... 모든 것은 刹那의 순간인 것을....

 

 인하대 학생의 무덤이 있었던 곳을 향해 묵념을 하고 告示禮 한 잔 따른 후 경치에 다시 취하고 천황문의 거대한 암석괴에 취하고 바람에 취하고 옥구슬이 흐르는 물빛에 취하여 余曰. ‘까이꺼 한 번 왔다 가는 인생! 사는 거 뭐 별거 있어. 이렇게 살다 가면 되는 거지.’

 

 

 

 

 

 

 

 

 

만경대에서 바라본 천황문( 120804~06)

 

 

 천하의 절경에서 잠시 가는 것을 잊고 있다가 이곳은 오늘밤 머무를 곳이 아닐세.’ 하고 벌떡 일어나 천황문을 떠납니다. 1979년 조난당한 사람의 무덤은 200625년이 넘게 흐른 뒤 그 부모가 찾아와 수렴동산장 이경수 어르신과 그 둘째 아들이 파묘를 도와 유골을 가지고 갔다고 합니다. 무덤 이야기를 해줄까하다가 모르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守口如甁(수구여병)하고 돌아섰습니다.

 

 

# 설악산 가야동 천황문에 묻힌 유골 이야기[]

 

 정말 좋은 일을 하신 <송병기>님의 글을 퍼왔습니다. 이런 분들이 있기에 그래도 세상은....

 

  200610월 등산객이 붐비던 수렴동 가는길에 70대 쯤 노부부가 배낭을 메고 두리번거리며 안쓰럽게 등산객을 쳐다보며 무언가 말을 건내고 싶어하는 눈치가 보여 먼저 인사를 건내고 보니 아주 반갑게 기다렸다는 듯이 설악산을 오르는 사연을 이야기한다.

 

  20여 년 전 인하대에 다니던 아들이 산악부에 들어가 설악산 훈련을 하던 중 집중호우가 내리던 날 선배가 아들에게 일행이 저쪽으로 내려간 것 같다고 잘못 일러주었는데 일행은 천불동으로 하산하였고, 아들은 홀로 반대편인 회운각에서 가야동계곡으로 간 것이 화근이 되어 급류에 휩쓸려 수렴동 거의 다가서 천황문앞 계곡에 나뭇가지에 걸려 시신이 반쯤 묻혀있는 상태로 운명을 달리하여, 천황문 근처에 묻어주고 20여년이 지난 지금 노부부는 마음 편히 잘 수가 없어 이날 유골을 정리하여 화장시키려고 천황문에 올라가는 중이라고 사연을 털어놓는데, 칠순 부부가 무슨 힘이 있어 땅을 파헤칠 힘이 없어 부탁해보았으나 몇몇 등산객들이 외면하여 걱정이라고 이야기 하길래 도와드리겠다고 하였는데 막상 걱정이 앞선다.

 

 수렴동에서 노부부와 같이 1박을 하고 새벽에 삽을 들고 가야동계곡을 거슬러 올라가 천황문에 도착하니 묘자리는 간 데 없고 누군가 그 자리에 텐트를 쳤는지 맨들 맨들하게 비박자리처럼 평평해져 노부부의 얼굴은 더 근심으로 가득차보였다. 두시간 묘를 파헤치니 유골이 보이더니, 덜 썩은 자일과 등산화가 보이고 작업은 3시간 만에 끝을 내고. 수습하고 난 후 그 자리를 원상복구 후 소나무를 한 그루 심었다, 이후 비박을 여기서 하지마라는 표시라고 합니다.

 

  수습을 하여 수렴동으로 내려와 점심을 같이 하고 난 후 다시 산행을 해야하는데 노부부가 눈치가 백담사 입구까지 유골을 운반해 주길 바라는 눈치 같아 이왕 발벗고 나선 길에 동행을 해주고 보니 산행은 이미 물건너간 것 같고 결국 속초 화장터까지 모셔드리고 돌아섰는데 노부부가 손에 10만원을 쥐어주는 게 아닌가, 안 받겠다고 몇 번 거절했으나 고마움에 대한 성의로 주머니에 구겨 넣고 돌아오는 길에 휴게소에서 따끈한 커피 한잔을 놓고 오늘 일과를 생각해보니 보람된 일을 한 것 같아 산행은 수포로 돌아갔지만 평생에 한 번도 오지 않을 일을 한 것 같아 잘한 거야. 스스로 되 뇌이면서 오는 길은 왠지 몸이 가벼워진 것 같았다.

 

  아들의 죽음은 자신들이 20년 넘게 산을 즐기다가 아들이 부모의 영향을 받아 산악부에 들어가서 사고가 나고나니 노부부의 자책의 말도 들어보고 노부부는 인공관절을 할 정도로 연골이 닳도록 등산을 다닌 등산의 오랜 배테랑이었습니다만 이후 깨달는 것은 등산도 즐기며 건강을 해칠 정도로 깊게 빠지다보면 오히려 건강에 해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어... 이후 산행은 안전산행과 무리한 운행을 하지 않는 쪽으로 하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다음 글은 윗글을 쓰고 난 후의 <송병기>님의 후기입니다.

 

  정확히 말씀을 드리자면 망자는 25년전 유명을 달리하셨고 인하대 전신인 인하공전 산악부 요원으로 현재 살아계시면 51(금년 60세 추정)입니다. 인하대에서 묘비를 바위 위에 설치했고 매년 추도식을 하였다고 합니다. 금년 집중호우로 비석은 없어졌고 그 당시 인하대 산악부 팀원분들이 이 글을 보시면 학교에 통보하여 주시기바랍니다.

 

  망자의 부모님은 대전에 살고 계십니다. 동생 분은 한전 원자력부 부장님이시고요, 추모비를 다시 건립하여 주시는 것이 도의적으로 당시 팀원 분들 도리이고 학교 도리입니다. 망자가 유명을 달리한 사연은 폭우 속에 산악부의 계도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사망원인을 제공하였다 생각이 듭니다.

 

  이후 부모님 연락이 와 알게 된 사실은 유골은 부모님이 가야동계곡에 산골을 하였다고 합니다. 유골을 캐며 나 자신이 망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습니다, 늘 겸허한 마음으로 산행하시기 바랍니다. 사망 당시 염을 해주시고 유골을 수습할 때 길 안내를 해주신 수렴동대피소 산장주인님과 산장주인 둘째 아드님의 도움도 아울러 감사드립니다.

 

글의 출처 -뽀루산방-

 

 

 

 

 

 

 

 

 

  천황문보다는 못하지만 수십 톤의 돌침대에 욕실이 완비된 특급호텔에 여장을 풀고 어둠이 내리니 소청산장의 불빛이 나뭇가지 틈으로 비집고 들어옵니다. 등불을 끄니 별들이 초롱초롱 빛나는 밤! 아까울 것이 없는 밤입니다. <윤더덕>님은 설악만 300번 이상 산행을 했다하니 설악에 관한한 모르는 것이 없고 막히는 것이 없었습니다. 호텔 요리사 경력도 있어 평소 맛보지 못했던 산해진미를 맛보고 덕분에 호화 보양산행을 한 셈입니다. 아침에는 생물 오징어를 넣은 해물 짬봉은 산중 음식에 있어서도 수준의 차이(?)를 실감했습니다.

 

 

 

 

 

 

막영지 위의 沼

 

 

막영지 아래 沼

 

 

 

 

臥龙沼 I

 

 

臥龙沼 II

 

 

 

 

 

 

 

 

臥龙沼 III

 

 

 와룡소에서 배낭을 내려놓고 한참을 머뭅니다. 물은 낮은 곳으로 저렇게 흘러 자신을 정화하는데 인간은 높은 곳을 향해 짧은 인생을 낭비하며 서로 아귀다툼만 하나니 슬프도다! 老子는 도덕경의 8易性章에서 (*)上善若水라 하였으니 나 또한 물을 보며 자신을 돌아보고 깨닫는 바가 적지 않았으니 홀로 설악에 들어 홀로 유익한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上善若水 : 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故幾於道(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해 주지만 다투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머물기에 그러므로 도에 가깝다)[도덕경8易性章]

 

  노자는 세상을 물처럼 살아야 한다고 하면서 먼저 남과 다투거나 경쟁하지 않는 不爭과 남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임하는 겸손을 강조하였다. 이것은 소극적인 방법이 아니다. 물과 같이 만물을 길러주고 키워주지만 자신의 공을 남과 다투려 하지 않는 것이고 낮은 곳에 임하기에 강이 되고 바다가 될수 있다. 노자는 이어서 물의 정신을 일곱 가리로 예찬하였다. 居善地(낮은 땅에 즐겨 임하고), 心善淵(처럼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與善仁(아낌없이 누구에게나 인을 베풀고), 言善信(말은 훌륭하고 믿음이 있으며), 正善治(깨끗하게 다스려지게 하고), 事善能(일을 맡으면 잘 융화하여 처리하고), 動善時(움직임은 옳다고 여길 때를 고른다)가 바로 水之七善이다.

 

  물처럼 순리대로 살아가는 것이 최선이지만 세상을 살아가는 보통사람은 그렇지 못하다. 공을 세워 자랑하려 하고 남을 깎아내려 그 위에 군림하는 것이 비일비재하다. 그래서 다툼이 끊임없다. 남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이 가장 오래 가는 높은 곳일 수도 있는데 깨닫지 못한다.[]

 

 

 

 

 

 

 

 

 

 

 

 

 

 

 

 

 얼마간 암반지대가 길게 이어지다가 멀리서 인기척이 나고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희운각까지 이어지는 계곡을 버리고 정규등산로로 올라와 오세암 쪽으로 방향을 틉니다. 이곳에서 1275봉 안부 샘터까지를 공가골이라고 합니다. 물이 흐르다가 땅속으로 스며 다시 솟아나기를 반복하며 실계곡이 이어지는데 그렇게 험하지는 않습니다. 한 무리의 산객이 지나가는데 후미에서 한 분이 저를 알아봅니다. 지난 627일 영랑대에서 만난 <無心>님입니다.

 

 

 

 

 

 

欕(엄)나무

 

 

 

 

  공룡능선 샘터 가까이 奇木 한 그루 모진 세월 거칠게 살아온 風霜의 흔적을 온몸으로 표현하며 제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자연이든 인간이든 생명은 귀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만물은 잘나고 못난 것도 없고 귀함도 천함도 없으니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이 순리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샘터에 도착해서 나뭇잎으로 물을 받는 사람들을 헤집고 병을 잘라 물이 흐르도록 만들어 수낭에 물을 채운 후 노인봉으로 올라갑니다. 공룡의 옛길도 만나고 19980731일 안개 속에서 길을 잃었던 설악골 초입으로 360도 사방을 조망할 수 있는 천혜의 조망터에 도착합니다. 시계를 보니 12시가 조금 넘었습니다. 해질 무렵까지 주변을 돌아다니며 조망을 즐깁니다. 외설악은 운무로 가득하고 천변만화 구름의 조화와 자연의 웅대함에 넋을 잃고 맙니다. 1275봉에 걸린 일몰 후에는 속초 시내의 야경이 장관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니 두 분은 귀경을 위해 서둘러 떠났고 노인봉에서 멀리 동해 바다를 바라보니 아득하기만 합니다. 점점 여명이 밝아오지만 일출은 없고 뿌연 안개로 뒤 덮힌 하늘을 멍하게 바라봅니다. 설악에 들어 산과 물을 보았고 이곳에서 머물며 생각을 얻은 것이 있으니 쉽게 노인봉과 일별하고 조용히 자리를 떠납니다.(06:00)

 

 

 

 

 

 

 

 

  신선대까지 한 시간 남짓 걸린 것 같습니다. 배낭을 내려놓고 삼지창을 무더기로 세워놓은 것 같은 첨봉을 바라보며 정도전이 바라본 철령의 멧부리는 이보다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살가운 바람이 소매 속으로 들어오니 살갗은 간지럽고 휴식을 취하며 아침 식사를 못한 대신 닭강정으로 아침 식사를 대신합니다. 이번 산행은 운명처럼 산행을 해온 자신을 돌아보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어머니의 치매와 직장의 번잡한 일을 잠시 잊은 2박3일 이제 세속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 시간, 돌길에 발을 내려놓으며 마음도 내려놓아야겠지요.

 

  신선대 내리막 마지막 암벽구간에서 홍천군청 사재붕씨를 만났습니다. 삼각산 원효봉 산행을 한 것이 마지막이니 얼굴을 본 것이 10년 가까이 되었습니다. 10년 안보는 사이에 머리는 은발이 되었는데 모습은 옛날 그대로입니다. 산에서 만나고 잠시 머물고 떠나는 일들이 번잡해서 이후에 대한민국 공무원산악회를 나가지 않았습니다. 안부를 묻고 연락처를 적고 양해를 구하고 사진을 한 장 찍었습니다.

 

 

대한민국 공무원산악회 사재붕씨

 

 

 

 

천당폭포

 

양폭

 

양폭산장

 

 

 새로 신축하기 전의 양폭산장은 추억이 서린 곳입니다. 여름이면 한 번은 머물렀던 곳 산장지기가 적십자구조대 김용철씨이던가? 밤이면 지붕에 올라가 누워서 별들을 보고, 피너클에 걸린 달을 벗 삼아 노닐었던 일들이 새삼 떠오릅니다. 천불동계곡에는 버들치가 오련폭포를 타고 올라와 유영하며 노니는 곳이죠. 이런 저런 추억들이 아련합니다. 지리에서 만났던 창원 총각을 만나 맥주캔 하나를 얻어 목을 축이고 귀면암에서 한 번 쉬면서 봉정암에서 오신 순례객들에게 주먹밥 하나를 얻어먹었습니다.

 

 

 

오련폭포

 

 

설악산 지게꾼

 

 

 비선대에 내려오니 마침 지게꾼 한 분이 산 같은 짐을 지고 올라옵니다. 무게를 물어보니 80kg 한 번 짐을 나르는데 16,000원을 받아서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내고 일정 금액을 모아지면 장애인 시설에 기부하거나 독거노인을 돕고 도서 벽지를 다니며 봉사활동을 하신답니다. 사람이 살면서 사람답게 사는 것이 중요한데 뭉클한 감동이 전해져 옵니다.

 

 양양에서 호텔을 운영하는 매형을 만나 후진에서 병어회를 먹고 호텔에서 샤워를 한 후 콜택시를 불러 용대리(39,000)로 넘어와 차량을 회수하여 대전으로 내려왔습니다. 2박 3일 동안 홀로 많은 생각을 했고 지난 시간 살아온 날들을 反芻(반추)하고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나에게 산행은 외로움에 사무쳐 홀로 떠나는 여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