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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칼럼 079] 동방무례지국 유감

도솔산인 2014. 10. 29. 10:34

 

[고전칼럼 079] 동방무례지국 유감

 

 

  우리 민족을 일컬어 2천 5백 년 전 이래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이라고 했다. 동방예의지국은 우리나라를 지칭하는 고유명사이지만 보통명사가 된 지 오래이다. 왜 그럴까? 그거야 당연히 ‘예의가 아주 바른 민족’이니까 그랬을 것이다. 그 유명한 동양 고전 『논어(論語)』「자한(子罕)」에도 나온다. “공자(孔子)께서 구이(九夷)에서 살고 싶다.[子欲居九夷]”고 하셨다.

 

 구이는 바로 동이(東夷), 즉 우리나라를 가리킨다. 속도 모르는 제자가 묻는다. “선생님, 그곳은 누추할 터인데 어떻게 사시겠습니까?[陋 如之何]” 공자는, “군자(君子)가 살면 무슨 누추함이 있겠느냐?[君子居之 何陋之有]”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공야장(公冶長)」에서는 “도(道)가 행해지지 않으니 뗏목을 타고 바다를 항해하려 한다. 나를 따라올 사람은 아마도 유(자로)일 것이다.[道不行 乘桴 浮于海 從我者 其由與]”라고 하셨다. 또한 공자께서는 『예기(禮記)』「잡기 하(雜記下)」에서 “소련과 대련은 상을 잘 치러서, 3일 동안 애통해 했으며, 석 달 동안 게을리하지 않았고, 1년 동안 슬퍼했으며, 3년 동안 근심하였다. 이들이 바로 동이의 아들이다.[少連大連 善居喪 三日不怠 三月不解 朞悲哀 三年憂 東夷之子也]”라고도 말씀하셨다.

 

 한편 『한서(漢書)』「지리지(地理志)」에 기록된 기자(箕子)의 팔조법금(八條法禁) 중 지금 전해지는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하여 갚아 주고, 남에게 상해를 입힌 자는 곡물로 보상하게 하며, 남의 물건을 도둑질한 자는 적몰(籍沒)하여 그 집의 노비로 삼되, 속죄(贖罪)하고자 하는 자는 1인당 50만을 내게 한다.[相殺以當時償殺 相傷以穀償 相盜者男沒入爲其家奴女子爲婢 欲自贖者 人五十萬]”는 이 세 조항만 봐도 당시 고대국가로서 체계와 면모를 갖춘 ‘문명 선진국’이었음을 알 수 있다. 

 

 『대지』의 작가 펄 S. 벅 여사는 『살아있는 갈대』라는 소설 서문에서 “한국은 고상한 사람들이 사는 보석 같은 나라”라고 했으며, 인도의 시성(詩聖) 타고르도 우리나라를 “동방의 등불”이라고 칭송하는 시를 남겼다. 성인 공자를 비롯하여 이런 칭찬을 받았던 동방예의지국의 우리나라가 지금은 과연 어떠한가? 아무나 ‘동방무례지국’(東方無禮之國)이라고 종주먹을 들이대며 비아냥거려도 제대로 반박할 수 없는 나라가 되지 않았는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도처에 ‘예의범절’(禮儀凡節)의 반대말만 무성하게 횡행하고 있다. 삼강오륜(三綱五倫)이 진정 물구나무를 선 때문일까? 대체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의 오륜(五倫)은 어디로 간 것일까? 이웃이나 친구보다도 못한 형제의 불화는 기본일까? 부모와 제 자식을 해치는 일까지 드물지 않다.

 

  하물며 사회생활은 또 어떠한가? 무례(無禮)는 기본이고, 결례(缺禮), 비례(非禮), 실례(失禮), 허례(虛禮) 등이 세 끼 밥 먹듯이 온통 판을 치고 있다. 오죽하면 개그콘서트에서 ‘네 가지’라는 코너가 인기를 끌었을까? 이래서야 어디 동방예의지국이라고 입을 뻥긋이나 할 수 있을까? 근현대 120여 년 동안 굴절된 역사를 겪어 오면서 실종된 인성 교육(人性敎育)의 복원 자체도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지만, 우리는 하루빨리 선조들이 물려준 동방예의지국의 명성(名聲)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그 방법이 고전(古典)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맹자(孟子)』「공손추(公孫丑)」의 사단(四端)이 그것일 것이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사양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無惻隱之心 非人也 無羞惡之心 非人也 無辭讓之心 非人也 無是非之心 非人也]” 그렇다. 인(仁)은 사랑의 마음이며, 의(義)는 올바른 마음이다. 예(禮)는 바른 예의에 사양하는 마음이며, 지(智)는 슬기로운 마음이다. 인의예지, 이 네 가지 정서(情緖)야말로 인륜(人倫)의 기본일 것이다. 그중에서도 예의와 예절은 사람끼리 부대끼며 사는 사회에서는 더욱 중요한 덕목일 것이다. 

 

  우리는 서양의 예절인 매너와 에티켓을 모르면 마치 무식한 사람 취급을 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우리의 ‘것’(문화, 언어, 유산 등)은 이상하게도 우습게보거나 멸시하는 ‘못난 풍조’에 길들여져 있다. 예절은 바로 사회의 불문법이자 올바른 습관이나 버릇이라고 할 수 있다. 시쳇말로 ‘싸가지’가 아닐까? ‘싸가지 있는 사람’이 곧 ‘예절 바른 사람’이다. “힘이 곧 법이자 정의인 세상”은 잘못돼도 크게 잘못된 것이다. 세상이 ‘돈이면 다’라는 극단적인 천민자본주의로 빠르게 치닫고 있다. 미래 사회가 아무리 과학이 발달하고 물질적으로 풍요롭더라도 같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인간에 대한 이해와 정신적인 넉넉함이 없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사람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사람의 도리가 어떠한 것인지, 자기를 희생하고 남을 배려하는 것은 무엇인지, 그 해답을 우리 고전 속에서 찾아야 한다면 잘못된 말일까?

 

  예절이 바로 서야 하고, 예절이 무엇이고 왜 배워서 생활화해야 하는지 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예절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는 말은 고금동서(古今東西)를 막론하고 영원한 진리(眞理)일 것이다. 동방예의지국이라는 상찬(賞讚)을 귀가 아프게 듣고 싶다.

 

 글쓴이 : 최영록  
  • 생활칼럼니스트. 전 동아일보 기자. 전 성균관대 홍보전문위원
  • 주요저서 수필집
    - 『백수의 월요병』, 서울셀렉션, 2005
    - 『나는 휴머니스트다』, 성균관대 출판부, 2008
    - 『은행잎편지 108통』, 이부키, 2009
    - 『어느 백수의 노래』, 부광출판사, 2010 외 다수
    - 문집으로 『어느 쉰둥이들의 쉰 이야기』, 『대숲바람소리』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