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의 향기 - 이백 스물 한 번째 이야기
1558년 여름, 남명 조식의 지리산 유람
2012년 5월 25일 지리산 둘레길 전체 구간이 개통되었다. 2008년 4월 시범 구간으로 첫 선을 보인지 4년 만에 완전 개통된 지리산 둘레길은 경상남도, 전라북도, 전라남도의 3개도와 남원시, 함양군, 산청군, 하동군, 구례군 등 5개 시와 군에 걸쳐있는 전체길이 274km의 길이다. 최근에는 둘레길로 유명해졌지만, 지리산은 예로부터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불려왔고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는 등 한국인들의 마음속에 언제나 깊이 자리 잡고 있는 명산이다.
지리산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대표적인 학자가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이다. 평생에 10번 이상 지리산을 다녀왔고, 말년에는 지리산 천왕봉이 바라다 보이는 산천재(山天齋)에 거처를 잡았다. 그의 묘소 또한 지리산 자락에 조성되어 있다. 지리산을 사랑한 학자 조식은 1558년(명종13) 첫 여름 제자들과 함께 지리산 유람길에 나섰다. 그리고 이때의 기행을 ‘유두류록(遊頭流錄)’이라는 기행문으로 남겼다. 이 글을 통해 450여년 전 조식 일행이 걸었던 지리산 유람 코스와 조식의 생각들을 따라가 보기로 한다.
가정(嘉靖) 무오년(1558) 첫 여름에 진주 목사 김홍(金泓) 홍지(泓之)ㆍ수재(秀才) 이공량(李公亮) 인숙(寅叔)ㆍ고령 현감 이희안(李希顔) 우옹(愚翁)ㆍ청주 목사 이정(李楨) 강이(剛而) 및 나는 함께 두류산(頭流山)을 유람하였다. 산 속에서는 나이를 귀하게 여기고 관작을 숭상하지 않으므로 술잔을 돌리거나 자리를 정할 때에도 나이로서 하였다. 혹 어떤 때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10일 우옹이 초계(草溪)에서 내가 있는 뇌룡사(雷龍舍)로 와서 함께 묵었다. 11일 내가 있는 계부당(鷄伏堂)에서 식사를 하고 여정에 올랐는데, 아우 조환(曺桓)이 따라왔다. 원우석(元右釋)은 일찍이 중이 되었다가 환속하였는데 지혜롭고 깨달음이 있으며 노래를 잘 불렀기 때문에 불러서 함께 길을 떠났다.
[嘉靖戊午孟夏。金晉州泓泓之,李秀才公亮寅叔,李高靈希顔愚翁,李淸州楨剛而 洎余 同遊頭流山。山中貴齒而不尙爵。擧酌序坐以齒。或時不然。初十日。愚翁自草溪來我雷龍舍。同宿。十一日。飯我鷄伏堂。登道。舍弟桓隨之。元生右釋曾爲釋化俗。爲其慧悟而善謳。召與之行。]
기행문의 첫 부분은 지리산 유람을 함께 한 사람들의 명단이다. 이공량(1500~?)은 조식의 자형(姊兄)이었으며, 이희안(1504~1559)과 이정(1512~1571)은 조식의 문인이었다. 뇌룡사와 계부당은 합천에 소재한 강학처로 조식이 48세부터 61세까지 거처하면서 제자들을 길렀던 곳이었다. 중으로 있다가 환속한 원우석을 깨달음이 있고 노래를 잘 부른다는 이유로 동행한 것도 주목된다. 이후의 여정은 진주를 거쳐 사천에서 배를 타고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가 쌍계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저녁 무렵 진주에서 묵었다. 일찍이 홍지와 약속하여, 사천(泗川)에서 배를 타고 섬진강(蟾津江)을 거슬러 올라, 쌍계(雙鷄)로 들어가기로 계획을 세웠다. 말고개[馬峴]에서 뜻하지 않게 종사관(從事官) 이준민(李俊民)을 만났다. 이준민은 호남 땅으로부터 부친을 뵈러 오는 참이었는데, 그의 부친은 바로 인숙이다. 또한 들으니 홍지는 벼슬이 갈렸다고 한다. 이윽고 인숙의 집에 투숙하였는데, 인숙은 바로 나의 자형이다. 12일 큰 비가 내렸다. 홍지가 편지를 보내어 머무르게 하고 아울러 음식을 보내 왔다. 13일 홍지가 찾아와 소를 잡고 음악을 베풀어 주었다. 우옹과 홍지와 준민이 함께 다투듯이 마음껏 술을 마시고 파하였다. 14일 인숙과 더불어 강이의 집에서 묵었다. 강이가 우리를 위해서 칼국수ㆍ단술ㆍ생선회ㆍ찹쌀떡ㆍ기름떡 등을 마련했다.
[向夕投晉州。曾約泓之乘舟泗川。遡蟾津入雙磎計也。忽遇李從事俊民於馬峴。由湖南來覲其親。其親則寅叔也。更聞泓之啣差去。旋投寅叔第。寅叔則吾姊夫也。十二日。大雨。泓之致書留之。益以廚傳。十三日。泓之來造。殺牛張樂。愚翁,泓之,俊民。共爭的劇飮而罷。十四日。與寅叔共宿剛而第。剛而爲具剪刀糆,醴酪齋,河魚膾,白黃團子,靑丹油糕餅。]
조식 일행은 16일 섬진강에 다다랐으며, 악양현을 지나 삽암(鍤岩)에 도착했다. 삽암에서 조식은 고려시대 최충헌의 집권기에 지리산으로 들어가 절개를 지킨 한유한(韓惟漢)의 충절을 기렸으며, 도탄(陶灘)에 도착해서는 선배 사림파 학자 정여창(鄭汝昌)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16일 새벽 빛이 조금 밝아질 무렵 섬진(蟾津)에 다다랐다. 잠을 깨었을 때에는 벌써 곤양(昆陽) 땅을 지나 버렸다고 한다. 아침 해가 처음 떠오르니 검푸른 물결이 붉게 타는 듯하고 양쪽 언덕 푸른 산에 그림자가 물결 밑에 거꾸로 비치었다. 퉁소와 북으로 다시 음악을 연주하니 노래와 퉁소 소리가 번갈아 일어났다. 멀리 구름 낀 산이 서북쪽 십리 사이에 나타났는데 이것이 두류산의 바깥쪽이다. 서로 가리키며 바라보고 기뻐하여 뛰면서 “방장산(方丈山)이 삼한(三韓) 밖이라 하더니 이미 이곳이 멀지 않은 곳에 있구나.” 라고 하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악양현을 지났는데 강가에 삽암이 있다. 이곳은 녹사(錄事) 한유한의 옛집이 있던 곳이다. 한유한은 고려 왕조가 장차 어지럽게 될 것을 알고, 처자를 데리고 이곳에 와서 살았다. 징소하여 대비원(大悲院) 녹사로 삼았으나, 하루 저녁에 숨어 달아나 간 곳을 몰랐다고 한다. 아! 나라가 망하려고 하는데 어찌 어진 사람을 좋아하는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중략) 한낮쯤 되어 배를 도탄에 정박시켰다. (중략) 도탄에서 한 마장쯤 떨어진 곳에 정여창 선생의 옛 거처가 있었다. 선생은 바로 천령(天嶺) 출신의 유종(儒宗)이다. 학문이 깊고 독실하여 우리 도학(道學)에 실마리를 이어주신 분이다. 처자를 이끌고 산으로 들어갔었으나 나중에 내한(內翰)을 거쳐 안음 현감(安陰縣監)으로 나아갔다가 교동주(喬桐主)1)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곳은 삽암과 십 리쯤 떨어진 곳이다. 밝은 철학자의 행ㆍ불행(幸不幸)이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
[十六日。曙色微明。迫到蟾津。攪睡間已失昆陽地云。旭日初昇。萬頃蒸紅。兩岸蒼山。影倒波底。簫鼓更奏。歌吹迭作。遙見雲山揷出西北十里間者。是頭流外面也。相與挑觀喜踴曰。方丈三韓外。已是無多地矣。瞥過岳陽縣。江上有鍤岩者。乃韓錄事惟漢之舊莊也。惟漢見麗氏將亂。携妻子來棲。徵爲大悲院錄事。一夕遁去。不知所之。噫。國家將亡。焉有好賢之事乎。(중략) 向午。泊舟陶灘。(중략) 去陶灘一里。有鄭先生汝昌故居。先生乃天嶺之儒宗也。學問淵篤。吾道有緖。挈妻子入山。由內翰出守安陰縣。爲喬桐主所殺。此去鍤岩十里地。明哲之幸不幸。豈非命耶。]
1)연산군을 말함. 연산군이 1506년의 중종반정으로 강화도 교동도에 유배를 갔기 때문에, ‘교동주’로 표현함.
▶ 정여창(鄭汝昌)의 별장을 그린 이징(李澄)의 화개현구장도 (花開縣舊莊圖)(문화재청 제공)
19일 아침 조식 일행은 마침내 청학동(靑鶴洞)으로 들어갈 것을 계획하였다. 이 부분에는 호남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합세하는 장면이 보이며, 21일에도 호남에서 온 여러 사람과 함께 날이 저물도록 절의 누각에 앉아서 불어난 시냇물 구경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어서, 지리산은 조선시대에도 영남의 선비와 호남의 선비들을 소통시키는 공간임을 알 수 있다.
19일 아침을 재촉하여 먹고 청학동으로 들어가려 하였는데, 인숙과 강이는 모두 병 때문에 그만두었다. 이것으로 보면 진실로 십분 뛰어난 승경(勝景)은 참된 연분이 없으면 신명(神明)이 받아들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중략) 호남에서 온 네 사람과 백(白)․이(李) 양군이 동행하였다. 북쪽으로 오암(㹳巖)을 올라 나무를 잡고 잔도(棧道)를 타면서 나아갔다. 원우석은 허리에 맨 북을 두드리고, 천수(千守)는 긴 피리를 불고, 두 기생이 이들을 따라가면서 전대(前隊)를 이루었다. 나머지 여러 사람들은 혹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물고기를 꼬챙이에 꿴 것처럼 줄지어 전진하면서 중대(中隊)를 형성하였다. 강국년(姜國年)과 요리사와 종들과 음식을 운반하는 사람들 수십 명이 후대(後隊)를 만들었다. 중 신욱(愼旭)이 길을 안내하면서 갔다.
[十九日。促食。將入靑鶴洞。寅叔,剛而。俱以疾退。固知十分絶境。非有十分眞訣。神明不受。(중략) 湖南四君。白李兩生同行。北上㹳巖。緣木登棧而進。右釋打腰鼓。千守吹長笛。二妓隨焉。作前隊。諸君或先或後。魚貫而進。作中隊。姜國年,膳夫,僕夫運饋者數十人。作後隊。僧愼旭向道而去。]
기생들이 전대를 형성하고 요리사와 음식을 운반하는 사람들 수십명이 후대를 형성하고 있는 장관도 눈에 들어온다. 조식은 불일암(佛日菴)을 청학동으로 보았다. 그리고 향로봉(香爐峯), 비로봉(毗盧峯), 학연(鶴淵) 등 청학동을 둘러싸고 있는 경치들에 대해서도 붓을 아끼지 않았다.
열 걸음에 한 번 쉬고 열 걸음에 아홉 번 돌아보면서, 비로소 불일암이라는 곳에 도착하였다. 바로 이곳이 세상에서 청학동이라고 이르는 곳이다. 바위로 된 멧부리가 허공에 매달린 듯 내리뻗어서 굽어볼 수가 없었다. 동쪽에 높고 가파르게 서서 서로 떠받치듯 찌르면서 조금도 양보하지 않는 것은 향로봉이고, 서쪽에 푸른 벼랑을 깎아내어 만 길 낭떠러지로 우뚝 솟아 있는 것은 비로봉이다. 청학(靑鶴) 두세 마리가 그 바위 틈에 깃들어 살면서 가끔 날아올라 빙빙 돌다가 하늘을 올라갔다 내려오곤 했다. 그 밑에 학연이 있는데 컴컴하고 어두워서 바닥이 보이지를 않았다. 좌우상하에 절벽이 고리처럼 둘러서서 겹겹으로 쌓인 위에 다시 한 층이 더 있고, 문득 도는가 하면 문득 합치기도 하였다.
[十步一休。十步九顧。始到所謂佛日菴者。乃是靑鶴洞也。岩巒若懸空。而下不可俯視。東有崒嵂撑突。略不相讓者曰香爐峯。西有蒼崖削出。壁立萬仞者曰毗盧峯。靑鶴兩三。棲其岩隙。有時飛出盤回。上天而下。下有鶴淵。黝暗無底。左右上下。絶壁環匝。層層又層。倏回倏合。]
조식은 지리산 유람 중에도 부역에 허덕이는 백성들의 힘든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백성과 군졸이 유망(流亡)하는 것이 현실인데 자신은 한가로이 유람을 하는 것에 대해 자책을 하기도 했다.
쌍계사와 신응사 두 절이 모두 두류산 중심에 있어 푸른 준령이 하늘을 찌르고 흰 구름이 문을 잠근 듯하여 밥 짓는 연기가 드물게 닿을 것 같은데도 오히려 이곳까지 관가(官家)의 부역이 폐지되지 않아, 양식을 싸들고 무리를 지어 왕래함이 계속 잇달아서 모두 흩어져 떠나가기에 이르렀다. 절의 중이 고을 목사에게 편지를 써서 조금이라도 완화해 주기를 청했다. 그들이 호소할 수 없음을 안타깝게 여겨 편지를 써주었다. 산에 사는 중이 이와 같으니 산촌의 무지렁이 백성들은 가히 알 만하다. 행정은 번거롭고 부역은 과중하여 백성과 군졸이 유망하여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보호하지 못한다. 조정에서 바야흐로 이를 크게 염려하는데, 우리가 그들의 등 뒤에 있으면서 여유작작하게 한가로이 노닐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참다운 즐거움이겠는가?
[雙磎, 神凝兩寺。皆在頭流心腹。碧嶺揷天。白雲鎖門。疑若人煙罕到。而猶不廢公家之役。贏糧聚徒。去來相續。皆至散去。寺僧乞簡於州牧。以舒一分。等憐其無告。裁簡與之。山僧如此。村氓可知矣。政煩賦重。民卒流亡。父子不相保。朝家方是軫念。而吾軰自在背處。優游暇豫。豈是眞樂耶。]
조식은 ‘좌퇴계 우남명’으로 불릴 만큼 이황과 함께 16세기를 대표하는 사림파 학자이며,경의(敬義)를 사상의 핵심으로 하면서 무엇보다 학문의 실천에 주력한 학자였다. 특히 지역적 기반이 경상우도였던 만큼 그의 삶과 사상 형성에 있어서 지리산은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다. 조식 일행이 걸었던 지리산 일대를 따라가 보면서 16세기 실천적 삶을 살았던 선비의 체취를 찾아보기 바란다.
글쓴이 : 신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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