永郞岾에서 부르는 노래 '철령'(150808~09)
▣ 일 시 : 2015년 08월 08일 ~ 09일
▣ 코 스 : 새재 - 영랑재 - 새재
▣ 인 원 : 5명(미산님, 木氏, 雲氏, 般氏)
立秋는 24절기 중 열세 번째 절기이다. 대서(大暑)와 처서(處暑) 사이에 들어 있으며, 음력 7월, 양력 8월 8일경이 된다. 태양의 황경이 135°에 있을 때이다. 입추는 여름이 나고 가을에 접어들었다는 뜻으로, 화성(火星)은 서쪽으로 흘러 있고 미성(尾星)은 중천에 떠 있다.[펌]
立秋가 다가오는데도 더위는 꺾일 줄 모르고 무더위 또 무더위 또 무더위... 심신이 지쳐있을 때 木·雲 부부에게 날아온 갓독 ‘이번주에도 영랑대에 가시나요?’ ‘네’ 영랑재에서 만나자는 나의 주장을 접고 새재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본래 다른 사람들과 산행을 섞지 않는데 木·雲 부부는 2008년 내가 삼신봉에서 골절상을 당해 잠시 쉬고 있을 때 우리 팀에서 산행을 한 일이 있어 다행히 한솥밥을 먹는데 걸림돌이 없었다.
흰동자꽃
치밭에서 배낭 점검에 들어가 겹치는 공장비와 식량을 데포시기고 무더위에 중량에 대한 부담을 줄였다. 배낭이 가벼워진 般씨는 그제야 비로소 제 컨디션을 찾았다. 산의 일이나 사람의 일이나 예측할 수 없는 일이 다반사라 하봉 헬기장에 오르는데 운무가 한줄기 넘어왔다.
천상의 화원은 예상대로 온갖 야생화가 지천으로 피어있어 산객들의 발길이 올무에 걸린 듯 움직일 수 없었다. 사초는 바람의 방향으로 가지런히 누워 초록의 푸르름을 더하고 바람에 실려온 숲의 향기는 흘린 땀을 보상이라도 하듯 상큼하다 못해 이곳이 지리의 구중심처임을 속삭였다. 반바지를 입으니 장단지에 전해오는 사초의 촉감은 온 몸 전체를 휘감아 오그라들게 했다.
나 또한 사초처럼 바람이 멈추면 고개를 들고 바람이 불면 대지에 바짝 엎드릴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나는 왜 그렇게 할 수 없는지. 살을 에는 삭풍이 불어도 제 몸 일부가 떨어져 나가도 나는 굽힐 수 없으니 타고난 기질이 왜 그런지 몰라. 하봉에 오르니 하늘이 열리고 구름 속에서 중봉과 상봉이 하늘을 향해 시커먼 칼날 모양으로 나타나더니 칠선에서 운무가 일어 하봉헬기장으로 넘쳐 흐르는 것이 보였다. 나는 여기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생각을 했다.
* 김종직의 유두류록 영랑재에 대한 기술
自此至永郞岾. 道極懸危. 正如封禪儀記 所謂後人見前人履底. 前人見後人頂. 攀挽樹根. 始能下上. 日已過午。始登岾 自咸陽望。此峯最爲峻絶。到此 則更仰視天王峯也。永郞者。新羅花郞之魁。領三千徒。遨遊山水。嘗登此峯。故以名焉。少年臺。在峯側。蒼壁萬尋。所謂少年。豈永郞之徒歟。余抱石角下窺。若將墜也。戒從者勿近傍側。
여기에서(청이당) 영랑재까지 길이 지극히 위태롭게 매달려 바로 [봉선의기]에서와 같이 이른바 뒷사람은 앞 사람의 발밑만 보이고 앞 사람은 뒷사람의 이마만 보면서 나무뿌리를 더위잡고서야 오르내릴 수가 있었다. 해가 이미 오시가 지나서야 비로소 재(영랑재)에 올라갔다. 함양(咸陽)에서 바라보면 이 봉우리가 가장 높게(험준하게) 보이게 되니, 여기에 이르면 다시 천왕봉(天王峯)이 우러러 보인다. 영랑은 신라(新羅) 때 화랑(花郞)의 우두머리였는데, 3천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산수(山水)에서 노닐다가 일찍이 이 봉우리(영랑재)에 올랐었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소년대(少年臺)는 봉우리(영랑재) 곁에 있어 푸른 절벽이 일만 길이나 되었는데, 이른바 소년이란 아마 영랑의 무리였을 것이다. 내가 돌의 모서리를 안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곧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종자(從者)들에게 절벽 난간에 가까이 가지 말도록 주의를 시켰다. [출처:조선시대 유산기 펌]
* 自~至 : ~에서~까지, 正 : 바로, * 豈~歟 아마 ~일 것이다. 履 : 신발리, 底 : 밑저 攀 : 더위잡을반, 매달릴반, 挽 : 당길만, 끌어당길만, 尋 : 발심(두 팔을 벌린 길이) 其 : 豈: 어조사기, 歟 : ~인가?(의문), ~인저(감탄), ~일 것이다(추측)
김종직의 유두류록에 나오는 永郞岾(영랑재)의 岾는 國字(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한자)로 유두류록에 나오고 금강산 楡岾寺(유점사)에서 보이기는 하지만 용례가 아주 드문 漢字로 선조들이 한자어(인명)와 고유어를 결합하여 만든 신조어 지명에 쓰인 한자로 짐작됩니다. 유두류록 원문에 岾재를 峰봉으로 여러 차례 설명하고 있어 永郞臺, 永郞峰도 무방하나 사림 종조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기록에 따라 영랑재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소년대는 봉우리(영랑재) 곁에 있어 푸른 절벽이 만길'이라고 했으니 옆에 있다는 것은 지나온 길에 있다는 뜻이다. 추정컨데 아래 사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오금이 저려 종자들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했다고 했으니 미루어 생각하건컨데 이곳이 아닐까? 참고로 거창 소년 임만길씨는 이곳을 제 집 드나들 듯 뻔질나게 드나드니 혹 연관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
푸른 절벽이 일만길
초암능선이 내려다 보이는 이곳이
소년대가 아닐까?
‘어려서는 부모님 말씀 안 듣고. 학교를 다니면서는 선생님 말씀 안 듣고. 결혼해서는 집사람 말 안 듣고. 직장 생활을 하면서는 윗사람 말 안 듣고. 병이 들어 침대에 누워서도 의사 말을 듣지 않을 것'을 생각하니 설핏 웃음이 나왔다. 지금 이순간도 나는 국립공원관리공단의 말을 듣고 있지 않다. 허참! 정말 고약한 나로다. 장담할 수 없지만 침대 위에서 죽고 싶지는 않다. 나는 가족에게 폐가 되지 않게 내 생명의 불씨를 스스로 끌 것이다. 순간의 생각이지만 실행이 될지의 여부는 또한 예측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살면서 늘 문제를 만들어서 문제를 해결했고 벼랑 끝에 서서 문제를 푸는 즐거움을 느낀다. 상황의 위태로움을 즐기는 것이니 산행 또한 그런 패턴인 것 같다. 가족들이 알면 깜작 놀랄 일이지만 심설에 자신의 온몸을 던지고는 살아 나와서 희열을 느낀다. 이를 우찌할꼬? 나이를 쳐먹으니 수다 또한 늘어 신상을 털고 세상에 내 패를 보여주며 삶이란 도박을 즐기고 있다. 정의를 위해서는 직장 하나쯤은 걸어도 된다고 생각하고 승리를 위해서는 반칙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재단 이사장에게 ‘내가 이사장을 해야겠다.’고 했고 '경영권 포기각서를 쓰라.'고 했다.
소년대인지 화랑봉인지 올라 상봉과 중봉을 바라보니 섬뜩하게도 날이 선 칼날로 보여 나도 모르게 소름이 돋혀 고개를 돌리고야 말았다. 일행이 뒤따라 올라와 이곳에서 역광으로 사진을 남겼다. 빛은 우리에게 사물을 볼 수 있는 고마움과 어둠 속에서는 사색의 즐거움을 선물한다.
어둠속에서 영랑대 위에서 올려다본 하늘과 하현달과 함께 영랑대의 밤은 그렇게 무르익어 갔다. ‘산보다 사람이 먼저다.’ 라는 생각을 했다. 산이라는 공통분모로 만난 사람들 한분은 한국산악회 출신으로 국내·외 산행을 두루 섭렵했고 청년시절 연하천과 뱀사골 산장에서 머물며 산 생활을 했고, 고 함태식 선생과도 인연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도 지리동부는 처음이라고 했다.
사람을 피해 산에 와서 만나는 사람들은 각양각색이다. 어제 해가 지고 한사람이 올라와 우리가 머물렀던 자리에 난장을 펼려고 했는지 ‘불이 밝아 치밭에서 보인다.’고 핀잔하고 내려가더니 아침에 만났는데 인사를 해도 받지 않고 눈도 마주치지 않고 말도 섞지 않는 사람, 아마 우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어디서 왔냐고 물으니 눈도 섞지 않고 허공에 대고 ‘청이당으로 올라왔고 거제에서 왔다고 하더라.’ 사람을 고의로 외면하는 것이 얼마나 無禮한 일인가?
여명이 밝아 오기 전에 검게 날이 선 상봉 멧부리에 랜턴의 검광이 언듯 보이더니 어둠이 걷히고 드디어 천왕검의 위용이 드러났다. 칼은 칼이 아니고 산인 것을...
암살에 나오는 약산 김원봉 선생은 영화에서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분의 또랑또랑한 연설이 육성을 통해 들리는 듯 나는 누구이고 왜 이곳에 일주일 만에 다시 서있는지 알지 못하겠다.' 사물에는 本末이 있고 일에는 始終이 있다.'는 '성현의 말씀대로 살아가겠다.'고 다짐하고 정도전의 '철령'을 읊조리며 영랑대와 작별하고 돌아섰다.
‘철령에서(鐵嶺)’
鄭道傳(1337~1398)
鐵嶺山高似劒鋩 : 철령의 높은 멧부리는 칼날과도 같은데
海天東望正茫茫 : 동쪽으로 바다와 하늘은 아득하기만 하네
秋風特地吹雙鬢 : 가을바람은 유독 귀밑머리에 불어오는데
驅馬今朝到朔方 : 말을 몰고 오늘 아침 북녘 변방에 왔노라.
정도전(鄭道傳·1342∼1398)은 젊은 時節 反對派에 몰려 全羅道 羅州에 流配되었고 流配에서 풀려난 後에도 首都인 開京으로 가지 못하였다. 三角山 아래 草幕을 짓고 弟子들을 가르치면서 살려 했지만 그를 猜忌하던 宰相(이인임)이 妨害하였다. 富平으로, 金浦로 떠돌던 鄭道傳은 某種의 決心을 하고 1383년 함흥(咸興)으로 이성계(李成桂)를 찾아간다. 이 作品은 이 무렵의 것이 아닌가 싶다.
鐵嶺은 咸鏡道로 가는 길목이다. 칼날처럼 서 있는 고산준령(高山峻嶺), 그리고 하늘과 바다가 잇대어 있는 망망대해(茫茫大海), 이것이 鐵嶺에서 바라보이는 風景일 것이다. 이 風景을 背景으로 하여 허옇게 센 귀밑머리가 바람에 흩날리는 老丈夫가 말을 치달리는 모습이 登場한다. 서거정(徐居正)의 ‘태평한화(太平閑話)’에 鄭道傳의 꿈이 실려있다. “北方에 눈이 막 휘날릴 때 가죽옷을 입고 駿馬에 올라타서 누런 사냥개를 끌고 푸른 사냥매를 팔뚝에 얹은 채 들판을 달리면서 사냥을 하는 것이 가장 즐겁소.” 이러한 豪快한 丈夫의 氣像이 이 詩에서 절로 느껴진다.
출처 : [이종묵의 ‘한시 마중’]<17>대장부의 노래
나는 산에 들어 먹고 마시는 즐거움보다 사물을 관조하고 산의 기운을 느끼고 사색하고 명상하는 것을 좋아한다. 매번 이 바위는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의 형상이더니 오늘은 이상하게 釋氏 모습으로 각인되었다. 영랑대에 올랐을 때가 정오를 지났다고 했으니 체력이 다한 점필재의 눈에는 평범한 船巖으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지리의 구름바다와 하봉 헬기장 해변의 배맨 바위는 억지로 고리가 연결된 셈이다.
잣잎&수국차
山親이 치밭 샘터에 떨어진 단풍잎을 유심히 들여다보다가
내게 말없이 건네줘서 물 위에 띄워 놓고 사진을 찍었다.^^
가을이 내 폰속으로 들어와 선명하게 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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