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산행기록

佔畢齋 遊頭流錄 少年臺를 찾아서(150822~23)

도솔산인 2015. 8. 23. 21:47

 

佔畢齋 遊頭流錄 少年臺를 찾아서(150822~23)

 

 

▣ 일   시 : 2015년 08월 22일 ~ 23일

▣ 코   스 : 새재 - 소년대 -새재

▣ 인   원 : 6명(미산님, 사니조아, 김선권씨, 김자준씨, 佳人)

 

 

九重深處 永郞岾(20140914)

 

                         銷魂

 

脫俗하려한들 어찌 登仙을 하리요

九重深處에 든들 通俗하기만 하네

 

松栢葉과 九節艸닳여 속을 달래고

般若 바라보며 어리석음을 탓하네

 

 

 

* 김종직의 유두류록 소년대에 대한 내용 발췌

 

[원문]

自此至永郞岾. 道極懸危. 正如封禪儀記 所謂後人見前人履底. 前人見後人頂. 攀挽樹根. 始能下上日已過午始登岾自咸陽望, 此峯最爲峻絶到此 則更仰視天王峯也永郞者新羅花郞之魁領三千徒遨遊山水嘗登此峯故以名焉少年臺在峯側蒼壁萬尋所謂少年豈永郞之徒歟余抱石角下窺。若將墜也。戒從者勿近傍側。時雲霧消散。日脚下垂。山之東西谿谷開豁。望之無雜樹。皆杉檜松枏。槁死骨立者。居三之一。往往間以丹楓。正如圖畫。其在岡脊者。困於風霧。枝榦皆左靡拳曲。雲髮飄颺。云。海松尤多。土人。每秋採之。以充貢額。今歲。無一樹帶殼。苟取盈。則吾民奈何。守令適見之。是則幸也。有草類書帶。柔韌而滑。可藉以坐臥。在在皆然。淸伊以下。多五味子林密。而到此無之。只見獨活,當歸而已。

 

[번역]

 여기에서(청이당) 영랑재까지 길이 지극히 위태롭게 매달려 바로 [봉선의기]에서와 같이 이른바 뒷사람은 앞 사람의 발밑만 보이고 앞 사람은 뒷사람의 정수리만 보면서 나무뿌리를 더위잡고서야 오르내릴 수가 있었다. 해가 이미 오시가 지나서야 비로소 재(영랑재)에 올라갔다. 함양(咸陽)에서 바라보면 이 봉우리가 가장 높게(험준하게) 보이게 되니, 여기에 이르면 다시 천왕봉(天王峯)이 우러러 보인다. 영랑은 신라(新羅) 때 화랑(花郞)의 우두머리였는데, 3천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산수(山水)에서 노닐다가 일찍이 이 봉우리(영랑재)에 올랐었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소년대(少年臺)는 봉우리(영랑재) 곁에 있어 푸른 절벽이 일만 길이나 되었는데, 이른바 소년이란 아마 영랑의 무리였을 것이다. 내가 돌의 모서리를 안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곧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종자(從者)들에게 절벽 난간에 가까이 가지 말도록 주의를 시켰다.

 

 이 때 구름과 안개가 다 사라지고 햇살이 내리비추자, 동서의 계곡들이 모두 환히 트이었으므로, 여기저기를 바라보니, 잡수(雜樹)는 없고 모두가 삼나무[], 노송나무[], 소나무[], 녹나무[]였는데, 말라 죽어서 뼈만 앙상하게 서 있는 것이 3분의 1이나 되었고, 간간이 단풍나무가 섞이어 마치 그림과 같았다.

 

♣ 檜 : 노송나무회(소나무과의 상록 교목), 枏 = 녹나무[]는 1,700m대 고산지대에 자생하지 않는다. 짐작컨데 毬上나무나 가문비나무를 잘못 쓴 것 같다. 

 

그리고 등성이에 있는 나무들은 바람과 안개에 시달리어 가지와 줄기가 모두 왼쪽으로 쏠려 주먹처럼 굽은데다 여인의 아름다운 머리결이 바람에 나부끼는 것 같았다. 중이 말하기를, 여기에는 잣나무[海松]가 더욱 많으므로, 이 고장 사람들이 가을철마다 잣을 채취하여 공액(貢額)에 충당하는데, 금년에는 잣이 달린 나무가 하나도 없으니, 만일 정한 액수대로 다 징수하려 한다면 우리 백성들은 어찌 하겠습니까. 수령(守令)께서 마침 보았으니, 이것은 다행한 일입니다.” 하였다.

 

雲髮 : 여인의 아름다운 머리결. 雲髮飄颺 : 여인의 아름다운 머리결이 바람에 나부끼는 것 같았다.

 

그리고 여기에는 서대초(書帶草)와 같은 풀이 있어 부드럽고 질기면서 매끄러워, 이것을 깔고 앉고 눕고 할 만하였는데, 곳곳이(在在) 다 그러하였다. 청이당 이하로는 오미자(五味子)나무 숲이 많았는데, 여기에 와서는 오미자나무가 없고, 다만 독활(獨活), 당귀(當歸)만이 있을 뿐이었다. [출처:조선시대 유산기 펌]

 

 

시천 덕천강

 

 

 

 

 

 

 

 

 

 

도솔泉은 봉침을 맞고 전립선이 나았는지 물줄기가 자신감이 있고 힘이 넘쳤다.

가뭄에도 물이 마르는 일은 거의 없지만 지난번 왔을 때는 가냘퍼서 안스러웠다.

 

 

 

 

아래 사진들은 소년대라고 추정하는 곳이다.

 

점필재 김종직선생은 답사한 후 僧법종의 설명에 의지해 기록을 남겼다.

선생을 깨워 다시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고 기록에 의지할 수 밖에 없다.

 

 

 

 

푸른 절벽 만길(萬尋)의 萬은 千의 10배인 萬이란 숫자가 아니고 數의 많음을 뜻한다. 여기에서는 매우 높다는  뜻이다.

三은 여러삼, 거듭삼, 九는 여러구, 많을구, 十은 전부십, 百은 많을백, 온갖백, 千은 여러천, 많을천으로 이해하면 된다.

선인들의 기록에 숫자의 의미를 곧이 곧대로 '과장법이라든가? 王뻥을 쳤다.' 는 식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150328~29

 

 

150718~19

 

'등성이에 있는 나무들은 바람과 안개에 시달리어

가지와 줄기가 모두 왼쪽으로 쏠려 주먹처럼 굽은데다

여인의 아름다운 머리결이 바람에 나부끼는 것 같았다.'

 

 

 

 

정오가 지난 시간에 '이 때 구름과 안개가 다 사라지고 햇살이 내리비추자, 동서의 계곡들이 모두 환히 트이었으므로, 여기저기를 바라보니, 잡수(雜樹)는 없고 모두가 삼나무[], 노송나무[], 소나무[], 녹나무[]였는데, 말라 죽어서 뼈만 앙상하게 서 있는 것이 3분의 1이나 되었고, 간간이 단풍나무가 섞이어 마치 그림과 같았다.'

 

녹(柟)나무는 지금 지리동부에 자생하지 않는다. 나무의 이름을 착각한 것인지. 상록침엽수를 대충 가리키는 것인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이곳에 서면 지리의 북쪽 여러 계곡이 환히 보인다. 지금의 식생도 잣나무 소나무 구상나무 가문비나무 단풍나무 말라 죽은 고사목도 점필재의 기록과 별반 다르지 않다. 1618봉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하봉 옛 길 1618봉 안부 현재 무덤 있는 곳에서 사면 길로 우회하여 영랑대에 올랐다가 소년대로 간 것으로 추정되고 다시 영랑대로 돌아와 초암능선 삼거리로 내려갔다.(앞 사람은 뒷사람의 이마만 보면서 나무뿌리를 더위잡고서야 오르내릴 수가 있었다)

 

 하산을 하고 지은 五律 '下山吟'에서 ' '오늘 나막신 한 켜레 다 닳았네.'라는 詩句로 미루어 나막신을 신고 고열암에서 영랑재(대)까지 왔다면 지극히 피곤했을 것이다. 정오가 지나 영랑대에 올랐을 때는 운무로 가득 차있었고 시계가 불투명했는데 이곳에(소년대)에 왔을때는 비로소 구름과 안개가 다 사라지고 날이 개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곳에서 서쪽 계곡은 아마 하백무쯤을, 동쪽은 국골을 가리키는 것 같다.

 

 

 

내가 돌의 모서리를 안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곧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종자(從者)들에게 절벽 난간에 가까이 가지 말도록 주의를 시켰다.

 

말라 죽어서 뼈만 앙상하게 서 있는 것3분의 1이나 되었다

 

 

 

 

 

그늘사초

 

서대초(書帶草)와 같은 풀이 있어 부드럽고 질기면서 매끄러워,

이것을 깔고 앉고 눕고 할 만하였는데, 곳곳이(在在) 다 그러하였다.

 

다만 독활(獨活), 당귀(當歸)만이 있을 뿐이었다.

 

당귀(當歸)는 이미 확인이 되었다. 지리은자가 푸른 절벽 아래로 내려가 당귀잎을 따와서 먹은 일이 몇 번 있다.

독활(獨活)은 산약초를 잘 모르니 확인이 필요하다. 풀의 종류가 서대라고 한 것은 그늘사초가 아닐까 짐작한다.

 

지리 전역에 곳곳에 자생하고 있는 그늘사초를 서대초라고 하는지는 모르나,

지리 동부의 사초는 특히 윤이 나고 아름다우며 앉고 싶고 심지어 눕고 싶다.

 

사초는 민초들의 삶처럼 바람이 부는대로 흔들리고 큰 나무 아래 땅에서 제 몸을 낮추지만 생명력은 강인하다. 

유두류록의 곳곳에서 민초들의 애환과 고충을 사대부 중심이 아닌 피지배계급 입장에서 기록하였다는 점이다. 

 

 

그늘사초 : 짧은 뿌리 줄기에 잎이 여러 개가 모여 달리며 세모진 꽃줄기는 높이 20~40cm 정도로 자란다. 잎은 폭이 1.5~2mm 정도이고 적갈색의 잎 집은 비늘모양으로 갈라진다. 4~6월에 꽃줄기 끝에 3~6개의 잔 이삭이 달리는데 위쪽 끝부분은 선형의 수꽃이 피고, 측면부에는 원주형의 암꽃이 핀다. 암술머리는 3개로 갈라진다. 과포는 3개의 능선이 있으며 열매는 수과로서 과포에 싸여 있다. 전국에 걸쳐 건조한 풀밭이나 산지 숲 속에서 무리를 지어 자라는 다년생 초본이다.[네이버 지식백과]

 

 

 

 

고사목 아래 구절초 일부는 목이 달아났고 꺾이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지난해 산오이풀과 구절초가 만개했었는데 기후 때문인지 사람 때문인지.

 

 

140815~17

 

 

 

 

 

 

 

 

 

 

 

 

 

 

 

 

 

 

 

 

 

 

 

 

 

 

 

 

 

흰동자꽃

 

 

도솔산 연소재 모과

 

 

그냥 무심코 지나쳐오다가 유두류록을 찾아 다시 읽어보고 이곳을 찾았다.

 

개인적인 생각이 지리를 전문 탐구하는 분들에게 누가 되지 않기를 바라며,

지리 숙·식객의 넋두리로 이해하시고 만해의 <심우장>으로 글을 맺습니다.

 

 

 

                                                                           尋牛莊

 

                                                                                    한용운(1879~1944)

 

                                                                        잃은소 없건만은

                                                                        찾을손 우습도다

                                                                        만일 잃을씨 분명타 하면

                                                                        찾은들 지닐소냐

                                                                        차라리 찾지말면

                                                                        또 잃지나 않으리라

 

* 유몽인 유두류록 4/4

 

새벽에 길을 떠나 옹암(甕巖)을 지나 청이당(淸夷堂)에 들어갔다. 숲을 뚫고 돌무더기를 가로질러 영랑대(永郞臺)에 이르렀다. 그늘진 골짜기를 굽어보니 어두컴컴하였다. 정신이 멍하고 현기증이 나서 나무를 잡고 기대섰다. 놀란 마음에 눈이 휘둥그레져 굽어볼 수가 없었다. 영랑은 화랑의 우두머리로 신라시대 사람이다. 3천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산과 바닷가를 마음껏 유람하였다. 우리나라 이름난 강산에 이름을 남기지 않은 곳이 없다.

산등성이를 따라 천왕봉을 가리키며 동쪽으로 나아갔다. 사나운 바람에 나무들이 모두 구부정하였다. 나뭇가지는 산 쪽으로 휘어 있고 이끼가 나무에 덮여 있어, 더부룩한 모양이 마치 사람이 머리를 풀어헤치고 서 있는 것 같았다. 껍질과 잎만 있는 소나무∙잣나무는 속이 텅 빈 채 가지가 사방으로 뻗어 있고, 가지 끝은 아래로 휘어져 땅을 찌르고 있었다. 산이 높을수록 나무는 더욱 작달막하였다. 산 아래에는 짙은 그늘이 푸른빛과 어우러져 있었다. 이곳에 오니 꽃나무 가지에 아직 잎이 나지 않고, 끝에만 쥐의 귀처럼 싹을 쫑긋 내밀고 있었다.

바위틈에 쌓인 눈이 한 자나 되어 한 움큼 집어먹었다. 갈증 난 목을 적실 수 있었다. 겨우 싹이 난 풀이 있었는데 푸른 줄기는 ‘청옥(靑玉)’이라 하고 붉은 줄기는 ‘자옥(紫玉)’이라 하였다. 한 승려가 “이 풀은 달고 부드러워 먹을 수 있습니다”라고 하고서 한 움큼 뜯어 가지고 왔다. 내가 말하기를 “그대가 청옥∙자옥이라고 한 것이 바로 선가(仙家)에서 먹는 요초(瑤草)일세”라고 하고서, 지팡이를 꽂아놓고 손수 한 아름이나 뜯었다.

앞으로 나아가 소년대에 올랐다. 천왕봉을 우러러보니 구름 속에 높이 솟아 있었다. 이곳에는 잡초나 잡목이 없고 푸른 잣나무만 연이어 나 있는데, 눈보라와 비바람에 시달려 앙상한 줄기만 남은 고사목이 10분의 2~3은 되었다. 멀리서 바라보면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노인의 머리 같으니 다 솎아낼 수 없을 듯하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천왕봉은 장로(長老)이고 이 봉우리는 장로를 받들고 있는 소년처럼 생겼기 때문에 ‘소년대’라 이름 붙인 것 같다. 아래로 내려다보니 수많은 봉우리와 골짜기가 주름처럼 펼쳐져 있었다. 이곳에서도 오히려 이러한데, 하물며 제일봉에 올라 바라봄에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