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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의 향기 233]역관(譯官) 홍순언의 어떤 인연

도솔산인 2012. 8. 30. 13:21

 

[고전의 향기 233]역관(譯官) 홍순언의 어떤 인연

 

 

조선중기에 활약한 역관 홍순언(洪純彦:1530~1598)을 아시는지? 역관은 조선시대 외국어 통역을 전담하는 관리를 말한다. 요즈음의 외교관이나 통역사의 역할을 한 인물이다. 조선시대에는 외국어 전문 교육기관인 사역원(司譯院)을 두고 이곳에서 집중적으로 역관을 양성했다. 사역원에서는 4대 외국어인 중국어, 몽골어, 만주어, 일본어를 배웠다. 한학청(漢學廳), 몽학청(蒙學廳), 청학청(淸學廳), 왜학청(倭學廳)이라 불리는 각 관청에서 외국어 학습을 전담하였다. 사역원의 연혁과 주요 역관의 행적을 기록한 책도 있다. 『통문관지(通文館志)』는 조선 숙종 때 사역원의 역관인 김지남(金指南)과 그의 아들 김경문(金慶門)이 중심이 되어 편찬한 책으로, 외교 및 역관 담당 관청인 사역원의 연혁과 관제(官制), 고사(故事), 사대교린(事大交鄰)에 관한 외교 자료를 정리한 책이다. 사역원은 고려시대에는 통문관으로 불렀기 때문에 제목이 『통문관지』가 된 것이다. 『통문관지』에는 「인물」이란 항목을 설정하여 최세진(崔世珍), 홍순언, 김근행(金謹行) 등 역대의 주요 역관들을 서술하고 있는데, 다음은 홍순언의 행적을 옮겨온 것이다.

 

홍순언은 젊어서 불우했으나 의기(義氣)가 있었다. 일찍이 연경에 가다가 통주(通州)에 이르러 밤에 청루(靑樓)에서 노닐다가 자색이 매우 뛰어난 한 여자를 보고 마음에 즐거워하였다. 주인 할미에게 부탁하여 접대하게 하였는데, 그가 소복(素服)을 입은 것을 보고 물으니 말하기를, “제 부모는 본디 절강(浙江) 사람으로서 명나라 연경에서 벼슬살다가 불행히 돌림병에 걸려 동시에 모두 돌아가셨는데, 관이 객관에 있습니다. 저 혼자서 고향으로 모셔가 장사지내고자 하나 장사지낼 밑천이 없으므로 마지못하여 스스로 몸을 팝니다.” 하였다. 말을 마치자 목메어 울며 눈물을 흘리므로, 공이 듣고 불쌍히 여겨 그 장례비를 물으니 3백 금이 필요하다 하기에 곧 전대를 털어서 주고 끝내 가까이 하지는 않았다. 여자가 성명을 물었으나 끝내 말하지 않았는데, 여자가 말하기를, “대인께서 말씀하지 않으려 하시면 저도 감히 주시는 것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에 성만 말하고 나오니, 동행했던 사람들이 모두 그의 우활함을 비웃었다.

 

[洪純彦 小落拓有義氣 嘗赴燕 到通州 夜遊靑樓 見一女子極有殊色 意悅之 托主嫗要歡 見其衣素 問之則曰 妾父母本浙江人 仕宦京師 不幸遘癘疾 一時俱沒 旅櫬在館 獨妾一身 返葬無資 不得已自鬻 言畢哽咽泣下 公聞之 愍然 問其葬費 可用三百金 卽傾槖與之 終不近焉 女請姓名 終不言 女曰 大人不肯言 妾亦不敢受賜 乃言姓而出 同行莫不嗤其迂]

 

홍순언에 관한 기록의 첫 대목은 홍순언이 중국 통주에서 자색이 뛰어난 여자가 부모의 장례를 지내지 못하는 딱한 사정을 알고 선뜻 거금을 내어 도와주면서 여자와 인연을 맺은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이 여자는 뒤에 명나라의 정권 실세 석성(石星)의 첩이 되었다.

 

여자는 뒤에 예부 시랑(禮部侍郞) 석성의 계실(繼室)이 되었는데, 시랑은 이 일을 들어서 알고는 그의 의리를 높이 여겨 우리나라의 사신을 볼 때마다 반드시 홍 통관(洪通官)이 왔는지를 물었다. 이때 우리나라에서는 종계변무(宗系辨誣) 때문에 전후 10여 차례 사신을 보냈으나 모두 허락받지 못하고 있었다. 만력 갑신년(1584년)에 공이 변무사(辨誣使) 지천(芝川) 황정욱(黃廷彧)을 따라 북경에 이르러 조양문(朝陽門) 밖을 바라보니, 화려한 장막이 구름에 닿을 듯한데, 한 기병이 쏜살같이 달려와서 홍 판사(洪判事)를 찾으며 말하기를,

“예부 시랑 석성이 공이 오셨다는 말을 듣고 부인과 함께 마중하러 나왔습니다.” 하였다. 이윽고 계집종 10여 명이 떼를 지어 부인을 옹위하고 장막 안에서 나오는 모습을 보고 공이 놀라 피하려 하니, 시랑이 말하기를, “군(君)은 통주에서 은혜를 베푼 일을 기억하시오? 내가 부인의 말을 들으니 군은 참으로 천하의 의로운 선비인데, 이제야 다행히 서로 만나니 내 마음이 크게 위안됩니다.” 하였다. 부인이 보고는 곧 꿇어앉아 절하므로 공이 부복하여 굳이 사양하니, 시랑이 말하기를, “이것은 은혜에 보답하여 군에게 절하는 것이니,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부인이 말하기를, “군의 높은 은혜를 입어 부모의 장례를 지낼 수 있었으므로 감회가 마음에 맺혔으니, 어느 날엔들 잊었겠습니까?” 하고는 곧 크게 잔치를 벌여 부인이 잔을 잡고 올렸다.

 

[女後爲禮部侍郞石星之繼室 侍郞聞知此事 而高其義 每見東使 必問洪通官來否 時本國以宗系辨誣 前後十餘使 皆未得請 萬曆甲申 公遂辨誣使黃芝川廷彧 到北京 望見朝陽門外 錦幕連雲 有一騎疾馳來 問洪判事言 禮部石侍郞 聞公來 與夫人迎候 俄見女奴十餘簇擁夫人 自帳中出 公驚愕欲退避 侍郞曰 君記通州施恩事乎 我聞夫人言君誠天下之義士 今幸相見 大慰我心 夫人見卽跪拜 公俯伏固辭 侍郞曰 此報恩拜 君不可不受 夫人曰 蒙君高義 得葬父母 感結中心 何日忘也 乃大張宴 夫人執盃以進]

 

당시 조선에서는 태조 이성계의 선계(先系)를 바로잡는 종계변무가 외교의 최대 이슈였고,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 차례에 걸쳐 사신과 역관을 파견하였으나. 뚜렷한 결실을 얻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홍순언은 중국 사신으로 갔고, 부인의 요청으로 홍순언을 찾고자 했던 석성과의 극적인 만남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시랑이 동방의 사신이 이번에 온 것은 무슨 일 때문인지를 물으므로, 공이 사실대로 대답하니, 시랑이 말하기를, “군은 염려하지 마시오.” 하였다. 회동관(會同館)에 머무른 지 한 달여 만에 사신의 일로서 과연 청함을 허락받았다. 특명으로 새로 고친 『대명회전(大明會典)』에 기록된 것을 보여주기까지 하였으니, 이는 석공(石公)이 실로 그렇게 하도록 만든 것이다. 돌아올 때가 되자 그 집으로 초대하여 매우 후하게 예대(禮待)하였다. 부인이 나전함[鈿函] 열 개에 각각 오색 비단 열 필을 담아 주며 말하기를, “이것은 제가 손수 짜면서 공이 오시기를 기다렸으므로 이것을 공께 바치고자 합니다.” 하였으나, 공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압록강 가에 돌아와 보니 대강군(擡杠軍:짐꾼)들이 따라와서 그 비단을 두고 갔는데, 비단 끝에는 모두 보은(報恩) 두 글자가 수놓아 있었다. 집에 돌아갔을 때에 비단을 사려는 자들이 앞을 다투어 이르렀는데, 사람들이 그가 살던 동(洞)을 ‘보은단동(報恩段洞)’이라 불렀다 한다.

 

[侍郞問 東使差來 爲何事 公以實對 侍郞曰 君毋慮 留會同館月餘 使事果得准 特命錄示新改會典 石公實爲之地也 及還 邀之其家 禮待甚厚 夫人以鈿函十 各盛五色錦段十匹曰 此是妾手織以待公 至願以此獻公 公辭不受 還到鴨綠江邊 見擡杠軍隨 至置其段去 錦端悉刺報恩二字 旣歸買段者爭赴 人稱所居洞 爲報恩段洞云]

 

 

▶ 연행도(燕行圖) 14폭 중 제7폭 조양문(朝陽門) 부분으로 조선 사신들이 조양문 입성을 앞두고 있는 모습.

《연행도》(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발행) 도록에서 인용. 원본은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이며, 단원 김홍도 그림으로 전함.

 

결국 석성의 도움으로 홍순언은 종계변무의 임무를 완성할 수 있었고, 석성의 부인은 홍순언에게 은혜를 갚는다는 의미에서 비단을 짜서 보냈다. 그리고 ‘보은단동’의 유래가 홍순언과 중국 여자와의 인연에서 비롯된 것임을 기록하였다. 석성과 홍순언의 인연은 임진왜란 때 원병을 파병하는 것으로도 이어졌다.

 

임진년에 왜노(倭奴)들이 국내로 침입하자 임금이 서쪽으로 피하고 중국에 구원을 청하였다. 그때 중국 조정의 의논이, 어떤 이는 압록강을 굳게 지키면서 형세가 변해 가는 것을 보자고 청하였고, 어떤 이는 이적(夷狄)이 서로 치는 것을 우리가 반드시 구원할 것까지 없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석공이 그때 병부 상서로서 구원할 것을 혼자 힘써 말하고, 또 먼저 군기와 화약을 줄 것을 청하였으니, 우리 동방이 나라를 회복하여 어육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은 다 석공의 힘이다. 홍순언은 광국공신(光國功臣)에 책훈되고 당릉군(唐陵君)에 봉해졌으며, 그 손자 홍효손은 숙천 부사가 되었다.

 

[壬辰倭奴內犯 車駕西巡 請援天朝 時朝議或請見守鴨江以觀其變 或云以夷狄相攻 中國不必救 石公時爲兵部尙書 獨力言救之 且請先賜軍器火藥 吾東得復爲國 而免其魚者 皆石公力也 公策光國勳封唐陵軍 其孫孝孫爲肅川府使]

 

석성은 임진왜란 당시 병부 상서의 자리에 있었고, 홍순언과의 인연을 생각해서인지, 명나라 원병의 파병에도 가장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홍순언은 외교적인 공을 인정받아 광국공신에 책훈되고 당릉군에 봉해졌다. 마지막 대목은 홍순언이 적절히 맺은 인연으로서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지만, 광해군 때부터 중국 사신에 대해 뇌물을 쓰는 풍조가 생기면서 외교적 폐단이 시작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국당배어(菊堂俳語)』에 이르기를, “당릉군이 남의 급한 일을 도운 의리는 가상히 여길 만하거니와, 부인으로서 그 은혜를 잊지 않고 반드시 갚은 것이 이러하니, 더욱이 가상히 여길 만하다. 이에 앞서 변무사가 여러 번 가서도 청한 것을 허락받지 못하였으므로 조정의 의논은 재화(財貨)가 아니면 이루기 어렵다고 여겼다. 이에 공이 말하기를, ‘이 일은 오직 지극한 정성이 하늘에 닿아야 할 것이거늘 뇌물을 써서 무엇하겠는가? 또 외국의 사세는 중국과 같지 않은데, 만일 이 길을 한 번 열게 되면 그 폐단은 반드시 나라가 피폐하기에 이를 것이다.’ 하였다. 광해군 때에 이르러 비로소 뇌물을 쓰기 시작하여 마침내 바로잡기 어려운 폐단이 되니, 하담(荷潭) 김시양(金時讓)이 ‘선견이 있는 군자이다.’라고 말하였다.” 하였다.

 

[菊堂俳語曰 唐陵急人之義可嘉 而夫人之不忘其恩 而必報之者 如此 尤可尙已 先是 辨誣使累往不准請 朝議以爲非貨難成 公曰 此事唯可以至誠格天 何用賂爲 此外國事勢 與中國不同 若開此路 其弊必至於國斃 至光海時 始開賂門 綜成難救之弊 荷潭金公時讓 以爲有先見君子云]

 

위에서 보듯 『통문관지』에는 홍순언이 중국 여인과 맺은 인연이 당시 최고의 외교 현안인 종계변무를 성공시키고, 임진왜란 때 명나라 참전을 이끌어내는데 큰 힘이 되었음을 기술하고 있다. 물론 여인과의 인연도 일부 작용했겠지만 그 보다는 홍순언이라는 통역관의 뛰어난 역량이 명나라와의 외교 협상을 성공으로 이끈 것으로 여겨진다. 홍순언에 관한 일화는 『성호사설』, 『열하일기』, 『청구야담』, 『이향견문록』 등의 주요 기록에도 널리 소개되었다. 각각의 기록은 내용상에 조금은 차이가 있지만 홍순언과 중국 여인, 석성과의 인연이 외교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는 부분은 공통적인 요소이다.

 

조선시대 역관은 추천에 의하여 심사를 받고 적격자로 판정을 받으면 사역원에 들어가 본격적인 외국어 학습을 하였다. 그러나 사역원에 들어갔다고 해서 바로 역관이 되는 것은 아니었고, 엄격한 수련 과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역원에서는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온종일 공부를 하고 매월 2일과 26일에는 시험을 쳤다. 3개월에 한 번씩은 지금의 중간고사나 기말고사에 해당하는 원시(院試)를 쳤다. 수련 과정을 거친 후에는 잡과(雜科)를 치렀다. 문과처럼 3년마다 한 번씩 열리는 잡과에서 역관은 역과에 응시를 했고, 역과의 초시와 복시에 모두 통과해야 역관이 될 수 있었다. 역관이 조선시대 일선 외교에서 역량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에는 탄탄한 교육과정과 시험 제도가 바탕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국가에서 주도적으로 외국어 학습을 실시하고 우수한 역관을 배출하는 시스템을 확보하고 있었기에 홍순언과 같은 스타 역관을 배출할 수 있었다.

 

신병주 글쓴이 : 신병주
  • 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 주요저서
      - 하룻밤에 읽는 조선사, 램덤하우스, 2003
      - 조선 최고의 명저들, 휴머니스트, 2006
      - 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 책과 함께, 2007
      - 이지함 평전, 글항아리, 2008
      - 조선을 움직인 사건들, 새문사, 2009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