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이들이여, 힘겨워도 좌절하지는 말자
요즈음 언론 보도를 접하다 보면 우리를 기쁘게 하는 소식보다는 우울하게 하는 소식이 더 많다. 그 가운데서도 우리를 특별히 더 우울하게 하는 소식이 있다. 바로 젊은이들, 특히 대학을 갓 졸업하고 사회에 첫발을 내디디는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찾지 못하여 극도의 좌절감에 싸여 있다는 소식이다. 우리의 희망이어야 할 젊은이들이 희망을 잃었다는 이런 소식은 참으로 우리를 우울하게 한다.
작년도 우리나라 대졸자의 취업률은 56%라고 한다. 이마저도 남들이 말하는 번듯한 직장이 아닌, 계약직이나 임시직 성격의 취업자도 포함한 숫자라고 한다. 여기에 포함되지 않은 나머지 44%가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다. 대학졸업자의 상황이 이러하니, 대학을 진학하지 못한 젊은이들까지 포함해서 따져 보면, 절반 이상의 젊은이들이 일자리로 말미암은 고통과 고민을 안고 있는 것이다.
현재 우리 젊은이들이 겪고 있는 고통은 이 취업문제만이 아니다. 이것 이외에도 여러 가지 상황들이 우리의 젊은이들을 고통스럽게 하고 있다. 이로 인해 한때 유행하였던 ‘이태백’이란 말에서 더 나아가 연애도, 결혼도, 출산도 포기하였다는 의미의 '삼포'라는 말도 있다고 한다. 젊은이들이 희망을 포기하였다는 이 말, 정말 우리를 우울하게 한다.
현재 자신의 앞날에 대한 불안감과 경제적인 문제로 인해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 특히 젊은 사람들이 한번쯤은 돌아보아야 할 우리의 선인(先人)이 있다. 바로 잠곡(潛谷) 김육(金堉)이란 분이다.
잠곡은 남들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극단적인 고통과 고생 속에서도 꾸준히 자신을 갈고 닦아, 마침내 크나큰 성취를 이루어, 우리나라 역사상 뚜렷한 자취를 남겼다. 잠곡이 젊은 시절에 겪은 고통이 어느 정도였느냐 하는 것은 다음의 글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잠곡 김 문정공(金文貞公)이 처음에 미천하였을 적에 가평(加平)의 잠곡으로 가 숨어 살았다. 공이 호를 잠곡이라 한 것은 이곳의 지명을 따라서 지은 것이다. 처음 이사하였을 적에는 집이 없었다. 땅에 굴을 파고 그 위에 시렁을 얽어 움집을 만든 다음, 그 속에서 처자식들을 살게 하였다. 그러고는 낮에는 산에서 나무를 하고 밤이면 관솔불을 켜놓고 글을 읽었다.
어느 날 공의 부인이 창문을 통해서 내다보다가 말하기를, “저기 저 푸른 도포를 입고 오는 사람은 모습이 마치 새신랑 같습니다.”라고 하자, 공이 “그 사람은 바로 우리 사위가 되려고 오는 사람이오.”라고 하였다. 당시에 공에게는 아직 시집가지 않은 딸이 있어 굴속에서 함께 살고 있었다. 그 말을 듣고 부인이 깜짝 놀라면서 “어찌하여 저한테 미리 말해 주지 않았습니까?”라고 하니, 공이, “미리 말했다 한들 뭘 장만할 수 있었겠소.”라고 하였다. 부인이 딸을 쳐다보면서 말하기를, “버선이 없어 맨발이니 어쩌면 좋단 말인가?”라고 하니, 공이 자신이 신고 있던 버선을 벗어서 딸에게 주어 신게 하였다.
얼마 뒤에 푸른 도포를 입고 오던 사람이 새신랑의 옷으로 갈아입고서 굴 밖에 도착해 말에서 내렸다. 공은 우물에서 물을 한 사발 떠다가 굴 안에 놓은 다음, 옷을 갖추어 입고서 나가 읍을 하고는 신랑을 맞이하여 굴 안으로 들어왔다. 새신랑과 신부가 맞절을 하는 예를 행하고는 드디어 떠나갔다. 공은 굴 밖으로 나가 한 번 읍하고 떠나보냈다.
潛谷金文貞公始微時, 遯于加平之潛谷, 號曰潛谷, 因其居也. 其初無居室, 嘗闕地爲窟 架其上爲屋 以處其妻子. 晝負薪於山 宵則耿松明讀書窟中. 一日夫人從牖中遠望而曰, “彼靑袍乘馬而來者, 若新婚者然.” 公曰, “其是吾婿乎.” 時公有未嫁女在窟中矣. 夫人驚曰, “何不早言之?” 公曰, “早言之, 亦何爲.” 夫人顧其女曰, “將如無襪何?” 公卽脫其襪與之. 已而靑袍者果改公服至, 下馬于窟之外. 公酌井水, 置窟之中, 具冠帶出揖, 婿入窟中. 婿婦旣交拜, 遂以行. 公出窟外, 一揖而送之.
- 서응순(徐應淳, 1824~1880), 「잠곡 선생의 숨겨진 일을 기록한 글[潛谷先生逸事狀]」, 『잠곡전집(潛谷全集)』
▶ <잠곡선생좌상(坐像)>『잠곡전집』에서 인용
“머리 희어 신선 같은 모습이거니, 안의 덕이 겉으로 드러난 거네. 군자들이 이런 공의 모습 보고는, 그렇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다네.[雪鬢霞儀 外形內德 君子觀之 是無不識]” 이상은 맹영광(孟永光)이 잠곡의 모습을 그린 다음에 찬(讚)을 써 놓은 것이다. 맹영광은 중국의 화가로,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따라서 우리나라에 왔었다.
이 글은 잠곡이 가평(加平)에서 살 때의 일화(逸話)를 전해 듣고서 기록해 놓은 것의 앞부분이다. 이 글에서 보면 잠곡은, 중년의 나이에 집 한 칸이 없어 토굴을 파 움집을 만들고는 그 속에서 살았다. 잠곡은 2남 4녀를 두었다. 자신까지 합해 모두 여덟 명의 식구가 토굴 속에서 살았던 것이다. 그러니 그 생활이 얼마나 비참하였을지는 미루어서 짐작할 수가 있다.
잠곡은 딸을 시집보내면서 버선 한 짝이 없어서 자신이 신고 있던 버선을 딸에게 신기고, 아무런 음식도 차리지 못한 채 우물물 한사발만 떠놓고 시집보냈다. 발에 맞지도 않는 때가 꼬질꼬질한 버선을 신겨서 시집보내는 아버지의 심정, 그 심정이 정말 오죽했겠는가?
잠곡은 그런 가운데서도 밤이면 관솔불을 켜놓고 글을 읽으면서 자신의 뜻을 펼칠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등잔을 밝힐 기름조차 없어서 관솔로 불을 밝히고 글을 읽었던 것이다. 의지가 정말 철석같이 굳세지 않다면 어찌 그럴 수 있었겠는가? 이 기록을 읽으면서 그 당시에 잠곡이 처하였던 상황을 그려보면, 정말 눈물겹다.
잠곡의 젊은 시절은 그야말로 다른 사람으로서는 견뎌내지 못할 정도로 고통의 연속이었다. 잠곡은 15세 때 아버지를 잃었으며, 21세 때 어머니를 잃었다. 어머니의 상을 치를 때 인부를 살 돈이 없어서 자신이 직접 무덤을 파고서 장사지냈다고 한다.
잠곡은 여기저기를 떠돌면서 살다가 남양주의 평구(平丘)에 자리 잡고 살 때에는, 먹고살 길이 없어, 산에서 숯을 구워 동대문까지 지고 와서 팔아먹고 살았다. 평구에서 동대문까지는 대략 3, 4십리 정도 되었다. 그런데도 동대문이 열리면 가장 먼저 들어오는 사람이 바로 잠곡이었다고 할 정도로 부지런하였다.
잠곡은 그런 가운데서도 부지런히 공부하여 25세 때 사마시(司馬試)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명성을 날렸다. 그러나 광해군의 난정(亂政)에 실망하여 서울을 떠나 가평의 잠곡으로 이사해 살았다. 위의 기록은 바로 이때의 삶이 얼마나 비참하였는지를 보여주는 일화이다.
잠곡은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난 뒤에 처음으로 벼슬길에 나갔다. 이때 잠곡의 나이는 41세였다. 조선시대 관료들 가운데 고위직을 지낸 인물들을 보면, 대부분 40대에는 상당한 고위직에 올라가 있었다. 우리가 잘 아는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은 33세에, 오성(鰲城) 이항복(李恒福)은 37세에 판서가 되었다. 이런 점을 고려해 볼 때 잠곡이 41세에 처음 출사한 것은 그야말로 다른 사람들보다 늦어도 한참 늦은 것이다.
이렇게 늦게 출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잠곡은 자신이 젊은 시절 고생을 하면서 겪었던 여러 가지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관직에 있는 동안 ‘애물제인(愛物濟人)’의 신념을 가지고 부지런히 직무에 종사하였다. 그 결과 주위 사람들과 임금으로부터 크게 인정을 받아, 마침내 최고위직인 영의정에 올랐다. 그때 잠곡의 나이가 72세였다.
잠곡의 일생을 돌아보면, 젊어서는 먹고살 것이 없어서 숯을 팔았고, 집 한 칸이 없어서 굴속에서 살 정도의 비참한 생활을 하였다. 그런 가운데서도 좌절하지 않고 부지런히 학문을 익혀, 마침내 영의정에 올라 수많은 업적을 남겼으며, 자신의 집안을 조선의 최고 명문가로 만들어 놓았다. 그야말로 조선조 최고의 입지전적인 인물이요, 요즈음 말로 표현하면 ‘의지의 한국인’인 것이다.
우리의 삶은 대부분 즐거움보다는 고통이, 희망보다는 절망이 더 많은 법이다. 태어나면서부터 많은 것을 갖추고 태어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대부분 다 어려움을 겪으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여북하면 우리의 인생을 고해(苦海)라고 하였겠는가. 고해 속에서도 희망을 향하여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것, 그것이 우리의 삶이다.
만약에 어려운 삶을 겪고 있는 어떤 사람이, 잠곡이 겪은 만큼의 고통 속에서 잠곡이 행했던 만큼의 치열한 삶을 살았는데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늘의 도가 잘못된 것이며, 세상의 도가 잘못된 것이다. 우리 사회가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잠곡 만큼 치열하게 살지도 않았으면서,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좌절하여 자신의 삶을 포기한다면, 이 세상을 탓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삶에 대한 자세부터 다시 한번 되돌아보아야 한다.
우리보다 아주 오래전에 이 세상을 살았던 잠곡은, 다른 사람들로서는 감내하기 어려운 고통 속에서도 부지런히 자신을 닦아, 마침내 제 뜻을 이루었다. 현재 여러 가지 문제로 고통을 겪고 있는 이 시대의 젊은이들이, 잠곡의 이야기를 통하여 다시금 새로운 용기를 얻어 이 세상과 부딪쳤으면 한다.
글쓴이 : 정선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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