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언진(李彦瑱,1740~1766)의 『衚衕居室』
조선 후기 英祖 시대의 譯官 출신 문인이다. 그는 신분이 미천한 탓에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그는 만인의 평등을 주장하였으며, 차별과 억압으로부터 해방된 사회를 꿈꾸었다. 한 마디로 그는 조선의 이단아였고 천재였다. 박지원이 온건한 개혁을 주장했다면, 이언진은 새로운 사회 체제를 수립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혁명적이다.
이언진은 일본에서 돌아온 1764년 이후 자신의 시문을 모아 『松穆館集』을 엮였으나 이 문집은 전하지 않고 있다. 다만 스승인 이용휴의 서문과 여항 시인 김숙이 쓴 발문이 전해지고 있다. 이용휴가 쓴 서문에는 이언진의 독창성, 남다른 학식과 현묘한 사고, 글을 퇴고하는 태도, 미천하고 가난한 그의 처지, 인정받지 못하고 있지만 당대의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그의 문학적 천재성을 두루 언급하고 있다. 김숙의 발문은 이언진 문학의 독창성과 난해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의 대표작 『衚衕居室』은 170수의 연작시다. 호동(衚衕)은 주로 가난한 하층민이 사는 ‘골목길’을 뜻한다. 이 연작시는 6언시이며, 중국 구어인 白話가 도처에 구사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는 이 시집을 통해 신분 해방과 인간 평등의 실현을 추구하고 있으며, 세습적 권력과 지위, 일체의 억압과 지배에 대한 반대를 표명하고 있다. 이 시집에는 신분차별로 인해 이언진이 겪는 內傷과 세상에 대한 不和의 감정이 그대로 표출되고 있다. 동시에 억압받는 하층민의 삶에 대한 시인의 따뜻하고 자별한 눈길과 그들에 대한 신뢰와 연대가 표명되어 있다.
『호동거실』은 미증유의 글쓰기다. 조선시대를 뛰어넘는 해방된 새로운 사회를 꿈꾸었기 때문이다. 또한 골목길의 미학이 구현되고 있다. 호동의 미학은 도시서민, 시정인, 중소상공인, 중인층의 미학이며, 사회적 약자의 미학이며, ‘俗’의 미학이다. 이는 사대부의 미학과 대립하면서 일정한 계급성을 갖고 있다. 그는 사대부의 지배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비록 미적인 방식이지만 시로써 저항하였고, 이런 저항의 과정이자 산물이 『 호동거실』이다. 즉 이 시집은 이언진 자신의 心魂,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서 만든 것이다.
진리는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절대적이지도 않다. 또한 진리는 하나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여럿일 수 있다. 하지만 하나의 담론 체계가 한 사회를 지배할 경우 그 담론 체계가 주장하는 진리가 보편타당한 것으로 통용된다. 나아가 이 지배적인 담론 체계는 자신이 주장하는 진리를 절대화하면서 다른 담론 체계가 제시하는 진리를 배척하거나 억압한다. 조선 후기 주자학이 그렇다.
조선 주자학은 16세기에 退溪, 栗谷을 거치면서 심성론 위주로 내면화, 思辨化의 길을 걸었다. 南冥은 유학의 실천성을 강조하면서 유학의 사변화를 경고했으나, 조선 유학은 남명의 길을 따르지 않고 퇴계와 율곡의 길을 따랐다.
16세기 말 조선의 사상사는 그 내부에 심각한 반성의 기운이 싹텄다. 張維(1587~1638)는 주자학 외에도 불가, 도가, 양명학을 허용하자는 학문의 다양성을 옹호했다. 17세기 전반 象村 申欽(1566~1628) 은 주자학의 理氣論이 보여주는 空理空論的 면모를 비판했다. 이 두 사람은 양명학에 경도되었다.
또 다른 한 사람은 許筠(1569~1618)이다. 그는 명나라의 학술과 사상, 문예의 동향에 해박했으며, 당시 동아시아 사상사의 흐름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의 경우 이탁오, 초횡, 원굉도 등 급진적 성향의 양명학 좌파에 관심 더 보인 것이 특징이다. 이런 이유로 허균은 情을 강조하고 인간의 욕망을 긍정하면서, 禮敎의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분방한 문학을 추구하였다. 그 결과 민간문학과 소설의 의의를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 주자학적 틀에서 벗어난 혁신적인 노선을 취했다.
17세기 후반에는 사상의 통제와 억압이 극심했지만, 새로운 진리를 모색하는 한 인물로는 洪萬宗(1643~1725)이 주목된다. 홍만종은 우리 고유의 海東道家 사상을 발전시켰다. 해동도가는 모화사상과 중화주의를 배격하고 우리나라 고유의 문화와 전통을 옹호했으며, 민중적 삶과 언어인 우리말로 된 노래나 속담, 설화 등에 관심을 보였다. 특히 그는 단군에서 시작된 우리 역사를 중국사와 대등하다고 보았다.
이후 진리인식과 관련해 조선 후기 사상사가 새로운 국면을 보여주는 것은 18세기 후반에 홍대용과 박지원에 이르러서다. 박지원은 주자학을 부정한 것은 아니지만 공리공론적 면모에 대해서는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와 함께 박지원은 管子, 莊子, 불교 등 이단 사상에 관심을 보이면서 사상적 유연성을 도모했다. 儒者였던 박지원은 장자나 불교 등에서 사유방법과 개념을 부분적으로 차용하여 자신의 사상을 풍부하게 하면서 주자학을 혁신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홍대용은 공평무사한 마음으로 뭇 사상의 장점을 두루 받아들일 것(公觀倂受)을 주장하고 ‘兼採竝用을 사상적 테제로 정립하였다. 홍대용은 墨子, 불교, 老莊, 西學, 양명학 등을 배척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 유교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마음을 맑게 만들어 세상을 구제하는 것(澄心求世)으로 그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교의 상대화, 주자학의 독재의 해체를 꾀한 것이다. 그는 또한 ‘人物均 ’의 사상을 수립함으로써 모든 존재는 평등하므로 주체와 타자의 평등성에 대한 사유의 길을 열어 놓았다.
*이언진 시에 나타난 평등의식
호동에 가득한 사람들 그 모두 聖賢
배고파 고통에 시달리고 있어도.
良志와 良能을 지니고 있음을
맹자가 말했고 나 또한 말하네 - <호동거실> 19
골목길에 사는 서민이나 여항인들도 성현이 될 수 있다는 시인데 이는 이언진의 양명학 좌파의 급진적 성향을 보여주고 새로운 진리관의 표명, 새로운 진리인식의 선언이라고 볼 수 있다. 이언진은 신분에 따른 인간의 우열을 인정하지 않았고, 신분의 선험성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가 중인이라는 신분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떵떵거리는 고관대작들
재주며 팔자랑 뭔 상관이람 - <호동거실> 30
이 시는 고관대작들을 비꼬는 시다. 그들이 특별한 재주가 있어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문벌이 좋아 그렇게 된 것이다. 지배계급인 양반 사대부를 공격한 것은 인간의 평등성에 대한 그의 자각 , 신분제 사회의 모순에 대한 통찰과 울분이다.
콧구멍 치들고 주인 뒤를 졸졸 따르니
종이라 불리고 하인이라 불리지
천한 이름 뒤집어쓰고도 고치려 않으니
정말 노예군 정말 노예야 - <호동거실> 51
이 시는 주체성을 갖지 못한 채 주인의 종속적인 존재로 생을 영위하는 노예의 무자각성을 개탄하고 있다. 노예에게 계급의식을 요구한 것이다. 이처럼 이언진은 조선왕조의 신분제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만인의 평등을 사유했다. 그가 18세기 중반 신분제에 대한 새로운 진리인식을 제기한 사실은 주자학적 진리인식과 충돌하게 된다.
*儒 佛 道의 공존 - 진리의 복수성
이언진은 유교만을 절대적 진리성을 담지한 것으로 보지 않았으며, 불교와 도교를 유교와 대등한 진리를 담지한 것으로 보았다.
冠은 儒者요 얼굴은 승려
성씨는 上請의 老子와 같네.
그러니 한 가지로 이름할 수 없고
三敎의 大弟子라 해야 하겠지. - <호동거실> 120
공자와는 世交를 맺었고, 부처는 본래 스승
心法을 간절히 구함은 둘이 똑같지. - <호동거실> 215
老子, 墨子, 刑名家는 저마다 작가
가을꽃은 봄꽃만 못하지 않네. - <호동거실> 216
하나를 뛰어넘어 셋을 아우르니 참으로 快事
스스로 門戶 열어 새로 一家를 이루네 - <호동거실> 217
이언진은 신분제의 이념적 근거인 유교의 독점적 지위를 부정하면서 그것을 해체하기 위해 유교를 불교/도교와 함께 하나로 재정립함과 동시에 유교의 자리에는 주자학 대신에 양명학을 위치시킨다. 특히 양명학 중에도 이탁오의 민중적 지향과 사상적 개방성이 강한 좌파 양명학이다. 또한 유교의 절대적 진리성 해체는 ‘사상의 자유’를 위한 의미있는 진전이었다. 이런 이언진의 다원적 사고의 모색은 미학적 지평의 갱신과 확장을 낳았다.
* 今
이언진은 古가 아니라 今이 미학적 진리임을 확신하였다. 그가 창조해낸 독자적 미학 공간에는 시간적으로는 ‘현대성=당대성’이, 계급적으로는 도시서민적 지향이, 언어적으로는 문어/백화 혼용체가 자리잡고 있다.
시는 투식을, 그림은 격식을 따라선 안 되니
틀을 뒤엎고 관습을 벗어나야지.
앞 聖人이 간 길을 가지 말아야
후대의 진정한 성인이 되리. - <호동거실> 33
다들 옛사람 쥐구멍이나 찾고
지금 사람 다니는 길로 나오려 않으니 원. - <호동거실> 47
* 타자에서 주체로
이언진은 중인 가운데 자신의 타자성을 투철하게 자각함으로써 스스로를 ‘주체’로 轉化해낸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타자성을 ‘자연’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인식론적 轉回를 통해 스스로 주체로 정립해냈다. 이 주체는 사대부라는 주체와 대립하는 주체이며 맞서 싸우는 주체다. 그러면 이언진은 어떻게 스스로 주체를 정립할 수 있었을까. 지식에 대한 끝없는 욕구다. 이언진은 明淸代 서적 중 사상과 자아의 해방을 고취한 책들을 많이 본 것 같다. 특히 이탁오의 사상의 핵심인 자아의 자율성에 대한 존중과 신뢰를 바탕으로 명말청초의 사상사와 문학사를 소화해 낸 것이다.
四方에는 문자의 바다가 있고
上天에는 도서관이 있지.
글을 모르면 옥황상제도 없고
글을 모르면 부처도 없네. - <호동거실> 128
18세기까지 조선 사상사에서 이탁오를 긍정적으로 읽은 사람은 허균, 이용휴, 이언진 밖에없다. 허균이나 이용휴는 신분이 사대부였다. 그래서 그들은 사대부 계급 내부의 자기반성이나 이의제기라는 성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언진의 경우 스승인 이용휴의 ‘主我思想’을 받아들였으나, 자아의 순수성과 자율성은 자기반성이 아니라 신분적 굴종성 내지는 예속성에서 벗어난 자율적인 인간 존재에 대한 옹호가 되었다.
*주체의 공간화
이언진은 ‘호동’을 자신의 삶의 거점으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 미학의 거점, 윤리의 거점, 저항의 거점이었다. 자신의 호를 호동이라고 지은 데서 확인되듯, 이언진은 자아를 호동이라는 공간으로 확대한 것이다. 따라서 이언진의 자아는 공간성과 분리되지 않고 주체를 공간화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주체의 공간화는 주체의 공간적 확대를 의미한다. 주체의 공간적 확대는 주체가 自閉되지 아니하고 사회적 공간= 집단 속으로 회귀하며, 이 속에서 자기를 발견함을 말한다. 즉 주체의 공간화는 거꾸로 ‘공간의 주체화’이다.
더러운 골목 지나 깨끗한 내 방에 들어와
맑은 향 피우고 繡佛을 걸면
피부병 있는 자건 몹쓸병 걸린 자건
모두 다 보살 생각을 하리. - <호동거실> 17
*항장(骯髒)한 주체
‘항장하다’라는 말은 신분이 고귀하지 않고, 오만하여 남에게 굴종하지 않는 성격이어야 하며, 담대하고 결기가 있고 고집이 세어야 한다. 즉 자기존중심이 강하고 저항적이며, 사회의 주류에 속하지 않은 인간에게 쓰는 말이다.
시인으론 李白과 同性
그림으론 王維의 후신. - <호동거실> 2
한 그릇 밥 먹고 배부르면 쉬고
큰길가에서 웅크리고 자는
저 거지아이 承旨보고 불쌍타하네
눈 내린 새벽 매일 출근한다고. - <호동거실> 13
자리에 앉혀서는 안 될 사람은
좋은 옷 입은 하얀 얼굴의 名士. - <호동거실> 126
<호동거실> 2 는 이언진 자신의 실력이 조선의 사대부들이 떠받드는 이백이나 왕유에 필적함을 말하고, <호동거실> 13은 사대부를 조롱하는 시다. <호동거실> 126에서 시인은 閥閱 가문의 사대부 귀족에게 적대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이처럼 이언진의 시는 전방위적이고 拔本적인 ‘저항’과 ‘아만(我慢)’이 표리관계를 이루고 있다. 아만으로 요약될 수 있는 이언진의 주체성은 아래의 시에서도 나타난다. 자기 자신을 부처라고 선언하는 자존심이 하늘을 찌른다.
과거의 부처는 나 앞의 나
미래의 부처는 나 뒤의 나
부처 하나 바로 지금 여기 있으니
호동 이씨가 바로 그. - <호동거실> 158
* 주체와 저항
항장한 주체는 그 내부에 저항성을 품고 있다. 그래서 주체성과 저항은 밀접한 내적 관련을 맺으며, 그것이 저항적 주체로 발현할 수 있다. 아래의 시는 노예의 굴종성과 자기의식이 없음을 비판하고 있다.
콧구멍 치들고 주인 뒤를 졸졸 따르니
종이라 불리고 하인이라 불리지.
천한 이름 뒤집어쓰고도 고치려 않으니
정말 노예군 정말 노예야. - <호동거실> 51
아래의 시는 노예의 무자각성과 지배- 피지배 관계, 나아가 체제에 대한 부정과 투쟁을 비유한 시로서 이언진의 저항성을 가늠케하는 시다.
“추한 종놈 온다! 추한 종놈 온다!”
아이들 짱돌 줍고 흙을 던지네.
내 들으니 참 괴이한 일도 있지
길에 떨어진 칼을 주인에게 돌려주다니. - <호동거실> 62
아래의 시는 저항적 주체가 된 이언진이 반역을 꿈꾸며, 억압적이고 차별적인 현체제를 깨부숴 버리고 새로운 사회를 수립했으면 하는 願望을 피력하고 있다. 백화문 ‘따거(형님)’등이 등장하는 시는 그가 ‘수호지’의 이규 등 떼도둑과 자기를 동일시한 것이다. 이는 ‘조선의 프롤레타리아문학’인 셈인데, 저항의식이 강렬하다.
이따거(李大哥)의 쌍도끼를
빌려 와 확 부숴 버렸으면.
손에 칼을 잡고
강호의 쾌남들과 결교했으면. - <호동거실> 104
이언진에게 있어 저항의 근거는 다름 아닌 ‘나’이다. 나의 근거는 호동이다. 따라서 저항의 사회적 근거는 바로 호동이다. 이 점에서 ‘나’의 정항은 집단성을 지니게 된다.『衚衕居室』의 저항적 주체가 개인이면서 동시에 집단을 대변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聖俗을 가로지르는 주체
조선의 사대부들은 탈속적 경지를 추구하는 주체로서 ‘聖’을 추구했다. 그러나 이언진은 자신의 자아 속에 ‘俗’과 ‘聖’을 아우르면서 가로지르는 주체적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가 추구한 속과 성은 독창적이었기에 성속을 가로지르는 주체의 양상을 살펴야 한다. 아래의 시는 속의 세계를 그린 것으로 특히 자기서사와 관련된 것이다.
세태는 요랬다 조랬다 하고
이내 몸은 고통과 번민이 많네.
높은 사람 앞에서 배우가 되어
가면을 쓴 채 억지로 우네. - <호동거실> 31
처는 거미 같고 자식은 누에 같아
나의 온 몸을 칭칭칭 휘감았어라. - <호동거실> 35
골목 깊어 마치 항아리 같고
지붕 낮아 머리가 천장에 닿네.
붓과 벼루 밥하는 부뚜막에 있고
서책은 쌀과 소금 사이에 있어라. - <호동거실> 73
<호동거실> 31은 속의 세계에서 고뇌하는 주체를, <호동거실> 35는 처자로부터 느끼는 구속감을, <호동거실> 73은 시인의 사는 공간을 그리는 방식으로 일상의 삶을 읊었다. 이처럼 이언진의 속의 세계는 가난과 구속과 자괴감이 어우러진 고통의 세계였다. 그리하여 다음의 시는 속을 ‘감옥’으로 형상화한다.
이 세계는 하나의 거대한 감옥
빠져 나올 방법도 없네. - <호동거실> 169
‘속’의 세계가 이렇게 인식될수록 ‘성’의 세계에 대한 욕구는 더욱 커진다. 이언진의 ‘성’에 대한 추구는 ‘속’의 한복판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자각적으로 보여준다. 다음의 시가 그렇다.
달구지 소리 뚜닥뚜닥 덜컹덜컹
연인네들 조잘조잘 재갈재갈.
나는 面壁한 승려처럼
평생 神을 기르네 이 시끄런 데서. - <호동거실> 8
좁은 방에서 정진하면서
하늘하늘 향 피우고 앉은 채 자네. - <호동거실> 39
미칠 땐 기생한테 가고
성스러워질 땐 佛典에 참배하네. - <호동거실> 149
위의 시들처럼 이언진의 주체는 ‘속’의 세계에서 있으면서도 끝없이 ‘성’의 세계를 추구하고 있다. 주체의 면모는 일상적이고 세속적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靈的이고 탈세속적이다. 그래서 <호동거실> 149처럼 이언진의 주체는 ‘속’과 ‘성’을 가로지르며 교차하면서 넘나든다.
이언진의 주체는 몇 가지 특징을 가진다. ① 항장한 주체, ② 저항적 주체, ③성속을 가로지는 주체가 그것이다. 주체는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언진의 주체 형성에는 18세기 조선의 호동이라는 시공간이 작용한다. 호동은 서울의 서민과 여항인들의 비천한 주거 공간이다. 여기서 ‘호동’은 사대부가 아닌 중인과 도시서민이기에 일정한 계급성과 민중 지향성을 갖는다. 민중 지향성의 계급적 기초는 도시서민과 상공인에 국한되어 한계를 지니고 있다. 농민이 배제되었기에 그렇다.
이언진은 생애의 대부분을 서울에서 살았기에『호동거실』이 보여주는 감각과 세계는 온통 도시적이다. 이언진이 죽기 얼마 전 시골로 이주하였다. 이 무렵 창작한 시가 연작시 <농촌의 四季>다.
양어장 바깥 둘러싼 마름 살랑거리고
외양간 곁에 심은 부추는 이랑에 가득.
이것이 바로 농촌의 삶이니
관리는 자갈, 사대부는 진흙으로 보이네. - <호동거실> 239
이 시에서 시인은 일정하게 농민을 대변하고 있다.『호동거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시들이다. 만약 이언진이 좀 더 살았다면 『호동거실』의 계급적 한계를 넘어 당대의 조선 사회와 현실에 대해 좀더 총체적인 시각과 전망을 갖게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라는 추측을 해본다. 이 점에서 이언진은 미완의 작가요, 사상가라고 할 수 있다.
* <나는 골목길 부처다> 박희병/ 돌베개/2010
출처:이언진의 호동거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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