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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산문 254] 불우한 제자를 위한 스승의 위로 - 송목관신여고서문(松穆館燼餘稿序文)

도솔산인 2013. 1. 23. 13:17

 

불우한 제자를 위한 스승의 위로 - 송목관신여고서문松穆館燼餘稿序文

 

 

 이 글은 18세기 후반 격변의 시기를 불우하게 보낸 송목관 이언진의 문집서문으로서, 그의 스승인 혜환 이용휴가 써준 글이다. 이용휴는 성호 이익의 조카이자 금대 이가환의 아버지이다. 연암 박지원과 함께 당대 문단의 쌍벽이었다. 이와는 달리 이언진은 중인인 역관 출신이다. 뛰어난 재주를 가져서 일본에 한 차례 통신사행을 다녀온 것을 계기로 단번에 문명을 날렸다. 하지만, 중인이라는 태생적 한계 속에서, 또 경제적 여유 없이, 질병에 시달리다가 27세로 요절하였다. 아래 글은 이런 제자에게 스승으로서 생전에 전한 말이다.

 

1) 글을 지을 때 남의 견해를 베끼는 사람도 있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견해를 내는 사람도 있다. 남의 견해를 베끼는 것이야 저급하여 말할 것도 없거니와 자신만의 독창적인 견해를 내더라도 고집이나 편견이 섞이지 말아야 진견眞見이 된다. 또 거기에다 반드시 진재眞材의 도움을 받아야 비로소 일가를 이루게 된다.

 

스승은 우선 문학의 도에 대하여 말한다. 진정한 독창성 즉 진견은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한데, 첫째는 남과는 다른 차별성이다. 남의 견해를 베끼는 것은 기본조건에 미달되며, 그 행위는 저급하다. 그러나 남과 소통되지 않는 차별성은 또한 무의미하다. 그래서 말한다. 차별적 독창성이 소통되는 보편성을 획득할 때 진정한 나의 견해 즉 진견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이것으로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천부적인 재능 진재가 있어야 한다. 새의 두 날개처럼 진견과 진재가 함께 할 때 진정한 일가를 이룬다.

 

2) 내가 이런 사람 찾은 지 몇 년 만에 송목관 주인 이군 우상(*)을 얻었다. 군은 문학의 도에 있어서 높은 식견識見과 깊은 사고思考를 가지고 먹 아끼길 금金처럼 하고 글 다듬길 단약丹藥(*)처럼 하여 붓이 한번 종이에 떨어질라 치면 그대로 세상에 전할 만 하다. 그러나 세상에 알려지기를 바라지 않았으니 능히 알아줄만한 이 없기 때문이요, 남에게 이기길 원하지 않았으니 족히 이겨볼만한 이 없기 때문이다. 이따금 시문을 가져와 내게 보여주고는 곧바로 깊숙이 넣어둘 뿐이다.

 

(*)우상은 이언진의 자字이다. 스스로 운아雲我라고 호를 붙였는데, 불의로 얻은 부귀는 나에겐 뜬구름과 같다는 뜻이다.

(*)단약은 도교의 불로장생약을 말한다. 마치 도사가 단약을 만들고 연금술사가 금을 만들 듯 한다는 것이다.

 

스승은 이어 이런 도를 가진 제자의 불우를 조리 있게 이해한다. 진견ㆍ진재이라 할 수 있는 식견과 사고, 거기에다 끊임없는 각고의 노력. 모든 것이 갖추어 졌으니 어떻게 뛰어난 작품이 나오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하지만 세상은 이런 천재성을 알아주기에는 여전히 미성숙하다. 그래서 세상의 불우는 천재성의 숙명이다. 스스로를 갈무리하여 세상과 단절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는 것. 오직 자신을 이해하는 스승에게만 자신의 작품을 보여줄 뿐, 결코 속인의 눈길로 더럽히지 않는다.

 

3) 아아! 벼슬이 쌓여 일품에 이르더라도 아침에 거두어 가면 저녁에는 백수요. 돈을 모아 만금에 이르더라도 밤새 잃어버리면 아침에는 거지인 것을. 하지만 문인이나 재사의 소유는 그렇지 않아 한번 가진 다음에는 비록 조물주라 하더라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이지.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가짐眞有라네. 군이 이미 이를 가졌으니 이 나머지 구구한 것은 모두 사양하여 내치고 가슴에 담아두지 않는 것이 옳을 듯하네.

 

스승은 이제 제자에게 조리 있는 말로써 위로한다. 벼슬이 정승이면 뭐하나 한번 거두어 가면 백수인데. 억만금을 가졌단들 다른 게 무엇인가 잃어버리면 그만인걸. 하지만 문인들이 가진 지적 능력은 비록 조물주라고 하더라도 어찌할 수가 없으니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소유가 아니겠는가. 끝으로 스승은 조언한다. 누구도 앗을 수 없는 진정한 소유자인 군은 신분 한계나 경제 궁핍과 같은 현상의 문제들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고.

 

詩文有從人起見者。有從己起見者。從人起見者。鄙無論。卽從己起見者。毋或雜之固與偏。乃爲眞見。又必須眞才而輔之。然後乃有成焉。予求之有年。得松穆舘主人李君虞裳。君於是道。有邁倫之識。入玄之思。惜墨如金。鍊句如丹。筆一落紙。可傳也。然不求知於世。以世無能知者。不求勝於人。以人無足勝者。惟閒出薦余。還錮之篋而已。嗟。積階至一品。朝收之。暮爲白身。殖貨至萬金。暮失之。朝爲窶人。若文人才子之所有者。則一有之後。雖造物。無可如何。是卽眞有也。君旣得有。此餘區區者。悉謝遣之。勿置胷中可矣。

 

- 이언진(李彥瑱 1740~1766),「송목관집서(松穆館集序)」,『송목관신여고(松穆館燼餘稿)』

 

 

 

▶왼쪽) 1764년 에도에서 만나 필담을 나눈 류우몬이 그린 이언진의 모습. 류우몬의 저서 『동사여담』에 수록되어 있다. (이 사진은 박희병의 이언진 평전 『나는 골목길 부처다』에서 전재한 것이다.

 

오른쪽) 이글의 저자 혜환 이용휴의 친필인<종손재중자유여설從孫載重字幼輿說>이다. 사진은 성호기념관에서 제공한 것이다. “혜환옹서”라는 글씨와 낙관이 보인다.

 

이언진은 1766년에, 이글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자신의 시고를 불사르고, 얼마 후 27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불타던 시고를 그의 부인이 거두어 그나마 남았으며, 그래서 타고 남은 원고라는 뜻의 이름을 가졌다고 한다. 참견해 ‘眞見’, 참재주 ‘眞材’, 그리고 참가짐 ‘眞有’라는 스승의 위로가 얼마나 이언진의 마음을 어루만졌는지는 모르겠다. 가진 것 없는 사람에게 내 놓으라고 하는 것도 고통이지만, 가진 것이 아주 많은데도 쓸 수 없게 한다면, 더한 고통일 것이다. 그때나 이제나 위로의 말이 공허하기는 마찬가지인 듯하다.

 

 지난해 우리가 가장 많이 접한 단어는 정신적 공황상태를 뜻하는 멘붕, 치유를 뜻하는 힐링, 치유해 줄 지혜로운 스승, 혹은 능력자라는 의미의 멘토와 같은 말이었다. 말하자면 젊은이의 멘붕을 힐링하는 멘토들이 각광 받는 시기였다고 할 것이다. 아마도 양극화된 사회가 치유를 필요로 한 젊은이를 양산했기 때문이리라. 어떤 멘토는 청춘은 원래 아프고 흔들리는 것이니, 그것을 이겨낼 때 진정한 어른이 된다고 당당하게 혹은 담담하게 조언한다.

 

 구조적 모순으로 말미암아 고통받고, 그 고통을 내적으로만 감내해 가는 현대의 젊은이나, 전근대적 신분제의 틀 속에서 신음하며 울울해 하는 이언진이, 달라 보이지 않는다. 또 열심히 참아내고 잘 이겨내면 어른이 된다고 하는 현대의 어떤 멘토나, 네가 가진 것이 진정한 소유이니 재산이나 벼슬 따위에 마음이 흔들리지 말라고 한 이용휴가, 크게 달라보이지도 않는다. 어째 세상은 이리도 반복되고 예나 지금이나 달라지는 것이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