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盈科後進/고전향기

인간삼락(人間三樂)

도솔산인 2012. 12. 20. 12:06

 

인간삼락(人間三樂)

 

 

 

閉門閱會心書, 開門迎會心客, 出門尋會心境, 此乃人間三樂.

 

 

문을 닫고 마음에 드는 책을 읽는 것,

문을 열고 마음에 맞는 손님을 맞이하는 것,

문을 나서서 마음에 끌리는 곳을 찾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인생의 세 가지 즐거움이다.

 

 

- 신흠 (申欽 : 1566∼1628)「야언(野言) 1」『상촌고(象村稿)』

 

 

 

사람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생각이 다르고 성향에 따라 세상을 보는 관점도 다르다. 옛사람도 이는 마찬가지여서 중임을 맡아 일할 때는 예법과 도학을 숭상하다가도 파직을 당하거나 하면 『장자(莊子)』 같은 책도 읽고 은자들이 좋아하는 아취 있는 글도 즐겨 읽었다.

 

 

신흠이 편찬한 「야언(野言)」에는 운치 있는 간결한 문장 속에 삶의 철리가 담겨 있는 청언 소품이 수록되어 있다. 그가 40대 후반에 파직을 당하여 김포와 춘천 등지에 살 때 명나라에서 수입한 서적을 통해 전인의 문장에서 마음에 드는 것을 뽑아 엮은 책이다. 위에 소개한 글은 원래 명나라 문인 오종선(吳從先)의 『소창청기(小窓淸紀)』에 수록되어 있는 글인데, 신흠이 옮길 때 자신의 생각을 담아 글자를 가감하였다. 문학 평론과 독서에서 당대에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법한 허균 역시 이 사람의 글을 『한정록(閒情錄)』에 선록해 놓은 것을 볼 때, 임진왜란의 와중에 명나라 서적이 조선에 끼친 영향을 실감하게 된다.

 

신흠의 글에서 ‘마음에 들다[會心]’라는 말이 두드러진다. 남들 마음이 내 마음 같지 않다는 걸 깊이 체험한 것일까. “책속에는 자연 마음 맞는 곳이 있는데, 이 세상엔 나를 알아주는 이 누구일까?[書中自有會心處, 世上誰爲知己人?]”라는 시구도 보인다. 어디 신흠뿐이랴! 예나 지금이나 고상한 생각을 품은 사람이 지기를 만나기는 쉽지 않은 법이다. 오죽하면 상우(尙友)라 해서 당대를 벗어나 옛날의 어진 이를 벗하려고 했을까.

 

『맹자』 「진심장(盡心章)」에는 군자삼락(君子三樂)이 있다. 부모가 모두 살아 계시고 형제가 무고한 것이 첫째이고, 위로는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아래로는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이 둘째이며, 셋째는 천하의 영재를 얻어 교육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父母俱存, 兄弟無故, 一樂也. 仰不愧於天, 俯不怍於人, 二樂也. 得天下英才而敎育之, 三樂也.] 이 또한 더 없이 좋은 것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사람이 실의에 빠지거나 하면 밖으로 향한 마음을 거두고 자신의 마음을 치유하고자 하는 속성이 있다. 술을 마시거나 음악을 듣거나 하는 것이 일종의 자기 위로나 연민 아니던가.

 

요즘은 살아가는 속도에 치여 나를 차분히 돌아보거나 마음의 충일감을 느낄 때가 적다. 밤, 장마철과 함께 겨울을 삼여(三餘)로 꼽았던 옛 사람의 말이 무색할 지경이다. 그래도 이제 한 해가 다가고 있지 않은가. 자신에게 시간을 쏟을 날이 생각보다 많지 않고, 한가한 운치를 즐기는 것이 옛사람의 전유물도 아니다. 잠시 번잡한 세상을 벗어나 훌쩍 떠날 수 있는 곳과 시간이 있으면 더 없이 좋을 것이고, 그럴 여유가 되지 않는다 해도 마음 한 구석에 지친 영혼을 쉬게 할 안식처는 있어야겠다.

 

신흠보다 한 세대 뒤에 강백년(姜栢年 : 1603~1681)은 한 해를 보내는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酒盡燈殘也不眠 : 술도 떨어지고 등불도 사위어 가는데 잠이 안와

曉鍾鳴後轉依然 : 새벽종이 울린 뒤에도 자꾸만 몸을 뒤척이네 

非關來歲無今夜 : 내년에도 오늘밤이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自是人情惜舊年 : 지난해를 아쉬워하는 건 본래 인지상정인 것

 

-「당시 고적의 제야음을 차운하여(次唐詩高適除夜韻)」

 

당나라 시인 고적(高適)이 타향의 어느 여관에서 잠을 이루지 못하며 “오늘 밤 그리운 고향은 천리 밖에 있는데, 허연 귀밑머리로 내일 아침이면 또 한 해![故鄕今夜思千里, 霜鬢明朝又一年]”라고 하여 간절한 고향 생각과 함께 이룬 것 없이 나이만 먹는 탄식을 노래하였다. 이처럼 세모에는 그리운 사람은 더욱 그립고 아쉬운 것들은 또 새삼 마음을 움켜잡기 마련이다. 미련, 회한, 이런 감정이 주책없이 일어나 무연히 먼 하늘을 응시하게도 한다. 이때처럼 시간의 의미나 산다는 것, 나이의 무게가 느껴지는 때도 드물다.

 

삶의 현실이 비록 자기 마음과 같지 않을 지라도 한 해가 저물어가는 이 때, 내 마음에 드는 책을 읽고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을 만나고 내가 가보고 싶은 곳에 가서 그동안 움츠렸던 마음이 있다면 본래대로 펴고, 지친 영혼이 있다면 어루만져 달래주는 것이야말로 정말 새해를 맞이하기 전에 챙겨야 할 것은 아닐까.

 

김종태 글쓴이 : 김종태(金鍾泰) / hanaboneyo@hanmail.net
  • 한국고전번역원 문집번역실 선임연구원
  • 주요 약력
    - 고종ㆍ인조ㆍ영조 시대 승정원일기의 번역, 교열, 평가, 자문 등
  • 역서
    - 《승정원일기》고종대, 인조대 다수
    - 《청성잡기(공저)》,《허백당집(근간)》등
  • 현 국민일보 <고전의 샘> 연재 중

 

* 강백년(姜栢年)[1603~1681]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숙구(叔久), 호는 설봉(雪峯) · 한계(閑溪) · 청월헌(聽月軒) 강백년이 죽은 후 그의 후손들은 사패지(賜牌地: 나라에서 내려준 땅)인 공주시 의당면 도신리에 묘소를 마련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