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友堂記/산행기록

영랑대에서 책을 덮고 칼을 갈다(150731~0802)

도솔산인 2015. 8. 3. 13:25

 

영랑대에서 책을 덮고 칼을 갈다(150731~0802)

 

 

▣ 일   시 : 2015년 07월 31일 ~ 08월 2일

▣ 코   스 : 새재 - 치밭 - 중봉 - 중봉샘 - 상봉 - 중봉 - 하봉 - 영랑대 - 하봉헬기장 - 치밭 - 새재

▣ 인   원 : 3명

 

 

 

남아(南兒) - 한용운(韓龍雲)

 

 

사나이 되었으니 무슨 일을 하여 볼까

밭을 팔아 책을 살까 책을 덮고 칼을 갈까

아마도 칼 차고 글 읽는 것이 대장부인가하노라.

 

 

 

# 1. 다시 읽는 六韜·三略

 

     지금으로부터 15년 전 2000년 겨울 방학 나는 직장에서 처음으로 의사표시를 하였다.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살아온 12년의 세월이 아까워서

     六韜·三略(육도삼략) 원문을 순식간에 읽어 내려갔고 행간의 뜻을 거침없이 머리 속에 정리했다.

 

     所以一擊十也 한 구절의 글귀로 삼지창을 삼아 격랑의 소용돌이 속에 온몸을 던졌다.

     10년 연배가 넘는 선배교사에게 반성문을 받았고 자인서와 왕따포기각서 심지어 사표까지 받았다.

 

     교육계는 마치 식당의 주방과 같아서 겉과 속이 다르며 유치함과 비상식이 판을 치고 지배한다.

     3학년 담임 6년차, 3학년 부장 3년차 교육감은 여름방학이면 3학년 부장에게 격려금을 지급했는데

     교무부장이 해마다 몰래 그 돈을 빼서 교피아(*) 무리들의 회식비로 쓰고 교감을 방패 삼아

     나를 공격한데서 비롯되었다.

 

     ♣ 교피아 : 눈치를 보다가 전교조의 문턱도 넘지 못하고 이익에 혈안이 된 아류의 무리 

 

     십여명이 넘는 교피아 무리들의 수뇌부를 순식간에 궤멸(滅)시키고 학교라는 뒷골목의 覇者(패자)가 되었다.

     후에 들으니 당시 교감은 퇴직의 결심까지 했던 것 같다. 얼마나 부끄러운 나의 자화상인가?

 

     퇴근 길에 읍내 계룡서점에서 정관정요, 육도삼략, 약산김원봉평전을 샀다.

     나는 진정 교육자인지 아니면 정치 교사인지 의심스럽다.

     2015년 7월 18일 나는 이사장에게 '나는 교사다. 당신의 신하가 아니다.' 라고 했고

     그에게 '다치지 말고 학교 일에서 손을 떼고 계룡시 두계에서 草野에 은거하라.'고 했으니

     앞으로 지켜볼 일이다.

    

 

 

 

 

 

 

 

 

 

 

 

 

# 2. 10년만에 흑염소와 천왕봉에 서다.

 

     늦깎이로 교직에 들어가 30년 가까이 몸담고 있지만

     나는 결혼이라는 전제 조건으로 그녀를 선택했고 흑염소는 내게 빅딜을 제안했다.

     말하자면 교직은 그녀의 선택이었고 나는 타의로 길고도 어려운 여행을 한셈이다.

    

     모난 돌은 수많은 釘에 모진 시련을 겪었어도 꺾이지 않았고 굽힐 수 없었다.

     나의 타고난 불같은 성정을 주체할 수 없어 산에 들었고 고뇌와 사색, 번민의 산행을 하였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당시는 중학교가 시험을 치르고 입학을 하던시절이라 담임은 과외를 했다.

     우리집은 형편이 어려워 일일 시험지로 공부했고 동네 상고 학생이 주산을 가르쳐 주산을 배웠다.

 

     교육청에서 보는 일제고사외에는 학급에서의 1등은 늘 과외를 하는 학생들의 차지였다.

     시험을 보면 나는 암산으로 담임의 성적일람표를 작성했고 다른 반은 물론 전교의 성적을 계산하기 일쑤였다.

     담임은 시험을 볼 때마다 나를 부려먹더니 우등상을 부자집 아이에게 하사하고 나를 烹시키고 미안했던지 충무상을 주더라. 

     어린 나이에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 일을 겪었고 그 상처와 분노는 평생 나를 지배했다.  

     나는 지금도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평정심을 잃는다.

 

     교육청에서 7월 22, 23, 24일 1차 감사 29, 30일 2차 감사를 나왔고 

     흑염소는 아이들과 지리산으로 휴가를 가고 나는 학교에 발목이 묶였다.

     31일 금요일 감사반 직원이 휴가를 가고 하루 쉰다고 하여 지리로 향했다.

     흑염소와 천왕봉[상봉]에 가본 것이 10년이 넘은 것 같다.

 

     중봉샘에 내려가 점심도 먹고 흑염소 濯足도 해주고 커피도 타줬다.

     김선권씨는 수낭에 물을 채워 중봉으로 우리 부부는 상봉을 향했다.   

 

 

 

 

 

 

 

 

 

흑염소는 10년만에 상봉에 섰다. 

 

 

     평생 방황하며 사는 남편을 바라보는 흑염소는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의리와 명분을 중시하는 내게 사랑을 갈구하지만 나는 그와 평친이길 원하고 그는 앤이길 바란다.

     홀시어머니를 모시고 장손부의 역할을 하는 것만해도 고맙고

     26살(소엽) 14살(둘렵) 9살(승학) 삼남매를 낳고 길러준 것만 해도 감사할 따름이다.

 

     10년만에 흑염소 천왕봉 가는 길은 순탄치 않았다.

     써리봉까지는 수월했지만 중봉과 상봉의 된비알 써미트는 역부족이었다.

 

     2002년 둘렵이를 낳고 잠시 산에 함께 다니며

     설악산 서북&공룡능선을 종주했고 내설악과 동계 가야동 계곡, 그리고 지리산 주능에 몇 번 간 적이 있다.

     아무튼 10명 가까운 직원을 거느리는 오너로 천왕봉은 이번 산행의 첫번째 목적지인 것이다.

 

     천왕봉에는 인증샷을 하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려야했고

     차례가 되었을 때 정상석 뒤에서 얼쩡거리는 사람들을 몰아내고 인증샷을 남겼다.

     내가 '내 폰에 찍혀 죽고 싶지 않으면 비켜달라.'는 큰 소리에

     흑염소는 내심 미소를 지었지만 근엄한 표정으로 인증샷을 남겼다.

 

     중봉으로 돌아오며 전화를 하니 김선권씨는 8리터가 넘는 물을 지고 중봉에 올라가 있었다.

     선권씨는 2008년 사월초파일 대화종주를 하며 처음 만났고 나와는 10년 차이가 나는 忘年之友다.

     본관은 光山人 沙溪 金長生선생의 후손으로 평소 말이 없으며 사리가 있고 생각이 깊은 친구다.

     산에서 경조부박(輕佻浮薄)한 사람들과 만나면 아예 말을 섞지 않아서 상대를 곤혹스럽게 하기도 한다. 

 

 

 

 

 

 

 

 

# 3. 영랑대 가는 길

 

     중봉에서 30분 넘게 휴식을 취하였다.

     걸을 때는 땀이 비오듯 하다가도 잠시 앉으면 땀이 식어 한증막과 냉탕을 번갈아 들어가는 기분이다.

 

     나는 그동안 10년 넘게 사계절 내내 영랑대 한 곳만을 다녔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서있던 고사목은 사그러지고 쓰러지고 넘어졌지만

     자연의 依舊(의구)함을 어찌 글과 말[筆舌]로 표현할 수 있으랴?

     莎草(사초)는 바람결에 누워 潤(윤)이 찰지게 흐르고 風倒木(풍도목)으로 인해 길이 변한 곳은 여러 곳이다.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을 처음 접하고 점필재 루트를 발굴한 이들의 노고에 크게 감사하지만

     오류의 가능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는데도 아무 답이 없으니 의견을 말한 내가 무색하기 이를데 없다.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는 성현의 말씀이 여기에 해당된다.

 

     드디어 천상의 화원 동부능선에 접어들었다.

     온갖 기화요초는 자태를 뽑내고 牧隱 李穡 육우당기의 한 구절이 하봉헬기장에 펼쳐져 있었다.

 

      風有八方 : 바람이 팔방(八方)이 있어서
      各以時至 : 각각 때에 맞게 불어오는 것은
      則吾之無妄作也 : 내가 망녕되게 행동함이 없음이요
      花有四時各以類聚 : 꽃은 사시(四時)가 있어 각각 종류대로 모이는 것은
      則吾之無失序也 : 내가 차례(질서)를 잃음이 없음이다.

 

      능선 길의  바람은 나를 영랑대로 부르고 온갖 꽃들은 나에게 눈길을 잡았다.

      흑염소를 앞세우고 걷는 길 체력이 다하고 다리의 힘이 풀렸는지 힘들어하더라.

      하봉 찍고 다시 전망바위에 오르며 아마 둘 중 하나는 소년대라는 생각을 했다.

      

     

 

 

 

 

 

 

 

 

 

 

 

      흑염소는 영랑대에 올라 내가 왜 이곳을 찾았는지 비로소 이해하더라.

      석양의 구름을 만든 바람이 소매 속으로 들어와 금방이라도 날개가 돋아날 것 같았다.

      왜 점필재는 이곳에서 시를 남기지 않았는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해가 지자 달뜨기 능선에서 달이 떠올랐다.

      毬上木(구상목)과 가문비나무에 스치는 바람소리는 파도소리가 되었고

      마음속에는 운해가 가득 넘쳐 흘러 하봉 헬기장으로 바닷물 넘치는 소리가 들렸다.

 

      점필재 김종직선생을 안내한 僧 법종(法宗)은 태고적 이야기를 끄집어내어

      蟹(방해)가 넘던 고개라 해유령(蟹踰嶺)이라고 한 것은 어쩌면 설득력이 떨어진다.

      차라리 구름바다가 넘쳐 흘러 해유령(海踰嶺)이라고 하는 것이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하로동선님 의견]

      믿거나 말거나 점필재는 법종(法宗)의 말을 인용, 그냥 그대로 옮겨 유두류록에 남겼다.

 

      비가 오거나 안개가 끼는 경우가 태반인 이곳

      영랑대는 흔쾌히 흑염소의 입성을 환영하는 듯 일몰과 달과 별, 일출을 허락했다. 

      흑염소는 파도소리에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고 젤트밖 중천에 떠있는 밤손님 永朗을 만났더라.  

      

 

 

 

 

 

 

 

 

 

 

 

 

      아침의 일출은 뜨듯미지근하고 흐리멍텅하고 멍청했다.

      이왕이면 흑염소에게 찬란한 일출을 보여주고 싶었지만 하늘이 하는 일이라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배낭을 꾸리고 영랑대 안부에 머물고 있는 夏爐冬扇님와 河대장에게 가서 출발을 알리고 永郞岾를 떠났다.

 

      일순간 바람이 일더니 운무가 몰려와 구름과 안개가 어둡게 하늘을 뒤덮었다.

      하봉 안부 지나는 길에 지리의 명사 슬이양을 만나 커피를 얻어먹었으니 이번에는 내가 반갑지 않은 손님이 되었다.

 

 

 

 

 

 

 

 

 

 

 

 

# 4. 내가 바로 깔치마오더라.

 

      깔치마오는 경상도 방언으로 '섣불리 건드릴 수 없는 존재'라는 뜻의 명사다.

      '보통은 깡다구가 쎈 사람' '성질이 더러워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좋은 표현으로 '특정영역에서 독보적인 존재' '카리스마의 끝판왕' '카리스마의 종결자'라고 해석하는 이도 있다.[지리99]

 

      사립학교에서 평교사가 재단 이사장에게 '학교 일에 손을 떼라.' 고 하였고

      그를 따르는 '교피아 잔당들에게 학교를 떠나라.'고 통고하였으니 내가 바로 깔치마오더라.

 

      烹頭耳熟(팽두이숙)은 '머리를 삶으면 귀때기가 익는다는 뜻'이다.

      머리가 제 발로 가마솥 끓는 물속으로 뛰어들었으니 귀가 저절로 익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대의명분과 의리 대 자신의 이익만을 중히 여기는 학문의 충돌은 시간이 지나면 결말이 날 것이다.

      지리동부의 '깔치마오'라는 이름으로 나는 계란으로 바위를 깰 것이다.

 

      (*)흑염소 부인은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리산에 따라 온 것을 후회하더라. 끝.

 

      (*) 흑염소 : 어느해 추석 명절 지리산에 갈 궁리를 하다가 장모님께 흑염소 중탕을 해드린다는 핑계로 지리산에 왔는데

          후에 집사람이 장모님께 흑염소 값을 중간에서 몰래 받아 쓴데서 흑염소라고 稱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