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백 열 일곱 번째 이야기
2012년 5월 7일 (월)
<적벽부(赤壁賦)>와 소동파(蘇東坡)의 마음
<적벽부(赤壁賦)>의 소동파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 드물 것이다. 우리나라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중국 인물로 문학에는 소동파, 사상에는 주자(朱子)를 꼽아도 지나치지 않으리라. 그런데 주자가 가장 배격했던 인물이 바로 소동파이다. 주자는 소동파의 사상과 문학이 학자들에게 큰 해독을 끼친다고 생각하여 혹독하게 비판하였다. 퇴계는 주자를 가장 충실히 배운 학자이지만 동파에 대한 견해만큼은 다르다. 퇴계와 주자의 성향 차이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대목이다.
신유년(1561) 4월 15일에 선생이 조카 교(), 손자 안도(安道) 및 덕홍(德弘)과 더불어 달밤에 탁영담(濯纓潭)에 배를 띄워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서 반타석(盤陀石)에 배를 정박했다가 역탄(櫟灘)에 이르러 닻줄을 풀고 배에서 내렸다. 세 순배 술을 마신 다음 선생이 옷깃을 바루고 단정히 앉아 마음을 고요히 가다듬고 한참 동안 가만히 계시더니 <전적벽부(前赤壁賦)>를 읊고는 말씀하셨다.
“소공(蘇公)이 비록 병통은 없진 않지만 그 마음에 욕심이 없었음은 ‘진실로 나의 소유가 아니면 비록 털끝만 한 것도 취하지 않는다.’ 이하의 구절에서 알 수 있다. 또 귀양 갈 때에 관(棺)을 싣고 갔으니, 세상일에 초연하여 구차하지 않음이 이와 같았다.”
그리고 청(淸)ㆍ풍(風)ㆍ명(明)ㆍ월(月)로 분운(分韻)하여 명 자를 얻으셨다. 시를 지으시기를,
달빛 어린 물 위는 희부옇고 밤기운 맑은데 水月蒼蒼夜氣淸
바람이 쪽배 불어 달빛 환한 강물 거슬러 오른다 風吹一葉泝空明
표주박에 담긴 백주는 은잔을 기울여 마시고 匏樽白酒飜銀酌
달빛 어린 물결에 노 저어 별빛을 끌고 가노라 桂棹流光掣玉橫
채석강에서 광태 부렸던 건1) 잘한 일 아니요 采石顚狂非得意
낙성호에서 뱃놀이한 일2)이 가장 생각나누나 落星占弄最關情
알지 못하겠다, 백년 뒤 통천에서 不知百歲通泉後
주자의 시 이은 사람 또 누가 있는지3) 更有何人續正聲
하였으니, 산수(山水)에서 흥취를 깊이 얻은 것이 이와 같았다.
1) 당(唐)나라 이백(李白)이 채석강(采石江)에서 뱃놀이를 하다가 술이 취해 물속의 달을 잡으려다 익사했다는 전설을 인용하였다.
2) 주자(朱子)가 낙성호(落星湖)에서 뱃놀이하면서 <화팽려월야범주낙성호(和彭蠡月夜泛舟落星湖)>란 시를 읊었는데 첫머리에 송나라 소상(蘇庠)의 <청강곡(淸江曲)>의 “長占烟波弄明月”이란 구절을 그대로 인용, “내 낀 강물 늘 차지하고 밝은 달 구경하려는, 생각을 가진 지 오래지만 누구에게 말할거나.[長占烟波弄明月 此心久矣從誰說]” 하였다.
3) 통천(通泉)은 중국의 지명이다. 두보(杜甫)의 <관설직소보서획벽(觀薛稷少保書畫壁)>에 “알지 못하겠다, 백년 뒤에 누가 다시 통천에 올런지.[不知百歲後 誰復來通泉]” 하였는데, 주자(朱子)가 무이구곡(武夷九曲)에서 뱃놀이를 하고 읊은 시에 “백년 뒤에 누가 다시 통천에 올거나.[百歲誰復來通泉]”라는 구절이 있다. 퇴계의 이 구절을 주자의 뱃놀이를 생각하면서 주자의 시구를 인용하여, ‘주자가 세상을 떠난 뒤에 누가 주자의 시를 이어 시를 지은 사람이 있는가.’라고 한 것이다.
[先生四月旣望, 與姪孫安道及德弘泛月濯纓潭, 泝流泊盤陀石, 至櫟灘, 解纜而下. 酒三行, 正襟端坐, 凝定心神, 不動聲氣, 良久而後, 詠前後赤壁賦曰: “蘇公雖不無病痛, 其心之寡欲處, 於苟非吾之所有, 雖一毫而莫取等句見之矣. 又嘗謫去, 載棺而行, 其脫然不苟如此.” 因以淸風明月分韻, 得明字. 詩曰: “水月蒼蒼夜氣淸, 風吹一葉泝空明. 匏樽白酒飜銀酌, 桂棹流光掣玉橫. 采石顚狂非得意, 落星占弄最關情. 不知百世通泉後, 更有下人續正聲.” 其有得於山水者如此.]
▶ 강세황(姜世晃)의 도산서원도(陶山書院圖)
- 이덕홍(李德弘 1541~1596), 《계산기선록(溪山記善錄)》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이 60세 때 도산서원(陶山書院) 아래 낙동강에서 형의 아들 이교(李), 손자 이안도(李安道), 제자 이덕홍(李德弘)과 함께 뱃놀이를 하는 광경을 기록한 것이다.
퇴계의 시에서 ‘공명(空明)’과 ‘유광(流光)’은 소동파의 <전적벽부(前赤壁賦)>에 “계수나무 노와 목란 상앗대로 맑은 물결을 치며 달빛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오르도다.[桂棹兮蘭槳 擊空明兮泝流光]” 한 데서 온 말로 밝은 달빛이 비친 강물을 형용한 것이다.
동파가 <적벽부>를 읊은 때는 7월 기망(旣望)이었고, 이 때는 4월 기망이었다. 기망은 음력 16일로 보름 다음 날인 이 때에 달이 가장 밝다고 한다. 달 밝은 밤, 낙동강에서 뱃놀이하면서 퇴계는 적벽(赤壁) 아래에서 뱃놀이한 동파를 생각하고 낙성호(落星湖)에서 뱃놀이한 주자를 생각하였다. 그런데 동파는 주자가 가장 배격한 인물이다.
소씨(蘇氏)는 그 몸가짐이 이미 형공(荊公)처럼 엄정하지 못하고 그 학술은 결국 공리(功利)를 잊지 못하고 속임수가 많다. 그를 따르는 사람으로 진관(秦觀), 이천(李薦) 같은 자들은 모두 허황하고 경박하여 사류(士類)가 선비 축에 끼워주지도 않았는데 서로 부추기며 현란한 언변을 구사하여 자기들의 주장을 유지했으나 예의와 염치가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하였다. 비록 그 형세가 사람들을 움직일 정도는 못 되었으나 세상의 방종을 좋아하고 구검(拘檢)을 싫어하는 자들이 이미 많이 그 쪽으로 쏠렸으니, 가사 권세를 가졌다면 채경(蔡京)이 한 짓을 직접 하지 않았다고 보장할 수 없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미 드러난 행적만 가지고 평가한다. 그래서 소씨가 그나마 근세 명경(名卿)의 반열에 들 수 있었고 남의 장점을 칭찬하길 좋아하는 군자들 또한 아직 드러나지 않은 화를 미리 찾아내어 비판하고자 하지 않았던 것이다.4)
동파의 몸가짐과 학문이 바르지 못하다고 비판하면서, 동파가 집권하였다면 왕안석(王安石)보다 훨씬 큰 폐해를 끼쳤을 것이며, 동파의 무리가 권력을 잡지 못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왕안석의 무리로서 악명을 떨친 소인배 채경과 다를 바 없었을 것이라 하였다. 이 밖에도 주자의 문집에는 동파를 혹심하게 비판한 곳이 많이 보인다. 요컨대 주자는 동파를 세상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가장 위험한 문인(文人) 학자로 간주하여 동파의 마음과 학문의 실상을 밝혀서 드러내고 가차 없이 공격하였다. 형공은 형국공(荊國公)의 준말로 왕안석의 봉호(封號)이다.
퇴계는 주자를 가장 흠모하였고 평생을 두고 주자학을 연구한 학자이다. 따라서 소동파를 비판한 주자의 저술을 누구보다 많이 읽었을 터인데도 ‘욕심이 없었고 세상일에 초연하여 구차히 살지 않았다’고 소동파를 평하고, 소동파가 귀양 갈 때 관을 싣고 갔다는 사실을 한 증거로 들었다.
그런데 주자는 소동파가 귀양 갈 때 모습을 형편없이 나약한 소인으로 기록하였다.
동파가 호주(湖州)에서 체포될 때 얼굴은 사색이 되고 두 다리에 맥이 풀려 거의 걷지도 못하였으며, 집에 들어가 가족과 작별하게 해달라고 했으나 사자(使者)가 들어주지 않았다.5)
유학사(儒學史)에서, 주자는 맹자(孟子)와 정이천(程伊川)을 닮았고 퇴계는 안연(顔淵)과 정명도(程明道)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주자는 맹자처럼 토론에서 결코 지지 않았고 그 어조도 결연(決然)하여 상대가 끝까지 수긍하지 않으면, 심지어 “천하에 단지 하나의 이치가 있을 뿐이다. 이쪽이 옳으면 저쪽이 그르고 이쪽이 그르면 저쪽이 옳으니, 양쪽이 병립(竝立)하는 경우는 있을 수 없다.[天下只有一理; 此是即彼非, 此非即彼是, 不容並立.]” 하였다. 양시양비(兩是兩非)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반면 퇴계는 토론하다가 끝까지 서로 견해가 맞지 않아도 “그대는 그대대로 연구하고 나는 나대로 연구하여 또 십여 년 공부를 쌓아야 할 것이니, 그런 다음 저마다 자신의 견해로 이 문제가 어떠한지 보면 피차의 옳고 그름을 알 수 있을 것이다.[只當爾月斯征, 我日斯邁, 又積十餘年之功, 然後各以所造看如何, 彼此得失, 於此始可定耳.]” 하여, 26세나 연하인 기고봉(奇高峯)을 포용해 주었다. 주자는 본래 양강(陽剛)한 성품을 타고 났거니와 그가 살던 시대에는 금(金)나라의 침략으로 국가가 위태하고 불교가 만연하여 유학이 쇠퇴하던 때라 건곤일척(乾坤一擲)의 결전을 치르는 위기의식을 늘 가질 수 밖에 없었다.
퇴계도 소동파의 학문을 인정하지는 않았다. 그 점에서는 주자와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본래 온후(溫厚)한 성품이었던 그는 밝은 달밤, 강 가에서 <적벽부>를 읊으면서 문득 소동파의 맑은 마음이 가슴에 와 닿았고, 학문의 시비를 떠나 순수한 인간의 마음에서 소동파의 심정을 느꼈으리라. 퇴계가 인간을 사랑하는 큰 마음을 가지지 않았다면 주자학에서 용납할 수 없는 소동파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이름난 학자가 되려면 명석한 두뇌, 비판적 사고가 필요하겠지만 좋은 학자 되려면 무엇보다 먼저 사람을 사랑하는 푸근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 또한 이것이 큰 학문의 바탕이 되고 메마른 인문학을 촉촉이 적셔주는 수분이 된다고 생각한다.
4) “若蘇氏, 則其律身已不若荆公之嚴, 其爲術要未忘功利而詭秘過之. 其徒如秦觀李薦之流, 皆浮誕佻輕, 士類不齒, 相與扇縱横捭闔之辨, 以持其說, 而漠然不知禮義廉恥之爲何物. 雖其勢利未能有以動人, 而世之樂放縱惡拘檢者, 已紛然向之; 使其得志, 則凡蔡京之所爲, 未必不身爲之也. 世徒據其已然者論之. 是以, 蘇氏猶得在近世名卿之列, 而君子樂成人之美者, 亦不欲逆探未形之禍, 以加譏貶.” 《朱子大全》 30권 答王尙書
5) “東坡在湖州被逮時, 面無人色, 兩足俱軟, 幾不能行, 求入與家人訣, 而使者不聽.” 《朱子大全》 45권 答廖子晦
글쓴이 : 이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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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고전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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