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盈科後進/고전향기

한시(漢詩) 고전의 국역(國譯)에 관하여

도솔산인 2012. 4. 25. 11:15

 

- 마흔 아홉 번째 이야기 -

 

2012년 4월 25일 (수)

 

한시(漢詩) 고전의 국역(國譯)에 관하여

 

 

며칠 전 신문에서; 러시아의 한 연구진이, 툰드라의 수십 미터 밑 지층을 조사하다가, 동토(凍土) 속에서 3만 2천 년 전의 땅다람쥐 굴에 저장 되어 있는, 식물의 열매들을 우연히 발견하고, 이를 ‘씨앗’으로 토양에 심어 싹틔우는 데 성공하여, 개화한 패랭이꽃 사진을 곁들인 기사를 읽은 바 있다.

개화한 패랭이꽃! 그 싱그러운 꽃향기며, 거기서 다시 영원한 생명의 유산으로 맺을 그 씨앗을 아울러 생각하면서 무한한 감개에 젖었었다.

 

먼지와 곰팡이 속의 어둑한 골방에서, 숨죽은 듯 쌓여있는 우리 선인들의 문화유산인 한적(漢籍)들! 지금도 기름진 토양과 따뜻한 햇살, 맑은 물, 신선한 공기 등, 여건만 제공되면 언제든 거기 내장(內藏)되어 있는 선인들의 정감어린 순수 우리말로 발아(發芽)하게 될 ‘씨앗’과도 같은 ‘시(詩)앗’들이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말’로써 ‘생각’한다. 생각이란 말을 바탕으로, 한 발 한 발 생각을 열어가는 것이다. 중국 사람의 한시는 중국말로 시상을 열어간 것이겠지만, 우리나라 한시는 우리말로 시상을 다져나간 것이니, 이 고서 속의 말들은, 본디는 선인들의 정감 어린 순수한 우리말이었건만, 우리말로 직접 표기할 수단이 없었던 당시였는지라, 부득이 한자를 빌어 표기했던 것인데, 한글 전용으로 한문을 도외시(度外視)하는 오늘날은, 어느덧 한문은 실어증(失語症)으로 말문이 닫혀버렸고, 사람들은 이를 해독할 길이 막혀, 이 귀한 유산을 계승해야할 후인들과의 소통이 되지 않는, 딱한 지경에 놓여 있게 되고 말았다.

 

우리는 이들을 깨워 일으켜야 한다. 그리하여 그 그윽한 서정(抒情)의 꽃을 피워내어, 향기를 풍기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해야 한다.

그리고 당시는 부득이하여 빌어 입었던 칙칙한 한복(漢服)을 벗겨내고, 산뜻한 우리 본래의 한복(韓服)으로 갈아입고 나서게 해야 한다. 그리하여 거기 내장되어 있는 선인들의, 그 알뜰한 사연들의 속삭임을, 우리말로 들을 수 있게 해야 한다.

그 속에는, 화조풍월(花鳥風月)의 유흥(幽興)도 있고, 이성간의 불타는 정념(情念)도 있다. 민생고(民生苦)의 연민(憐愍)도, 불면(不眠)의 회포(懷抱)도 있으며, 외침(外侵)에의 의분(義憤)도, 불의(不義)에의 항거(抗拒)도 있고, 풀리지 않는 고뇌(苦惱)도 있다. 이제 그 모두가 다시 말문이 트이어, 본래의 우리말로 그 속사정을 털어놓을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리고 그 갈아입을 한복(韓服)도, 그 체재(體裁)며 옷감의 재질(材質), 그 무늬며 감촉, 색상(色相)이며 그 매무새, 그 풍채며 품격 등이 최상이기를 염원한다. 물론 이는 재봉사에 따라 다르듯이; 역자의 자질에 따라 달라질 것은 부득이한 일이나; 시어(詩語)의 적절한 선택과 조사(措辭)의 긴절(緊切)한 배려(配慮)는 기본이라 하겠거니와, 조사(助詞) 하나, 어미(語尾)하나의 미세한 조작(操作)으로도 호리천리(毫釐千里)로 격차가 나게 마련이니, ‘시수(詩瘦)가 드는 일’은 원작자만이 아닌, 역자로도 자유로울 수는 없다 할 것이다.

 

필자는 우리의 한문학 유산은, 마땅히 환원되어 국문학 유산으로 계승되어야 한다고 주장해 오는 바이다.

우리는 우리 선인들의, 그 다정다감한 가슴속에서 무시로 피어오르던 문학적 정서를, 무엇에 의해서든 표현하지 않고는 못 견딜, 강한 충동과 욕구들로 안달하던, 당시의 정황(情況)을 상상해 본다. 거기 다행히 한자(漢字)라도 있어서, 불편하나마 ‘적을 수 있었음’은 그 얼마나 다행한 일이었던가?

그 중에도 한시는 고전 중의 정수(精髓)로서, 우리 선인들의 순수한 ‘서정의 꽃’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하마터면 공백(空白)일 뻔한 고대 문학사에 끼쳐준 공적 또한 컸거늘, 일부 학자들의 이국적시(異國籍視)하거나 서얼시(庶孼視)함은, 그 협소한 국수주의 와실(蝸室)에 안주(安住)하고자하는 협량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한시를 국역함에 있어 특히 유의해야 할 두 가지가 있으니, 그 하나는 시의 주제(主題), 곧 시정(詩情)에 알뜰해야 할 것과, 또 시의 감흥에 따라 일어나는 운율에 충실해야 한다는 내용과 형식의 양면의 조화이다.

 

무릇 한자는 표의문자(表意文字)라, 그 한 자 한 자가 다 알찬 의미의 덩어리인데다 또 일자다의(一字多義)로서, 그 자리에 특채(特採)된 자의(字意)만이 아닌, 여타의 비슷한 자의들도, 대개는 그 주변에서 은연중 분위기나 뉘앙스로 작용하게 되어, 자간(字間) 행간(行間)에 은근히 작용하는 암유(暗喩), 상징(象徵), 풍자(諷刺), 기탁(寄託), 우의(寓意), 여운(餘韻) 등 언외(言外)의 함축(含蓄)을 가능하게 하여, 은근미(慇懃美), 유수미(幽邃味)를 자아내게 하기 때문에, 한 편의 시 속에 실로 엄청난 시세계를 압축수용(壓縮收容)해 놓고 있는 것이므로, 비록 소품(小品)일지라도, 그 시경(詩境)의 역내(域內)로 깊숙이 진입하여 진경(眞境)에 이르지 않고는, 그 시혼(詩魂)에 접신(接神)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니, 그러고서야 올바른 감상(鑑賞)도 불가능하겠거든, 하물며 어찌 역시를 시도할 수 있으리오?

 

‘번역도 창작’이란 말은 시에 있어 더욱 절실하고, ‘역시(譯詩)도 시이어야 하기’에 그 치르는 산고(産苦)는 창작시에서나 다름이 없다 할 것이다. 시가 자연과 인생의 질서요 조화의 한 유기체일진대, 이러한 시로서의 생명은 역시에서도 손상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불타는 작자의 시심(詩心)이, 역자의 가슴에로 옮아붙지 않은 상태에서의, 섣부른 사무적 축자해(逐字解)는, 비시(非詩)에로 전락되게 하기 십상이니, 그것은 부분적인 뜻에 집착하다보면 시정신이 실종되기 쉽고, 미사여구로 옮겨 줄바꿈은 해놓았지만, 운율은 이미 죽어 있는; 역시에서 흔히 보는, 그런 비시비문(非詩非文)의 기형(畸形)은, 일종의 트기나 다를 바 없다.

그러므로 원시의 자의(字意)가 부분적으로는 손상됨이 있다할지라도, 전체적으로의 본래의 시정신은 살아 있어야 할 것이기 때문에, 그 극복해야 할 제약은, 오히려 창작시에서보다 더하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옛 작품에 접하여 감흥을 느낀다는 것은, 독자의 뇌리(腦裏)에 순간적으로 영상(映像)되는; 시작(詩作) 당시의 정경(情景)이며 정황(情況), 곧 시의 내부세계를 떠올리게 됨으로써 부지중 원작자의 시흥에 편승(便乘)하게 되고, 그 시신(詩神)에 접신(接神)하게 되었을 때의 그 감흥인 것이다. 곧 시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공감(共感)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진정한 공감대(共感帶)는 오히려 저 표면에 나타나 있는 것에서가 아니라, 그 전체에서 우러나는, 마치 자장(磁場)에 자화(磁化)되듯, 심금(心琴)에 와 부딪히는 전심령적(全心靈的) 공명(共鳴)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시의 번역이란 곧 이 전심령적으로 공감되는 감동을 옮겨내는 일이니, 우리말 우리 가락으로 옮겨내는데 있어, 작자의 시정(詩情)이 역자(譯者)의 가슴에로 재연(再燃)되는 상태에서의 계시(啓示)와도 같은 언어의 귀띔에서, 대역(對譯)도 의역(意譯)도 아닌, 시어들이, 춤추는 가락으로 연달아 길을 터주게 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곧 시인의 가슴에 불타던 그 불길이 역자의 가슴에로 옮아붙어 재연(再燃)되는 시정(詩情)의 재탄생(再誕生)에서야 참다운 역시가 기대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비록 본시와에 경정(逕庭)이 생긴다 하더라도, 그 근본의 시정에 충실한 한, 완역이라 이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역자 또한 시적 감정의 체험의 폭이 넓고 깊을수록 재연(再燃)에의 점화(點火)도 신속(神速)할 것은 물론이다. 이는 역자의 자질(資質)로서, 필수적이라 할 것이다.

 

한시는 여러 유형들이 있으나, 거의 대다수는 한자(漢字)들로 축조된 오언(五言) 칠언(七言)등 음수율(音數率)의 정형시(定型詩)이다. 그러므로 역시에서도 정형으로 옮겨지게 마련이며, 그 절주(節奏:운율)는 시정의 희로애락에 따라 저절로 달라지게 마련이다.

여기서 운율이라 함은, 한시 자체에 내재하고 있는 평측율(平仄律), 압운율(押韻律) 등을 이름이 아니라, 우리말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그 내적 감흥이 음악적으로 조율(調律)되어져야 함을 이름이다.

곧 운율이란, 시흥(詩興)에 따라 절로 일어나는 ‘흥가락[興調]’을 이름이다. 곧, 시정에 따라 일어나게 마련인 흥가락, ―그 흥가락에 따라 나타나게 마련인 언어(言語)의 율동적 몸짓을 이름이니; ‘몸짓’이란 무엇인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손이 너풀거리고 발이 우쭐거리는[不知 手之舞之 足之蹈之 -詩經] 동작을 이름이다. 곧 그 내용과 형식이 표리일체(表裏一體)로 숙성되어 있어야 할 것을 이름이다.

 

고전 한시의 국역! 이는 천고상(千古上)의 선인과 천고하(千古下)의 후인이 얼싸 만나 공명공감하는 감격의 장(場), 그 다시 말문이 열린 애당초의 우리말! 천고의 혈맥이 소통하는 감동의 장을 마련하는 일인 것이다.

극도의 이기주의와 물질만능으로 치닫는 세태! 어디없이 대결의 양상으로 포진하여, 으르렁거리고 포효(咆哮)하는 세태! 가해와 보복의 악순환이 처처에 반복되고 있는 지구촌! 이 싸느라니 식어가는 인정(人情)의 불모지대(不毛地帶)에서, 한갓 물질의 풍요만으로 인간이 어찌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인가? 비록 오늘날보다는 가난했을망정 연민의 눈물이 있고, 어루만지는 손길이 있는 그 옛날의 인정이 그립지 아니한가?

‘고전을 일깨우는 일’은 바로 이 고갈해버린 인정의 텃밭, 비인간화(非人間化)로 황폐해진 인간의 마음밭[心田]에 옛 ‘씨앗’을 싹틔워, 다시 푸르게 푸르게 자라, 붉게 붉게 꽃피우는 녹화사업(綠化事業)이기도 하다 할 것이다.

 


글쓴이 : 손종섭
  • 고전 평론가
  • 저서
      『우리말의 고저장단』, 정신세계사, 1999
      『노래로 읽는 당시(唐詩)』, 태학사, 2004
      『옛 시정(詩情)을 더듬어』, 김영사, 2011 등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고전포럼 고전칼럼 -마흔아홉번째이야기[2012년04월25일(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