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盈科後進/고전향기

‘우리 안의 중국’ : 바깥이 없는 사회의 슬픔

도솔산인 2012. 4. 30. 13:34

 

- 이백 열 여섯 번째 이야기-

 

 

‘우리 안의 중국’ : 바깥이 없는 사회의 슬픔

 

 

요즈음 우리 사회에서 고전이 힘을 얻고 있다. 대학가에서는 고전 읽기를 강조하고, 출판계에서는 고전 다시 쓰기를 기획한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얄팍한 인스턴트 지식들을 떨쳐내고 심신을 울리는 묵직한 고전의 쇳소리를 듣고 싶은 것일 게다. 하지만, 큰 결심하고 동서양 고전 백선 목록에서 어렵사리 몇 권 골라 책을 읽어도 기대한 쇳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면 원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사람들은 말하리라. 고전은 언제나 우리의 바깥에서만 맴돌고 있다고. 그래서, 고전을 모른다고. 그러나, 박제가(朴齊家, 1750~1805)는 반대로 말한다. 고전은 언제나 우리의 안에서만 맴돌고 있다고. 그래서, 고전을 알기 어렵다고. 과연 그러한가?

 

우리나라 시는 송(宋), 금(金), 원(元), 명(明)을 배운 사람이 상류이다. 당(唐)을 배운 사람이 그 다음이다. 두보(杜甫)를 배운 사람이 최하이다. 배운 내용이 더욱 높을수록 그 재주가 더욱 낮은 것은 어째서일까? 두보를 배운 사람은 두보가 있음만 알 뿐이다. 그 나머지는 보지도 않고 먼저 업신여긴다. 그래서, 작법이 더욱 졸렬하다. 당을 배운 사람의 폐단도 똑같이 그렇지만 그래도 조금 나은 것은 두보 외에도 오히려 왕유(王維), 맹호연(孟浩然), 위응물(韋應物), 유종원(柳宗元) 등 수십 명 시인의 이름이 가슴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꼭 두보의 시보다 더 나은 시를 지으려 하지 않아도 절로 더 나은 시를 짓게 된다. 송, 금, 원, 명을 배운 사람은 그 식견이 다시 이보다 앞서 있을 것이다. 그러니, 또 하물며 보다 더 많은 책을 널리 모두 읽고 참된 성정(性情)을 일으킨 사람이겠는가. 이렇게 볼 때 문장의 도는 심지(心智)를 열고 이목(耳目)을 넓히는 데 있지 어느 시대의 작품을 배웠느냐는 것에 달려 있지 않다.

 

서예도 그렇다. 진인(晉人)을 배운 사람이 최하이다. 당송(唐宋) 이후 서첩을 배운 사람이 조금 아름답다. 지금 중국의 서법을 곧바로 익힌 사람이 가장 훌륭하다. 어찌 진인과 당송의 서예가 지금 중국만 못해서이겠는가? 세대가 멀어지니 모각(摸刻)이 전해지지 않고 외국에서 출생하니 진짜를 품정(品定)하지 못해 도리어 지금 중국 사람의 서예가 믿을 수 있고 친근하여 고서의 법을 이로부터 구할 수 있는 것만 못하기 때문이다. 탑본의 진짜와 가짜, 육서(六書)와 금석문(金石文)의 근본과 유파, 그리고 필묵이 자연스럽게 변화하고 유동하는 필세(筆勢)를 알지 못한 채 부질 없이 스스로를 진인(晉人)이라 하고 이왕(二王)1)이라 하니, 천하의 시를 모두 폐지하고 두보의 수십 편 시구를 묵수하여 스스로 고루한 문제점에 빠지는 것과 거의 가깝지 않은가? 무릇 군자의 입언은 시대를 아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내가 중국에서 산다면 이런 논의를 하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에 있으니 어쩔 수 없이 그런 것은 학설이 달라져서가 아니라 시세가 그렇게 시키는 것이다.

 

누군가는 말하리라. “두보의 시와 진대(晉代)의 필적은 사람으로 비유하면 성인(聖人)이다. 성인을 버리고 성인보다 못한 사람에게 배울 것인가?”

“그것과는 차이가 있으니 행동과 기예는 구별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땅을 구획해서 집을 짓고는 ‘이것이 공자의 집이다’라고 말하고 종신토록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면 그것이 폐가가 되어 있음을 볼 뿐이다. 문장이 옛날 융성하고 오늘날 쇠퇴한 대강이나 풍요(風謠)와 명물(名物)이 같고 달라 생긴 득실 같은 것은 정밀한 사람의 자득(自得)에 달려 있으니 사람들마다 더불어 말하기는 어렵겠다.”

임금님(=정조) 재위 5년 신축년(1781) 초겨울 위항도인(葦杭道人)은 겸사직(兼司直) 중에 적는다.

 

1) 이왕(二王) : 서예가로 이름높은 왕희지(王羲之)와 왕헌지(王獻之)를 일컫는다.

 

-박제가(朴齊家 1750~1805),「시학론(詩學論)」,『정유각문집(貞蕤閣文集)』

 

※ 이 글의 원문텍스트는 한국고전종합DB 홈페이지에 수록된 한국문집총간 261집《정유각집(貞蕤閣集)》권1, 논(論),〈시학론(詩學論)〉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원문 바로가기]

 

 

  

▶ 청나라 화가 나빙(羅聘 733~1799)이 그린 박제가 초상화

 

 

 

 

 

박제가는 조선후기 지성사에서 샛별 같은 사람이다. 정조연간 청의 학문을 수용하고 청의 선진 문물을 도입해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꽤 있었지만 박제가처럼 이를 북학(北學)이라 개념 규정하고 직접 정조에게 북학을 해야 한다고 상소한 사람은 거의 아무도 없었다. 홍대용도 박지원도 북학을 말하지는 않았다. 정조연간 북학 담론이 실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북학사상이라는 학술 용어가 자연스럽게 사용되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박제가의 문제작 『북학의』에 힘입은 것이다. 물론 『북학의』가 특별한 것은 북학의 창발성 때문만은 아니다. 일본 메이지 시대의 문명개화론, 또는 한국 박정희 시대의 조국근대화론이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로 이 책에는 조선의 부국(富國)을 위한 파격적인 제안들이 담겨 있다. 아니, 어쩌면 조선 후기 정조 시대가 일본의 메이지 시대나 한국의 박정희 시대와 비슷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커진다. 박제가는 조선 사회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파격적인 제안을 하면서 그것을 왜 북학이라는 개념으로 표상한 것일까? 북학이란 『맹자(孟子)』 「등문공상(縢文公上)」에서 보듯이 초(楚)의 진량(陳良)이 평소에 주공과 공자의 도를 좋아하여 북으로 중국(中國)에 유학을 가서 중국 현지 학자를 능가하는 큰 학자가 되었다는 이야기에 출처를 두고 있는 말이다. 이 말의 말뜻은 조금 섬세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아마 진량은 중국에 가기 전에 충분히 초(楚)에서도 중국을 배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원하는 참다운 중국, 곧 주공과 공자의 도는 초(楚)의 바깥에 있었고 그렇기에 그는 중국으로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진량이 공부한 참다운 중국은 ‘초(楚) 안의 중국’이 아니라 ‘초(楚) 밖의 중국’이었다. ‘우리 안의 중국’이 아니라 ‘우리 밖의 중국’이었다. 박제가가 자신의 작품에 북학의 제목을 부여한 것은 곧 그가 구상한 것이 ‘조선 안의 중국’을 버리고 ‘조선 밖의 중국’을 취하자는 계몽의 기획이었음을 암시한다.

 

사태의 심각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조선은 유사 이래 중국과 교류하며 항상 중국을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조선이 잘 알고 있는 것은 ‘중국’이 아니라 ‘조선 안의 중국’이 되었다. 그리고, ‘조선 안의 중국’을 붙들며 그들만의 리그를 하고 있었다. 바깥이 없는 사회의 슬픔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도대체 중국이 무엇이던가? ‘조선 안의 중국’은 조선에서 문화적으로 소비되는 중원과 강남일지 모르나 ‘조선 밖의 중국’은 중국의 현지 정세에서 조우하는 만주, 몽골, 티베트였다. 만주, 몽골, 티베트를 통해 중국을 본다는 것과 중원과 강남을 통해 중국을 본다는 것은 그 감각이 서로 얼마나 다른가? 홍대용의 「의산문답」에서 말하는 ‘의무려산’, 박지원의 『열하일기』에서 말하는 ‘열하’, 박제가의 『북학의』에서 말하는 ‘북학’, 그것은 다같이 ‘조선 안의 중국’을 극복하고 ‘조선 밖의 중국’을 전망하는, 중국을 향한 문명사적인 새로운 시점(視點)이었다. 북학이란 북벌로부터 북학으로의 전환, 혹은 낙론으로부터 북학으로의 전환과 같이 북학에서 사태가 종료되는 ‘북학으로의 전환’이라는 시점에서 보아야 할 미지근한 현상이 아니라 북학으로부터 개화로의 전환, 혹은 북학으로부터 애국계몽으로의 전환과 같이 북학에서 사태가 시작되는 ‘북학으로부터의 전환’이라는 시점에서 보아야 할 들끊는 현상이었을지도 모른다.

 

요컨대, 북학은 단순히 중국의 선진 문물을 배우자는 기술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우리 안의 중국’을 극복하고 ‘우리 밖의 중국’을 자각하여 참다운 문명을 다시 수립하자는 사상적인 차원의 문제, 학문적인 차원의 문제였다. 이 점에 유의한다면 어쩌면 박제가의 진정한 문제작은 『북학의』보다 「시학론」일지 모르겠다. 「시학론」에서는 ‘우리 안의 중국’의 일그러진 학문적 모습을 흥미롭게 엿볼 수 있다. 시성(詩聖)으로 불리는 두보(杜甫)의 시를 전공해야 나도 시성이 될 수 있다는 기복신앙적 학문, 두시(杜詩) 이후의 시사(詩史)에 전혀 무관심한 비역사적 학문, 두시에 관한 과학적인 문헌 조사에 인색한 관념적인 학문, 내가 사는 시대를 향해 두시가 무엇을 말할 수 있는지 근본적 물음이 결여된 취미적인 학문. 박제가는 두시(杜詩)를 말했지만 이것은 주학(朱學)의 문제일 수도 있었으며, 오늘날의 현대 학문에서도 양심적인 학자라면 늘 고민하는 문제일 것이다. 아울러 ‘우리 안의 중국’을 극복하는 문제를 보편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어쩌면 현대 중국 이택후(李澤厚)가 말하는 ‘서체중용(西體中用)’의 문제의식, 현대 한국 중문학계에서 말하는 ‘제3의 동양학’과도 통할 수 있는 자기 성찰인지 모르겠다.

 

고전을 읽어도 고전이 잘 읽히지 않는다면 박제가의 북학을 생각해 보라. 우리의 고전은 지금도 ‘우리 안의 중국’, ‘우리 안의 서양’에 갇혀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진정 우리의 안을 벗어나 우리의 밖에서 고전과 만날 용기가 있는가?

 

 

노관범

글쓴이 : 노관범

  •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박사
  • 한국고전번역원 전문위원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고전포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