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백 열 여덟 번째 이야기
2012년 5월 14일 (월)
어우동(於于同)은 시대의 희생양인가?
현대사회에서도 성추문은 민감한 사회적 이슈이다. 국회의원 당선자를 하루 아침에 낙마시키고, 사회적 지명도가 있는 인사도 성추문에 휩쓸리면 평생 쌓아온 명예를 모두 잃게 된다.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성추문은 아이러니하게도 여성에게서 나왔다. 어우동이 그 주인공이다.
조선왕조의 공식 기록인 『성종실록』에는 어우동 사건의 전말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서, ‘어우동’이 당시 정국의 뜨거운 감자였음을 알 수 있다.
가. 의금부(義禁府)에서 아뢰기를, “방산수(方山守) 이난(李瀾)과 수산수(守山守) 이기(李驥)가 어을우동(於乙宇同)이 태강수(泰江守)의 아내였을 때에 간통한 죄는, 율이 장 1백 대, 도(徒) 3년에 고신(告身)을 모조리 추탈하는 데에 해당합니다.”하니, 명하여 은 속(贖)바치게 하고, 고신을 거두고서 먼 지방에 부처(付處)하게 하였다.(『성종실록』 성종 11년(1480) 7월 9일)
[義禁府啓: “方山守瀾、守山守驥, 於乙宇同, 爲泰江守妻時通奸罪, 律該杖一百、徒三年、告身盡行追奪。” 命贖杖, 收告身, 遠方付處]
나. 사헌부 대사헌 정괄(鄭佸)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신 등은 생각건대, 어을우동이 사족(士族)의 부녀로서 귀천을 분별하지 않고 친소(親疏)를 따지지 않고서 음란함을 자행하였으니, 명교(名敎)를 훼손하고 더럽힌 것이 막심합니다. 마땅히 사통한 자를 끝까지 추문하여 엄하게 다스려야 하겠는데, 의금부에서 방산수(方山守) 이난(李瀾)의 초사(招辭)에 의거하여 어유소(魚有沼)ㆍ노공필(盧公弼)ㆍ김세적(金世勣)ㆍ김칭(金偁)ㆍ김휘(金暉)ㆍ정숙지(鄭叔墀)를 국문하도록 청하였는데, 어유소ㆍ노공필ㆍ김세적은 완전히 석방하여 신문하지 않으시고, 김칭ㆍ김휘ㆍ정숙지 등은 다만 한 차례 형신(刑訊)하고 석방하였으니, 김칭 등이 스스로 죄가 중한 것을 아는데, 어찌 한 차례 형신하여 갑자기 그 실정을 말하겠습니까? 신 등이 의심하는 것이 한 가지가 아닙니다. 난(瀾)이 조정에 가득한 대소 조관 중에 반드시 이 여섯 사람을 말한 것이 한 가지 의심스럽고, 어유소ㆍ김휘 등의 통간한 상황을 매우 분명하게 말하니 두 가지 의심스럽고, 난이 이 두 사람에게 본래 혐의가 없고 또 교분도 없는데, 반드시 지적하여 말하니 세 가지 의심스럽고, 김칭ㆍ김휘ㆍ정숙지 등은 본래 음란하다는 이름이 있다는 것이 네 가지 의심스럽습니다. 지금 만일 그들을 가볍게 용서하면 죄 있는 자를 어떻게 징계하겠습니까? 청컨대 끝까지 추문하여 그 죄를 바르게 하소서.”하였고, 사간원에서 또한 어유소ㆍ노공필ㆍ김세적의 죄를 청하였으나, 모두 들어주지 않았다.(『성종실록』 성종 11년(1480) 8월 5일)
[司憲府大司憲鄭佸等上箚子曰:臣等以謂 ‘於乙宇同, 以士族婦女, 不辨貴賤, 不計親疏, 恣行淫亂, 毁汚名敎莫甚。’ 宜窮推所私者, 而痛治之, 禁府據方山守瀾招辭, 請鞫魚有沼、盧公弼、金世勣、金偁、金暉、鄭叔墀, 而有沼、公弼、世勣, 則全釋不問, 金偁、金暉、鄭叔墀等, 則只刑訊一次, 而釋之, 偁等, 自知罪重, 豈一次刑訊, 而遽輸其情乎? 臣等所疑者非一。 瀾於滿朝大小朝官, 必言此六人, 一可疑也; 有沼、金暉等通奸之狀, 言之甚明, 二可疑也; 瀾於此二人, 素無嫌隙, 又無交分, 而必斥言之, 三可疑也; 金偁、金暉、鄭叔墀等, 素有淫亂之名, 四可疑也。 今若輕赦之, 則有罪者何所懲乎? 請窮推, 以正其罪。司諫院亦請魚有沼、盧公弼、金世勣罪, 皆不聽]
다. 어을우동(於乙宇同)을 교형(絞刑)에 처하였다. 어을우동은 바로 승문원 지사(承文院知事) 박윤창(朴允昌)의 딸인데, 처음에 ‘태강수(泰江守) 동(仝)에게 시집가서 행실(行實)을 자못 삼가지 못하였다.(『성종실록』 성종 11년(1480) 10월 18일)
[絞於乙宇同。 於乙宇同, 乃承文院知事朴允昌之女也, 初嫁泰江守仝, 行頗不謹]
▶ 어우동에 관한 기사가 나오는 용재총화(《민족문화대백과사전》제공)
위에서 실록 기록을 살펴보았지만 어우동은 음행(淫行)이 문제가 되어, 결국에는 교형(絞刑)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한편 성종 시대에 활약한 성현(成俔:1439~1504)의 『용재총화』에도 당대에 겪었던 어우동 사건의 시말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어서, 어우동 사건은 당시 사회에 큰 이슈가 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어우동(於于同)은 지승문(知承文) 박 선생의 딸이다. 그녀는 집에 돈이 많고 자색이 있었으나, 성품이 방탕하고 바르지 못하여 종실(宗室) 태강수(泰江守)의 아내가 된 뒤에도 태강수가 막지 못하였다. 어느 날 나이 젊고 훤칠한 장인을 불러 은그릇을 만들었다. 그녀는 이를 기뻐하여 매양 남편이 나가고 나면 계집종의 옷을 입고 장인의 옆에 앉아서 그릇 만드는 정묘한 솜씨를 칭찬하더니, 드디어 내실로 이끌어 들여 날마다 마음대로 음탕한 짓을 하다가, 남편이 돌아오면 몰래 숨기곤 하였다. 그의 남편은 자세한 사정을 알고 마침내 어우동을 내쫓아 버렸다. 그 여자는 이로부터 방자한 행동을 거리낌 없이 하였다. 그의 계집종이 역시 예뻐서 매양 저녁이면 옷을 단장하고 거리에 나가서, 이쁜 소년을 이끌어 들여 여주인의 방에 들여 주고, 저는 또 다른 소년을 끌어들여 함께 자기를 매일처럼 하였다. 꽃피고 달 밝은 저녁엔 정욕을 참지 못해 둘이서 도성 안을 돌아다니다가 사람에게 끌리게 되면, 제 집에서는 어디 갔는지도 몰랐으며 새벽이 되어야 돌아왔다. 길가에 집을 얻어서 오가는 사람을 점찍었는데, 계집종이 말하기를, “모(某)는 나이가 젊고 모는 코가 커서 주인께 바칠 만합니다.” 하면 그는 또 말하기를, “모는 내가 맡고 모는 네게 주리라.” 하며 실없는 말로 희롱하여 지껄이지 않는 날이 없었다. 그는 또 방산수(方山守)와 더불어 사통하였는데, 방산수는 나이 젊고 호탕하여 시(詩)를 지을 줄 알므로, 그녀가 이를 사랑하여 자기 집에 맞아들여 부부처럼 지냈었다. 하루는 방산수가 그녀의 집에 가니 그녀는 마침 봄놀이를 나가고 돌아오지 않았는데, 다만 소매 붉은 적삼만이 벽 위에 걸렸기에, 그는 시를 지어 쓰기를,
물시계는 또옥 또옥 야기가 맑은데 / 玉漏丁東夜氣淸
흰 구름 높은 달빛이 분명하도다. / 白雲高捲月分明
한가로운 방은 조용한데 향기가 남아 있어 / 間房寂謐餘香在
이런 듯 꿈속의 정을 그리겠구나. / 可寫如今夢裏情
하였다. 그 외에 조관(朝官)ㆍ유생으로서 나이 젊고 무뢰한 자를 맞아 음행하지 않음이 없으니, 조정에서 이를 알고 국문하여, 혹은 고문을 받고, 혹은 폄직되고, 먼 곳으로 귀양간 사람이 수십 명이었고, 죄상이 드러나지 않아서 면한 자들도 또한 많았다. 의금부에서 그녀의 죄를 아뢰어 재추(宰樞)에게 명하여 의논하게 하니, 모두 말하기를, “법으로서 죽일 수는 없고 먼 곳으로 귀양보냄이 합당하다.” 하였다. 그러나 임금이 풍속을 바로잡자 하여 형에 처하게 하였는데, 옥에서 나오자 계집종이 수레에 올라와 그녀의 허리를 껴안고 하는 말이, “주인께서는 넋을 잃지 마소서. 이번 일이 없었더라도 어찌 다시 이 일보다 더 큰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란 법이 있겠습니까.” 하니, 듣는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여자가 행실이 더러워 풍속을 더럽혔으나 양가(良家)의 딸로서 극형을 받게 되니 길에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성현(成俔 1439~1504), 『용재총화(慵齋叢話)』권5)
[於宇同者知承文朴先生之女也。其家殷富。女婉孌有姿色。然性蕩放不檢。爲宗室泰江守之妻。泰江不能制嘗請工造銀器工年少俊丰。女悅之。每値夫出。衣婢服坐工側。贊美造器之精。遂得私引入內室。日縱淫穢。伺其夫還則潛遯。其夫審知事情遂棄之。女由是恣行無所忌。其女僕亦有姿。每乘昏靚服。出引美色少年。納于女主房。又引他少年與之偕宿。日以爲常。或於花朝月夕不勝情欲。二人遍行都市。故爲人所摟。其家不知所之。到曉乃還。嘗借路旁家。指點往來人。僕曰某人年少。某人鼻大。可供女主。女亦曰某人吾敢之。某人可給汝。如是戱謔無虛日。女又與宗室方山守私通。守亦年少豪逸。解作詩。女愛之。邀至其家如夫婦。一日守到其家。適女春遊不還。惟紫袖衫掛屛上。遂作詩書之曰。玉漏丁東夜氣淸。白雲高捲月分明。間房寂謐餘香在。可寫如今夢裏情。其他朝官儒生年少之無賴。無不邀而淫焉。朝延知而鞫之。或栲或貶。流遠方者數十人。其不露而免者亦多。禁府啓其罪。命議宰樞。皆云於法不應死。合竄遠方。上欲整風俗。竟置於刑。自獄而出。有女僕登車抱腰曰。女主勿失魂。若無此所事。安知復有大於此事者乎。聞者笑之。女雖穢行汚俗。而以良家女被極刑。道路有垂泣者]
위의 기록을 보면, 어우동은 성종대 스캔들의 중심에 있었다. “조정의 관리와 유생으로서 나이 젊고 무뢰한 자를 맞아 음행하지 않음이 없으니, 조정에서 이를 알고 국문하여, 혹은 고문을 받고, 혹은 폄직되고, 먼 곳으로 귀양간 사람이 수십 명이었고, 죄상이 드러나지 않아서 면한 자들도 또한 많았다.”는 기록에서 ‘성리학의 나라’임을 표방한 조선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런데 주목할 점이 있다. 과연 어우동의 음행이 극형에 이를 만한 것이었느냐는 점이다. “여자가 행실이 더러워 풍속을 더럽혔으나 양가(良家)의 딸로서 극형을 받게 되니 길에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는 기록처럼 당시에도 어우동을 사형시킨 것은 심한 처사라고 인식하는 경우도 있었다.
결국 어우동을 죽음으로 몬 것은 성종의 의지였다. 본격적으로 성리학의 이념을 전파하려고 하던 시대에 발생한 ‘어우동’이라는 돌출 인물은 성리학의 이념에 정면으로 반대되는 캐릭터였다. 시범적으로라도 어우동을 처형해서 모든 조선의 여성들에게 반면교사로 삼게 하자는 뜻이 피력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우동이 교형(絞刑)으로 처형된 1480년(성종 11) 10월은 성종의 왕비인 윤씨가 1479년 폐위되었다가, 1482년 사사(賜死)된 시기와도 묘하게 맞물린다. 왕실에서 왕의 권위에 도전했던 폐비 윤씨와 민간에서 남성의 권위에 도전했다가 죽음을 맞이한 어우동의 모습에는 겹쳐지는 부분이 있다. 두 사람을 처형시킨 인물은 성종이었고, 성종시대는 성리학의 이념을 국가와 사회 곳곳에 전파시키려는 의욕으로 가득찬 시대였다. 어우동과 폐빈 윤씨는 이러한 시대의 희생양은 아니었을까?
글쓴이 : 신병주
- 하룻밤에 읽는 조선사, 램덤하우스, 2003
- 조선 최고의 명저들, 휴머니스트, 2006
- 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 책과 함께, 2007
- 이지함 평전, 글항아리, 2008
- 조선을 움직인 사건들, 새문사, 2009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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