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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이언진, 시대를 넘어 사유하다

도솔산인 2013. 1. 22. 16:45

조선시대 이언진, 시대를 넘어 사유하다

 

‘나는 골목길 부처다:이언진 평전’ / 박희병지음 / 돌베개 / 2010

 

▲‘나는 골목길 부처다:이언진 평전’

 

“머리숱은 가을 짐승처럼 성글고/ 얼굴은 고목나무 껍질처럼 메말랐네/(…) 해진 승복 한 벌/ 손수 거듭 깁네/ 바늘귀에도 꿰맨 실에도/ 모두 하나의 부처가 있네.”

천재로 태어났지만 미천한 신분 때문에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몸과 마음의 병을 깊이 앓다가 불교에 귀의하고, 스물일곱(27)에 요절한 역관 이언진(1747~1766)이 죽음을 앞두고 쓴 시(병 끝에; 病餘)에서 그린 자화상이다. 사상과 신분체계가 경직된 사회에서 신분 차별 타파와, 사상·문학의 혁명을 꿈꾸었으니 그는 시대의 이단아였다. 그래서 박희병은 그를 일러 “조선 시대에 속해 있으되 조선 시대 너머의 세계를 사유했다”고 평한다.

 

“나는 우리나라가 문벌에 얽매여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으면서도 굶주리는 사람이 많은 것을 늘 한탄한다.(…) 이언진과 같은 사람이 홍문관에서 임금의 교서를 기초하게 하더라도 안 될 게 뭐 있겠는가.” 그와 단 한 차례도 만난 적이 없었지만 이언진을 평생의 지기(知己)로 여겼던 이덕무는 이언진에 대한 기대와 그를 담아내지 못하는 시대에 대한 불만을 이렇게 드러냈다.

 

그 뒤에 이어지는 “나는 어리석어 백 가지 중에 하나도 능한 것이 없지만, 다만 남이 재주를 갖고 있는 것을 보면 그걸 마치 내가 갖고 있는 것처럼 아끼니 이것이 백 가지 결점 중에 내가 가진 한 가지 장점이다. 나는 우상의 얼굴을 모른다”는 고백에서 보듯이, 타고난 인품이 맑고 깊었던 이덕무의 이언진 평가에는 거짓이나 꾸밈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의 죽음을 전해 듣고 상심하여 “꽃나무 아래를 배회하며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세상이 담기에는 너무 큰 재주를 타고 나서 요절한 지기의 죽음 앞에 달리 어쩔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이언진은 스승 이용휴를 각별히 믿고 따랐고, 스승도 여러 제자 중에서 그를 가장 아꼈다.

 

“요행으로 억만금을 얻게 된다면/ 그 집에 반드시 재앙이 생기지/ 하물며 세상에 드문 이런 보배를/ 어찌 오래도록 빌릴 수 있으랴.(…) 옛날에 그대 처음 찾아왔을 때/ 광채가 종이 밖을 뚫고 나왔지/ 초고(草稿)를 펼쳐 읽기도 전에/ 보배가 그 속에 든 줄 알았네/ 그 사람은 간담이 박처럼 크고/ 그 사람은 안목이 달처럼 밝았지/ 그 사람 팔에는 귀신이 있고/ 그 사람 붓에는 혀 달렸더랬지/ 다른 사람은 자식으로 제 몸을 전하나/ 우상은 그렇게 하지 않았네/ 자손은 어느 땐가 다함이 있지만/ 이름은 영원토록 다함이 없네.” (이용휴의 挽詩 일부)

 

진정 그럴 지도 모른다. 시대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걸출한데다가 간담이 크고 안목이 밝은 인물은 세상에 오래 살아남을 수 없고, 다만 ‘큰 그릇을 품어줄 수 있는 시대’를 만나면 이름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이 역사의 법칙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중국 명말청초(明末淸初) 사상의 이단아 이탁오를 일러 신용철은 “20세기가 필요했던 16세기 사상가”라며, 안타까움과 존경을 함께 드러내기도 하였다. 하긴 죽기 직전에 자신이 평생 쓴 원고를 불살라 버리며 세상에 저항한 점에서도 이탁오와 그는 많이 닮았다.

글쓴이 : 이병두 문화체육관광부 종무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