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盈科後進/고전향기

[고전명구 248] 숨어 사는 법

도솔산인 2014. 10. 23. 08:23

 

[고전명구 248] 숨어 사는 법

 

 

닦는 일 없이 숨기만 한다면 암흑 세상이 내 집이 될 뿐이요,

기르는 일 없이 조용히 있기만 한다면 적막 강산에 빠지게 될 뿐이다.

 

無修而晦焉, 則混於黮黯而已矣。無養而靜焉, 則淪於枯寂而已矣

 

- 장유(張維, 1587~1638)

「회정당기(晦靜堂記)」

『계곡선생집(谿谷先生集)』

 

 

晦 : 그믐회, 어두울회, 어둠회, 감출회, 숨길회, 어리석을회, 조금회, 시들회

混 : 섞을혼, 흐릴혼, 합할혼, 흐를혼, 클혼, 나누어지지않을혼, 사물의형용혼(물솟는모양, 물흐르는 모양 등), 오랑캐이름곤

黮 : 검을담, 새까말담, 검누른빛담, 사사로울담, 구름따위의 검은모양담, 오디심, 어두울탐

黯 : 어두을암, 검을암, 슬퍼할암, 흐려서 밝지못한 모양암

  

 

잠곡(潛谷) 김육(金堉, 1580~1658)이 가평(加平)의 산골에 들어가 살면서 지은 집에 회정당(晦靜堂)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회정의 뜻은 “숨어 살면서[晦] 조용히 기다린다.[靜]”는 역서(易書)의 점사(占辭)에서 취한 말로, 옛 선비들이 혼돈한 세상에서 택한 처신의 한 방도이며, 자신을 온전히 지키려는 의지가 담긴 말입니다.

김육의 벗인 계곡(雞谷) 장유가 이 회정당에 기문(記文)을 지어 주었는데, 윗글은 기문의 한 구절입니다. 계곡은 벗의 뜻에 깊이 동조하고 그렇게 하지 못하는 자신을 부끄러워하며 책망하기까지 합니다.

 

“재능을 인정받지 못하는 암울한 시대에 처했으면서도 헛된 명예 때문에 잘못되는 일을 면하지 못하였고 보면 회(晦)에 부끄럽고, 진실되게 행동하지 못한 나머지 걱정과 후회가 걸핏하면 뒤따라오곤 하니 이런 점에서는 정(靜)에 부끄럽다.”

 

그러나 계곡은 벗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하는데, 이것이 이 기문을 지은 뜻이기도 합니다.

“종적을 숨기고 사는 것이 본래 좋기는 하지만 닦는 일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요, 조용히 때를 기다리는 것이 물론 좋기는 하지만 기르는 일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닦는 일이 없이 숨기만 한다면 암흑 세상이 내 집이 될 뿐이요, 기르는 일이 없이 조용히 있기만 한다면 적막강산에 빠지게 될 뿐이다.”

 

한편 계곡은 이미 학문과 인품으로 세인의 중망을 받고 있었던 벗이 회정 속에서 자기의 빛을 감추고만 있을 수는 없으리라고 확신합니다.

“저 천둥과 번개를 보라. 아무도 모르게 잠복해 있다가 급기야 순식간에 번쩍이면서 산악을 뒤흔들고 하늘을 온통 환히 밝히는데, 이 기세는 그 누구도 막을 수가 없지 않은가.”

 

이로부터 십 년 뒤, 과연 계곡의 기대대로 잠곡은 새 조정에 나아갔고 마침내 재상의 자리까지 올라 경세치민(經世治民)을 선도하는 역할을 다하였습니다. 자신의 도리를 지킨다는 소신만 가지고 산수를 즐기면서 유유자적하게 세월을 보내는 듯이 하였지만, 실제로는 끊임없이 덕업을 닦고 길렀음을 입증한 것입니다.

숨어 사는 울울한 처지에서도 미래를 준비하는 긍정적인 우리 선인들의 모습을 한번 돌아보게 됩니다.

 

 

글쓴이 : 오세옥(한국고전번역원 책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